전설/설화

고려(高麗)의 충절(忠節) 노포(蘆浦) 안준(安俊)

노포 안준은 고려 말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경혜공 손주(景惠公 孫柱)의 아들이다.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에 이르렀다. 그가 벼슬하던 당시 고려(高麗)의 국운(國運)이 기울어져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남은(南誾), 배극렴(裵極廉) 등이 시중(侍中) 벼슬에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하던 때였다. 그들의 음모(陰謀)를 알고 있는 그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과 고려를 중흥(中興)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기회를 엿보던 중 1392년(공양왕 4) 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왕세자(王世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李成桂)가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었을 때 “기회(機會)가 바로 이 때다”하고 그들을 제거(除去)하려 하였으나 천운(天運)이 따르지 않았다. 그들의 눈치를 챈 이방원(李芳遠 : 조선 태종)이 그 날 밤으로 황주에서 개성(開城)으로 돌아오니,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어서 정몽주는 이방원(李芳遠)과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를 주고받고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善竹橋)에서 조영규(趙英珪)에게 격살(擊殺)당하고 도리어, “정몽주 일당(一黨)은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하고 죄명(罪名)을 씌워 안준(安俊), 우현보(禹玄寶),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귀양(流配)갔으니 그곳은 지금의 경남 의령(宜寧)이었다. 그 해 7월 조선(朝鮮)이 건국(建國)되고 이성계가 등극(登極)하니 태조(太祖)이다. 그 후 안준을 불러 벼슬을 주고자 하였으나 고려를 위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버리지 않자 태조(太祖)도 그의 충절(忠節)에 감동하여 그의 뜻에 따라 배소(配所-귀양살이 하던 곳)를 예천(醴泉)으로 옮겨 주었으니 노포리(蘆浦里)이다. 그는 이 곳에 와서 호를 스스로 노포(蘆浦)라고 부르고 삿갓을 쓰고 자연을 벗하며 망국(亡國) 고려(高麗)를 붙들지 못한 회한(悔恨)을 달래면서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초개같이 버렸으니 그의 굳은 충절은 기리 빛나고 있다. 그의 시호(諡號)는 충정(忠靖)이며, 용궁(龍宮)의 기천서원(箕川書院)에 모셨다.
개포면(開浦面)의 지명 이름은 그의 호 노포(蘆浦)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영남인물고, 예천군지, 축산승람)

삭다리걸

  • 위 치 : 개포면 금리, 예천읍 상리 경계 지점

1) 옛날 금리(거믄골)에 만석(萬石)꾼 박부자(朴富者)가 살고 있었다.
그는 마음이 너그럽고 언제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으며, 굶주리고 몸이 아파 약(藥) 살 돈이 없는 사람에게 양식(糧食)과 돈을 주어 항상 은혜(恩惠)를 베풀어 인근 마을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예천읍(醴泉邑) 상리(上里)와 개포면 금리 경계(境界)의 소하천(小河川)에 다리가 있었는데, 예천읍(醴泉邑) 쪽에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이 이 다리를 건너오면 인정(人情) 많은 박 부잣집에서 쌀을 얻을 수 있다 하여 이 다리를 “쌀다리”로 불러오다가 세월(歲月)이 흘러 지금은 “삭다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2) 일설에는 예천군수(醴泉郡守)를 지낸 용궁면 금남리 훤평(暄坪) 출신의 장영(張翎)이라는 분이 금리 박씨 문중의 박희문(朴希文)이 아주 잘생기고 학문(學問)도 높아 사위 삼기로 하였는데, 혼례식(婚禮式) 전 날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많아 이 내(川)를 건널 수 없게 되자 혼인(婚姻)을 치르기 위해 쌀가마니로 다리를 만들어 건넜다 하여 “쌀다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서울나들이

  • 위 치 : 개포면 경진리

내성천과 한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영남(嶺南)의 많은 선비들이 과거(科擧) 보러 서울(漢陽)로 갈 때 호명면 오천을 경유하여 한천변(漢川邊) 주막집에 들러 이사리의 안동고개를 경유하여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漢陽)으로 다녔다.
이곳은 통행객(通行客)이 많아서 벙어리도 3년을 여기서 지내면 말문이 트이고, 거지도 이 곳에 살면 3년 안에 부자(富者)가 안되면 빌어먹을 팔자를 타고났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돈을 벌면 반드시 여기를 떠나야 그 살림을 지킨다고 하며, 지금도 3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당시 영남의 남쪽 지방에서 서울로 소금, 특산물(特産物) 등 조공(朝貢)을 보낼 때 이 곳 나루터까지 배로 물자를 운반하였다. 서울로 가는 물자를 운반하였던 나루터라 하여 “서울나루터” 또는 “서울나들이(京津)”라고 불리어졌다.
지금은 옛날에 번성했던 주막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각성촌(各性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포면 소재지와 지보 방면, 예천읍 방향으로 가는 경진삼거리 지점이다.
금리와 경계 마을을 일명 검바우(劍巖) 또는 갈가리 라고 하는데, 고려 유신(儒臣)인 노포(蘆浦) 안준(安俊)이 조선 개국 후 귀양지(流配)를 이곳으로 옮겼던 곳으로, 그의 후손 안승종(安承宗)이 집승정(集承亭)을 짓고 살았으며, 이황(李滉)이 지은 시(詩)인 집승정 십운(集承亭 十韻)은 중국까지 널리 알려졌다.
덕수 이씨도 살던 터인데 임진왜란 무렵 예안 김씨의 김윤안(金胤安)이 영주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이래 지금은 그 후손의 집성촌(集成村)이 되었다.
이 곳은 옛 노포면(蘆浦面)의 중심 지역으로서 경진리(京津里) 301번지는 노포면소(蘆浦面所) 터이고, 또 경진리 329번지는 옥동서원(玉洞書院)이 자리한 남향마을이다.
인근의 동송리 진입로는 옛날 지형이 험준(險峻)하여 도둑 떼들이 들끓었다. 서울나들이를 거쳐 한양 가는 길손들을 괴롭히고 주머니를 털었을 뿐만 아니라 행인들의 왕래도 방해하여 이곳을 “도둑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포장(鋪裝)을 하여 마을 진입로(進入路)가 되었다.

파리산과 거북바위

  • 위 치 : 개포면 우감1리

먼 옛날 천지(天地)가 개벽(開闢)할 때 큰 홍수가 나서 집이고 산이고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이 물 속에 잠겨 버렸는데, 우감1리의 마을 뒷산만 파리 한 마리가 앉을 만큼의 자리만 남겨두고 모두 물 속에 잠겼다. 이 때 물 속에 잠기지 않는 부분을 “파리산” 이라고 전해오며, 이 마을에서는 농악(農樂)을 울리는 일이 없는데 그 이유는 농악을 울리면 파리가 놀라 달아난다고 한다.
그리고 홍수로 인하여 물에 잠겼던 곳이 물이 빠지자 바위 밑에서 한 쌍의 거북이가 기어 나왔다고 해서 그 바위를 “거북바위“라고 불렀으며, 바위 또한 거북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지금도 그 바위가 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다.
국도 28번선인 경진리 삼거리에서 개포면사무소로 가는 924번 지방도로의 이사리와 우감1리의 경계 지점에 있는 고개를 안동(安東)고개라고 부른다.
옛날 경진리(京津里) 서울나루터를 건너 영남 선비들 특히 안동지방(安東地方) 선비들이 한양에 과거(科擧)를 보러갈 때 육로(陸路)로 이 고개를 넘어 가면 과거시험에 잘 붙는다는 전설이 있어 과거 보러 가는 영남 선비들은 이 고개를 많이 넘어 다녔다고 하여 “안동고개”라 불러졌다 한다.

성황목(서낭목-참나무)과 석말(石馬)

  • 위 치 : 개포면 우감2리(소감)

소감마을에는 차씨(車氏), 임씨(林氏), 서씨(徐氏) 등 3성씨가 살아왔다고 한다.
마을에 있는성황목(城隍木)은 참나무로 직경이 5미터가 되며 수령(樹齡)이 40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소감리와 이사리(절골)의 두 마을은 무사태평을 위해 성황제(서낭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때는 음력 정월이다. 제관은 동민 중 생기에 맞는 사람을 동민이 추천하여 제관으로 삼고 음력 1월 11일 아침부터 왼새끼를 꼬아 집 궐(闕)에 금색을 하고, 향토흙으로 대문 밖을 단장하고 난 뒤 제관은 3일 간은 궐밖 출입을 금하고 경건(敬虔)한 마음과 몸가짐을 깨끗이 한 후 음력 정월 보름날 새벽 2시에 선황제를 올렸다고 한다. 단, 유사는 제수(祭需) 제물을 용궁장(龍宮場)에서만 구입하였다고 한다.
선황제는 음력 정월 보름날 새벽닭이 울기 전 남녀노소(男女老少) 구분 없이 전 동민이 성황당에 모여 일년 내내 마을의 평안함과 무사안일을 빌고 각각의 소원성취를 위해 소지에 적어서 불을 붙이고 소지를 올리면서 일년의 소망을 기원했다 하며 제사를 끝낸 후 복주(福酒)를 마시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과 술로 별신굿을 올리고 밤이 새도록 동민화합과 단결을 약속하였다고 한다.
성황목 뒤에는 성황당 집이 있으며 당(堂) 안에는 철말(鐵馬)이 있었다고 전해오나 아직까지 그 곳을 확인하기가 두려워 본 사람이 없다고 하며 지금까지 전설로만 알고 있지 어느 누구도 철말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당집은 매년 볏짚으로 엮어서 보존(保存)해오다가 몇 년 전부터는 보수(補修)를 하지 않아서 지금은 그 자리에는 썩은 재와 일말의 형태만 남아있는 실정이다. 처음 몇 년 동안은 3성씨(姓氏)가 화목하게 마을을 지켜오다가 차씨(車氏)는 임씨(林氏)가 번성하는 것을 시기하여 “수풀(林)은 말이 잘 뜯어먹으므로 자라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마을 한복판에 석말(石馬)을 세웠으나, 그 후 세월이 흐를수록 차씨가 의도한 반대 방향으로 차씨 가문이 오히려 기울고 석마도 동네 밖으로 끌려나갔으며, 임씨는 오히려 새싹이 돋아나듯이 계속 번창하여 차씨는 모두 떠나고 임씨만 400여 년간 마을을 지키고 현재 30여 가구가 한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광복(光復) 전까지는 성황제(서낭제)를 지내왔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백화사(白華寺)와 광대골

  • 위 치 : 개포면 신음리 앞산

개포면 신음리 앞산 천덕산(天德山-주민들은 白華山이라 부름)의 남록(南麓)에 폐사(廢寺)된 백화사(白華寺)의 옛 절터가 남아 있다.
전해 내려오는 유래와 전설에 의하면, 백화사 바로 뒷산이 명산(名山)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서 조선 말엽(末葉) 한 세도가(勢道家)가 이 곳에 묘 터를 잡기 위하여 이 곳에서 남서쪽으로 1km 떨어진 산골(일명 : 광대골)에 빈 상여를 꾸며 놓고 광대놀이를 시켜서 스님들을 이 곳으로 유인했다. 광대놀이에 정신을 잃고 세도가의 꾐에 빠져 스님들이 광대골에 이르게 되자, 이 세도가는 절에 스님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백화사 바로 뒷산에 몰래 묘를 썼다.
그 이튿날 난데없는 고목(枯木)나무 한 그루가 절 한복판에 우뚝 섰기에 주지 스님이 지팡이로 건드리자 고목나무가 전부 빈대로 변해 절로 침입하니 스님들은 얼씬도 못하였으며, 그 날 밤 주지스님의 꿈에 석가여래(釋迦如來)께서 나타나 이 곳은 지세(地勢)가 다하여 이제 쇠(衰)하니 새로운 터전을 잡아 줄 테니 백화사를 버리고 지금의 용궁면 향석리 비룡산에 자리잡고 있는 장안사(長安寺-주민들은 남산절이라고도 함)로 옮겨가라고 하여 옮겨갔다고 전해진다.
※ 광대골 - 광대놀이를 했던 곳이라 하여 지명이 붙여진 듯 하다.

<백화사(白華寺)>
고려 초에 창건, 19세기 말쯤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되며 용궁군에서 가장 큰 사찰로 전해온다. 사지(寺址)에는 농지(農地)로 사용된 흔적이 보이나 지금은 잡목(雜木)에 묻힌 오래된 석축지(石築址)가 2~3m 높이로 3개소 있으며, 식생활에 긴요하게 이용했던 방아고(돌호박-디딜방아)가 버려져 있고 무수한 기와 조각과 잡석(雜石) 더미가 산재하고 깨어진 돌학 하나가 샘가에 뒹굴고 있어 폐사(廢寺)된지 얼마되지 않은 듯 하나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군지(郡誌)에는 산상(山上)에 기우단(祈雨壇)이 있었고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는 샘이 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고려(高麗) 때 익재(益齋) 이제현(李濟賢)의 ‘백화선원정당루기(白華禪院政堂樓記)’가 전해 오는데 그에 의하면 동쪽에 정당루(政堂樓), 서쪽에 관공루(觀空樓)라는 큰 누각(樓閣)이 있는 용궁현(龍宮縣)에서 제일 가는 대찰(大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와룡담(臥龍潭)

  • 개포면 가곡2리 마을입구(佳五室池 - 국도4차선 옆)

1) 1549년(명종 4) 이경백(加平 李氏)이라는 분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이 곳에 파니 용모양을 닮은 바위가 나와 용바위라 불렀다 한다, 200여 년전 이 곳에 살던 주민들이 1,000평 정도의 연못을 만들고 연못 가운데에 조그마한 섬을 만들어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어 놓았으며, 못 주변에는 큰 바위가 많이 있어 큰 바위에 이름을 와룡담(臥龍潭) 또는 용두암(龍頭岩)이라 새겨 놓았다. 지금은 그 흔적이 1973년 새마을사업으로 추진한 군도(郡道) 확장 공사로 묻혀 사라졌으나, 못 둑 주변에 있는 돌을 깨면 이 곳을 지키는 용이 복수를 하여 마을에 젊은 사람이 죽는다는 전설과 함께 용바위라 부르고 있다. 당시 연못을 만들 때 용이 누워있는 형상과 같다 하여 옛부터 “와룡담”(臥龍潭)이라 불러 왔다.
2) 또한 일설에는 지나던 길손이 이 바위 위에서 시(詩) 한 수를 바위에 새겨 두려고 망치로 정을 치니 피가 솟구쳐 나와 달아났는데 연못으로 흘러 들어가 피 빛으로 변하였다. 그 이후 마을 젊은이들이 갑작스런 죽음 등 재앙이 이어지자, 한 노인이 초승달 어두운 밤에 몰래 용바위에 다가가 커다란 망치로 바위를 치니 갑자기 밤하늘에 천둥 번개가 치면서 바위가 크게 소리를 내며 넘어지면서부터 재앙(災殃)이 사라졌다 한다.
가오실(佳五室)로 불리는 이곳은 예로부터 지중소도(池中小島-연못 안에 작은 섬이 있으며), 심하명천(沈下明泉-땅 속 깊은 곳에 샘이 울고), 용산명월(龍山明月-魚龍山에 달이 걸리면 아름다우며), 봉강숙운(鳳崗宿雲-봉강산에 구름이 걸려 자고 있고), 두수청풍(杜樹淸風-못둑에 나무가 푸르러 맑은 바람이 항상 분다)는 다섯 가지의 아름다웅이 전해 온다.
사방(四方)의 오경(五景)을 간직한 이곳은 1999년부터 가오실 수변휴식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하여 주차장, 베드민턴장, 팔각정자, 파고라, 야외탁자, 바베큐시설, 운동시설, 낚시터 등을 갖추어 명소로 가꾸고 있다.

마꼬장

  • 개포면 가곡리 원두골

옛날 원두골에 담이 크고 술마시기를 좋아하는 김찬구라는 사람이 살았다.
어느 날, 이 사나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장에 가서 술을 마시고 놀았다. 어느 듯 시간이 흘러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 갈 때에 비로소 술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비틀거리며 한발 두발 집으로 향하여 옮겨갔다.
그런데 이 사나이가 원두골고개를 넘으려 할 때, 해는 완전히 지고 컴컴한 밤이 되었다. 바로 이때 뒤에서, “여보세요.“라고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정말 세상에서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미녀였다. 이 여자의 미모(美貌)에 황홀하여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는, ”우리! 저기 있는 바위 위에 가서 잠시 이야기 합시다.“라고 하였다.
이 때 이 사나이는 정신을 차리고 그 여자의 뒤를 따라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러나 이 사나이의 머리 한 구석에는 혹시 귀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늘 가지고 다니던 칼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칼은 어디에서 잃었는지 없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그 여자는, ”왜? 그러셔요?“라고 조그마한 소리로 말하고 치마를 열었다. 바로 이 때 사나이는 여우의 꼬리를 보았다. 동시에 비호(飛虎)같이 달려가 그 여자의 목을 졸랐다. 그리고, ”네 이년! 너는 귀신이지?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여자는 사라지고 사나이의 손에는 한 자루의 빗자루만가 잡혀 있었다.
이 사나이의 등에는 식은땀이 주르르 흘렸다. 마침내 이 사나이는 마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 소문(所聞)은 마을에 쫙 퍼져서 이후로는 이 고개를 넘는 사람은 없었다.
세월(歲月)이 흘러감에 따라 이 이야기는 점점 사라져 잊혀가고 있다.

구시골 샘

  • 개포면 황산2리 4차선 주변

아득한 먼 옛날 구시골에 한 샘이 있었고, 그 주변(周邊)에는 사찰(寺刹)이 있었다고 한다.
이 샘은 스님들이 사용하던 샘으로, 깊이가 얼마나 깊었던지 명주 실 한 타래가 다 들어가도 모자랐다고 한다. 물맛이 좋고, 며칠간 이 물로 목욕을 하게 되면 땀띠가 어떠한 피부병도 완쾌(完快)된다고 하여 멀리서도 찾아왔다고 한다. 지금도 주변 밭에서는 사찰(寺刹)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기왓장 등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언제 어떻게 창건(創建)되고 없어졌는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절의 이름이나 규모도 분명하지 않다. 현재 있는 샘은 당시의 샘으로 여겨지며 퇴적물(堆積物)이 많이 쌓여 무척 얕은 샘이 되었지만, 수량(水量)이 많고 물이 매우 차가워서 삼복(三伏) 더위에는 땀띠를 치료(治療)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현재는 농업용수(農業用水)로도 이용되고 있다.

대망(大亡)터

  • 개포면 이사리 대망터(대명터)

이사리 절골에서 우감리로 가는 길 사이에는 공동묘지(共同墓地)가 있는데, 옛날 이곳에 마을이 있어 지금도 기왓장 등이 출토(出土)된다고 한다.
옛날 산 중턱의 이 대망터에는 마을을 이루고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 집 주인은 구두쇠 영감으로 토지와 소, 말 등 가축도 많았으며, 창고에는 곡식이 늘 가득하였다. 또한, 하인도 10여명이나 거느렸다. 하루는 길을 걷다가, 배가 고파 쓰러져 있는 여인을 보고는 못 본체하고 지나가서 그만 그 여인은 죽고 말았다. 영감은 그 여인을 가엾게 보기는커녕 오히려 침을 뱉고 지나갈 정도로 구두쇠이고 몰인정하였다. 이른 봄의 어느 날, 한 스님이 문 앞에서 동냥을 달라고 애걸하자 하인이 나와서 안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돌아가지 않고 주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하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주인 영감이 나왔는데, 욕지거리를 하며 스님을 내쫓았다. 그러자 스님이 나가면서 하는 말이 “집 뒤에 있는 바위를 깨어 구르면 그 속에 보물이 많이 있어서 더 큰 부자가 된다.”라고 하며 떠났다. 욕심 많은 주인은 그 말을 믿고 이튿날 동네사람들을 불러와 돼지고기와 술을 많이 주고는 그 바위를 깨고 구르게 하였다. 그 바위가 굴러가자 거기에는 보물은 없고 큰 구렁이가 치여 피를 흘리며 죽었다. 그 후 1개월이 못되어 이 영감은 죽고, 또 다시 얼마되지 않아 아들도 원인 모를 병이 들어 죽자 하인들도 하나, 둘 떠나면서 패가망신(敗家亡身) 되었다. 그리고 동네도 흉흉해지면서 한 가구, 두 가구 떠나자 마을이 텅 비어버리고 망해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크게 망할 터라 하여 대망(大亡)터라고 한다.
또 한 전설에서는 그 바위를 깨니 붉은 피가 흘러내렸고, 그 후 차차 망하게 되어 대농가(大農家)도 망하였다고 하여 대망터라고 전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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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8.10.17

곤충도시 Clean 예천마을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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