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가야리(佳野里)

  • 강당(講堂)

    개이 서쪽에 있는 마을, 강당이 있었음.

  • 넙운개이, 넘은갱이(可也 , 佳野)

    가야리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 축산 전씨(竺山 全氏)들이 금산(琴山)을 넘어 새로운 마을을 개척한 곳이므로 넘운개이 라고 하며, 이 마을은 고려 이후 전원발(全元發)의 유훈으로 새운 국파강당이 있다. 강당 마을과 함께 전씨(全氏)와 유서가 깊은 곳이다. 경북선 철도가 마을 앞을 지나고 있다.

  • 황죽촌(黃竹村) , 강당

    기계 전 인(箕溪 全 仁)(1502~1557)이 선조 전원발(全元發)의 유훈을 받들어 국파강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며 이 강당은 지금도 유림행사장으로 쓰이고 있다. 넘운개이에 정착한 전씨(全氏)들이 이 곳에 또한 마을을 이룩했으며, 전 인(全 仁)은 이 곳을 황죽촌(黃竹村)이라고 했다. 마을 중앙부에는 가야사(佳野祠)가 있다.

  • 하미동, 해미동, 화미동(化味洞)

    마을 동쪽에 고살미 산이 있고 그 아래 생긴 마을이며 넘은개이 동쪽 마을이며, 서쪽이 트여서 서풍받이로 겨울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이웃이 정답게 살아가며 뒷산의 석질이 매우 좋아서 석공예가 발달했다.

  • 장승리(長升里), 장성계(長城界)

    옛날 서울로 통하는 큰 길가에 맑은 샘물과, 기천 냇가에 늘어선 버드나무가 장성을 이루어 오가는 길손들의 좋은 쉼터가 되었으며 길가에 이정을 표시하는 큰 장성이 서 있던 옛 용궁현(龍宮縣)과 상주목(尙州牧)의 경계마을이고 넘운개이 북쪽이다. 마을앞을 경북선 철도가 지나고 있고, 조선 경종(朝鮮 景宗)말기(1724년경) 청주 한씨(淸州 韓氏), 함안 조씨(咸安 趙氏), 축산 전씨(竺山 全氏), 김해 김씨(金海 金氏)가 잇따라 이거해 와서 마을이 구성되었다.

  • 방메, 박매(朴山)

    장성계 뒷산 원시낭골에 있는 박감사(朴監司)라는 이의 묘소 부근 산천이 모두 박씨(朴氏)들 소유였으므로 마을 이름을 박씨(朴氏)들 산천이었다란 뜻으로 박매라 부른다고 한다. 넘운개이 북서쪽 마을이다.

금남리(琴南里)

  • 삼미, 살미(山尾)

    조선조 경종(景宗)때(1724년대) 김해인 김세봉(金海人 金世鳳)과 경주인 이중일(慶州人 李重一), 순종(純宗)(1910년경)때 영일 정부기(迎日 鄭父基)등 삼성이 낙동강 상류인 금천(錦川)(성화천(省火川)) 주변에 터를 잡고 그 후손이 살다가 조선 철종(朝鮮 哲宗)7년(1856년) 홍수로 마을이 떠내려가자 그 마을터 뒤로 이주하게 되면서 동리 위치가 산꼬리에 있다고 하여 산미(山尾)라 했다고 전해진다.

  • 휘넛들, 호느들, 노넛들, 훤평(喧坪)

    450여년전 울진장씨 선조 금계 장한보(蔚珍張氏 先祖 錦溪 張漢輔)가 충주에서 옮겨 와 정착한 고장이다. 마을 옆에 넓은 들이 있어서 농부들이 늘 오가면서 격양가를 부르느라고 떠들썩하던 곳이며 옛날의 성화원(省火阮) 터가 있고 또 훤평사(喧坪祠)가 있다고 하여 훤평(喧坪)이라 한다.

  • 금원(琴原, 錦元)

    금남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라 해서 금원이라 이름이 되었다 하고, 휘넛들 북서쪽 금산 아래에 있는 평원에 생긴 마을로 270여년전 안동 권씨(安東 權氏)가 개척 하였다고 하고 그 후 경주 이씨(慶州 李氏), 김해 김씨(金海 金氏), 밀양 박씨(密陽 朴氏), 함창 김씨(咸昌 金氏)등이 차례로 입주하였고 울진 장씨(張氏)들이 세덕사(世德祠)를 지어 조상들을 추모하고 있다.

  • 작은봇들

    금원 서쪽에 있는 마을로 용수보(用水洑)가 발달되어 옥토 700여 두락의 평평한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금천에 막아 놓은 보(洑)는 큰 보라 하는 반면 작은 봇들이라 한다.

  • 새동네, 신촌(新村)

    금원 마을 동쪽에 있고 들판이 있는데 무오년(戊午年)(1918년) 홍수때 기천변(箕川邊)의 작은 봇들 수재민들이 고지대로 이주하여 새로운 동리를 이룩하여 동명을 새동네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정씨(鄭氏), 김씨(金氏)들이 살고 있다.

  • 청산모링이, 천산모링이

    금천에 해마다 한 번씨 지나가는 홍수로 청산 앞에 소(沼)가 생겼다 하는데 이 청산소 뒷골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청산모링이라 불러진다. 1972년 이후 특수 지역성토 공사로 많은 자갈과 모래를 채취했으므로 하상(河床)이 낮아지고 소(沼)가 묻혔다.

  • 용두징이, 용두진(龍頭津)

    금원 서쪽 금천가에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긴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소금배가 1910년대까지도 오르내리던 나루터였다고 한다.

대은리(大隱里)

  • 대은(大隱, 대은역, 역골, 역촌)

    축산(竺山) 동쪽이 병풍처럼 둘러싼 곳에 위치하고 구읍(舊邑)(향석리(鄕石里)) 동쪽 산(축산맥(竺山脈)) 너머에 동향마을로 지금은 파평 윤씨 집성촌(坡坪 尹氏 集成村)으로 윤사석(尹師晳)이 조선 연산 폭정(朝鮮 燕山 暴政)을 피하여 청주로 옮겨 갔다가 그 아들 윤(尹) 욱이 후환이 두려워 조선(朝鮮) 12대 인종(仁宗)때 용궁 무이(龍宮 武夷)에 이거하였으나 은신처가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그의 6대손 윤인(尹仁)이 이 곳으로 다시 옮겨와 크게 숨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대은(大隱)이라 하였다 한다. 대은리(大隱里)에서 제일 큰 마을이다.

  • 실름실, 실음실(瑟音室)

    대은 서쪽에 있고 풍수설에 의하면 옥녀탄금(玉女彈琴), 즉 옥녀가 비파를 타는 것과 같이 생겼다는 형국이다. 마을 앞에 낮고 곱게 생긴 야산이 있는데. 이 산이 바로 비파모양으로 생겼으며 산 기슭 양편으로 집들이 있고, 지금은 그 산 능선에 전선이 가설되어 있어 더욱 비파 타는 지칭을 실감나게 해주고 있다. 파평 윤씨(坡平 尹氏)가 개척하고 김해 김씨(金海 金氏), 예천 임씨(醴泉 林氏)등 모두 18가구가 살고 있다.

  • 쌍수문걸(雙水門一)

    무지(舞紙) 앞들의 관개(灌漑)를 위하여 큰 돌로 수문 2개를 마련하고 쌍수문이라 하던 언저리에 생긴 마을이며, 개울이 마을 가운데를 흐르기 때문에 쌍수문걸이며 달성 서씨(達城 徐氏)가 100여년전에 개척했다고 하고 윤씨(尹氏)도 살고 있어, 모두 14가구가 있다.

  • 신당(神堂, 新塘)

    1905년경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굽이쳐 흐르는 강변에 전주 이씨(全州 李氏) 두 집이 터를 잡았고, 임씨(林氏), 김씨(金氏), 양씨(梁氏)가 점차 이거해온 후 마을이 커졌으며 신당(神堂)이 있던 자리에 마을이 생겼다 하여 신당(神堂)이라 불린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못(池)를 새로 막은 곳이라 하여 같은 발음 신당(神塘)으로 개칭하였다. 동학란때 전주 이씨(全州 李氏)가 개척하고 김해 김씨(金海 金氏), 예천 임씨(醴泉 林氏), 남원 양씨(南原 梁氏)등 17가구가 살고 있다.

  • 회룡(回龍)

    고두실 남쪽 내성천 건너 비룡산 동단(飛龍山 東端)아래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마을로 조선 철종(朝鮮 哲宗)7년(1856년) 대홍수 이후 구읍(舊邑)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마을을 개척했으며 뒷산이 비룡산(飛龍山)이고 내성천이 새을자(乙字)로 돌아 흐르는 곳이라 하여 회룡(回龍)이라 불린다 한다. 경주 김씨(慶州 金氏), 밀양 박씨(密陽 朴氏), 안동 김씨(安東 金氏), 함안 조씨(咸安 趙氏)들이 23가구가 살고 있다. 감나무가 많아서 감은 옛부터 유명하다.

  • 고두실(高頭谷), 동림(東林)

    신당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1856년큰 홍수로 “상대” 라는 마을이 폐동(廢洞)되고 이 곳 동림일대의 높은 지대의 계곡으로 이주하여 동쪽의 숲이 있는곳 또는 높은 곳이라 고두곡(高頭谷) 즉 고두실, 또 동림(東林)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주 이씨(全州 李氏) 10가구, 공주 이씨(公州 李氏) 1가구가 살고 있다.

  • 의성개, 의성포(義城浦)

    회룡서남(回龍西南)쪽 내성천이 굽어도는 용궁면(龍宮面)의 최남단(最南端)에 섬처럼 형성된 마을로 물이 굽이굽이 돌아간다는 회룡(回龍)과 인접한 곳으로 기묘하게 이루어진 지형이 의로운 자연환경을 이루었다하여 의자(義字)와 내성천(乃城川)이란 성자를 따서 의성(義城)이라하고 삼면이 강변이니 개(浦)가 끼어 있다하여 포자(浦字)를 합하여 의성포(義城浦)라 명하였다고 유래된다. 경주 김씨(慶州 金氏)가 11가구 살고 있으며 6?25전쟁시 피난지(避亂地)로 유명하며 마을 앞으로 펼쳐진 백사장은 너무나 깨끗하여 누구나 쉬어가고 싶은 자연환경이다.

덕계리(德溪里)

  • 덕봉(德峰)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 피난(紅巾賊 避亂)길에 마을 뒷산 소나무에 옷을 걸고 쉬어 가다고 왕의산(王衣山)(338.6m)이라 부르는 산 밑에 성주 도씨(星州 都氏)의 세거지(世居地)로 마을 앞 남단에는 도명천(都命天), 도명찬(都命燦) 형제의 효행을 기리는 쌍효각(雙孝閣)이 있어 마을 이름을 덕봉(德峰)이라 부른다.

  • 평장골(坪章), 평창(坪倉)

    옛날부터 평화롭고 인심이 후덕하여 마을 앞에 넓은 들이 있어 농사짓고 살기 좋은 곳이다. 공민왕이 홍건적 피난중 이 곳에 평창(坪倉)을 두었다고 하는데 마을 이름도 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 달계(達溪)

    평장골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에는 반씨(潘氏)가 살던 마을이라고 하며 거제 반씨(巨濟 潘氏)들이 살던 유적인 충효각(忠孝閣)과 관물당(觀物堂)이 남아 있고 약포 정 탁(藥圃 鄭 琢)의 처가인 반씨(潘氏)가 번성하게 살았는데 뒤에 거의 떠났고 안동김씨(安東金氏)가 산다.

  • 복거리, 보거리, 복계(洑溪, 福溪)

    덕봉(德峰) 남쪽에 있는 마을로 덕과 복은 같이 따라 다니는 것이라 하여 복거리라고 했다고 한다. 또 이 마을 남쪽 평창들에 관개(灌漑)하던 보가 있었으므로 보계(洑溪)라고 부른다고 한다. 도씨(都氏)가 산다.

무이리(武夷里)

  • 무레실, 무리실, 무이(茂李室, 武夷)

    현재 인근면에 산재하고 있는 남포 백씨(藍浦 白氏) 낙향선조(落鄕先祖)인 백홍정(白弘正)이, 백형 이정(伯兄 ?正)이 고려 충선왕 복위사건(高麗 忠宣王 復位事件)에 연루되자 그 화를 면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피신정착(避身定着)하여 개척한 곳이라 하며 백홍정(白弘正)이 고향의 그리운 정에서 현 충청남도 보령군 남포(忠淸南道 保寧郡 藍捕)에 무이산명(珷夷山名)을 따서 무이실(武夷室)이라 이름한데서 기인한다고 하며 기후 백씨(白氏)가 대대로 세거하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후 역시 선조(宣祖)때 이 곳으로 옮겨온 여주인 창(驪州人 滄)암 이윤수(李潤壽)라는 이가 마을에 오얏나무가 무성함으로 성씨를 맞추어 마을이름을 무이(茂李)라고도 부르며 내성천(乃城川), 금천(錦川), 기천(箕川)이 3면을 둘러서 흐르므로 무레실로도 부른다고 하며 무이실(茂李室)을 주려서 무촌(茂村)이라고도 한다. 내무(內武)마을(안마), 외무(外武)마을(밭마)이 있는데 동쪽마을이 내무(內武), 즉 안마고 서쪽이 외무(外武), 즉 밭마라고 한다.

  • 갯마, 포촌(浦村)

    안마 동쪽 갯가에 있는 양지바른 마을이다. 갯들이 광활해서 채소를 많이 가꾸며 가을철에 마장(김장 무, 배추를 파는 갯가의 장)때면 원근에서 소를 몰고와서 소등에 무, 배추를 싣고 가는 풍경이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며 근간은 추럭과 경운기 등으로 운반한다고 하며 갯밭, 동남쪽으로 바로 내성천(乃城川)이 흐르며, 6가구가 사는 적은 마을이다.

  • 누문골, 누문동(樓門洞)

    안마 동쪽 작은 등성이 넘어 구읍(舊邑)(鄕石(향석)1리)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서 누문(樓門)이 있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누문동(樓門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6호가 사는 적은 마을이다.

  • 소천마, 소천(蘇川)

    원(元)나라의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귀국할 때, 고려(高麗)가 바치던 많은 조공(朝貢)을 국력에 알맞게 줄이게 하였고 뒤에는 또 명(明) 나라에 대한 조공도 줄이게 하는데 공헌하였다는 국파 전원발(菊坡 全元發)이 살았던 고장으로 마을앞 성화천(省火川)(금금천(今錦川))을 국명에 의해 소천(蘇川)이라고 고쳐 부르고 1702년 2월 후손들이 소천서원(蘇川書院)을 세워 전원발(全元發)을 봉향(奉享)하면서 마을 이름도 소천(蘇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금도 마을 서남단 금천변(錦川邊)에 전원발(全元發)이 산수를 즐겼다는 정자가 있고 암석에는 청원정(淸遠亭)이라 전서(篆書)의 각자(刻字)가 있는데 당시의 명필 김구용(金九容)의 글씨라 전한다.

무지리(舞紙里)

  • 쥣골, 조우골, 지동(紙洞)

    조선 중엽 한산 이씨(朝鮮 中葉 韓山 李氏)가 개척한 무동(舞洞) 남동쪽 마을이며 이곳은 닥나무(楮)가 많아서 옛날부터 한지를 만드는 지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닥나무 껍질만 생산하고 윤(尹), 김(金), 박(朴) 3성이 살고 있는 무지리(舞紙里)의 으뜸되는 마을이다.

  • 무동(舞洞)

    지동(紙洞) 서쪽 1㎞ 지점에 있는 마을인데, 풍수설에 이 마을은 옥녀 탄금형(玉女 彈琴刑)의 뒷산 앞에서 어린이가 춤을 추는 형상이라는 무동형(舞童形)의 마을이라 한데서 마을 이름을 무동(舞洞)으로 하였다 한다.

산택리(山澤里)

  • 산못, 산택(山澤)

    마을 뒤를 구릉성(丘陵性) 산지로 둘러싸고 마을 남단에서 우뚝 솟은 고종산(鼓鍾山)이 옥야십리 용궁평야(沃野十里 龍宮平野)를 내려다보고 마을 앞에 자생수(自生水)를 뿜으며 자생연(自生蓮)이 피는 연못이 있어 산택(山澤)이라 부른다고 한다. 총 300여년전에 영양 김씨(英陽 金氏), 울진 장씨(蔚珍 張氏)가 개척하였다 함.

  • 호미(虎尾), 화미(花美, 化味)

    고종산(鼓鍾山)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이 마치 표호하는 호랑이와 같고 그 호랑이 꼬리 부분에 취락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호미(虎尾) 또는 음화(音化) 되어 화미로 부르기도 한다고 함. 200여년전 울진 장씨(蔚珍 張氏), 영양 김씨(英陽 金氏)가 이곳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이따라 경주 이씨(慶州 李氏), 한산 이씨(韓山 李氏)가 이주하여 살고 있다.

  • 치내, 치냇걸, 기천(箕川)

    마을 앞에 치내, 기천(箕川)이 흐르고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치내라 하였다 하며 호미(虎尾)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산택리(山澤里) 남서단이 되고 치내를 경계로 동쪽이 산택리(山澤里)에 속하는 자연부락이고, 서쪽 마을은 읍부리(邑部里)이다. 장씨(張氏), 윤씨(尹氏), 임씨(林氏)등이 살고 있다.

  • 원당(元塘 또는 隱塘)

    치내걸 남동쪽에 있고 산택리(山澤里)의 최남단이 되며 이조(李朝)때 나그네의 편의를 돕기 위한 원터가 있던 곳이며 마을 앞에 둥근 못이 있고 그 뒤에 성황당이 있다. 김길보(金吉寶), 김길남(金吉南) 두 형제가 충주 신우실에서 약 350년전에 이 곳으로 옮겨와 마을을 개척 하였다. 영월 엄씨(寧越 嚴氏), 야성 송씨(冶城 宋氏), 밀양 박씨(密陽 朴氏), 안동 권씨(安東 權氏), 경주 이씨(慶州 李氏), 백씨(白氏)등이 살고 있다.

  • 덩암마, 등암(?岩)

    말등자처럼 생긴 큰 등자바위 앞에 있는 마을이므로 덩암마라고 하며 산택못 북동쪽에 있다. 일제(日帝) 초 신작로를 닦을 때 이 바위는 부서졌으나 마을 이름은 예대로 등암이다. 장씨(張氏), 김씨(金氏) 두 성이 산다.

송암리(松岩里)

  • 용바우, 용암(龍岩)

    분토골 남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뒷산인 옥녀봉(玉女峯) 꼭대기에 약물샘이 있었는데 그샘에 하늘에서 용이 자주 내려와 목욕을 하고 올라갔다고 하며 그 용이 늙어서 죽으니 이 샘의 약물도 말라 버리고 그 옥녀봉(玉女峯) 밑에 큰 바위가 용머리같이 생긴 것이 솟아나서 마을 이름을 용암(龍岩)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지금도 그 산마루를 약물탕 꼭대기라고 부른다. 임난(壬亂) 직후 청주인 한 호(淸州人 韓 頀)가 개척하였다.

  • 법고개, 법현(法峴)

    경암 남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고개가 법고개인데 그 밑에 있는 마을이며 지금은 장씨(張氏)들이 정자를 지어 놓았다. 약 400여년 전에 인동 장씨(仁同 張氏)가 개척하였다 함.

  • 이암, 인암(印岩)

    법고개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산사태에 의하여 둘레 1m가량의 돌 하나가 드러났는데 둥굴고 기둥같이 생겨서 도장(인장)과 같다 하여 인암(印岩)이라고 불렀는데 이 바위가 있는곳에 터를 잡은 마을이라 하여 인암(印岩)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법고개 개척과 같은 무렵 약 400여년 전에 인동 장씨(仁同 張氏)가 개척하였다 함.

  • 경바우, 경암(景岩)

    약 500여년 전 청도에 살던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인 김해 김씨(金海 金氏)가 이 곳에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을 때 뒷산 송림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큰 바위가 아침 햇살에 광채를 발산하므로 마을 이름을 경암 또는 경바위라고 불렀다 함.

  • 분톳골, 분토(粉土)

    경암 남서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이 마을은 근처의 흙이 분처럼 곱고 흰 가루 흙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지형이 단지 모양을 하고 있어 분톳골이라 불려지고 있고, 영월 엄씨(寧越 嚴氏)만이 10여호가 산다.

월오리(月梧里)

  • 다래이, 달오이, 월내, 달안(達安), 월오(月梧)

    약 500여 년 전 이 마을 개척한 후 마을의 모양이 반월형(半月型)이고 마을 주위에 오동나무가 많이 있어 월오(月梧)라고 불렀으며 또 순흥 안씨(順興 安氏)가 정착하여 산다고 달안(達安)이라고도 한다. 아랫마을은 순흥 안씨(順興 安氏)가 윗마을에는 중화 양씨(中和 楊氏)와 울진 임씨(蔚珍 林氏)가 산다.

  • 장평(章坪, 長坪, 長平), 장야평(長野坪)

    글(章)을 잘 하는 선비가 많이 산다고 장평(章坪)으로 불렀으나, 지금의 장평국민학교가 설립되면서 오래도록 편안함을 기원하는 뜻에서 장평(長平)으로 부른다. 17세기에 약포 정탁(藥圃 鄭琢)의 아들 청풍자 정윤복(淸風子 鄭允複)은 앞들이 농사짓기에 편하고 넓은 들이므로 장야평(長野坪)이라고 이름하고 들을 개척하고 보(洑)를 내었다고 축산승람(竺山勝覽)에 기록하고 있다.

  • 절골, 사곡(寺谷)

    고려 시대에 창건된 사찰이 있었다고 절골이라고 한다는 골짜기인데 다래이 앞에 터잡은 마을이다. 근처에 감나무가 많아서 곶감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 가래미, 나산(蘿山)

    가래산 밑에 있고 마을 뒷산에 담쟁이가 많아서 가나산(佳蘿山)이며 여기서 지명을 따 나산으로 불렀다 하며 이문흥(李文興)이라는 이가 마을을 처음 개척하였다고 한다.

  • 안터

    가래미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뒷산 모양이 마치 소쿠리와 같이 생겼고 그 안에 마을이 생겼으므로 안터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마을 사람들은 지세 때문에 의식이 넉넉하다고 하며 안씨(安氏)와 이씨(李氏)가 산다.

  • 벼락고개, 별락(別樂)

    월오(月梧)마을 앞에 벼락고개가 있고 옛날에는 그 고개 너머 마을이라 하여 별락(別樂)이라고도 썼다. 또 동네 앞 고개에 벼락이 떨어져서 산맥이 끊어지고 그 자리로 길이 났다고 하여 벼락고개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 등자바위

    월오(月梧) 동편 도로변 개포면 장송리(開浦面 長松里)와 등을 사이에 두고 남향으로 형성된 마을로 등자와 같은 바위가 있어서 이름이 되었고 경주 이씨(慶州 李氏), 김해 김씨(金海 金氏), 안동 권씨(安東 權氏), 밀양 우씨(密陽 禹氏)등 8호가 산다.

읍부리(邑部里)

  • 용궁면(龍宮面) 행정의 중심지이다. 향석(鄕石)에 있던 용궁현청(龍宮縣廳)이 1856년 내성천(乃城川)의 홍수로 유실되고, 1857년 이 곳으로 옮겨 온 뒤로 가야(佳野)라고 부르던 이 곳은 신읍면(新邑面)이 되고 1914년 이후 읍부리(邑部里)로 되었으며, 현재의 용궁면(龍宮面) 사무소 자리인 읍부리(邑部里) 278번지는 현청(縣廳)터이다. 마을이 커져서 방위에 따라 동, 서, 남, 북부로 나누기도 한다.
  • 치냇걸, 기천(箕川)

    지형이 호랑이 꼬리처럼 생겼다는 호미(虎尾) 남서쪽의 치내걸 양 옆에 생긴 마을이므로 채냇걸 이라고 부르며 동쪽 마을은 산택(山澤)에 서쪽 마을은 읍부리(邑部里)에 속해 있고, 치냇걸은 이 지방의 젖줄 구실을 하는 하천이다.

  • 버들쑤, 유수(柳藪)

    읍부(邑部)의 남쪽 기천(箕川)강변에는 지대가 낮아 습지대이므로 이 곳에 버드나무가 무성하여 숲을 이루었는데 그 버들 숲 사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버들수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 새마, 신동(新洞), 북부(北部)

    현청(縣廳)이 향석리 구읍(鄕石里 舊邑)에서 포금산(抱琴山) 밑의 가야리(佳野里) 곧 지금의 읍부리(邑部里)로 옮겨져서 신읍(新邑)이 형성될 때 새로 생긴 마을이므로 새마라고 부르며 읍부리(邑部里) 북쪽에 위치하므로 북부(北部)라기도 하는 마을이다.

  • 복호(伏虎)

    읍부리(邑部里) 서쪽 논 가운데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이다. 산양다리 건너편 산이 호랑이 머리의 형상이며 그 산줄기의 호랑이 배부분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므로 복호(伏虎)라고 하였다고 한다.

향석리(鄕石里)

  • 구읍(舊邑), 향사리(鄕舍里), 안마

    1413년부터 1856년 이전까지 약 440여년간 용궁현청(龍宮縣廳)이었던 마을이다. 1856년 6월 영남지방의 대홍수로 낙동강(낙동강(洛東江), 내성천(乃城川), 금천(錦川) 3강수가 합수되는 풍양면(豊壤面) 삼강리(三江里)가 여기서 남쪽 2㎞ 밖에 되지 않음) 내성천(乃城川)이 범람하여 현청(縣廳)이 유실되어 이듬해 읍부리(邑部里)로 이전했다. 뒷산의 높이 158m의 축산(竺山)이므로 신라때는 용궁군(龍宮郡)을 축산(竺山)이라고 했다. 안동 권씨(安東 權氏) 세거지이며 함양 박씨(咸陽 朴氏), 영일 정씨(迎日 鄭氏), 김해 김씨(金海 金氏)들이 주로 산다.

  • 지잣걸, 시항(市巷)

    고을이 읍부리(邑部里)로 옮겨 가기 전의 장터거리였으며 마을 앞 내성천(乃城川)가에 있으므로 이 지방의 산물인 쌀을 소금배에 싣고 온 물화들과 교역을 하던 곳이다. 경주 최씨(慶州 崔氏)가 살며 60여년 전부터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박씨(朴氏)와 탁씨(卓氏)도 몇집 산다.

  • 돌 우물, 석정(石井)

    마을 복판에 옛 용궁현감(龍宮縣監)이 식수로 쓰던 물이 암석 사이에서 용솟음 치는 샘이 있는 마을이다. 뒷날 용궁현감(龍宮縣監)은 읍부리(邑部里)로 고을을 옮겨 간 후에도 물맛이 좋아 여름철만 되면 석정(石井)의 물을 가져다 썼다고 전해지고 있다. 주로 파평 윤씨(坡平 尹氏)가 살고 있다.

  • 생교골, 향교(鄕校), 교촌(校村)

    구읍(舊邑) 서쪽 지금의 향석리(鄕石里) 299번지 용궁향교(龍宮鄕校)가 있는 곳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향교골이라 한 것이 변음되어 생곳골이라고 불린다. 경주 이씨(慶州 李氏)가 가장 오래전에 왔고 김씨(金氏), 박씨(朴氏), 윤씨(尹氏)등 명성촌이다.

  • 샛마

    생곳골과 구읍 사이에 있으므로 마을의 위치를 마을 이름으로 삼았으며 언래 현청(縣廳)과 향교의 사무를 연락하던 전씨(全氏)가 생활의 편의를 위해 여기 집을 짓고 살면서부터 마을이 이루어졌다. 전씨(全氏)가 먼저 살고 이씨(李氏), 박씨(朴氏), 허씨(許氏)등이 살고 있다.

  • 성밑, 성저(城底)

    구읍(舊邑) 남서쪽에 내성천(乃城川) 건너 높이 189m의 비룡산(飛龍山)에 둘레 871척, 높이 7척의 산봉 안에 군창(軍倉)터와 우물 3개가 현존하는 토석으로 쌓은 원산성(圓山城) 아랫 마을로 예천 임씨(醴泉 林氏)가 개척한 마을이라 한다. 마한(馬韓)의 마지막 남은 산성으로 온조왕(溫祚王) 7년에 백제국(百濟國)에 망했다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경주 이씨(慶州 李氏)가 주가 되고 한산 이씨(韓山 李氏), 파평 윤씨(坡平 尹氏), 영월 신씨(寧越 辛氏)등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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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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