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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563:굽다리손잡이...궁궁을을
작성자장병창 @ 2019.08.24 06:07:22

  도청신도시 예천 563 : 굽다리손잡이...궁궁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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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굽다리 손잡이 잔(高杯形 把手附盞 =Cup with handle, earthenware) [韓國學資料] : 기원전 57˜기원후 676년에 만들어진 일반굽보다 높은 굽 위로 손잡이가 붙은 잔 형태를 한 손잡이 잔으로, 이와 같은 기형은 신라토기에서 자주 보인다. 신라토기란 삼국시대 신라에서 만들어 사용하던 토기로 지역적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나, 신라의 영토범위가 확장되면서 포괄하는 범위가 넓어졌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신라시대 경상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회색의 광택이 없는 토기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 토기는 대부분 흑색 ․흑회색 ․회청색 등의 색조를 띠며 흡수성이 없고 표면이 단단하여 때리면 금속성이 나는데, 이는 밀폐된 가마에서 바탕흙[胎土] 속의 철분이 환원염(還元焰)으로 구워진 결과이다. 형태상으로는 목항아리[長頸壺]와 굽다리접시[高杯]가 기본이지만 이후 다양한 변형들이 등장한다. 이들 토기는 원삼국시대(김해시대) 말기인 250-350년에 와질토기(瓦質土器)에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단계에서 김해 부원동 패총에 잘 나타나는 󰡐부원동기(府院洞期)󰡑를 거쳐 신라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와질토기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소백산맥 이남에서 거의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했는데, 낙동강 동쪽에서는 신라토기가, 서쪽에서는 가야토기가 각각 발전하였다. 신라토기와 가야토기는 같은 회색의 광택이 없는 토기로서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신라토기로 부르지만, 두 토기는 형태상 몇 가지 면에서 구분이 된다. 즉 가야의 굽다리접시는 굽구멍[透窓]이 위아래 한 줄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신라토기의 굽구멍은 위아래가 교대로 배치된 경우가 많으며, 몸통의 깊이가 깊은 편이다. 표면에 새긴 무늬는 신라토기 쪽이 보다 다양한 편이며, 굽다리접시에 딸린 뚜껑의 꼭지 형태도 차이가 있다. 목항아리의 경우 어깨 몸통이 이어지는 부분이 가야토기는 매끄럽게 곡선으로 연결되는 데 비하여 신라토기는 단이 져 있고, 바닥에 대각(臺脚)이 붙어 있는 점도 다르다. 이 토기의 변천에 대해서는 전기 ․중기 ․후기 ․통일신라기 등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기는 350-450년으로 경주 황남동 109호분 ․110호분 ․98호분, 황오동 14호분 등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대표적이며, 경주 이외에는 부산 ․안동 ․예천 ․영일 등에서도 일부 출토되었다. 이 시기에는 신라시대 대표적 고분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 많은 양의 토기가 부장되어 신라토기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김해식 적갈색의 창이 없는 굽다리접시가 소멸하고, 창과 덮개가 있는 굽다리접시 ․파배(把杯) ․기대(器臺) 등 신라토기의 중요 형태가 이 시기에 모두 등장한다. 중기는 500년을 전후한 1세기 동안으로 서봉총(瑞鳳塚) ․천마총(天馬塚) ․금관총... <참고자료> : 金元龍, [韓國考古學槪說], 一志社, 1986./ 國立文化財硏究所, [韓國考古學事典], 2001./ 中央日報, [韓國의 美] 5 (土器), 1978./ 國立中央博物館, [한국 고대의 토기], 1997.(daum 2008)

 

  굽다리완(Bowl, earthenware) [韓國學資料] : 기원전 57˜기원후 67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본문 요약] : 토기 뚜껑은 그릇의 몸체와 한 쌍을 이루는 것으로 보통 몸체와 한조를 이루고 있으나, 따로 분리되어 발견될 경우 몸체를 찾기에 어려움이 있다. 일반적으로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의 굽다리 접시와 합에 뚜껑이 있는 경우가 많고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가야토기의 굽다리접시에 뚜껑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라토기란 삼국시대 신라지역에서 만들어 사용하던 토기이다. 지역적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나, 신라의 영토 범위가 확장되면서 포괄하는 범위가 넓어졌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신라시대 경상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회색의 광택이 없는 토기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 토기는 대부분 흑색․흑회색․회청색 등의 색조를 띠며 흡수성이 없고 표면이 단단하여 때리면 금속성이 나는데, 이는 밀폐된 가마에서 바탕흙[胎土] 속의 철분이 환원염(還元焰)으로 구워진 결과이다. 형태상으로는 목항아리[長頸壺]와 굽다리접시[高杯]가 기본이지만 이후 다양한 변형들이 등장한다. 이들 토기는 원삼국시대(김해시대) 말기인 250-350년에 와질토기(瓦質土器)에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단계에서 김해 부원동 패총에 잘 나타나는 󰡐부원동기(府院洞期)󰡑를 거쳐 신라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와질토기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소백산맥 이남에서 거의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했는데, 낙동강 동쪽에서는 신라토기가, 서쪽에서는 가야토기가 각각 발전하였다. 신라토기와 가야토기는 같은 회색의 광택이 없는 토기로서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신라토기로 부르지만, 두 토기는 형태상 몇 가지 면에서 구분이 된다. 즉 가야의 굽다리접시는 굽구멍[透窓]이 위아래 한 줄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신라토기의 굽구멍은 위아래가 교대로 배치된 경우가 많으며, 몸통의 깊이가 깊은 편이다. 표면에 새긴 무늬는 신라토기 쪽이 보다 다양한 편이며, 굽다리접시에 딸린 뚜껑의 꼭지 형태도 차이가 있다. 목항아리의 경우 어깨 몸통이 이어지는 부분이 가야토기는 매끄럽게 곡선으로 연결되는 데 비하여 신라토기는 단이 져 있고, 바닥에 대각(臺脚)이 붙어 있는 점도 다르다. 이 토기의 변천에 대해서는 전기․중기․후기․통일신라기 등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기는 350-450년으로 경주 황남동 109호분․110호분․98호분, 황오동 14호분 등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대표적이며, 경주 이외에는 부산․안동․예천․영일 등에서도 일부 출토되었다. 이 시기에는 신라시대 대표적 고분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 많은 양의 토기가 부장되어 신라토기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김해식 적갈색의 창이 없는 굽다리접시가 소멸하고, 창... [참고자료] : 金元龍, [韓國考古學槪說], 一志社, 1986./ 國立文化財硏究所, [韓國考古學事典], 2001./ 中央日報, [韓國의 美] 5 (土器), 1978./ 國立中央博物館, [한국 고대의 토기], 1997.(daum 2008)

 

  굽다리항아리(臺附長頸壺 =Long-necked jar with stand, earthenware) [韓國學資料] : 기원전 57˜기원후 676년에 만들어진 굽다리 항아리는 일반 굽보다 높은 굽이 달린 항아리를 일컫는 것이다. 이와같은 굽이 달린 토기는 주로 신라와 가야 지방에서 주로 제작된 신라토기에서 나온다. 신라토기란 삼국시대 신라지역에서 만들어 사용하던 토기이다. 지역적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나, 신라의 영토범위가 확장되면서 포괄하는 범위가 넓어졌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신라시대 경상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회색의 광택이 없는 토기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 토기는 대부분 흑색 ․흑회색 ․회청색 등의 색조를 띠며 흡수성이 없고 표면이 단단하여 때리면 금속성이 나는데, 이는 밀폐된 가마에서 바탕흙[胎土] 속의 철분이 환원염(還元焰)으로 구워진 결과이다. 형태상으로는 목항아리[長頸壺]와 굽다리접시[高杯]가 기본이지만 이후 다양한 변형들이 등장한다. 이들 토기는 원삼국시대(김해시대) 말기인 250-350년에 와질토기(瓦質土器)에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단계에서 김해 부원동 패총에 잘 나타나는 󰡐부원동기(府院洞期)󰡑를 거쳐 신라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와질토기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소백산맥 이남에서 거의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했는데, 낙동강 동쪽에서는 신라토기가, 서쪽에서는 가야토기가 각각 발전하였다. 신라토기와 가야토기는 같은 회색의 광택이 없는 토기로서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신라토기로 부르지만, 두 토기는 형태상 몇 가지 면에서 구분이 된다. 즉 가야의 굽다리접시는 굽구멍[透窓]이 위아래 한 줄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신라토기의 굽구멍은 위아래가 교대로 배치된 경우가 많으며, 몸통의 깊이가 깊은 편이다. 표면에 새긴 무늬는 신라토기 쪽이 보다 다양한 편이며, 굽다리접시에 딸린 뚜껑의 꼭지 형태도 차이가 있다. 목항아리의 경우 어깨 몸통이 이어지는 부분이 가야토기는 매끄럽게 곡선으로 연결되는 데 비하여 신라토기는 단이 져 있고, 바닥에 대각(臺脚)이 붙어 있는 점도 다르다. 이 토기의 변천에 대해서는 전기 ․중기 ․후기 ․통일신라기 등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기는 350-450년으로 경주 황남동 109호분 ․110호분 ․98호분, 황오동 14호분 등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대표적이며, 경주 이외에는 부산 ․안동 ․예천 ․영일 등에서도 일부 출토되었다. 이 시기에는 신라시대 대표적 고분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 많은 양의 토기가 부장되어 신라토기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김해식 적갈색의 창이 없는 굽다리접시가 소멸하고, 창과 덮개가 있는 굽다리접시 ․파배(把杯) ․기대(器臺) 등 신라토기의 중요 형태가 이 시기에 모두 등장한다. 중기는 500년을 전후한 1... <참고자료> : 金元龍, [韓國考古學槪說], 一志社, 1986./ 國立文化財硏究所, [韓國考古學事典], 2001./ 中央日報, [韓國의 美] 5 (土器), 1978./ 國立中央博物館, [한국 고대의 토기], 1997.(daum 2008)

 

  굽다리 화로모양 토기(굽다리 火爐模樣 土器, 火爐形 土器 =Brazier-shaped pottery stand, earthenware) [韓國學資料] : 기원전 57˜기원후 676년에 만들어진 높은 굽이 달린 화로 모양의 토기로, 이와 유사한 기형은 신라토기에서 볼 수 있으나 내부에 이와같이 이중으로 처리된 기형은 극히 드문 기종이다. 신라토기란 삼국시대 신라에서 만들어 사용하던 토기로 지역적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나, 신라의 영토범위가 확장되면서 포괄하는 범위가 넓어졌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신라시대 경상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회색의 광택이 없는 토기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 토기는 대부분 흑색 ․흑회색 ․회청색 등의 색조를 띠며 흡수성이 없고 표면이 단단하여 때리면 금속성이 나는데, 이는 밀폐된 가마에서 바탕흙[胎土] 속의 철분이 환원염(還元焰)으로 구워진 결과이다. 형태상으로는 목항아리[長頸壺]와 굽다리접시[高杯]가 기본이지만 이후 다양한 변형들이 등장한다. 이들 토기는 원삼국시대(김해시대) 말기인 250-350년에 와질토기(瓦質土器)에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단계에서 김해 부원동 패총에 잘 나타나는 󰡐부원동기(府院洞期)󰡑를 거쳐 신라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와질토기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소백산맥 이남에서 거의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했는데, 낙동강 동쪽에서는 신라토기가, 서쪽에서는 가야토기가 각각 발전하였다. 신라토기와 가야토기는 같은 회색의 광택이 없는 토기로서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신라토기로 부르지만, 두 토기는 형태상 몇 가지 면에서 구분이 된다. 즉 가야의 굽다리접시는 굽구멍[透窓]이 위아래 한 줄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신라토기의 굽구멍은 위아래가 교대로 배치된 경우가 많으며, 몸통의 깊이가 깊은 편이다. 표면에 새긴 무늬는 신라토기 쪽이 보다 다양한 편이며, 굽다리접시에 딸린 뚜껑의 꼭지 형태도 차이가 있다. 목항아리의 경우 어깨 몸통이 이어지는 부분이 가야토기는 매끄럽게 곡선으로 연결되는 데 비하여 신라토기는 단이 져 있고, 바닥에 대각(臺脚)이 붙어 있는 점도 다르다. 이 토기의 변천에 대해서는 전기 ․중기 ․후기 ․통일신라기 등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기는 350-450년으로 경주 황남동 109호분 ․110호분 ․98호분, 황오동 14호분 등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대표적이며, 경주 이외에는 부산 ․안동 ․예천 ․영일 등에서도 일부 출토되었다. 이 시기에는 신라시대 대표적 고분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 많은 양의 토기가 부장되어 신라토기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김해식 적갈색의 창이 없는 굽다리접시가 소멸하고, 창과 덮개가 있는 굽다리접시 ․파배(把杯) ․기대(器臺) 등 신라토기의 중요 형태가 이 시기에 모두 등장한다. 중기는 500년을 전후한 1세기 동안으로 서봉총... <참고자료> : 金元龍, [韓國考古學槪說], 一志社, 1986./ 國立文化財硏究所, [韓國考古學事典], 2001./ 中央日報, [韓國의 美] 5 (土器), 1978./ 國立中央博物館, [한국 고대의 토기], 1997.(daum 2008)

 

  굽달린손잡이사발(把手附臺鉢 =Bowl with handle, earthenware) [韓國學資料] : 기대가 달린 손잡이 사발은 신라시대의 회청색 경질토기 중 한 종류이다. 신라토기란 삼국시대 신라에서 만들어 사용하던 토기로 지역적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나, 신라의 영토 범위가 확장되면서 포괄하는 범위가 넓어졌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신라시대 경상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회색의 광택이 없는 토기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 토기는 대부분 흑색, 흑회색, 회청색 등의 색조를 띠며 흡수성이 없고 표면이 단단하여 때리면 금속성이 나는데, 이는 밀폐된 가마에서 바탕흙[胎土] 속의 철분이 환원염(還元焰)으로 구워진 결과이다. 형태상으로는 목항아리[長頸壺]와 굽다리접시[高杯]가 기본이지만 이후 다양한 변형들이 등장한다. 이들 토기는 원삼국시대(김해시대) 말기인 250-350년에 와질토기(瓦質土器)에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단계에서 김해 부원동 패총에 잘 나타나는 󰡐부원동기(府院洞期)󰡐를 거쳐 신라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와질토기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소백산맥 이남에서 거의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했는데, 낙동강 동쪽에서는 신라토기가, 서쪽에서는 가야토기가 각각 발전하였다. 신라토기와 가야토기는 같은 회색의 광택이 없는 토기로서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신라토기로 부르지만, 두 토기는 형태상 몇 가지 면에서 구분이 된다. 즉 가야의 굽다리접시는 굽구멍[透窓]이 위아래 한 줄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신라토기의 굽구멍은 위아래가 교대로 배치된 경우가 많으며, 몸통의 깊이가 깊은 편이다. 표면에 새긴 무늬는 신라토기 쪽이 보다 다양한 편이며, 굽다리접시에 딸린 뚜껑의 꼭지 형태도 차이가 있다. 목항아리의 경우 어깨 몸통이 이어지는 부분이 가야토기는 매끄럽게 곡선으로 연결되는 데 비하여 신라토기는 단이 져 있고, 바닥에 대각(臺脚)이 붙어 있는 점도 다르다. 이 토기의 변천에 대해서는 전기, 중기, 후기, 통일신라기 등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기는 350-450년으로 경주 황남동 109호분, 110호분, 98호분, 황오동 14호분 등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대표적이며, 경주 이외에는 부산, 안동, 예천, 영일 등에서도 일부 출토되었다. 이 시기에는 신라시대 대표적 고분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 많은 양의 토기가 부장되어 신라토기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김해식 적갈색의 창이 없는 굽다리접시가 소멸하고, 창과 덮개가 있는 굽다리접시, 파배(把杯), 기대(器臺) 등 신라토기의 중요 형태가 이 시기에 모두 등장한다. 중기는 500년을 전후한 1세기 동안으로 서봉총(瑞鳳塚), 천마총(天馬塚), 금관총(金冠塚),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 <참고자료> : 金元龍, [韓國考古學槪說], 一志社, 1986./ 國立文化財硏究所, [韓國考古學事典], 2001./ 中央日報, [韓國의 美] 5 (土器), 1978./ 國立中央博物館, [한국 고대의 토기], 1997.(daum 2008)

 

  굽베미들 [들] : 호명면 형호리(衡湖里) 저우리 남쪽에 있는 들로, 굽배미란 논이 있다.

 

  굿 모닝 밀레니언(Good morning milleniun) [책] : 호명면 오천리 162번지 출신인 장회익(張會翼, 1938- , 서울大 敎授) 등의 저서로, 325쪽, 삽도, 23cm, 서울 민음사(民音社)에서 1999년에 발행하였다. 목차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위하여-2000년의 시간대를 정리한다. 1) 예수의 탄생(김성재, 김영민), 2) 로마 제국의 멸망(조남진, 김경현), 3) 마호메트의 출현(이희수, 김용선), 4) 주희와 동양(교수신문 편집부, 손영식, 조준하), 5) 문자와 인쇄술의 발달(이근무, 이광주), 6) 지리상의 발견과 신대륙 도착(최협, 최재헌), 7) 종교 개혁과 루터(조태연, 박상익), 8)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박은진, 박만엽), 9) 뉴턴의 과학 혁명 완성(오진곤, 성영곤), 10) 자본주의의 등장(이수훈, 윤승준), 11) 프랑스 혁명(주명철, 최갑수), 12) 마르크스주의의 출현(황태연, 유재건), 13) 다위의 ‘종의 기원’ 출현 이후(최종덕, 홍옥희), 14)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장회익, 이중원), 15) 1.2차 세계대전(정성화, 김진웅), 16) 러시아 혁명(김태현, 김부기), 17) 원자 폭탄의 투하(이필렬, 이기택), 18) DNA의 발견(정재훈, 방재욱), 19) 우주 시대의 개막(김상준, 임경순), 20) 컴퓨터의 발명(허수열, 조충호), 21) 사회주의의 몰락(김윤자, 이성백), 22) 리우 환경 선언(이정전, 임홍빈), 새 천년의 화두, 인권의 혁명을 위하여(최갑수), 세계사 연표(323쪽)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인문과학실에 소장되어 있다.

 

  궁궁을을(弓弓乙乙 1894) [演劇] : 동학혁명이 일어난 해인 1894년에 예천 등 경북 북부지방에서 있었던 동학농민운동 사례를 극화한 마당극으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약칭 민예총) 대구지부(지부장 정지창)의 동학 100주년 특집이다. 대본 집필은 김창구ㆍ오진석, 책임 연출은 김창우, 그림은 김항규, 음악은 유완순이다. 이는 1994년 4월 1일부터 10일까지(오후 5시, 7시 30분) 동아문화센터 비둘기홀에서 열었다. 이 작품은 극단 '함께하는 세상'과 '반달인형극회', 실내 국악단 '도도리', '사진사랑판', 소리패 '산하', 노래패 '소리타래', 대구 민족미술인협의회 등 민예총 대구지부의 각 단체들이 총출연해 제작한 것으로 1993년 극단 '함께 사는 세상'이 공연한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의 후속편이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기 30년 전 조선 왕조의 부패가 심했던 1862년의 진주농민항쟁을 그린 것이고, <궁궁을을 1894>는 1894년에 예천, 상주 등에서 있었던 농민항쟁 사례를 극화한 것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창작 판소리와 창작 노래를 사용하며 실내 공연과 야외 공연을 동시에 마련해 관객들을 출연진으로 사용하는 마당극 특유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것이다.(每日新聞 1994.3.28, 인터넷 야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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