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설화

예천군(醴泉郡)

우리 군은 소백준령(小白峻嶺)의 높은 줄기가 감싸고 낙동강(洛東江), 내성천(乃城川)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으로 은근과 끈기가 스며있는 『충효의 고장』이다.
경상북도 최북단에 위치하여 동쪽은 안동시, 서쪽은 문경시, 남쪽은 상주시와 의성군, 북쪽은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과 접하고 있으며, 행정구역(行政區域)은 1읍(邑),11면(面),265리(里), 면적은 660㎢, 인구는 6만 명이다.
부족국가시대(部族國家時代)에는 호로국(戶路國) 혹은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이라 군지(郡誌)에 전해지나 확인할 수 없으며,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신라(新羅)의 수주현(水酒縣), 757년(경덕왕 16)에 예천군(醴泉郡)으로 처음 불리어지고, 안인현(安仁縣, 現 山北面), 가유현(嘉猷縣, 現 山陽面), 은산현(殷山縣, 現 上,下里面), 영안현(永安縣, 現 豊山邑)을 편입하였다. 고려(高麗)시대에는 936년(태조 18) 보주(甫州), 983년(성종 2) 양양(襄陽), 995년(성종 14)년엔 청하(淸河)라는 별호도 가졌으며, 1018년(현종 9) 5도 양계로 행정구역 개편시 보주는 안동영지사부에 용궁군(龍宮郡)은 상주목에 속하였다. 1274년(원종 15) 상주의 다인현(多仁縣)이 예천군에 편입되었다. 조선(朝鮮)시대 1413년(태종 13) 보천군(甫川郡), 용궁현(龍宮縣)으로 부르다가 1416년(태종 16)에 보천군이 다시 예천군(醴泉郡)이 되었다.
1895년 용궁현(龍宮縣)이 용궁군(龍宮郡)으로 승격되고, 1896년 예천군과 용궁군이 경상북도에 속했다. 1906년 동로,화장면이 문경군에, 옛 다인현인 현내(縣內),현동(縣東),현남(縣南),현서면(縣西面)이 비안군(比安郡)에 편입되었으며, 안동군에서 감천면이 우리 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용궁군이 예천군에 통합되고 현서면이 예천군에 편입되어 풍양면 일부가 되었다. 1923년 풍기군(豊基郡)에서 상리,하리면이 우리 군에 편입되었다. 1937년 7월 1일 예천면(醴泉面)이 읍(邑)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 1,200여 년의 긴 역사(歷史)를 자랑하는 고장이다.
유구(悠久)한 역사에 걸맞게 고인돌, 선돌 등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유물과 국가지정문화재 26점, 도(道)지정문화재 54점 등 소중한 많은 문화유산이 아름다운 자연자원과 어울려 있다.
또한 해마다 10월 중에 개최되는 예천군민제전(醴泉郡民祭典)은 민속놀이, 백일장, 문화강좌, 국궁대회를 비롯한 문화제행사(文化祭行事), 예천군민의 날(10. 16)행사, 군민체육대회 등이 열린다. 통명농요, 공처농요, 청단(靑丹)놀음, 재애밟기, 도해따기, 마당굿, 별신굿 등 다양한 민속예술(民俗藝術)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예천(醴泉)이라는 유래는 단술「예(醴)」자(字), 샘「천(泉)」字로 삼국시대 수주(水酒)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물맛이 좋고 단술과 같다 하여 「예천(醴泉)」이 되었으며, 우리 고을의 지명 유래와 밀접한 『주천(酒泉)』이라는 샘이 예천읍 노하리에 있다.

예천읍(醴泉邑)

예천군청의 소재지로서 1914년 이전까지는 읍내사부(邑內四部)라 하여 동,서,남,북의 4개 읍내면(邑內面)으로 나누었는데, 군청이 북쪽이 되므로 북읍내면(北邑內面)이라 하여 노상(路上), 노하(路下), 백전(栢田), 용산(龍山), 효동(曉洞), 나평(羅坪), 생천(生川), 정산(鼎山), 구산(九山)의 9개 동을 관할하다가,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동읍내면의 갈두(葛頭), 응동(鷹洞), 광천(廣川), 우계(愚溪), 본동(本洞), 원동(院洞), 통명(通明)의 7개 동 전역과 남읍내면(南邑內面)의 본동(本洞), 청복(淸福), 왕상(旺相), 신기(新基)의 4개 동과 서읍내면(西邑內面)의 대무(大母), 흘증(屹增), 홍심(洪心), 지내(池內), 석정(石井)의 5개 동과 승도면(繩刀面)의 본동, 고평동 일부, 개포면의 상리 일부와 신당면(神堂面)의 하리(下里) 일부를 병합하여 예천면(醴泉面)이라 해서 노상, 노하, 백전, 용산, 생천, 갈구, 우계, 동본, 통명, 남본, 청복, 왕신, 서본,대심, 지내, 석정의 16개 동으로 개편 관할하였다. 1937년 7월 1일에 예천읍(醴泉邑)으로 승격되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제6542호)에 의하여 개포면의 상동을, 1983년 보문면 고평동을 편입시켜 18개 동이 되었으며, 1988년 5월 11일 동(洞)이 리(里)로 개칭되었다. 동쪽은 보문면, 남쪽은 호명면과 개포면, 서쪽은 유천면과 용문면, 북쪽은 용문면과 감천면에 경계를 두고 있다.
관광자원으로는 주천, 예천향교, 동본리삼층석탑,석조여래입상, 개심사지오층석탑, 정충사, 흑응산성, 남산, 통명농요, 양궁경기장이 있고, 특산물은 옹골진미, 풋고추, 쪽파, 단무지, 동충화초, 누에가루, 영지버섯, 참우, 국궁(各弓) 등이 있다.

주천(酒泉)

  • 위 치 : 예천읍 노하리 68

옛날 우리 고을 담 밖 관혁동(貫革洞 - 지금의 예천읍 노상리)에 주천(酒泉)이란 샘이 있었다.
이 샘은 물맛이 달 뿐 아니라,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철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고 한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울산지방의 왜군을 토벌하기 위해 우리 고을을 지나던 양호(楊鎬)라고 하는 명(明) 나라 장수가 이 샘의 물을 마셔 보고 감탄한 나머지 “과연 예천(醴泉 - 中國에도 있는 지명으로 단술처럼 맛이 좋은 샘이 있다고 함)의 이름처럼 물맛이 좋다”고 하면서 “예천의 지명은 이 샘 때문에 얻게 되었구나“라 극찬하였다. 또 이 샘 때문에 통일신라 때 「예천(醴泉)」이라는 행정이름이 생겼다는 설(說)과 그렇지 않다는 설(說)이 엇갈리고 있으나, 참고 문헌이나 구전(口傳)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 샘(속칭 군방골) 설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
군방골샘은 깊이가 8m나 되며 지하에서 용출(湧出)하는 자연수로 이름만큼이나 달고 차서 지역민들에게 원동력을 제공하는 감로수(甘露水)였고, 또한 한(恨)과 애환(哀歎)을 함께 한 현장이었다. 군방골이란 조선 중기까지 관아(官衙)와 활을 만들던 궁방(弓房)이 모여 있었으며, 일설에는 동헌(東軒)을 지키던 군방(軍房)이 있던 곳이라 하여 군방골샘 또는 궁방골샘이라 구전(口傳)되고 있다.
근년에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상수도(上水道)가 보급됨에 따라 폐정(廢井)하였던 것을 이 우물에 대한 주민들의 애정(愛情)과 우리 고을의 지명 유래와 얽힌 유서(由緖) 깊은 샘이기에 1990년에 목조와가(木造瓦家) 사각(四角)지붕의 보호각을 세우고 샘(酒泉)을 복원(復元)하여 보존 관리하고 있다.

약포(藥圃)대감에 얽힌 일화(逸話)

불을 켜지 않은 밤에도 편지를 쓰는 시력(視力)

약포(藥圃)대감의 약관 시절 겸암 선생(謙菴 柳雲龍)은 일찍부터 약포가 장차 국가에 공헌할 큰 인물인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의 아우인 서애 대감(西崖 柳成龍)은 약포보다는 16년이나 손아래이면서도 약포 선생의 인물됨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낌새를 알고 아우에게 약포의 비범함을 알려 주기 위하여 어느 날 저녁 아우인 서애가 보는 앞에서 밝은 낮에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가는 글씨로 편지를 써서 하인에게 주면서 이 편지를 고평(예천읍)에 있는 약포에게 갖다 드리고 그 답장을 받아서 오늘 밤까지 돌아 오라 일렀다. “형님 그렇게 가는 글씨로 된 편지를 등촉을 아무리 밝혀도 읽기조차 힘들 텐데 그 답장까지 받아 오라고 하시니 이상한 분부이십니다.” 하며 서애가 말하니 겸암은, “약포는 밤중에라도 그 편지를 읽어 볼 것이며 답장도 쓸 것일세.” 하며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과연 새벽녘에 고평에 갔던 하인이 약포의 답장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온 하인에게 겸암은, “약포가 내 편지를 받아 어떻게 하더냐?” 하고 물으니, “고평에 도착하니 해가 넘어가서 어두운데 방 가운데서 촛불도 켜지 않고 편지를 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이 답장을 써서 줍디다.” 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은 서애는 약포가 초인(超人)한 인재임을 깨닫고 더욱 친분을 더하여 그 어려웠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같이 손을 잡고 슬기롭게 헤쳐 나갔다고 한다.

도량(度量)이 넓은 시(詩)에 콧대 꺾인 맏동서

약포(藥圃)가 젊었던 시절 그 맏동서 되는 사람이 아우 동서인 약포의 체소함을 얕잡아 보는 눈치가 있는 것을 안 그들의 장인되는 십독 반충(習讀 潘沖 - 용궁면 덕계리)이라는 분은 본래 지인지감(知人之感)이 있어 둘째 사위인 약포가 큰 그릇임을 알고 있는 터이기 때문에 맏사위에게 약포의 인물됨을 알려 주기 위하여 짐짓 모른 체 하고 있다가 하루는 갑자기 두 사위를 불러 앉히고 등잔불을 보고 일곱 자의 시(詩)를 지으라고 하였다. 맏사위가 먼저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
“흰 용이 구슬을 물고 강을 건너온다.(白龍含珠渡江來) 흰 용은 솜으로 된 심지, 구슬은 불꽃, 강은 접시를 상징한다.”
묵묵히 맏동서의 시를 들여다 보고 앉았던 약포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모든 나라의 성안엔 한 나라의 깃발이 꽂혔다.(萬國城中揷漢幟) 모든나라 성안… 기름이 담겨진 접시 속 깃발… 심지에 불이 붙어 펄럭이는 모습” 그윽히 아우동서가 지은 시를 들어다 보던 맏동서는 깜짝 놀랐다. 기름이 담겨진 조그만 접시를 자신은 한 개의 강(江)으로 밖에 못 보는데, 아우동서인 약포는 접시를 천하(天下)로 보는데는 그 도량과 포부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그만 질려버려서 그 다음 부터는 아우동서인 약포를 마음속으로 존경(尊敬)하며 따랐다고 한다.

큰 인물임을 알아 맞춘 명(明) 나라의 관상사(觀相師)

약포가 체약(體弱)하고 키도 매우 작았다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명(明)나라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의 일이다.
천자(天子)를 만나러 궁중(宮中)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키가 너무 작아서 초라하게 보일까 염려되어 신을 한 치 정도 높여서 본래의 키보다 크게 하여 천자를 배알했다.
천자 옆에는 명나라 최고의 관상(觀相)을 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약포를 보고는 “조선 사신으로 온 저 사람의 키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재상(宰相) 감인데 아깝구나.” 하였다. 이 말을 귓전으로 엿들은 약포는 그 다음 날 명(明) 나라 궁중에 들어갈 때는 높였던 뒷굽을 다시 낮추어 본래의 키대로 들어갔더니, 어제 그 사람이 무릎을 탁 치면서,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과연 조선에서 온 정탁(鄭琢)은 큰 인재임이 틀림없구나” 하더라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

꿈에서 얻은 용(龍)의 알

약포(藥圃)가 태어나기는 용문면 하금곡리인데, 고평리에 새로 집을 짓고 우물을 팠으나 웬 일인지 아무리 깊게 파도 물이 나기는커녕 한 방울도 비치지 않았다. 며칠동안 애를 쓰다가 낮에 잠이 들었는데, 꿈에 용이 꿩알 만한 돌을 주면서 “이 알을 파던 우물 속에 넣으면 물이 날 것입니다.” 하였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용문면(龍門面) 금당실(金塘室)에 볼일이 생겨서 살던 옛 집터에 들렸더니 뜻밖에도 얼마 전 꿈에서 용이 주던 알처럼 생긴 돌이 눈에 띄었다. 약포는 그 돌을 도포소매에 집어넣고 고평으로 돌아와서 꿈에 용이 시키던 대로 파던 우물에 집어넣으니 이게 웬 일이냐! 그 돌이 우물 밑에 떨어지자 한 방울의 물도 비치지 않던 우물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현재 예천읍 고평2리에 있는 ‘중간샘’이라는 우물이 바로 이 우물이라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 돌은 남아 있어 해마다 한 차례씩 우물을 헹구어 내고 우물 속에 들어 있는 이 돌을 닦아서 고이 우물에 모셔 넣는다고 한다.

약포 대감의 체온(體溫)

약포는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냉돌방에서 이불을 덮지 않고 잠을 잤다고 한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서애(西崖)가 볼 일이 생겨 약포와 하룻밤 자게 되었다. 한겨울철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방(冷房)에 더구나 이불도 없이 누웠으니 춥기보다는 이가 덜덜 떨려서 한참도 배기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약포는 서애에게 자기와 자리를 바꾸자고 하였다. 얼마 후 서애가 누운 자리가 차가워 지자 약포는 또 자리를 바꾸자고 하였다. 번번히 약포가 누웠던 자리는 따뜻하였다. 이렇게 자리를 세 번씩이나 바꾸어 가며 길고 긴 겨울밤을 이불도 없는 냉방에서 따뜻하게 새웠다고 한다.

메기북

메기가죽으로 만든 이 북은 크기가 지름 35cm, 둘레 119cm, 테의 너비 18cm이고, 무게가 2.3kg으로 가볍다. 이 북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해 온다.
300여 년 전 도정서원(道正書院) 벼랑아래 소(沼)가 있었는데, 이 소 위에 송아지를 자주 매어 놓고 일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송아지가 없어져 주위를 살펴보니 송아지의 꼴삐가 이 소(沼)에 내려가 있었다. 이 소에는 전부터 큰 이무기가 살고 있다고 전해와 이 이무기가 잡아먹은 것으로 생각하고 죽은 송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며칠후 큰 낚시를 만들어 이 소에 담구어 두었다. 얼마가 지나자 큰 물고기가 물렸다고 생각되어 온 동네사람들이 모여 몇 시간을 씨름한 끝에 고기를 건져 올려놓고 보니 어마어마한 큰 메기였다.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메기였으니 크기가 짐작이 갈 만하다.
이 메기를 잡아 놓고 보니 통쾌감도 느끼고 겁이 나기도 하였으나 이왕에 잡은 고기를 살릴 수 없어 가죽을 벗겨 영원히 기념하고자 북을 만들게 되었다.
이 북이 지금까지 보관돼 오면서 재미있는 일화를 남겼다. 100년 전쯤 도정(道正)에 살 때 가족이 32명이 되어 식사시간이나 가족의 모임이 있을 때에는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따로 부르지 않고 이 북을 쳐서 모이게 하였다고 하니 북의 쓰임도 다양(多樣) 했던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보관해오면서 찢어지거나 흠 없이 원형 그대로 조상들이 물려준 물건을 지금까지 정성껏 잘 보존 관리하고 있다.
정탁(鄭琢, 1526∼1605)의 자(字)는 자정(子精), 호(號)는 약포(藥圃)이다. 조식(南溟 曺植), 이황(退溪 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사(經史), 지리(地理), 병서(兵書)에 밝고 믿음과 지조가 높아 50여 년간 벼슬길에 올랐으며, 5조판서(五曹判書)와 좌·우의정(左·右議政)을 지낸 명재상으로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등 명장(名將)을 천거하여 나라를 구하게 하였으며, 특히 충무공(忠武公)을 사형 직전에 구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케 한 뒤 명량대첩의 큰 공을 세우게 하였다. 사후(死後) 1613년(광해군 5) 위성공신(衛星功臣) 1등에 녹훈(錄勳)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 되었다.
이 곳과 연계하여 볼 수 있는 볼거리는 약포 선생의 유물(遺物)을 보존·전수하기 위하여 1980년에 건축한 정충사(靖忠祠)가 있다. 이 사당에는 약포영정(藥圃影幀 - 보물 제487호)이 있고 유물로는 약포유고 및 문서(藥圃遺稿·文書 - 보물 제494호) 등을 소장(所藏)하고 있다. 정충사 건너편 호명면 황지리(도정골)에는 도정서원(道正書院)과 약포사당(藥圃祠堂 - 문화재자료 제142호)이 울창한 산림(山林) 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아래 내성천변(乃城川邊)엔 맑고 넓은 백사장(白沙場)이 펼쳐져 있다.

염라대왕(閻羅大王)을 감동(感動)시킨 효성(孝誠)

옛날 우리 고을에 김흥환(金興煥)이라는 효자가 살고 있었는데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 지극(至極)한 효성을 다하였다.
어머니가 병들어 눕게 되자, 효성이 지극한 효자는 유명한 의원(醫員)과 약을 찾기 위하여 온갖 곳을 다 찾아 다녔으나 허사였다. 날이 가면 갈수록 어머니의 병은 차도는커녕 약을 쓰면 쓸수록 병은 나날이 깊어만 갔다. 이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함이라 생각하고 약을 계속 쓰는 한편, 매일 아침 저녁으로 목욕재계(沐浴齋戒) 하고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바라보면서 어머니 대신 제 몸을 바칠 터이오니 하루 빨리 병환(病患)을 낫게 해달라고 지성으로 빌었다.
몇 달이 지나던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일어 앉아서 그를 불러 앞에 앉히고 하는 말이, “어제 내가 잠이 들어 잠시 동안 꿈을 꾸니 어딘지도 모르는 한 곳에 이르게 되었는데, 굉장히 큰 궁궐(宮闕) 같은 집에서 관복(官服)을 정제한 흰 수염이 보기 좋게 늘어진 노인 한 분이 많은 군복(軍服)을 입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점잖게 앉아서 나를 부르기에 엉겁결에 그 노인 앞에 다가서니, 너의 명(命)이 오늘까지로 되어 있어 이곳에 오게 되어 있었으나, 네가 평소 절개가 있어 수절(守節)을 잘 하였을 뿐만 아니라, 네 아들의 효성이 워낙 뛰어나서 내 느낀 바가 있어 너에게 특별히 열네(14) 해의 명(命)을 더 주는 바이니 돌아가서 더욱 절개를 잘 지키다가 십사년 후 오늘 이 시각에 다시 오도록 하여라.” 하면서 “돌아가라”고 하였다.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하는 게 아닌가.
이상하게도 그 꿈을 꾸고 난 다음 날부터는 그렇게도 깊어만 가던 어머니의 병이 차츰 호전되어 가드니 얼마 후 병이 완쾌(完快)되었다고 한다. 그 후 효자의 어머니는 꼭 십사년이 되는 그 날 그 시각까지를 더 살고 죽었다고 한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이 얘기를 듣고 그의 어머니가 꿈에 만났다고 하는 노인은 저승에서 인간의 수명(壽命)을 관장(管掌)하고 있는 염라대왕(閻羅大王)이 틀림없을 것이라 하였다.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한 사람은 저승의 염라대왕도 감복(感服)시켜 그 소원(所願)을 들어주었으리라 한다.

효자(孝子)에게 신선(神仙)이 가르쳐 준 약국(藥局)

  • 위치 : 예천읍 남본리 (남산 부근)

옛날 우리 고을에 마음이 착하고 부모에게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한 장의진(張義鎭)이라는 효자가 살았다.
아버지가 병들어 눕게 되자, 그는 아버지의 병(病)을 고치기 위하여 약(藥)이란 약은 모두 구하여 써봤으나, 병은 차도가 없을 뿐더러 점점 위독하게 되어 이제는 하는 수 없이 돌아가시는 날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고비에 이르고 말았다.
효성이 지극한 효자는 그 날도 슬픈 마음을 억지로 진정하고 정신없이 앓고 있는 아버지의 옆에 꿇어앉아 아버지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자신도 모르게 두 줄기 눈물이 앞을 가리고 빰을 스쳐 방울방울 떨어져 옷깃을 적셨다.
그러는 사이 앉은 채로 잠이 들어 꿈을 꾸고 있는데, 흰 도복에 검은 띠를 두른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를 살려 낼 약(藥)은 북쪽 우물 위에 있는 약국(藥局)에 있느리라.” 하고 휭하니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깜짝 놀라 깨어난 그는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가 북(北)쪽을 향하여 무작정 걸어갔다. 얼마쯤 걷다 보니 덕고개(德峴 - 龍門面)라는 곳에 이르게 되었는데 마침 거기에 우물이 있는 것이 아닌가? 기쁜 마음으로 근처 사람들에게 약국이 있는 곳을 물으니, “이 우물 뒷마을에 약국이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약국을 찾아가 의원(醫員)에게 아버지의 병 증세를 얘기하고 약 세 첩을 지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편작(扁鵲)이나 화타(華陀)라도 못 고친다고 의원마다 단념하라고 하던 아버지의 병을, 지어 온 약을 정성을 다하여 달여 드렸더니 씻은 듯이 나아버렸다.
그 후 아버지가 천명(天命)을 다하고 돌아가려 하자, 효자는 도끼로 자기의 손가락 세 개를 끊어 숨진 아버지의 입에 피를 흘려 넣어서 열흘 동안이나 목숨을 더 연장 (延長)하였다고 한다.

화재(火災)를 예방(豫防)한다는 돌자라

  • 위치 : 예천읍 남본리 (남산공원 경내)

예천읍 남산에 있는 팔각정(八角亭, 舊 觀豊樓 터) 옆에 길이 1미터 남짓한 돌로 투박하게 다듬어진 돌자라 한 마리가 남(南)쪽을 향해 놓여져 있다.
이 돌로 다듬어진 자라가 처음 놓여진 연대(年代)는 자세하지 않으나 <예천군지>에 다음과 같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하면, 호명면 본리 뒷산인 검무산과 종산리 뒷산이 예천읍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 두 산이 모두 예천읍의 화체(火體)가 되어 예천읍에 화재가 자주 났다고 한다. 그래서 남산(南山) 위에 돌로 자라를 다듬어 앉히게 되면 이 두 산의 화기(火氣)를 막게 되어 예천읍의 화재(火災)를 예방(豫防)할 수 있다고 하여 돌로 자라를 다듬어 남산 위 관풍루 주변(周邊)에 앉혀 놓았다고 한다. 그 후 이 고을에 군수(郡守)로 있었던 1570년대의 예천군수 이귀수(李龜壽)의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기 위하여 돌자라를 비석 받침으로 삼기 위해 끌어내려 빗돌을 세울 만큼의 홈을 그 돌자라 등에 파니 피가 나더라고 하며, 그 돌자라는 예천읍 서본리 비선거리(예천초등학교와 굴모리 중간지점)에 두었다고 한다. 그 뒤 예천읍에 자주 불이 나자 다시 다른 돌로 자라를 다듬어 놓은 것이 현재 남산 위에 앉혀진 「돌자라」라고 한다.
돌자라가 있는 이 곳 남산은 등산코스와 체육시설(體育施設)이 있어 예천읍민들의 휴식공간(休息空間)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호국영령(護國英靈)의 혼(魂)이 깃들여 있는 충혼탑(忠魂塔), 국궁(國弓)으로 심신(心身)을 수련(修練)하는 무학정(武學亭)등이 있다.

무심바우

  • 위치 : 예천읍 왕신리

예천읍 왕신1리 무심바우 마을 앞에 무서운 느낌이 들만큼 커다란 바위가 있다.
1) 그 바위 뒷골에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한 사람은 무서운 생각도 없이 무심히 마을을 개척(開拓)하여 그 바위와 마을 이름을 「무심바우」라 전해오고 있다.
2) 오래 전 이 마을에 정(情)이 깊고 우애(友愛)가 돈독한 몇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마을 사람 중에 방울장사로 생계(生計)를 이어가며 살아가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방울장사 나간 남편이 6개월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자, 혼자 남은 부인은 걱정이 되어 매일 마을 앞에서 남편을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 몸이 쇠약하여진 부인은 언제나 기다리던 그 자리에서 그만 죽고 말았는데, 그 후 1년이 지나자 부인이 죽은 자리에 평평한 큰 바위가 생겨났다. 그 형상은 마치 가만히 앉아서 남편을 기다리기 위하여 앞을 내려다보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부인이 바위가 되어 끝까지 기다리는데도 끝내 그 방물장사가 돌아오지 않자, 그 바위를 무심바우로 불렀다고 한다.

옻샘

  • 위치 : 예천읍 청복1리

남부초등학교 뒤에 있는 오성바위에서 산능선을 타고 내려온 골짜기에 청복1리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큰 샘이 있는데 ‘매화낙지(梅花落池)’라고 하였으나, 아주 오랜 옛날 하늘의 옥황상제(玉皇上帝)가 내려와 목욕(沐浴)을 하고 하늘나라에 올라갔다고 하여 ‘용두천(龍頭泉)’ 이라고 하였으며, 그 이후부터 이 샘물을 마시면 피부병(皮膚病)이 없어지고 옻이 오르지 않는다고 하여 「옻샘」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샘 제일 밑바닥에는 사람의 몸통 만한 옻나무 둥치 4개가 기초를 하고 있으며 물의 오염(汚染)을 막기 위해 은(銀)이 박혀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곳의 우물을 먹기 위하여 전국 곳곳의 사람들이 줄을 서고 며칠을 묵으면서 몸의 병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샘물은 먹을 수가 있으나 안전사고(安全事故) 방지를 위해 철조망으로 가려져 있으며, 매년(每年) 양력(陽曆) 8월 15일에는 마을 주민 전체가 참여하여 샘물 청소를 하고 풋굿먹기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마을 주민은 이 샘물을 먹기 때문에 어린이가 태어나도 옻에는 면역(免疫)이 되었다고 한다.

송정 느티나무

  • 위 치 : 예천읍 청복1리 도리촌

이 나무는 도리촌(桃梨村) 마을에 1920년 이후부터 자란 것인데, 이 마을이 개척(1417년 경)되기 전부터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 나무는 장정 3인의 팔 둘레로 세(3)아름이나 되었고, 단오(端午) 때에는 그네를 매고, 음력 7월 13일에는 풋굿놀이도 이 곳 나무아래에서 했다.
나무 중앙에 장정 1인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생겼는데 주민들이 이 구멍에 음식을 넣어 제사를 지내면 나무에서 음식 먹는 소리가 났다.
나무에서 음식 먹는 소리가 나면 1년 농사는 대풍(大豊)이 들고 마을에는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 행운(幸運)을 가져다 준다고 주민들은 믿었다. 이 큰 느티나무는 계속 보존되다가 1920년 경에 불타버리고 지금의 나무는 그 터에 생긴 제2세의 느티나무인데, 마을 사람들의 휴식공간(休息空間)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매년 정월 보름 자정에 이 나무에서 동신제(洞神祭)를 올려 마을의 평화를 기원(祈願)하고 있다.

용정(龍井) 마을

  • 위치 : 예천읍 청복2리

300년 전 밀양(密陽) 박씨(朴氏)와 김해(金海) 김씨(金氏) 양 씨족이 용정(龍井)이란 골짜기에서 대(代)를 이으며 살아왔으나 첫째는 식수(食水)요, 둘째는 의식주(衣食住)가 문제였다. 그래서 두 씨족(氏族)이 서로 힘을 합해 샘을 파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러 곳에 샘을 아무리 파도 물이 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마을에서 제일 고령자(高齡者) 되는 박씨(朴氏) 노인의 꿈에, 어떤 도인(道人)이 나타나서 “이곳 중간 마을 가운데 논을 깊이 파면 물이 콸콸 쏟아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꿈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하였고, 마을사람들이 모여 샘을 팠다. 과연 샘을 파니 용(龍)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물이 용솟음쳤다고 하여 이 샘을 용정(龍井)이라 칭(稱)하고, 마을 이름도 용정(龍井)이라고 하였다.
이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며, 지금은 상수도(上水道)의 설치로 식수(食水)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백일장고개(白日場峴)와 장원봉(壯元峯)

  • 위 치 : 예천읍 청복리

옛날 남읍내(南邑內)에서는 선비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과거(科擧)를 보는 것처럼 시(詩)를 짓고 시험(試驗)을 치르기 위해 큰 차일을 여러 개 치고 한 선비가 글제를 내고 일제히 글을 지었다는 장소가 있었는데, 이 장소를 백일장 고개라 하였다.
여기서 글을 잘 지어 장원(壯元)한 선비는 제일 앞에 서서 호위를 받으며 장원봉(壯元峯)으로 가서 급제한 상패(賞牌)를 받고 술과 안주로 마음껏 즐겼으며 한양(漢陽)에 과거(科擧)를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별장고개로 불러지면서 사과밭이 형성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항상 공부하고 연구(硏究)하라는 교훈(敎訓)을 주고 있다.

귀밑마을(龜尾村)

  • 위치 : 예천읍 갈구리

이 마을은 예천읍 갈머리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순흥 안씨가 터를 잡았다.
옛날에 명당(明堂) 터를 찾아 전국을 유람하던 풍수(風水)가 이 마을에 도착하여 이 지역이 거북의 형상을 한 명당 터(金龜沒尼形)이며 누군가가 금거북이를 묻어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여 여러 날 주변을 찾아 헤메였다.
이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한 마을이기에 구산(龜山) 혹은「귀밑」이라 전래(傳來)되어 오늘날까지 불려지고 있다. 지금도 마을 어딘가에 금거북이가 묻혀 있을 것이라고 주민(住民)들 사이에는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 지세가 거북의 꼬리처럼 생겼다 하여 구미(龜尾)라고도 하며, 마을 앞의 산이 아홉골이므로 구산(九山)이라고도 한다.

마들

  • 위치 : 예천읍 생천리

마들은 예천읍 생천리 군(軍) 부대 앞에 있는 들이다.
옛날에 이 부근에 태부자(太富者)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스님이 시주(施主)하러 태 부자집 문을 두드리니 아주 피치 못 할 위급한 일이 있어 만나주지 못했다. 그 스님이 화가 나서 태 부자가 소유하고 있는 “들 이름을 맛들(馬坪)로 고치면 더욱 부귀(富貴)하리다” 라는 소문을 내어 태 부자의 귀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그는 그 소문을 믿고 들 이름을 맛들로 고쳤으나 그 뒤로 불행한 일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이것은 말이 콩을 먹었다는 뜻이어서 콩 「태(太)」자인 태(太)씨에게는 매우 해로운 이름이라고 한다.
당시 태 부자가 살았던 마을은 예천읍 우계리 어린촌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고개, 박샘(酒泉)

  • 위치 : 예천읍 서본리 지고개

예천읍 서본리 선산봉으로 난 길 지고개에는 박샘이라는 샘이 있다.
이 곳은 옛날 술이 나는 샘이라 하여 주고개(酒峴)라 하였으며 그 샘을 주천(酒泉)이라 했다. 그 전설을 살펴보면, 정성을 들이면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고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옛날 어느 추운 겨울에 이 근처에 사는 어느 가난한 집 아낙네가 남편에게 줄 술을 사서 조그마한 항아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느라 급히 고개를 올라가다가 그만 실족(失足) 하여 넘어져 항아리가 산산조각이 나고 술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에 대성통곡(大聲痛哭)하며 실컷 울다 앞을 보니 기이(奇異)하게도 조그만 구덩이에 술이 괴어 있었다. 그 술을 바가지에 담아 집으로 가 남편에게 드리고, 그 이튿날 또 술을 사러 가는데 여기를 지나다가 어제 깨어진 항아리를 치우러 그 곳을 보니 또 술이 괴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가져다가 남편에게 드렸다.
이렇게 하기를 얼마간 지나자 이 소문(所聞)이 인근 주민들에게 퍼졌다. 이 우물에서 나는 술을 한 그릇(한 잔)을 마시면 술이 되고, 두 잔을 마시면 취하고, 세 잔을 마시면 물이 된다고 하여 인근 주민들이 경계(警戒)하면서도 오래도록 애용(愛用)하였다. 어느 날, 이 고개 길을 넘나들던 한 나그네가 목이 말라 이 물을 한 그릇 퍼 마셨더니 물이 아니고 술이었는데 그 맛이 하도 좋아 다시 한 번 마셔보니 얼큰히 취했다. 그래서 욕심이 나 계속 마셨더니 샘에 있는 술이 모두 물로 변하고 말았다고 한다.
최근 시멘트로 우물가를 발라 원형(元型)이 남아 있었으나 그마저 지고개 포장공사(鋪裝工事)로 흔적도 찾을 길이 없어졌다. 전설 어린 곳도 보호되었으면 한다.

한해에 세 번씩 꽃이 피던 목면화(木棉花)

  • 위 치 : 예천읍 서본리 (선산봉)

예천읍 서본리 현산(峴山) 동쪽 기슭에 이상한 꽃나무가 있었는데 음력(陰曆) 4월에 꽃이 피기 시작하여서 한 해에 세 번이나 꽃이 피었다가 지곤 하였다. 이 꽃이 피게 되면 마치 눈송이가 달린 것처럼 꽃이 희고 고왔다고 한다. 이 꽃이 두 번째 필 때가 목화(木花)를 갈 무렵이기 때문에 이 꽃나무 이름을 목면화(木棉花)라고 하였다 하며 중국(中國) 현산(峴山)이라고 하는 곳에도 이 꽃나무가 있다고 하여 지명도 현산이라 불렀다.

누음골(妹音谷, 陵谷)

  • 위 치 : 예천읍 백전리 누음골(능골)

예천읍 백전2리 잣밭고개 북쪽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석실고분(石室古墳)이 있는 골짜기 마을인 누음골 또는 능골(陵谷)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신라로 추정)에 어떤 전란(戰亂)으로 한 가족이 뿔뿔이 헤어졌는데 난리가 끝난 뒤 서로 가족(家族)을 찾아 헤매다가 이 곳 부모재(父母峴, 범우재)에서 부모를 만나고, 형재(兄峴)에서 형을 만났다. 그러나 만나지 못한 여동생을 찾기 위해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가 이 골짜기에서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하고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에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여동생 소리가 틀림없으므로 가족들이 모두 달려가 보니 과연 여동생이 있었다. 여기서 집을 짓고 온 집안이 정착(定着)하여 단란하게 살아서 골짜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시대 초기 왕릉(王陵)이나 호족(豪族)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석실고분이 있어 능골이라고도 하며, 조선초 대학자인 별동 윤상(別洞 尹祥 : 1373~1455)의 묘도 이 곳에 있다.

명(明) 나라 장수(將帥)의 무례함을 혼내 준 대성전(大成殿)의 대들보

  • 위 치 : 예천읍 백전리 예천향교(대성전)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에 명나라 마귀(麻貴) 장수가 왜군(倭軍)을 토벌하기 위해 울산으로 가던 길에 우리 고을에 주둔하려고 하니 많은 군대를 수용할 만한 큰 건물이 없어 공자위패(孔子位牌)를 모셔 놓은 향교(鄕校)의 대성전(大成殿)으로 많은 장졸들을 데리고 들어가려 하였다.
아무리 명(明) 나라 군사가 우리나라를 도와 준다고는 하나 당시 유림(儒林)들은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공자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며, 마장군(麻將軍)에게 몇 번이고 만류하면서 다른 장소로 옮기라고 간청하였지만 무인(武人)인 마귀에게 대성전이 금기(禁忌)의 장소로 통할 까닭이 없었다. 유림들은 부득이 대성전 안에 모신 공자(孔子)의 위패(位牌)를 비롯한 모든 위패들을 정산서원(鼎山 書院)으로 옮기고 말았다.
이 때 마장군은 휘하에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위세 당당하게 앞장서서 대성전 안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앉았다. 그런데 앉자마자 갑자기 대성전의 굵고 긴 대들보가 벼락치는 소리를 내면서 뒤틀려 돌아갔다. 벼락치듯 하는 대들보의 뒤틀리는 소리에 그렇게도 거만하고 위세 당당하던 그는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단걸음에 대성전을 뛰쳐나와 달아나고 말았다. 대성전 대들보가 너무 굵고 커서 평소엔 그 안쪽을 볼 수가 없었으나, 뒤틀어지는 바람에 그 안쪽을 살펴보니 「군수 이광준(郡守李光俊)」이라고 쓴 글자 다섯 자가 보였다고 한다. 마장군이 달아난 후 대들보는 안쪽으로 되돌아가서 차츰 제자리에 놓여지게 되었으나 뒤틀어질 때 보였던 글씨는 그 후에도 희미하게 보였으며, 그 때 뒤틀려졌던 흔적이 지금도 대들보에 남아 있다.

밤나무고개 못(栗木池)

  • 위 치 : 예천읍 백전리(밤나무고개)

밤나무지는 간들고개 위쪽에 있는 밤나무고개에 위치하고 있는 저수지(貯水池)로, 이곳에 술을 많이 먹는 이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전설이 있다.
옛날 이 곳은 용문(龍門), 용산(龍山) 사람들이 예천장(醴泉場)을 오가는 길목으로, 특히 밤나무고개는 산림이 울창(鬱蒼)하고 으슥하여 혼자 넘기에는 낮에도 두려움이 앞서는 곳이었다. 장날이나 볼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술을 먹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고개를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는 벌써 밤이 깊고 으슥하여 인적(人跡)이 드물다. 이런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헛것이 보이고 이 저수지가 집으로 가는 길로 보여 물 속을 이리저리 헤매는 경우가 많았으며, 또한 달빛에 산그림자가 물에 비쳐 궁전(宮殿)이나 큰 집 같은 것이 나타나 예쁜 아가씨가 나와서 물 속으로 안내하기도 하고, 주막 같은 쉬어 갈 수 있는 곳이 나타나기도 하여 물 속을 헤매다가 깊이 들어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헛깨비가 나타나 밤나무고개에 있는 산길을 집으로 가는 길이라 유인하여 밤새도록 산속을 헤매게 하여 아침에 햇살을 받고 정신이 들면 집으로 돌아 갔다고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술에 대한 욕심과 과음(過飮)을 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당시에는 주막이나 인가(人家)가 여러 곳에 있었고 큰 길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곳에 포장(鋪裝)된 용문 통로가 생기는 바람에 모두 이주(移住)하였으며, 그 옛날 많이 다니던 길도 이제는 사람의 통행이 드물며 지금도 이 길을 낮에 혼자 걸어가면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지금의 밤나무고개 못은 농업용수(農業用水)로 사용하고 있으며, 주말(週末)이 되면 가끔 낚시꾼들이 찾아온다.

달우리고개(鷄鳴峴)

  • 위 치 : 예천읍 생천1리 (나붓들 서북쪽)

용문면 통로로 생천1리와 생천2리의 경계지점에 달우리고개가 있다. 이 고개를 달울고개, 달부리고개, 닭우리고개(鷄鳴峴), 계현(鷄峴)이라고도 부른다. 고개의 정상에는 큰 노송(老松)이 서 있으며, 주위에는 돌로 채워져 있다. 생천리와 용산리 주민들은 이 노송을 서낭당으로 모셔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전설 1) 임진왜란 때 두사충(竇士沖, 杜師聰)이 이 고개를 지나 금당실(金塘室)에 이르러 말하기를, “금계(金鷄)가 앞에 있고 옥견(玉犬)이 뒤에 있으니, 마치 명나라 양양(襄陽)의 금곡(金谷)과 같다.라고 칭찬했는데, 금계라는 곳이 닭우리고개라 한다. 전설 2) 용문면 선리(仙里)에 사는 서씨(徐氏)가 가난하여 짚신 장사를 하며, 그 아들을 가르쳐서 마침내 그 아들이 벼슬을 하여 고을 원으로 부임(赴任)하는 것을 보려고 하인에게 업혀서 예천읍 백전리 신거리에 가서 그 아들을 만나보고 어찌나 기쁘던지 정신없이 즐기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오는데, 이 고개에 이르니, 닭이 울었다고 한다. 전설 3) 조선 초기에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백방으로 도읍(都邑)을 정할 곳을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지금의 용문면 소재지가 있는 금당실 부근에 당도하게 되었다. 앞에는 내(川)가 흐르고 뒤에는 산이 가로 막혀 있어서 도읍지로 안성마춤이라 생각하고, 부하 장수에게 닭 한 마리를 주면서 이르기를, “이 닭이 금당실에 닿을 때까지 울지 않으면 도읍으로 정하겠노라.라고 했다. 그런데 그 부하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그만 닭이 울고 말았다. 그래서 도읍의 후보지에서 탈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도 용문을 ”금당(金塘) 마질 반서울“이라고 부르고 있다.(권양하)< 전설 4) 이 고개에서 옛날에 닭을 많이 키웠는데, 이 닭들이 요란하게 울 때면 용산리에 큰 횡재(橫災)가 났다. 그래서 용산리 주민들은 닭울이고개로 불러왔다고 한다.전설 5) 조선 때 어느 선비가 가사(家事)는 돌보지 않고 공부만 하여 그의 아내가 품팔이를 하여 끼니를 이어가는데, 어느 날 아내가 품팔이를 나가면서 남편에게 이르기를, “여보, 이웃집 논매기하고 오겠어요. 마당에 나락을 널어놓았는데 날씨를 보니 소나기가 퍼부을 것 같소. 만약 소나기가 올 것 같으면 치워 주세요.”라고 하였다. 아내가 나간지 몇 시간 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니, 큰 소낙비로 변하여 갔다. 선비는 공부에 열중하다가 비가 오는 것도 모르고 있어서 아내가 품팔이로 얻어 온 그 나락을 모두 물에 떠내려 보내고 말았다. 그 날 저녁에 돌아 온 아내는 빗물에 씻기어 간 나락을 보고 한숨과 더불어 화가 벌껏 났다. “아니! 여보, 당신은 공부만 하면 먹을 것이 생깁니까? 당장 저녁 끼니마져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합니까? 이렇게 살 바에야 헤어집시다. 나는 이 생활이 지긋지긋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부부는 이혼(離婚)을 하고 말았다. 그 후 선비는 계속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돌아오던 중, 이 달부리고개에서 옛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옛 아내가 이르기를, “지난번에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세요.”라고 하면서 다시 살자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쏟아진 물을 다시 물동이에 담을 수 없소.”라고 하면서 그 선비는 떠나갔다. 아내는 옷을 찢어 나무에 걸어두고 돌을 던지면서 한없이 울기만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 고개를 걸어서 넘어 가는 사람은 돌을 던지는 관습이 내려오고 있다.(최영환) 전설 6) 옛날 어느 선비가 한양을 가기 위하여 밤길을 떠났는데, 무슨 사연인 지는 모르지만, 날이 밝기 전에 이 고개를 필히 넘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선비가 고개를 넘기도 전에 닭이 울어서 선비는 어떤 한(恨)을 품고 죽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이 고개를 닭울이고개라 한다.

흑응산 장군바위의 영험

예천읍 서본리 뒷산을 흑응산(黑鷹山)이라 한다. 이 산중턱에 넓이 10여미터, 높이 4∼6미터의 넓은 바위를 일컬어 장군바위(將軍巖)라고 한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읍민(邑民)들은 이 장군바위가 매우 영검이 있다고 하여 예천읍(醴泉邑)의 수호신(守護神)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금기(禁忌)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비가 내리지 않으면 관민(官民)의 대표가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고 생돼지 머리를 위시하여 모든 제물(祭物)을 날것으로 장만하여 옛날 관복(官服)차림으로 정성들여 제사(祭祀)를 이 장군바위 앞에서 올리고 시장을 예천읍 앞에 있는 한천(漢川) 강바닥에서 보게 한다.
그리고는 시가지 요소엔 황토(黃土)를 뿌리고 여염집과 각 상점마다의 지붕과 출입문에 버드나무의 푸른 가지를 비스듬이 꽂아두면 사흘 안으로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것이다. 장군바위 밑에 묘(墓)를 쓰면 날씨가 가물고 읍내에 있는 개들이 몹시 짖어댄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장군바위 앞엔 일체 묘를 드리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수 백년 동안 예천읍민들의 불문률(不文律)처럼 되어 있다.
때로는 욕심 많고 세력(勢力) 있는 사람들이 명당(明堂)이라는 장군바위 밑에 묘를 몰래 쓰고 봉분(封墳)을 만들지 않고 평지처럼 그 위에 띠를 놓아도 개들이 짖어대고 비가 내리지 않게 되어 읍민들에게 발각되어서 묘를 파헤쳐 버리기 때문에 묘를 못쓰게 된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예천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킨 사람들이 이 바위 위에서 승리를 맹서(盟誓)하였으며, 1894년 동학 농민운동(東學 農民運動) 때 예천군수가 여기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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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8.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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