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유래

  • 내성천(乃城川)과 한천(漢川)이 개포면의 남동쪽으로 흐르고, 면적이 36㎢, 예천군 남서부에 위치한다. 구한말까지는 용궁군(龍宮郡) 북상면의 풍정(楓井), 송포(松浦), 입암(立岩), 봉산(鳳山), 갈마(葛麻), 봉암(鳳岩), 종산(宗山), 장화(長化), 적현(赤峴), 송동(松洞), 성도(盛島), 가산(加山), 황산(黃山), 신천(新泉), 보수(保守), 가오(佳五), 원곡(元谷), 화산(化山), 송계(松溪), 신기(新基), 화음(化陰)과 구읍면(舊邑面)의 지동(紙洞), 대은(大隱) 일부와, 지금 금동으로 불리는 예천군 노포리면(蘆浦里面)이 철종 때에 옥개동(玉開洞)의 “개”(開)와 노포(蘆浦)의 “포”(浦)를 합하여 「개포면(開浦面)」으로 개칭되었으며, 신기, 도장(道莊), 우감(牛甘), 승동(蠅洞), 동송(冬松), 지동(池洞), 경진(京津), 금동(琴洞), 옥동(玉洞), 소옥(素玉), 검암(劍巖), 이사(伊四), 상리(上里) 등을 관할하였다.
  • 한때는 관내(管內) 상리면(上里面)에서 발원한 한천(漢川)과 봉화군(奉化郡)에서 발원한 내성천(乃城川)이 북(北)쪽에서 흘러와서 경진리(京津里)에서 합수(合水)하여 갯벌 주변 갈대가 장관(壯觀)을 이룬다 하여 노포리면(蘆浦里面)이라고 하였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이 두 지역이 금동, 경진동, 동송동, 이사동, 우감동, 신음리, 가곡리, 황산리, 장송리, 입암리, 갈마리, 풍정리, 상동의 13개 리,동으로 개편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 상동이 예천읍으로 이관되면서 12개의 리,동이 되었고, 이 무렵 입암리와 갈마리의 대부분이 특수부지로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동(洞)을 리(里)로 바꾸었다.
  • 농지(農地)는 전면적의 41%인 14㎢이며, 승두산이 218m로 가장 높아서 산지(山地)가 없고 거의가 구릉지이면서, 동(東)으로는 예천읍과 호명면, 남(南)으로는 지보면, 서(西)로는 용궁면과 문경시 산북면, 북(北)으로는 유천면과 접하여 있다.
  • 관광자원으로는 가오실지(佳五室池)가 있고, 특산물은 개포풋고추, 수박, 오이, 풋호박이 유명하다.

가곡리(佳谷里

  • 가오실(佳五谷, 佳五)

    가곡리(佳谷里)에서 으뜸되는 마을, 경치가 아름다워서 지중소도(池中小島), 침하오천(枕下嗚泉), 용산명월(龍山明月), 풍각숙운(風崗宿雲), 두가수오청(杜佳樹五淸)의 오경(五景)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가오리(佳五里)라 한다.

    1549년 본관(本貫) 가평(加平) 호(號) 상심헌(賞心軒) 이경백(李景伯)이 개척한 가평이씨(加平李氏) 집성촌(集成村)이다.

    송담(松潭), 송계(松溪)영양(英陽) 남씨(南氏)이 사는 마을로 마을 앞에 우거진 큰 소나무숲이 있고, 그 숲 아래 못이 있는데, 그 못물이 흘러 개울이 된곳에 마을이 있어 마을 이름을 송담(松潭)또는 송계(松溪)라 부른다. 어룡(魚龍)의 남(南)쪽에 있다.

  • 어링이, 어룡(魚龍)

    300년간을 한씨(韓氏)만 사는 마을이며 뒷山은 용머리같고 앞산은 물고기 머리같다고 하는 곳에 생긴 마을이다. 어룡산(魚龍山)밑 매봉대의 샘 자리에 1930년대에 저수지(貯水池)를 만들어 어룡(魚龍)이 함께 서식할 터를 만들었으며 농업용수(農業用水)로도 쓴다. 가오실 동쪽에 있다.

  • 못안, 모단, 지내(池內)

    물이 늘 부족하여 농사에 걱정이 많던 들판이므로 가뭄이 없어지라고 한퇴(旱退)라고 불렀던 마을 앞 들판에 1930年 못을 파고 농사에 걱정이 없어지자 그 못 뒷골 안쪽에 마을이 생겼다하여 모단,못안, 지내(池內)라 한다. 가오실 남서쪽에 있다.

  • 붉은바우, 적암(赤岩),신화리(新化里)

    흙빛이 붉고 많은 곳에 400여년전 경주(慶州) 손씨(孫氏)가 터를 잡은 곳으로 마을 앞에 빛이 붉은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붉은바우 또는 적암(赤岩)이라 한다. 송담(松潭) 남서쪽에 있다.

  • 종미, 종산(宗山, 鍾山)

    가오실 사람들이 조선(朝鮮) 영조(英祖) 년간(年間) 옮겨와서 종처럼 생긴 산 아래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이 곳을 개척(開拓)한 분은 종산(鍾山)으로 자호(自號) 를 삼기도 했으며 가평(加平) 이씨(李氏)가 살고 있다. 가오실 북쪽에 있다.

  • 원둣골, 원딧골, 원곡(元谷)

    고려(高麗)때 이곳 동쪽끝에 사찰(寺刹)이 있어 부근에 제일 먼저 생긴 마을이어서 원곡(元谷)이라 하며, 우두원(牛頭院)으로 가는 길목인 이곳 원고개를 넘으면 첫마을이어서 원두곡(院頭谷),또 우두원(牛頭院)의 뒤에 있어 원딧골이라 한다. 가오실 남서쪽에 있다.

갈마리(葛麻里)

  • 봉암동(鳳岩洞), 봉현동(鳳峴洞)

    본래는 봉현동(鳳峴洞) 1909년경 뒷산이 응봉(鷹鳳)이므로 응봉(鷹鳳)의 응자(鷹字)를 봉자(鳳字)로 하고 마을 주위에 있는 바위가 마을을 향하고 있고 마을 앞에 있는 바위가 부엉이처럼 앉았다고 하여 암자(岩字)를 따서 봉암동(鳳岩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새동네

    갈마리(葛麻里) 대부분이 특수부지로 편입되었는데 이 지구(地區)의 주민들이 이 곳으로 이주하여 새마을을 이루고 있다.

경진리(京津里)

  • 검바우, 갈가리, 노포(蘆浦), 검암(劍岩)

    예안(禮安) 김씨(金氏)들의 집성촌이며 옛 노포면(蘆浦面)의 중심마을이다. 김윤안(金胤安(1550년)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앞의 큰 바위가 모양이 칼처럼 생겼다 하여 검(劍)바우라고 했으며 또 갈대가 우거진 곳이었다고 갈가리라고도 했다. 이 마을 300번지는 노포면소(蘆浦面所)자리이다.

  • 신옥동(新玉洞), 교회(敎會)마을, 교회촌(敎會村)

    옥동(玉洞) 북쪽에 100여년전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으로 신옥동(新玉洞)이며 6.25사변 이후 마을앞에 교회(敎會)가 서면서 교회마을로 통한다.

  • 옥골, 옥동(玉洞), 옥산동(玉山洞), 옥개동(玉開洞)

    동래(東萊) 정씨(鄭氏) 집성촌 이며 마을터가 환옥(還玉)모양이라 하여 옥골 또는 옥동이라 불린다. 또 조선초 옥계(玉溪) 신달정(辛達廷)이 여기 살면서 마을 이름으로 호(號)를 삼았다.

  • 서울나들이, 경진(京津)

    한천(漢川) 내성천(乃城川)이 합류되는 곳에 있는 마을이다. 영남(嶺南)의 선비들이 서울로 과거(科擧)보러 갈 때 이 나루터를 건너 조령(鳥嶺)을 넘어가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었으므로 조선말까지는 매우 붐비던 곳이다. 특히 이곳은 벙어리도 3년만 머물면 의식(衣食)걱정은 없을 정도로 돈을 모을 수 있으나 돈을 벌면 이 마을을 떠나야 살림을 지킬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3대(代)를 사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 갱잇골, 학교앞

    1962년 경진국민학교(京津國民學校)가 개교되기 전에는 들판이었으나 교통이 불편한 소릿골 주민들이 이 곳으로 옮겨 와서 마을을 이루었다.

  • 소릿골, 소옥동(小玉洞)

    신안(新安) 주씨(朱氏)들이 우리나라에서는 한 곳 뿐이라는 주자(朱子)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사는 마을이다. 뒷산에 짐승들이 우글거리고 그 짐승들 울음 소리가 밤낮 들려오던 곳이므로 소릿골이라고 불렀다 한다.

  • 새터

    서울나드리 마을 북서쪽 큰길가에 새로 된 마을, 처음에는 서울나드리 나루터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겼음.

금리(琴里)

  • 짓골, 집골, 지동(池洞)

    구릉을 배경으로 동남향(東南向) 하고 있는 이 마을은 옛날에 지씨(池氏)들이 마을 앞에 못을 막았다 하며 청주(淸州) 한씨(韓氏)가 사는 마을이다.

  • 거문골, 금동(琴洞)

    산세(山勢)가 베틀에서 옥녀(玉女)가 거문고를 타는 모양인 직녀탐금형(織女彈琴形)이므로 거문골이라 하였다. 뒷산은 옥녀봉(玉女峰)이고 마을 앞들 가운데 따로 생긴 봉우리는 베틀짜는 신짝이라 한다. 또 마을 모양이 자연(自然) 길게 생겨서 양지 마을과 음지 마을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청주(淸州) 한씨(韓氏)와 함양(咸陽) 박씨(朴氏)가 주로 살고 있다.

동송리(冬松里)

  •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부채산과 불탄골의 소나무가 한 겨울에도 푸르게 숲을 이루고 있어 마을 이름을 동송(冬松)이라 하였다 하며 풍수설(風水說)에 다르면 근방의 지명이 모두 악기(樂器)의 이름이므로 이 마을도 동소리(冬簫里)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을 중앙부(中央部)에 동신(洞神)나무인 느티나무(지금은 없음)를 중심으로 웃마, 아랫마가 있고 동쪽 들 가운데는 평밭(坪田) 마을이 따로 있다.

이사리(伊泗里)

  • 큰이사리, 옛터, 고기(古基)

    寧越 辛氏 集成村이며 가장 먼저 이들 祖上이 터를 잡은 마을이고 본디는 옛 절터였다고 한다. 지금도 절 터라고 전해지는 곳에서는 기와족들을 찾아 볼 수 있으며 열두 이사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 작은이사리

    큰 이사리에서 동쪽으로 2마정쯤 떨어진 골짜기에 생긴 작은 마을, 골짜기마다 마을이 있어 열두이사라 한다.

  • 안골(內洞 )

    역시 열두 이사리의 한 마을이며 골짜기 썩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 음지마, 음지촌(陰地村)

    마을이 북향이고 옛터 음달 쪽에 있으며 열두이사리의 한 마을이고 영월 신씨(辛氏)들이 살고 있다. 옛터에 살던 사람들이 생활의 편의와 농토(農土)를 따라 옮겨 왔으며 20가구가 산다.

  • 절골, 사곡(寺谷), 사동(寺洞)

    고려 때 서학사라는 절이 있었던 터에 생긴 마을이다.

  • 참샘이, 한천(寒泉)

    열두이사리의 가장 끝 마을이며 마을 앞에 수량(水量)이 많은 찬물이 나는 샘이 있어 마을 이름을 참샘이라 불렀다 한다. 360 군도(郡道)(용궁-경진선)가 마을 앞을 동서로 통하여 교통(交通)이 편리(便利)하고 영월 신씨(辛氏)가 집단으로 산다.

  • 당 미

    안골 동쪽에 있는 마을

우감리(牛甘里)

  • 도장골, 도장(道莊)

    450년전 豊山(풍산) 柳氏(유씨)와 眞城(진성) 李氏(이씨)가 開拓(개척)한 마을로 壬辰倭亂(임진왜란) 當時金海(당시김해) 金氏(김씨) 1家(가)와 密陽(밀양) 朴氏(박씨) 1家(가)가 定着(정착)한 후 柳氏(유씨)와 李氏(이씨)는 떠나고 現在(현재) 密陽(밀양) 朴氏(박씨)와 金海(김해) 金氏(김씨)가 主姓(주성)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곳에 온 朴氏(박씨)라는 사람이 여기 形局(형국)을 살펴보니 골이 마치 곡식을 넣어두는 도장방처럼 생겼으므로 도장골이라고 부르고 맏아들과 함께 안마을을 開拓(개척)했고 둘째 아들이 살림집을 그 마을 밖에 짓고 바깥도장골이라 했으며 셋째 아들은 酒幕(주막)거리라고 하는 들판 위쪽에 分家(분가)시켜 웃주막거리라 불렀다 한다. 지금은 바깥도장골이 가장 큰 마을이다.

  • 파릿골, 승동(蠅洞)

    마을 뒷산이 옛날 大洪水(대홍수)때 四方(사방)이 모두 물바다가 되었으나 파리머리만큼 남았었다는 해발 218m 蠅頭山(승두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는 農樂(농악)을 울리는 일이 없는데 그 이유는 농악을 울리면 파리가 놀라 달아날까 봐 그렇다고 전해지고 있다. 高氏(고씨)가 가장 많이 산다.

  • 소감, 우감(牛甘)

    고려(高麗) 때부터 있던 마을이라 한다. 서씨(徐氏)와 차씨(車氏)가 개척(開拓)했다가 서씨(徐氏)는 먼저 떠나고 차씨(車氏)만 살았는데 조선조(朝鮮朝) 초기(初期)에 임씨(林氏)가 이주(移住)해 와서 살자 차씨(車氏)는 쇠잔(衰殘)해졌다. 이때 차씨(車氏)들이 모여 궁리한 끝에 임(林)은 수풀이니 우마(牛馬)가 들어가서 짓밟으면 세(勢)가 꺽이고 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여겨 말 한 필을 돌로 다듬어 마을 복판에서 뒷산을 향해 세웠으나 밤에는 차씨(車氏)들 몰래 임씨(林氏)들이 그 석마(石馬)를 마을 바깥쪽을 향하게 돌려놓고 아침이면 차씨(車氏)들이 또 뒷산을 향하게 돌려놓는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나 임씨(林氏)는 점점 번성(繁盛)하고 오히려 차씨(車氏)들이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모두 떠났다고 한다. 그것은 말이 풀밭에 똥을 누어 수풀을 가꾸고 수레를 끌어다 버린 때문이라는 민담(民談)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 뒤 임씨(林氏)들은 그 마석(馬石)앞에 느티나무를 심고 동제단(洞祭檀)을 삼았으며 그 모양이 송아지처럼 생겼으므로 송아지가 풀을 달게 뜯어 먹고 마을을 편하게 보호(保護)해 달라는 뜻으로 소감이라고 했다.

신음리(新陰里)

  • 우대골, 우다골, 우대궁터, 상대궁(上大宮), 우두원(牛頭院)

    옛날 우대감(禹大監)이란 이가 살던 곳이라 하며 우대골이라고 하며, 고려말(高麗末) 공민왕(恭愍王)홍건적(紅巾賊)을 피해 안동(安東)에 머물다가 상주(尙州)로 가는 길에 여기서 묵어갔다고 하여 우대궁터라고도 한다. 신음리(新陰里)에는 고려(高麗) 때부터 행인들의 편의를 제공하던 우두원(牛頭院)의 터가 남아 있다. 또 잿마루가 높아서 이 재를 넘을 때 울고 넘어 간다고 하여 우다골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 대밭, 죽전(竹田), 감나무골

    내성천변(乃城川邊)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부터 400여년전에 경주최씨(慶州崔氏)가 터를 잡아 살다가 농토가 메말라 붉은바우로 옮겨 가고 그 후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서 대밭이라고 불렀으며 50여년전부터는 경주최씨가 새로 이 마을을 형성할 때 마을에 감나무를 많이 심어 감나무골이라고도 하고, 죽전(竹田)이라 부르기도 한다.

  • 새터, 신기(新基)

    본시(本是) 이 마을은 영양(英陽) 남씨(南氏)의 거주지이며, 처음에는 마을 건너편 골에 마을이 있었는데 1858年 큰 장마로 마을이 떠내려가자 당시 용궁현감(龍宮縣監)게 진정(陳情)을 하여 허락을 받아 이 곳에 새로 터를 잡아 옮겨와 새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 섬마, 화산(火山), 화음(化陰)

    들판 가운데 개울물이 둘러 흐르고 있어 마치 섬처럼 보이는 마을이라 하여 섬마라고 부른다 한다. 1914년 이후 면소재지(面所在地)가 되고 1957년부터 시장(市場)이 개설(開設)된 곳으로 개포면(開浦面)의 중심지이다.

입암리(立岩里)

  • 선바우(立岩)

    옛날 밀양인(密陽人) 박선달(朴先達)이 개척(開拓)하였다고 전하며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성주(星州) 이씨(李氏)가 들어와 살면서 중종(中宗)때 이구(李構)가 전국 초유의 향약(鄕約)을 실시(實施)했던 곳이라 한다.

    1982년 부락(部落) 전체가 특수부지(特殊敷地)로 편입(編入)되어 서남쪽 약100m되는 구릉지(丘陵地)산 아래 옛날 절터라고 전해 오는 곳으로 옮겨가 사는데 역시 선바우라 부른다. 마귀 할멈이 바위 3개를 하나는 이고, 하나는 들고, 또 하나는 치마폭에 싸가지고 와서 서로 기대어 세웠다는 바위가 공군부대 부지로 편입되었으나 지금도 보존하고 있으며 그래서 선바우(立岩)이라 한다.

  • 방터, 방터골, 방기(方基, 芳基)

    방씨(方氏)들이 400여년전에 터를 잡고 살았으므로 방터골이라고도 하고 개척(開拓) 당시 해당화(海棠花)가 많이 피어 있어 아름답다 하여 방기(芳基) 즉 방터라고 칭하였다. 경북선(慶北線) 개포역(開浦驛) 마을앞에 있고 34번국도가 마을 앞을 통하고 있어 교통의 중심지다. 오일(五日)보다 시장(市場)이 섰으나 1962년 이후로 없어졌다.

  • 봉산동(鳳山洞)

    순흥(順興) 안씨(安氏)가 대봉산(지금 주봉(主峰)이 없고 지맥(支脈)이 남서(南西)쪽으로 뻗어 있다)

    서쪽에 마을터를 잡았다고 봉산동(鳳山洞)이라고 하며 또한 온갖 새들이 모여 들어 축복(祝福)을 해주는 곳이라고 봉산동(鳳山洞)이라고 한다. 선바우 사람들이 1982년 에 이리로 이거(移居) 왔다고 하며 북으로 대봉산 지맥(支脈)이 둘여 있고 남향의 마을이며 앞은 넓은 들판이다.

장송리(長松里)

  • 장화(長化), 장송(長松)

    약 500년전 이사언이라는 선비가 개척(開拓)하였다는 마을이며 마을터를 잡을 때 노송(老松)이 많이 있었으므로 장송(長松)이라고 한다는 곳이고 마을 뒤 산이 성주(星州) 이씨(李氏) 집거(集居) 마을이다.

  • 솔골, 송곡(松谷)

    솔숲이 우거진 골에 성주(星州) 이씨(李氏)가 개척(開拓)한 마을로 앞산은 청룡산(淸龍山)이며 장송리(長松里)에서는 으뜸되는 마을이다.

  • 붉은디기, 적현(赤峴)

    30여 구가 살고 있으며 마을 터와 뒷산의 흙이 모두 붉고, 마을 앞 국도변(國道邊)에 붉은대기라는 주막(酒幕)이 있어 경진(京津)으로부터 이곳을 거쳐 문경(聞慶) 조령(鳥嶺)을 넘어서 서울에 갔다고 하며 붉은대기 주막집은 6.25동란 후 없어지고 말았다.

  • 바느물, 침정(針井)

    마을 뒷산의 끝이 뾰족하여 바늘산이라고 불렀고 그 정상에 우물이 있어 침전(針井)이라 하였는데 그 아래에 마을이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도 바느물 혹은 침전(針井)이라 불렀다.

  • 던지미, 둔지미, 성조(盛鳥)

    바느물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힘센 사람이 들어서 던질만큼 조그만 산이 뒤에 있어 온갖 새들이 깃든다고 하여 성조(盛鳥)라고도 하며 한편으로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왜병이 이 곳을 지나면서 둔(屯)을 치지 않았다고 하여 둔지미라 불렀다고 한다.

풍정리(楓井里)

  • 시누물, 풍정(楓井)

    성주(星州) 이씨(李氏)가 살고 있는 마을로 마을 터를 잡을 때 큰 시무나무 밑에 맑은 샘물이 솟았다 하여 시누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모산, 못안(池內)

    풍정리(楓井里)에서 가장 큰마을, 못 안쪽이 됨

  • 솔안, 소란, 송포(松浦)

    마을 터를 잡을 때 뒷산은 소나무가 우거졌고 마을 앞에는 깊은 늪이 있었다고 솔안, 송포(松浦)이며 풍정(楓井) 남동쪽에 있으며 경주이씨가 주로 산다.

  • 안방터(芳基)

    입암리(立岩里) 방터의 안쪽이며 솔안 남서쪽에 있고 방씨(方氏)들이 살았던 터라고도 전해지며 아름다운 꽃이 많이 피던 곳에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안방터라 불렀다 한다. 개포역(開浦驛) 뒤가 된다.

황산리(黃山里)

  • 뒷미, 도산(道山), 도미(道味), 가산(加山)

    마을 뒤에 높은 산이 있고 그 앞에도 낮은산이 있는 곳에 마을이 생겨 가산(加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마을을 순천박씨(順天朴氏)와 송씨(宋氏)들이 개척(開拓) 한 터에 용궁면(龍宮面) 무이리에서 옮겨 온 백씨(白氏)들이 살고 있으며 도미(道味)의 마을명은 중간마을(山井) 뒷편에 있다하여 뒷미(뒷마을)라 하였으며 행정구역 리동설치시 도미라고 이름하였다.

  • 집너메, 황전(黃田)

    마을 뒷동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고 집너메이며, 또 흙빛이 누렇기 때문에 황전(黃田)이라고 한다. 1914년 이후에는 신천동(新泉洞)이었으나 그 당시 면소재지(面所在地)가 황전(黃田)에 있기로 황색은 5색(五色)의 중앙이므로 황산(黃山)의 대를 맞추어 황전(黃田)이라고 했다.

  • 중간마을, 시누물, 산정(山井), 신천(新泉)

    경주최씨(慶州崔氏)가 개척(開拓)하여 그 후 인동(仁同) 장씨(張氏) 이씨(李氏) 현(現) 용궁면(龍宮面) 무이리(武夷里)에 살던 백씨(白氏)들이 순조(純組)때 들어와 그 후손(後孫)들이 현재에도 살고 있다. 이 마을 식수로 쓰는 뒷산 중허리에서 맛좋은 물이 솟아나 사람키로 세 길이 나 되는 깊은 샘이 있어 그 샘을 산우물이라 하고, 마을 이름으로 삼았다 한다.

  • 갓마

    중간마을에서 바깥쪽에 있으므로 갓마라 하였으며 옛날 인동(仁同) 장씨(張氏) 주부공(主簿公) 후손이 살다가 모두 이거(移居)하고 현재는 장길(張拮)의 후손이 주로 살고 있다.

  • 보수동(保守洞)

    조선말기(朝鮮末期)에 파평(坡平) 윤씨(尹氏)들이 가산남서(加山南西)의 동수목(洞守木)이 있는 곳에 터를 잡고 잘 보호(保護)하자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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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8.10.17

곤충도시 Clean 예천마을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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