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노하리(路下里) 유래
- 군방골(軍房洞), 궁방골(弓房洞), 관혁동(貫革洞) 군청앞 정문에서 동쪽으로 뻗은 큰길 근처에 있는 노하동의 원마을인데, 동헌(東軒)을 지키던 군 인들이 과녁(貫革)을 세우고 활쏘는 훈련을 하던 곳이고, 병사가 있었다고 하여 군방동이 라 부르기도 하고, 활을 만드는 궁방이 있었다 하여 궁방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 노하(路下), 길알, 질알 원래 한천(漢川)이 흐르던 곳이었으나, 고려 의종 (1147~1170)때 임춘(林椿)이 서본2리 굴모롱이에 암석 20m 가량을 뚫어 "임춘(林椿)천"이라 불리면서, 노하리에 작은마을이 생겼으나, 배수가 잘 되지 않아서, 1919년에 임춘천의 확장공사 를 하여 배수가 잘 되어 일 일대를 매립하여 집터가 확장되어갔다. 군청앞에 동서로 큰길 이 트여있어 이 길을 두고 길위는 질우(路上) 길 아래는 질알(路上)로 부르게 되었다.
- 봉란(鳳卵)거리 노하리 32번지에 봉란산이 있어서 불리어진 마을인데, 현재 파라다이스(樂園)호텔 동쪽 네거리이다.
- 성기골 자리전골에서 북서쪽으로 현재 예천교회(醴泉敎會)로 가는 길목인 노하리 36번지에 성기(성기) 공장이 있었다.
- 자리전골 노하리와 동본리의 경계를 이루는 골목의 마을로서, 1960년대 까지 자리를 파는 노점전이 열리었다.
노상리(路上里)
- 새막골, 새맛골, 새마골, 사마골(司馬洞) 연계당골 동쪽에 있는 골로서, 조선 시대에 생원과 진사가 모여노는 司馬所가 있었다.
- 연계당골(蓮桂堂谷) 군청 바로 동쪽 골목 마을인데, 조선시대 연계당이 있었다. 예계당터 옆을 지나 서북쪽으로 올라간다.
- 향교골(鄕校谷), 행교골 예천향교로 올라가는 골목의 마을로서 북서쪽으로 가는데, 대창중고등학교로도 가는 주된 통로이다.
- 홰나무골(槐木谷), 괴목정(槐木亭), 굇대, 굇디 노상리 안동통로에서 북쪽으로 바로 관통되는 골목의 마을로서, 경노당과 관속골의 동쪽이 되는데, 골 막바지 북쪽에 적은 골목에 큰 홰나무가 있었고 굇디라는 측량푯대가 있었다.
- 골안(谷內) 관속골을 올라가다가 경로당 뒤에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는 골목의 마을이다.
- 관속골(官屬谷), 강석골, 광석골 노상리 복판에 있는 마을로, 사마골 동쪽에 있는데, 이 골에는 군청이 노상리에 설치되고부터 관원(吏屬)들이 살았다. 지금 대창중고등학교로 가는 길목 마을이다.
- 깃디, 깃뒤, 귓디 조선 말까지 군청 뒷산에 암장(暗葬)이 발견되면, 이것을 파가라는 의미로 여러색깔의 기(旗)를세워 고지(告知)했다. 군청 옆 연계당골을 올라가면, 동쪽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의 윗쪽에 있는 마을이다.
- 노상, 길우 군청 앞의 한길보다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이 일대를 길우라고 한다.
- 산동네 예천군청 뒤 흑응산 중턱에 있는 마을로서, 노상리 6반에 해당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곳 어느 집에서 뱀 한 마리가 담장에서 기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 집주인이 뱀을 죽였다 그 후 수 많은 뱀이 그 집에서 득실거리기에 놀란 가족들이 상에 물을 떠 놓고 기도하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니 겨우 뱀들이 물러갔다고 한다. 이 뱀은 집뱀이었다는데, 이 집뱀을 해롭게 하거나 잡으면 그 집안이 망한다고 한다.
동본리(東本里)
- 공설운동장(현 예천스타디움)옆마을 동본2리로 한천변에 있는 마을이다. 농촌지도소(현 농업기술센터)와 공설운동장(현 예천스타디움) 사이에 조선시대 동읍 내면의 치소가 있다.
- 도덕골(道悳洞, 道德洞), 도득골(道得洞) , 장자동(長者洞) 동본2리 공설운동장(현 예천스타디움)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18세 기에 어느 도사가 마을뒤의 바위 위에서 수도하여 득도(得道)를 했다는 전설이 있어 도덕골이라 불리어진다. 또 부자가 살았다고 장자동(長者洞)이라고도 한다. 남을 비방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도둑골이라고도 불리어 진다. 해가 10시에 뜬다는 음지마을이다.
- 돌고개(石峴), 돌꼬지(石串,石串村) 동본2리 돌고개 밑에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 (1592)때 명(明)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이 보낸 지사(地士)가 이 곳 지형이 큰 인물이 태어날 곳이라 하여 군사들을 시켜 큰 바위를 깨트리고 혈을 잘랐다고 하며 그 뒤 이근처 사람들은 깨트린 방위 위에 성황당을 마련하고, 길가는 사람들이 돌을 던져 행운을 빌었는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 되었다고 저하고, 또 지금 동본교(東本橋) 자리에 내건너까지 바위가 물가 운데 쪽 깔려 있어서 돌꼬지라고 하였다.
- 동읍내(東邑內), 도읍내, 매름지, 매립지(埋立地), 새마 동본1리이다. 동읍내는 행정구역개편(1914) 전에는 현재 동본2리인 동쪽 한천 건너에 대부분 이었고, 1919년 서본리 굴모리의 굴을 확장함에따라 늪지대가 대지로 확장되어갔다. 그래서 매립지라고 해서 매름지라고도 한다.
- 새마, 새마을 동본1리 상설시장 주변에 새로 생긴 마을로, 원래 논과 미나리깡이었으나, 매립하여 집들이 점차 들어서서 이루어진 마을이다.
- 양재이(羊暘山), 양정리, 양짓골(陽地谷), 양촌(陽村) 동본2리 도덕골에서 동쪽 보문통로를 가다가 돌 꼬지 근처에 있는 양지 바른 마을이다. 18세기초에 이 곳에 엽전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 옥박골(獄外洞), 옥반골(玉盤谷), 오빠골 동본2리이다. 옛날에 감옥이 있던 자리인데, 그 감옥 터 밖에 있는 마을 이란 뜻으로 옥박골이라 불린다고도 하고, 또 뒷산이 선녀가 옥을 은쟁반 위에 굴리는 형국이라 하여 옥반골이라고도 한다.
- 원골(院洞), 큰원골(大院洞) 들꼬지마을 남쪽 등너머에 있다. 고려때부터 있었던 통명역(通明驛) 가까이 여관이 있던 곳이다.
- 터서리 동본1리 매름지 동쪽, 현 동본교 서편 20m에 있던 논을 매워 1970년경부터 주택가가 형성된 마을인데, 이곳은 옛날에 미나리 논이었다.
남본리(南本里)
- 공새마을 동리, 새동네 예천중학교 정문앞 동네로서 1972년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자, 이 동리 권기섭이 남본동 88번지 일대의 전답을 매립하여 가옥들이 들어서면서부터 새동리라 하다가 새마을 명칭을 빌어 새동리, 새마을 동리라고 부르게 됨.
- 공외남본(外南本), 외남본동, 남산동(南山洞) 남산 밑에 있어서 남산동이라고도 하는데, 남본2리에 속한다. 읍의 가운데로 한천이 흐르는데, 한천 밖, 즉 외곽지에 있다하여 외남본이라 부른다.
대심리(大心里)
- 무리실(水谷, 茂里室) 신라때의 예천 이름인 수주(水酒)가 이 마을 이름 에서 유래했는데, 무리실은 옛날에는 물이술 로 불리어졌고, 이 물이술은 곧 수주이다 라고 한다.
- 옻밭뚝 작은 하무실의 한 부분인데, 옛날에 옻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 이미기, 이미귀(伊未歸) 대심2리로 옛날에 경상감사가 예천군에 초도순시를 올 때, 용궁군을 거쳐 이곳까지 왔으나 당시의 법도에는 원이 영접을 안하면, 상관이 그 지경을 밟을 수 없으므로 원이 영접하기를 기다리다가 감사는 되돌아갔으며, 원은 감사를 마중하기 위해 달려갔으나, 감사가 이미 떠나간 뒤이므로 할 수 없이 돌아간 곳이라 하는데, 원은 감사를 마중하지 못하고 돌아갔 고, 감사는 원의 마중을 못 받고 돌아간 마을 아라고 하여 마을 이름을 이미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17세기에 귀양오는 어느 원님이 싫은 길이라서 7일 만에 이 곳 까지 왔다고 하여, 당시의 사람들이 이곳을 "이래미기"라고 불렀는데, 그 후 와전되어 이 미기가 되었다고 한다.
- 작은 하무실(小大母谷) 대심리이다. 큰 하무실 동쪽에 길다란 구릉이 뻗어 있어 그 너머 마을이다. 작은 하무실이라 부르나, 마을이 다를 뿐이지 어느 마을이 미리 생겼는지 모른다.
- 하무실(大母谷), 화무실(花舞室, 化舞室), 한모실 대무동(大茂洞, 大母洞), 큰하무실 이곳 상재봉(上材峰) 밑에 있는 무덤이 장마로 인하여 그 봉분이 붕괴 되자, "소벌국왕 모후분(小伐國王 母后墳)"이라는 지석(誌石)이 노출되어, 이 곳을 하무실(大母谷), 또는 대총골(大塚谷)이라고 하였는데, 그중 大母가 대무(大母)가 되고, 대무가 한무가 되고, 한무가 하무실이 되었다.
- 홍심동(弘心洞), 홍심리(洪心里), 홍시미, 홍심이 대심2리이다. 임진왜란(1592)때 어느 벼슬 높은 이가 여기서 피난을 하던 중 인심이 하도 후해서 후심(厚心) 또는 홍심이라고 했다고 한다.
- 공흘증동(屹曾洞), 흙진개, 흙징개, 흑진개 하무실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1740년 평해 황영후(黃永厚)가 개척하였는데, 흙이 매우 찰져 갯펄같은 곳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흘진개라 했다 고 하며, 또 앞산이 개가 흙을 지고 엎드린 모습 이라 하여 흑진개라고도 부른다. 또한 중국의 성기사라는 장군이 마을 서편에 있는 산의 혈(穴)을 보니 개혈(犬穴)이라 흙이 찰져서 흙징개라 했다고 한다.
고평리(高坪里)
- 가수내(佳水川), 가시네 고평2리 안골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앞을 흐르는 실개천 물이 만병 통치의 영약이 라 하여 먼 곳에서도 이 물을 마시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들어 물맛이 좋고 아름다운 곳이라 하여 가수내라 함.
- 고평(高坪), 고사평(高士坪), 역앞, 안골, 안곡(雁谷) 고평2리 경북선 고평역이 있어 역 앞이라고도 하나, 내성천의 물길보다 높고 넓은 들을 향해 생긴 마을이라 하여 고평으로 불리고 있다. 조선시대에 약포정탁(藥圃鄭琢)이 임진왜란(1592)을 수습하고 물러와 살던 곳으로, 그 때는 높은 선비가 산다하여 고사평(高士坪)이라 불렀다 하며, 현재는 동네 앞에 제방이 둘러있어 안골이 라고도 한다.
- 부리실, 부루실, 불우실(不遇谷, 不憂谷), 부곡(富谷), 불이실(不二室) 고평1리로서, 안골 북쪽 골짜기에 있는 남향받이 마을로, 마을 앞에 시원한 내성천이 흐르고, 뒷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봉우리가 솟아 등잔불을 켜 놓은 형국이란데서 연유된 동명이라 한다. 3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따뜻하므로 "소구리 동네"라고도 한다. 조선 세조때 사육신 하위지(河緯地)의 후손 부사정 하정해(副司正 河呈海)가 화를 피해 들어와 아무도 만나지 않 고 숨어 산다고 不憂谷이라 했다고 하며 임진왜란 후 여기에 정착한 청주 鄭琢의 후손들이 근심없이 살아가는 마을이라 하여 불우실(不憂谷)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 사당골(祠堂谷), 서당골(書堂谷), 강당곡(講堂谷) 고평1리 반(潘)씨 가문의 사당이 있던 곳이라 하여 사당골이라 불렀는데, 정(鄭)씨 집안의 강당도 있었기 때문에 강당골, 또는 서당골로 고쳐부름.
- 솔친재, 솔친저, 솔친정(松伐亭), 재너머, 저너머 고평1리 솔숲속에 옛날에 갖바치가 살았는데, 뒷날 경주 김씨가 솔숲을 치고 마을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는데, 뒷날 경주 김씨가 솔 숲을 치고 마을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솔친정, 또는 솔친재라 불렀다.
- 한질건너, 한길건너, 샘동네 고평1리 솔친재와 서당골 중간 마을이며, 옛날에 안동, 영주로 통했던 한길 건너에 있으므로 이렇게 불리고 있다.
- 83.2.15. 보문면에서 예천읍으로 편입
갈구리(葛九里)
- 갈머리, 갈두(葛頭) 갈구리에서 가장 일찍 생겼고, 큰 마을로 칡덩굴을 헤치고, 터를 잡았으며, 갈화미발형(葛花未發形)의 첫머리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임.
- 거서리(巨西里) 갈구2리로서 귀밑 마을의 남서쪽에 생긴 마을이며, 집이 뛰엄뛰엄 있는 산촌이어서 아주 큰 동네처럼 보이므로 거서리로 불리어 옴. 또한 마을 중심에 항상 물이 흐르는 소하천(小河川)을 경계로 하여 그 서쪽에 인가(人家)가 들어서 살면서 거랑 서쪽 마을을 약칭 붙여진 명칭임.
- 귀밑, 구밑, 구산(九山) 구미(龜尾) 16세기 말엽 순흥안씨가 터를 잡은 마을이라 하는데 금거북이 묻힌 꼬리의 형상(金龜浸尾 形)의 명당에 마을이 생겨 구미(龜尾)이 귀밑으로 되었다 라고도 하고 또 지세가 거북의 꼬리처럼 생겼다 하여 구미라고도 하며, 마을 앞의 산이 아홉 골이므로 구산(九山)이라고도 한다.
백전리(栢田里)
- 본래 예천군 북읍면의 지역으로서, 잣밭고개가 있으므로 잣밭고개 또는 백전이라 하였는데, 1914년에 백전동이라 한다.
- 간들고개 : 능골에서 생천리로 넘어가는 고개
- 구룡다리 : 아홉 골의 물이 한데 모인다.
- 능골(陵洞) : 사창 북쪽 골짜기 있는 마을, 고려장이 많이 있다.
- 맛들(馬坪) : 구마니 북쪽에 있는 들. 전에 말을 놓아 먹였었다.
- 사창(社倉) : 잣밭고개 북동쪽에 있는 마을. 이조 때 사창이 있었다.
- 쉰거리(신거리) 백전교 북쪽에 있는 마을 . 현재 예천 여자고등학교가 있다. 전에 용문면 선동에 사는 서씨가 가난하여 신을 삼아 가지고 장날마다 예천읍에 가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신을 대추나무에 걸어 놓고 쉬어 갔다고 한다.
- 잣밭고개(栢田峴) : 백전 남서쪽에 있는 고개
- 향교골(校洞, 행깃골, 鄕校洞) : 예천 향교가 있는 고개
- 효자각(孝子閣) 정문 : 사창 앞 큰길가에 있는 효자 임즐의 정문
상동리(上東里)
- 본래 예천군 개포면의 지역으로서, 개포면의 가장 위쪽이 되므로 웃마, 또는 상리라 하였는데, 1914년 이후 상동이라 하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예천읍에 편입되었다.
- 갯들(浦坪) : 양지마 앞에 있는 들
- 굼들 : 갯들 북쪽에 있는 들. 큰 늪이 있었다.
- 동녘마(동녘, 東村) : 안골 동쪽에 있는 마을
- 안골(內洞, 방앗골) : 양지마 남서쪽 안 골짜기에 있는 마을
- 양지마(陽村) : 내동 양지쪽에 있는 마을
생천리(生川里)
- 본래 예천군 북읍면의 지역으로서, 앞 냇물이 늘 소리를 내고 흘러서, 마치 생황 소리와 같다 하여 생내실 또는 생나실, 생천이라 하였는데, 나평동, 정산동을 병합하여 생천동이라 한다.
- 나붓들(羅坪, 羅坪洞) : 생나실 남서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나부처럼 되었다고 함.
- ①임진 왜란 때 두사총(杜師聰)이 이 고개를 지나 금당실(金塘室)에 이르러 “금계(金鷄)가 앞에 있고, 옥견(玉犬)이 뒤에 있으니, 마치 중국 양양(襄陽)의 금곡(金谷)과 같다”고 크게 칭찬했다.
- ②용문면 선동에 사는 서씨가 가난하여 짚신 장사을 해 가며 그 아들을 가르쳐서, 마침내 그 아들이 벼슬을 하여 고을 원으로 도임하는 것을 보려고 하인에게 업혀서 백전동 신거리에 가서 그 아들을 만나보고 어찌나 기뻤던지 정신없이 즐기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오는데, 이 고개에 이르니, 닭이 울었다고 한다.
- 못골(池洞) : 생나실 서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앞에 못이 있었는데. 현재 못둑만 남아 있다.
- 물방앗간 동네 : 생나실 동쪽 건너에 있는 마을. 물방앗간이 있었다.
- 서원(書院) 마 : 솔뚜껑이산 북쪽에 있는 마을. 정산서원이 있었다.
- 정산서원터(鼎山書院터) 서원마 뒤에 있는 서원. 1912년에 서원을 세워서 이황(李滉), 조목(趙穆)을 제향하였는데, 1677년에 정산의 이름을 따서 정산서원으로 사액되었다가, 1868년에 헐리었다.
서본리(西本里)
- 본래 예천군 서읍면의 지역인데, 본동과 남읍면의 본동 일부를 병합하여, 서읍면과 본동의 이름을 따서 서본동이라 한다.
- 객사터 : 서본리 52번지에 있는 예천군의 객사 터. 현재 개인의 소유가 되었다.
- 굴모롱이굴(林椿遷) : 굴모롱이에 있는 굴. 임춘(林椿)이 이 굴을 뚫어서 한천의 물을 끌어다가 서정잿들에 대게 하였다.
- 임춘전(林椿遷) : 굴모롱이에 있는 벼랑. 전에 큰길이 현산 꼭대기로 나서 매우 곤란하였는데, 임춘이 이 벼랑을 깍아 내어 길을 내고, 또 굴을 뚫어서 물길을 만들어서 서정잿들의 蒙利를 도왔다.
- 박샘(酒泉) 우물 : 지고개 동쪽 기슭에 있는 우물
- ① 바가지로 떠서 먹게 되었음.
- ② 전에 술이 나왔다 하는데, 한 바기지만 떠먹어야 되는데, 욕심많은 사람이 두 바가지를 떠먹은 뒤로부터 술이 변하여 물이 되었다고 한다.
- 비선거리(길) : 쥐고개 남쪽에 있는 길. 군수(郡守) 유건환(兪建煥), 이인성(李寅聲), 지응주(洪膺周)의 선정비가 있었다.
- 지고개(酒고개, 酒峴, 쥐고개) : 서읍내 서쪽에 있는 고개
- ① 모양이 쥐처럼 생겼다.
- ② 고개 밑에 주천이 있다.
- 홋골(솟골, 효곡, 孝谷) 서읍내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어느 효자가 여기 살면서 범의 보호를 받아 부모를 극진히 모셨다고 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그래서 호곡이던 것이 효곡으로 변했다고 한다.
석정리(石井里)
- 본래 예천군 서읍면의 지역으로서, 돌샘이 있으므로 돌샘, 또는 석정이라 하였는데, 1914년 이후 석정동이라 한다.
- 근넝골 : 신리 건너쪽에 있는 마을.
- 까칫골 : 석정 뒤에 있는 골짜기.
- 깜부기재 : 신리 북쪽에 있는 고개. 신리에서 용문면으로 통한다.
- 돌샘(石井) : 석정리 117번지에 있는 우물. 절벽사이에서 물이 나오는데 , 몹시 차고 맛이 좋다.
- 물탕골 : 안석정 뒤에 있는 골짜기. 한길이 넘는 물탕이 있다.
- 봉웃골(烽火谷) : 물탕골 옆에 있는 골짜기. 봉우재 밑이다.
- 새터(新基, 新里) : 석정 서남쪽에 새로 된 마을.
- 안석정(內石井) : 석정 안쪽에 있는 마을.
- 독실골 : 안석정 동쪽에 있는 골짜기.
- 흘진갯골 : 독실골 옆에 있는 골짜기. 대심리에 있는 흑진개쪽이다.
용산리(龍山里)
- 본래 예천읍 북읍면의 지역으로서, 용처럼 생긴 산이 있으므로 용산이라 하였는데, 석문정, 효동을 병합하여 용산동이라 해서 예천읍에 편입됨.
- 검북골 : 봉웃골 서쪽에 있는 마을. 봉우산과 백마산 밑이다.
- 고래장등 : 새박골 앞에 있는 등성이. 고래처럼 생겼는데, 옛 금가락지와 청자들이 발견 되었다.
- 돌문(石門, 석문바우) : 석문정 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 두 바위가 문처럼 길 양쪽에 서 있다.
- 돌부처(石佛) : 부채집골에 있는 돌부처, 높이 1길이 되는 부처 셋이 있는데, 1967년에 법당을 지어 보호하였다.
- 새박골(曉洞) : 석문정 남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동ㆍ남ㆍ서쪽에 산이 높이 둘러있어서 낮에도 새벽같이 어둡다고 한다.
우계리(愚溪里)
- 본래 예천군 동읍면의 지역으로서, 기와점이 있으므로 점마, 또는 욋골, 와계라 하다가 변하여 우계가 되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광천동, 응동 일부를 병합하여 우계동이라 해서 예천면에 편입되었다.
- 광대원(廣大院) : 우계동에서 으뜸되는 마을. 앞에 넓은 내가 있으며, 이조 때 행인의 편의를 도와주는 광대원이 있었다.
- 냉정골(冷井一) : 아릇마 남쪽에 있는 마을. 냉정산(군 산천)밑이 되는데, 찬 샘이 있다.
- 맷골 : 광대원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지내리(池內里)
- 본래 예천읍 서읍면의 지역으로서, 큰 못 안쪽이 되므로 못안, 또는 모단골로 변하여 모산, 모산골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개포면의 상리 일부를 병합하여 지내동이라 해서 예천면에 편입되었다.
- 갯들 : 청등들 남쪽에 있는 들. 한(군 산천) 근방이다.
- 독실 : 독싯골 입구에 있는 마을.
- 독싯골 : 치실골 옆에 있는 골짜기.
- 딧골 : 치실골 뒤에 있는 골짜기.
- 모산골(池內池) : 모산골 앞에 있는 큰 못.
- 목건너 : 독실 옆에 있는 골짜기.
- 못안고개(모단고개) : 못안 남동쪽에 있는 고개.
- 청등들 : 청미 앞에 있는 들.
- 청미 : 모산골 남서쪽에 있는 마을.
- 치실골 : 모산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청복리(淸福里)
- 본래 예천군 남읍면의 지역인데, 도리촌, 용정, 원고개, 남읍내을 병합하여 청복동이라 한다.
- 남내(南月村, 南邑內) : 돌태 동남쪽에 있는 마을. 전에 남읍면의 소재지로서 매우 번창 하였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면소가 없어지는 동시에 마을이 줄어들었다.
- 다리끝(龍井) :남내 남서쪽에 있는 마을
- ① 돌다리 끝이 되었다고 한다.
- ② 큰 우물이 있는데, 용이 나와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 도로변(道路邊) : 새마 동북쪽 큰길 가에 있는 마을. 도로변에 이정표(里程表)가 있다고하여 도리촌(道里村)이라고도 한다.
- 돌태(桃李村, 도리티) : 청복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도는 고개가 있으므로 도리티라 하였는데, 변하여 도리촌이다.
- 원고개 : 돌태 서남쪽에 있는 마을. 이조 때 행인의 편의를 도와주는 원집이 있었다고 한다.
통명리(通明里)
- 본래 예천군 동읍면의 지역으로서 통명이라 하였으며 원동 일부와 승도면의 본동, 고평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통명동이 되었다.
- 각골(尹村, 윤천못) : 동짝마 북쪽에 있는 마을. 윤씨가 많이 살았다.
- 골마(通明, 谷村) : 통명리 원마을
- 놋티기(雷澤, 네티기) : 동북쪽에 있는 마을
- 동짝마(東村) : 골마 동쪽에 있는 마을
- 땅골(堂谷) : 각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신당이 있었다.
- 마당(馬堂) : 동짝마 남쪽에 있는 당. 마신을 제사지냄, 1823년에 중수하였다가 1934년 장마에 떠내려 갔으므로 새로 짓고, 매년 정월 15일 밤에 동민들이 제사를 지낸다.
- 막죽고개 : 골마 서쪽에 있는 고개. 예천읍으로 넘어가는데 마지막이 되므로. 혼인 가마는 꺼러서 일체 다니지 않는다.
- 사내실(사느실) : 통명 북쪽에 있는 들
- 새골(新谷) : 골마 북쪽에 새로 된 마을
- 쇠제이(松亭) : 새골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소나무 정자가 있다.
- 웃마(上村. 上通明, 웃통명) : 통명 위쪽에 있는 마을
- 천제등(天祭燈) : 동짝마 북쪽에 있는 등성이. 늙은 소나무 7그루가 있는데. 매년 정월 15일 밤에 동민들이 이 곳에서 천제를 지낸다.
- 통명역(通明驛) : 골마에 있는 통명역의 터. 이조 때 창락도에 딸린 통명역이 있어서 유동과 안동부 안교에 통하였다.
- 항구골(黃拘谷) : 골마 남쪽에 있는 마을. 지형이 “황구형(黃拘形)”으로 되었는데, 맞은편에 범밭등이 있어서 황구가 똥을 싸고 있으므로, 이 마을이 부유하게 된다고 한다.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예천읍총무팀(☎ 054-650-8335)입니다.
최종수정일2022.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