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설화

유천면(柳川面)

신라때에는 고림리 부근에 당동현(堂洞縣)이 있었다고 하며 그후 고림부곡(高林部曲)으로 조선초까지 예천군에 영속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버드내가 있으므로 유등천면(柳等川面)이라 하여, 가리(街里), 화지(花枝), 고산(孤山), 광전(廣田), 손곡(蓀谷), 후평(後坪), 성주(星州), 장기(場基), 손동(蓀洞)의 9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당동면(堂洞面)의 고림(高林), 율현(栗峴), 매산(梅山), 퇴치(退治), 송내(松內), 지곡(池谷), 망정(望亭), 연화(蓮花), 한천(寒泉), 용암(龍岩), 초적(草笛)의 11개 동리와 지서아면(只西牙面-只西, 岐西里)의 마천(麻川), 사곡(沙谷), 송전(松田), 청송(靑松), 죽안(竹岸), 중평(中坪), 화전(花田)의 7개 동리와 개포면의 금동, 문경시 화장면의 흑송리를 병합(倂合)하여 유등천면의 이름을 따서 유천면(柳川面)이라 하였다. 가동, 고산, 고림, 광전, 마천, 매산, 사곡, 성평, 손기, 송지, 수심, 연천, 용암, 율현, 죽안, 중평, 초적, 화지, 화전의 20개리로 개편 관할하고 있으며, 동쪽은 예천읍과 용문면, 남쪽은 개포면, 서쪽은 개포면과 문경시 산북면, 북쪽은 용문면과 문경시 동로면에 닿고 있다.
관광자원으로는 죽안저수지와 양난단지가 있으며, 특산물은 풋고추, 마늘, 수박, 참우 등이 있다.

조선 초(朝鮮初) 예천백(醴泉佰)이 된 명재상(名宰相) 권중화(權仲和)

  • 위 치 : 유천면 성평리 덕달

권중화(權仲和, 1322~1408)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학자, 문신, 자는 용부(容夫), 호는 동고(東皐), 시호는 문절(文節), 본관은 안동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한공(漢功)의 아들로 조선 태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여 대언(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고, 1390년(공양왕 2)에 이초의 옥(彛初의 獄, 尹彛와 李初가 반란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 나와 다시 문하찬성사,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 등을 역임했다. 조선 개국(開國, 1392) 후 판문하부사(判問下府使)에 올랐고, 1394년(태조 3) 2월 동국역대제현비록촬요(東國歷代諸賢秘錄撮要)를 편찬했다. 1396년(태조 5) 명(明)나라가 조선(朝鮮)에서 세공(歲貢)을 적게 바친다고 트집을 잡아 문책해 왔으므로 이에 당황한 조정은 그로 하여금 사은사(謝恩使)로 보냈다. 이에 명나라에 간 그는 우리가 바친 세공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고 정성을 다한 것이므로 더는 바칠 수 없다고 조리 정연하게 진술하여 명나라 황제 태조로 하여금 감복케 하였다. 나라를 걱정하는 진정한 사신이란 칭찬과 함께 세공을 더 줄 수 없다는 확약을 받고 돌아 왔으니, 백성들로 하여금 세금에 허덕여 도탄(塗炭)에 빠지지 않고, 민심을 바로 잡는 한편, 국가 재정(財政)이 파탄에 이르지 않도록 난국을 타개하여 조선 건국 초에 기틀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하겠다.
그 후 1407년(태종 7)에 영의정이 되고 이어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다. 그의 공적은 나라를 빛낸 공이 클 뿐만 아니라 6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고장의 큰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근검(勤儉), 청렴(淸廉)하고 사물의 판단에 조리가 분명하여 만 백성들로부터 추앙(推仰)을 받았으며,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고 초연했다. 또 의학, 지리, 복서(卜筮)에도 통달했으며, 글씨에도 능하여 전서(篆書) 팔품체(八品體)를 잘 썼다. 지금도 창암사 나옹화상비(양주), 광통보제사비의 전액(개성)에 그의 작품이 남아있다.
그의 고향 덕달(德達)의 유래는 고려와 조선을 통해 가문과 마을을 번창하게 하였다하여 일컫게 되었다.(고려사, 태조,태종실록, 국조인물고, 조선불교통사, 예천군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오우가』(五友歌)의 유래(由來)

  • 위 치 : 유천면 고산리 오미동(五美洞)

옛부터 경상북도 북부지방 즉, 소백산맥(小白山脈) 아래 영주, 봉화, 예천, 문경, 상주 지방은 조선 중엽이래 유학(儒學)의 본거지인 동시에 남인(南人)들의 본거지였던 터라 남인계(南人系) 사림(士林) 거유(巨儒)들의 은거(隱居) 또는 내왕(來往)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들 남인계의 거유 사림들의 내왕 흔적들 중 참으로 기이하고도 신기한 일은 이 곳 유천(柳川)의 「고산리 오미동(孤山里 五美洞)」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불후의 명시조(名詩調)인 “오우가”(五友歌) 중

“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의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삿밧긔 또 더하야 머엇하리 “
의 작사 현장이라고 하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조선 중엽 1587년(선조 20) 서울에서 예빈시 부정(副正)을 지낸 해남(海南) 윤씨(尹氏) 유심(惟深)의 아들로 태어나 종가댁(宗家宅)과 숙부(叔父) 유기(惟幾)의 양자(養子)가 된 후 1671년(현종 12) 85세의 생애(生涯)를 마쳤다. 그의 나이 26세에 진사(進士) 초시(初試)의 수석합격을 시발로 승보시, 별시 문과 초시, 중광 문과 등에서 그 때마다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여 대군(大君)들의 사부, 공조 좌랑, 형조 정랑, 동부승지 등의 관직(官職)을 지냈으나, 그는 남인계로서 치열한 당파(黨派)싸움에 휘말려 세 차례나 다섯 곳에 걸친 20여 년 간의 유배생활(流配生活)과 19년 간의 은거생활(隱居生活)을 하면서 무려 75수(首)에 달하는 단가(短歌)와 시조(時調)를 창작(創作)하였는데, 그 중 그의 나이 53세(歲)쯤 유배지 명덕에서 풀려나 56세 때 해남(海南) 김소동(金消洞)에서 지었다는 『오우가』의 작사 현장이 바로 이 곳 유천 「고산리 오미동(孤山里 五美洞)」 일대의 자연경관을 보고 지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심증을 보면,
첫째, 고산(孤山)이라는 아호 또한 이곳의 지명「고산(孤山)」과 일치한다.
그의 나이 26세 때 진사 초시에서 이미, “눈속을 무릅쓰고 고산을 찾다(冒雲訪孤山)”이라는 시제로 장원하였던 바 그의 유배지와 은거지 및 모든 작품으로 미루어 볼 때 아호 「고산」과 그가 일생동안 이상향(理想鄕)으로 그려 온 이 곳과 사이에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가 있는 듯 하다.
둘째, 이 시조 「오우가(五友歌)」의 제목과 내용이 이 곳 오미동(五美洞)에 옛부터 전해 내려오던 “류화춘무 계수구류 소미추월 중산운송 만산환병” (柳花春霧 溪水拘流 小尾秋月 中山雲松 巒山環屛)이라는 작자 미상(尹善道 일 수 있음)의 오우가(五美歌)의 제목 및 그 내용이 지극히 유사한 점이다. 다시 부연하면 「오우가」는 위에 소개한 바와 같이 작자의 주변환경, 즉 대자연의 산천(山川)과 초목(草木)들 중 물(水)과 돌(石), 소나무(松), 대나무(竹), 및 달(月) 등, “오우가”의 물(水)와 돌(石)은 오우가의 「계수」(溪水)와 벽산의 바윗돌이고, “오우가”의 소나무는 「오미가」(五美歌)의 운송(雲松)이며, 오우가의 달(月)은 오미가(五美歌)의 가을달(秋月)이라고 한다.
셋째, 유천의 「고산리 오미동(孤山里 五美洞)」과 그 주변에는 특히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송전(松田), 초적(草笛), 송곡(松谷)의 소나무와 대나무를 비롯하여 북쪽의 꽃재, 회압재에서 발원하여 동남방으로 흐르는 유등천(柳等川) 주변(周邊)에는 오우가의 다섯 벗이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고 한다.
또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은거생활로 지금의 경상북도 북부지방을 찾아다니던 중 낙동강(洛東江) 어느 지점(내성천과 한천이 만나는 서울 나들이 부근이라고 추정 됨-예천군 개포면 경진리 부근)에서 강물을 찍어 맛을 보고 그 상류지역에 천하의 명당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감지하고, 그 물줄기를 따라 이 곳 오미동까지 도달해 보니 지금 이 곳 고산(孤山), 화지 두 동네에 약 200여 호나 집거하고 있는 파평(坡平) 윤씨 중시조(中始祖)인 윤문(尹汶)의 유허비(遺虛碑)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가 명당(明堂)임에는 틀림 없으나, 그 자리에 이미 정체 미상(未詳)의 사당이 한 채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되돌아갔다는,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說話)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옛날의 오미동이 지금은 많이 변화됨에 따라 사진으로 그 아름다움을 담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자료는 고산 윤선도 선생의 종손(宗孫)인 해남의 윤형식(尹亨植), 고산의 후손으로서 정통(正統) 고산 연구가인 윤승현(尹承鉉)이 응해 주었다.

선돌(골매기 장군석)

  • 위 치 : 유천면 초적리 입구

선돌은 부족국가시대(部族國家時代) 마을의 경계(境界)로 세운 것이다.
초적리(草笛里) 마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잡귀(雜鬼)를 추방하기 위해 마을 입구(入口)에 서 있는 7척(尺) 정도의 이 자연석을 마을의 수호신(守護神) 으로 모셔 놓고 동신제(洞神祭)를 지내고 있다. 이 마을 지형이 “소가 누워 있는 형(臥牛形)”이므로 이 돌이 골단(束草)에 해당되기도 하고, 소를 매는 말뚝이라고도 한다.
해마다 음력 정월이면 동네 주민들 중 부정(不淨)없는 세 사람을 선출하여 보름날까지 3일 간 몸가짐을 정결(貞潔)하게 하고 당일 목욕재계(沐浴齋戒) 하여 산신(山神), 목신(木神), 석신(石神)에게 마을 대표자 자격(資格)으로 마을의 번영(繁榮)과 안녕(安寧)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삼신당(三神堂)

  • 위 치 : 예천군 유천면 고림리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인 1795년 경에 셋 할머니 탱화(幀畵)를 모시기 위해 삼신당(三神堂)을 지었으나, 약 150년 전 화재(火災)로 인해 소실되어 1938년에 새로이 개축(改築)하였다고 한다.
국사봉 숫(雄)서낭과 삼신당의 암(雌)서낭 사이를 방울이 내왕(來往)하면서 찾아와 기도하는 이들의 소원(所願)을 들어 주었으며, 특히 삼신(三神)께 점지(點指) 받아 자식 갖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곳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서 지나 가지를 못하고 혼례(婚禮)길 가마채도 가마에서 내려 팽나무고개를 걸어서 지나가야 되었다고 하며, 또한 동네의 번영과 안녕(安寧)을 지켜준다는 믿음이 강하여 군(軍) 입대(入隊)하러 가는 동네 청년들도 이 곳에 찾아와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게 해달라는 인사를 하고 떠나며 제대(除隊)를 하고 온 후에도 삼신(三神)님의 음덕(陰德)으로 무사히 다녀옴을 인사드린다고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객지(客地)에서 생활(生活)하는 고향(故鄕) 사람들도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고향이 그리울 때는 삼신당을 향해 재배(再拜)한다. 삼신당이 있는 이 곳을 팽나무고개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삼신당(三神堂) 밑에 팽나무가 서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국시(國始)에 얽힌 전설(傳說)

  • 위 치 : 유천면 사곡리 뒷산

사곡(沙谷里) 뒷산 국사봉(國師峯) 마루턱 소나무에 “국시(國始)태”라는 열매가 달렸는데 이상하게도 이 열매는 사람의 물음에 말 대답을 하여 인간소원을 풀어주어 동네에서는 영신(靈神)으로 믿어 사당을 짓고 국시(國始)로 모셨다 한다.
매년 정월(正月) 초(初) 닷세 날, 동네에서 가장 정결한 가정을 택하여 모셔놓고 국시(國始) 형체(形體)에다 오색(五色) 현란한 종이와 새털 등으로 장식시켜 국시에게 소리로 문답을 하였다. ‘국시 서낭님! 새해에는 풍년(豊年)이 들겠습니까?’ 라고 물을 때 풍년이 들면, “윙-달달-” 하는 소리가 나고, 풍년이 들지 않으면 아무리 절을 하고 묻고 달래도 소리를 내지 아니 하였다 하여 동네에서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묻기도 하고 개개인의 가정에 길운(吉運) 등을 모두 묻는 토정선생(土亭先生) 역할을 하였다 한다. 이렇게 동네 주민들이 극진히 모시고 믿는 가운데, 언제인가 마을의 「최동락」이란 사람이 아들이 없어 국시서낭께 백일기도(百日祈禱)하여 아들을 얻어 이 기쁜 마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새로이 서낭집을 짓고 국시를 집안으로 모셨는데 비운(悲運)이 들어 아들이 죽게 되자 믿어도 소용이 없다 하여 국시를 천대(賤待)하자 국시(國始)는 윙하고 슬피 울며 충청도 월악산(月岳山)으로 날아갔다고 전해오고 있다.
지금은 국시사당(國始祠堂)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고, 그 터가 어디인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효열각(孝烈閣)

  • 위 치 : 유천면 성평리 451

성평리(星坪里)는 경주(慶州) 이씨(李氏) 집성촌(集姓村)이다.
경주(慶州) 이씨 이은(李隱)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그 중 셋째 아들이 이장서(李章瑞)이며 셋째 며느리는 경주(慶州) 최씨(崔氏)이다.
셋째 며느리는 21세에 남편을 잃고 외아들을 기르면서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셨는데, 시아버지께서 중병(重病)으로 수 삼년을 눕게 되자 매일 병간호를 하면서 영험이 있는 약을 구해달라고 지성(至誠)으로 하늘에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서들과 앞개울에 빨래를 하러 갔다가 두 동서가 먼저 집에 들어가고 효성이 지극한 셋째 며느리만 남아서 빨래를 계속하던 중 갑자기 2척(尺)이 넘는 잉어가 치마폭 안으로 올라오기에 잡아서 병(病)으로 누워 계신 시아버지를 봉양(奉養)하였고,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복숭아가 먹고 싶다는 시아버지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다래끼를 메고 산으로 가던 중 덕고개에서 복숭아를 얻었으니, 효성(孝誠)이 지극한 며느리를 위해 산신령(山神靈)이 내린 복숭아라 했다.
또한 엄동설한에 난데없이 뱀 두 마리와 거북 한 마리가 나타나 이것을 시아버님께 드렸는데 병이 완쾌(完快)되기도 하였다.
그 후 시아버님이 운명(殞命)하게 된 저녁에 셋째 며느리에게,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다하고 간다”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한다.
1884년(광무 3) 성균 진사 이씨가 이를 임금께 고하여 어명으로 마을 입구에 효열각(孝烈閣)을 세우게 하여 정려(旌閭)됐으며, 지금도 그 단청(丹靑)이 선명하다.

효자 정문(孝子旌門)

  • 위 치 : 예천군 유천면 매산리 316-1

매괴당(梅槐堂) 박제정(朴齊政, 1827~1890)은 자는 화여(華汝)이며, 조선 순조,고종 때 효자이다.
어릴 때부터 효행(孝行)이 지극하고 대장부로서 예의범절(禮儀凡節)에 어긋남이 없었으나 그의 나이 9세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6세 때 어머니께서 병환으로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을 때 주야(晝夜)로 시탕(侍湯)하고 대변(大便)을 맛보아 병의 차도를 알아보고 목욕재계(沐浴齋戒)하여 하늘에 빌어 자신이 대신 죽기를 원하였다. 병이 위독함에 단지(斷肢)하여 피를 어머니의 입으로 통하게 하여 생명을 구했으나 병세가 다시 악화되자 손가락 모두를 잘라 수혈케 하여 7년을 더 살도록 하셨다. 유림(儒林)과 군청(郡廳)에서는 그의 지극한 효행을 기특하게 여겨 자주 쌀과 고기를 주고 칭찬하므로 “내 무엇이 달라서 이런 일을 하는 가요, 이것이 나의 불효(不孝)를 더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고 간곡히 만류하였다.
후에 어머니가 천수(天壽)를 다함에 이십리 밖 묘소에 3년 간 매일 참배 (參拜)하여 통곡(痛哭)하며 그 슬픔을 다하였다.
그의 이러한 효(孝)를 행한 사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조정(朝廷)에서 알게 되어 당시 김건영 군수(郡守)가 어명(御命)에 의하여 1893년 정려문(旌閭門-홍문)을 세웠으며, 과거(科擧)에 급제하지 않았지만 사후(死後) 특별한 우대로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의 증직(贈職)이 내려졌다.
1977년과 1993년에 각각 군비(郡費)로 이 비를 다시 중수하여 마을 앞에 우뚝 서 있으니 효도가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고 있다.
지금 이 비는 그 후손인 박인우(朴仁雨) 씨가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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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8.10.17

곤충도시 Clean 예천마을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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