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설화

용문면(龍門面)

용문면은 임진왜란(1592) 직후부터 유리면(流里面), 휴구곡면(雎鳩谷面), 제곡면(渚谷面)의 3면(面)으로 되어 있었으며, 1913년 제곡면과 휴구곡면을 병합하여 제고면(諸古面)으로 개칭하여 상금곡, 선동, 하금곡, 상능내, 하능내, 방구, 소제(小渚), 백학, 상리, 하리의 10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군면(郡面) 폐합(廢合)에 따라 제고면(諸古面)의 성암, 와현, 중리, 봉천, 신리, 덕암, 개방, 반송, 사라, 구계, 죽림, 노곡, 직동의 13개 동리와 유리면(유리동면)의 인천, 두천, 우망, 사부, 내동, 시목, 둔지, 점리, 신원, 본류의 10개 리를 병합하여 용문사(龍門寺)의 이름을 따서 용문면이라 하여 성현, 덕신, 방송, 구계, 죽림, 노사, 직동, 두천, 사부, 내지, 원류, 상금곡, 선동, 하금곡, 능천, 제곡, 대제, 하학의 18개 동으로 개편 관할(管轄)하였다. 1987년 1월 1일 두인동(杜仁洞)을 두천동(杜川洞)으로 개칭되었고 1988년 5월 동(洞)을 리(里)로 바꾸었다. 동쪽은 하리면과 예천읍, 남쪽은 예천읍과 유천면, 서쪽은 유천면과 문경시 동로면, 북쪽은 상리면에 접(接)하고 있다. 용문천(龍門川)과 선동천(仙洞川)이 발원하여 모두 한천(漢川)으로 흐른다.
관광자원으로는 용문사, 초간정, 예천권씨종택, 금당실전통마을, 청룡사, 어림성 등이 있고, 특산물은 마늘, 양파, 고추, 토마토, 금당꿀, 잡곡, 참우 등이 있다.

용문사(龍門寺)

  • 위 치 : 용문면 내지리

용문사는 신라(新羅) 870년(경문왕 10) 두운대사(杜雲大師)가 당(唐)나라에 들어가 도(道)를 깨친 후 귀국하여 산천경관(山川景觀)이 수려한 소백산(小白山) 남쪽에 이르러 초옥 1칸으로 874년(경문왕 14) 용문사를 창건(創建)하니 두운암(杜雲庵)이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두운대사(杜雲大師)의 명성을 듣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 삼한통일(三韓統一)을 이룩한 뒤 두운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936년(태조 19)에 재물을 보내 중건공사를 시작하고 인근 주현(州縣)의 조세(租稅) 중에서 매년 150석을 공양 하여 사찰(寺刹) 발전의 재원으로 충당토록 하였다. 1165년(의종 19) 자엄대사(資嚴大師)에 의하여 중건 불사가 시작되고 1171년(명종 원년)에는 태자(太子, 제22대 康宗)의 태(胎)를 일주문(一柱門) 밖의 좌비봉두(左臂峯頭)에 묻고 용문사(龍門寺)를 창기사(昌期寺)라고 개칭하게 하였으며 동왕 3년(1173)에 삼만 승제를 설하고 대장전(大藏殿)을 신축하여 당내 좌우에 윤장대(輪藏臺) 2좌를 설치하였다. 1179년(명종 9)에 중수 공사를 완공하고 선종 9문학도 500명을 모아 50일 간에 걸쳐 법회(法會)를 열었으며, 1185년(명종 15) 4월 경내에 완공을 기념하는 중수비(重修碑)를 세워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조선(朝鮮) 1457년(세조 3)에 왕이 교지(敎旨 - 보물제729호)를 내려 승려(僧侶)들의 잡역(雜役)을 면제케 하였으며, 연산군(燕山君)의 어머니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태실(胎室)을 이 곳에 묻고 성불산용문사(成佛山龍門寺)로 개칭(改稱)하였으나 1783년(정조 7)에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태실을 이 곳에 봉장(奉藏)하고 소백산용문사(小白山龍門寺)로 환원하였다. 1835년(헌종 원년)에 큰 화재(火災)로 소실된 보광명전, 해운루를 중건하였고, 1979년에는 대장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을 대대적으로 보수(補修)하였으며, 1984년 화재로 소실된 영남제일강원, 보광명전, 해운루 등을 1990년 복원하였다.
이 사찰에는 국내(國內) 최고(最高·古)를 자랑하는 것이 있는데, 대장전(大藏殿 - 보물제145호)은 1173년(명종 3)에 초건(初建)한 오래 된 목조(木造) 건물이며, 윤장대(輪藏臺 - 보물 제684호) 1쌍은 국내 유일(唯一)의 회전식 불경 보관대로 이 대(臺)를 돌리고 한 가지 소원(所願)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전해지는데 공부하는 이는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병고(病苦)에 시달리는 자는 병이 낮게 되며 박복(薄福)한 자는 다복(多福)하게 된다는 전경신앙(轉經信仰)으로 이는 선(善)한 마음으로 음덕(陰德)을 쌓아야 복(福)을 받는다는 것이다. 목불좌상 및 목각탱(木佛坐像·木刻幀 - 보물 제989호)은 대추나무로 만든 후불탱 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크며 예술적 가치도 높다. 또한 사천왕상(四天王像)은 불국사(佛國寺)의 것보다 규모가 더 웅장하다.
천여년(千餘年)의 역사를 자랑하는 법보대찰(法寶大刹) 용문사에 얽힌 세 가지의 이적(異蹟)이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먼저,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삼한통일을 위하여 남정(南征)하는 길에 두운대사를 방문하고자 동구에 이르렀을 때 바위 위에 청룡(靑龍) 한 쌍이 나타나 어가(御駕)를 환영하기에 왕이 이를 기뻐하여 용문사로 불리어졌다고 하며, 다른 하나는 두운대사가 절을 짓기 위해 이 곳에 이르렀을 때 바위에서 홀연히 진룡(眞龍)이 나와 영접하였다고 하여 산 이름을 용문산(龍門山), 사명(寺名)을 용문사(龍門寺)라 하였다 한다.
둘째, 이 절을 짓기 시작하였을 때 나무둥치 사이에서 무게가 16냥(兩)이나 되는 은병(銀甁) 하나가 나와 그 것을 팔아서 공사비에 충당했다고 하며,
셋째, 1171년(명종 원년)에는 도량의 남쪽 9층의 청석탑(靑石塔)에 사리를 봉안하였는데, 이 때 오색(五色)의 구름이 소반을 에워쌌다고 전해온다.
1984년 초파일 다음날 화재로 인하여 해운루, 영남제일강원 등 많은 건물이 전소(全燒)되었다. 당시 응향각에는 조선 세조 때 스님들의 잡역을 면제케 해준 교지가 대형 금고 속에 있었는데 이때 이 절에서 공부하고 있던 변진용(당시 20세)이라는 학생은 장정 4명이 목도를 이용해도 억지로 들 수 있는 육중한 금고를 초인적(超人的)인 힘으로 요사채 안방에서 문턱을 넘어 마당까지 굴려 떨어뜨려 귀중한 문화재를 구했다.
특히 응향각을 삼킨 불이 2m 이내에 있는 단하각(丹霞閣)에 접근하자 30여 명의 용문면사무소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불길을 헤쳐 들어가 단하각을 허물어 바로 옆에 있는 대장전(大藏殿)이 화(禍)를 면하였는데 그 안에는 윤장대 1쌍(雙), 목각좌상 및 후불탱화 등 이 절을 상징하는 귀중한 문화재가 있어서 이는 부처님의 음덕(蔭德)과 가호가 있었다고 한다. 대장전 기둥과 벽에는 연꽃, 붕어, 도깨비(鬼面) 등 그림이 있는데, 이들은 물을 상징하는 부적(符籍)으로 화마(火魔)를 막는 역할을 하였다고도 한다
또한 불이 나기 전인 4월 5일(陰) 주지스님의 꿈에 사천왕상(四天王門) 전면에 5색 연기가 자욱하게 나고 많은 군중이 법당을 향해 절을 하는 꿈을 꾸어 잠을 설쳤다고 하며, 4월 7일(陰) 사찰 현장에 근무 중이던 용문면 산업계장은 비몽사몽(非夢似夢) 간 큰 법당 부처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꿈을 3번이나 되풀이 꾸어 놀라 잠을 깨어 보니 꿈이었으므로 방심하여 부처님의 계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화재(火災)를 막지 못하였다고 매우 안타까워했다.
당시 “용머리를 깼으니 불이 안날 턱이 있겠느냐?”는 소문이 자자하였는데 이는 불이 나기 며칠 전 면(面) 경계지점인 용문면 하금곡리 포장 공사장에서 용머리 바위를 폭약으로 깨트려 용문사(龍門寺)를 지키는 수호신인 용(龍)이 화가 나서 불을 냈다는 말이 지금도 전해온다.

불교문화(佛敎文化)를 꽃피우고 고려(高麗) 건국(建國)에 이바지한 두운스님

두운대사(杜雲大師)는 신라 말의 고승(高僧)으로 소백산(小白山) 용문사(龍門寺)를 창건한 개산조(開山祖)이며, 고려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그는 용문면 두천리에서 태어났으며 속성(俗性)은 신(申)씨로,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범일국사(梵日國師)를 모시고 뗏목을 타고 황해(黃海)를 건너 당(唐)나라에 가서 경(經),율(律),론(論) 삼장(三藏)을 두루 익히고 돌아왔다.
당시 사회가 혼란하고 삼국(三國)이 분열되어 중생구도(衆生求道)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하여 이곳에 수행(修行)하던 중 하루는 운우(雲雨)가 자욱하여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운 때 구척(九尺) 거구의 한 장수(將帥)가 나타나 “나는 왕건(王建)이라는 사람인데, 고승 두운대사가 이곳에 머무신다기에 뵙고자 오다가 산문 밖에서 청룡(靑龍) 두 마리가 길을 인도(引導)하여 이르렀으니 부디 자비(慈悲)를 베푸시어 도탄(塗炭)에 허덕이는 만 중생(衆生)을 구하여 주소서.” 하며 애원(哀願)하였다.
대사께서는 “꽃을 꺾어 밭 가운데 둔들 얼마 동안이나 고울 수 있겠느뇨? 청춘이 머무르지 않는 것은 달리는 말과 같고 사람의 목숨이 덧없기는 산골짝을 흐르는 물과 같아서 오늘은 비록 살아 있으나 내일을 보장하기 어렵거늘, 그대는 나를 어느 길로 인도코자 하느뇨?” 하고 거절하니, 왕건(王建)이 오체투지(五體投地)하여 재삼 간곡히 부탁하기를, “무엇 때문에 삭발하고 가사를 입었습니까? 지금 이 시국에 대사께서 입으신 옷이나 입안의 밥이 쉽게 소화가 되겠습니까? 바라건데 인연(因緣)이 있어 만나게 되었으니 부디 만 중생을 건질 수 있는 스님의 슬기를 저에게 빌려 주소서.” 했다.
수행(修行)에만 전념해 온 대사도 왕건(王建)의 얼굴에 덕(德)이 넘치고 말씨가 간절하며 경륜(經綸)이 넉넉하니 반드시 이 사람이야말로 난세(亂世)를 수습할 군왕(君王)이 될 기상이라 하여 그를 초당(두운암)으로 인도하여 그의 청(請)을 받아 들였다. 이에 왕건은 절 이름을 용문사(龍門寺)라 하였으며 대사(大師)는 그 후 그를 도와 후삼국(後三國-신라, 후백제, 후고구려)을 평화적으로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두운대사는 이 곳 용문사 외에도 풍기(豊基)의 희방사(喜方寺), 남해(南海)의 용문사를 창건(創建)하고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를 중건(重建)했다고 전해지나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 호국불교(護國佛敎)의 큰 가람을 이룩하고 겨레의 마음 속에 부처님 공경(恭敬)하는 마음과 나라 사랑하는 지혜를 심어 주었다.

자명금(自鳴琴)

  • 위 치 : 용문면 상금곡리 박노준씨댁

용문면 금당실(金塘室 : 상금곡리) 함양 박씨(박노준) 집에는 길흉(吉凶)을 알려주는 기이한 거문고가 가보(家寶)로 간직되어 있다. 자명금(自鳴琴) 일명 태랑금(泰娘琴) 으로 불러지는 이 거문고는 박정시(朴廷蓍)의 현손 손경(孫慶)이 지은 이름으로 1671년(현종 12) 박정시가 충청도 태안군수(泰安郡守)로 있으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 195cm, 폭 25cm, 6현(絃)으로 된 거문고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해온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전 1670년(현종 11) 박정시(朴廷蓍)가 충청도 태안군수(泰安郡守)로 부임하였을 때이다. 그가 부임하기 몇 해 전인 1666년부터 이 곳에 군수로 부임하기만 하면 첫날 밤에 죽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이러기를 여러 번 거듭하는 동안 이상한 말들이 말에 말을 거듭하여 떠돌았다. 이 고을 사람들은 사또가 이상하게 죽어 가는 까닭을 몰라 인심이 극도로 흉흉해지고 사람들은 불안하여 누구나 이 곳을 부임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당시 형조(刑曹)에서 근무하던 담력과 지략이 뛰어난 박씨가 해괴한 이 사실을 밝혀 민심(民心)을 수습하고자 자원(自願)하여 이 곳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부임 첫날 밤, 관복을 정제하고 등촉(燈燭)을 낮과 같이 밝혀 놓고 동헌(東軒)에 정좌하고 있었는데, 밤이 삼경(三更)이 되고 인적이 적적할 무렵 갑자기 음산한 바람이 휘익 몰아치자 밝혀 놓은 촛불이 일시에 탁 꺼져 버리고 비릿한 피 냄새와 더불어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으며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 통곡하는 소리가 되어 점점 동헌(東軒) 쪽을 향하여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 아무리 담력이 큰 박 군수도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에 땀이 흐르고 떨리기 시작하자,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자리에 앉아 울음소리가 가까워 오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두워진 앞문이 소리도 없이 열려지면서 울음소리가 동헌 마루 끝에 와서는 뚝 끊겨 지더니 동헌 뜰 아래에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고 아래 위로 소복(素服)을 한 소녀가 목에 칼을 꽂고 피를 뚝뚝 흘리면서 박 군수에게 얌전히 절을 올리고 있지 않는가?
이 때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네가 귀신이냐? 사람이냐? 역대 군수가 까닭없이 죽은 것은 네 소행이었구나! 사람이라면 이 밤중에 여기에 온 까닭을 고할 것이며, 귀신이라면 사불범정(邪不犯正)인데, 네 어찌 감히 관장(官長) 앞에 이런 꼴로 나타났느냐 ?” 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동헌의 대들보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쳐서 꾸짖었다.
이에 소녀는, “사람이 어찌 이런 모습으로 이 시각에 나타나겠습니까? 소녀는 틀림없이 귀신이온데, 원귀(寃鬼)가 되어 신원(伸寃)을 하려고 사또가 부임할 때마다 나타났사오나 소녀의 비참한 꼴을 본 전임 사또께서 마음이 약하여 죽었기 때문에 하소연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오늘은 다행히 명관을 만나 이런 다행한 일이 없습니다.”
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정 이야기를 하였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1) “지금부터 5년 전 태안 군수가 된 아버지를 따라 이 고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녀의 미색(美色)을 탐낸 아전 한 사람이 소녀를 겁탈하고 난 다음, 후환(後患)이 두려워서 소녀의 목을 칼로 찌르고 동헌 앞 뜰에 있는 수 백년 묵은 저 오동나무 속에 거꾸로 집어넣어 오늘에 이르렀으나 소녀는 원귀(寃鬼)가 되어 썩지도 않고 아직도 그대로 있으니 소녀의 원수를 갚아 주소서” 하는 사연으로 그렇게 할 것을 약속하고 소녀를 돌려보냈다.
그 이튿날 날이 밝자 태안 관아에 있던 아전들이 이번 군수도 으레 죽었으려니 하는 지레짐작으로 장사(葬事)지낼 준비를 갖추고 들어오다가 사또가 생생하게 동헌(東軒)에 정좌하고 있음을 보고 모두 놀라 꿇어 엎드렸다.
사또는 명(命)하여 뜰 앞 오동나무를 베어 보니 과연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소녀의 시체가 목에 칼이 꽂힌 채 거꾸로 쳐 박혀 있으므로 그는 소녀의 목에 꽂힌 칼을 뽑고 정성을 다해 장사(葬事)를 지내주고 소녀의 원혼(寃魂)을 달래는 한편, 그녀가 일러준 아전을 살인범(殺人犯)으로 잡아 자백(自白)을 받고 처형하였다.
범인을 처형(處刑)하던 날 밤에 박 군수가 꿈을 꾸니 소녀가 먼저와는 달리 깨끗한 소복 차림으로 나타나 무한히 감사드리면서, 이번에 벤 오동(梧桐)나무로 거문고를 만들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라졌다.
박 군수는 소녀가 시키는 대로 오동나무를 다듬어 거문고 세 개를 만들고 이러한 사실을 조정(朝廷)에 보고하였더니 조정에서 박 군수의 처사를 칭찬하는 한편, 거문고의 내력(來歷)이 이상하니 두 개만 조정에 보내라고 하여 조정에 올리고, 하나는 간직하였다. 청(淸)나라 성조 임금도 이 기괴한 소문을 듣고 한 개를 희망하므로 숙종(肅宗) 임금이 하나를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그 후, 청렴(淸廉) 강직한 박 군수는 선정(善政)을 베풀고 임기를 마친 후 거문고 한 틀만 안고서 고향인 이 곳 금당실(金塘室)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갑속에 든 이 거문고는 박 군수의 집안과 나라에 경사(慶事)가 있을 때나 흉(凶)한 일이 일어나면 스스로 소리를 내어 알려주었다고 한다.
후손(後孫)들은 신비한 이 거문고 이름을 자명금(自鳴琴)이라 하여 대대로 가보(家寶)로 물려 오던 중 지금부터 100여 년전 당시의 세도가(勢道家)였던 양주대감 이유인(李裕寅)이 빌려가서 거문고 뒤를 칼로 뚫어 본 후로는 스스로 우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소녀의 원혼(寃魂)을 달래주고 얻은 이 거문고는 그의 종손인 박노준 씨댁에 있다.
(南野集의 泰娘琴記)
2) “소녀는 4년 전 이 고을 원의 외동딸인데, 애달픈 사연으로 죽은 몸입니다. 이 곳에서 동북(東北)쪽으로 멀지 않는 곳에 소녀의 무덤이 있는데, 그 옆에 두 그루의 오동나무가 있사옵니다. 그 뿌리가 소녀의 시구(屍軀)에 파고들어 견딜 수가 없사오니 베어 없애주소서” “어렵지 않구나! 그 뿐이냐?” “그리고 그 오동나무를 베시거든 버리지 마시고 거문고를 만드시면 스스로 소리를 내는 자명금이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소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말기를 천만번 원하오며, 다시는 현신(見身)치 않겠나이다.” 하고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문밖이 소란하여 단잠에서 깨어 크게 호령하여, “게 아무도 없느냐? 밖이 왜 이리 소란한고?” 하니 이방을 비롯한 모든 관속들이 새 원의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도구를 들고 파랗게 질린 체 잘못을 빌었다. 이에 사또는 너그러이 용서하고 태랑(泰娘)이라는 여인에 대해 물으니 오래 있었던 아전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4년전 고을 원에게 태랑이라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용모가 뛰어나고 마음씨와 행실이 고와 부모는 물론 온 고을의 총애(寵愛)를 독차지했다. 그러나 기구하게도 평민의 아들과 사련(邪戀)이 있어 끝내는 인연(因緣)을 맺게 되고 말았다. 이를 눈치챈 아버지는 양반의 체통과 귀여운 외딸의 사랑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그들의 정열을 끊을 수 없음을 알고 비밀리에 이를 허락하고 신혼초야(新婚初夜)를 맞게 하였다. 그러나 고을 원은 자객(刺客)을 보내어 신랑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초야(初夜)의 피곤함과 나른함에 젖어 꿈길을 헤매던 신랑에게 백발의 노인이 현몽(現夢)하여 “잠자리를 바꿔 눕지 않으면 큰 화(禍)를 당할 것이다.”라고 했다. 놀라 잠에서 깨어난 그는 신부(新婦)와 잠자리를 바꾸고 잠이 들었는데 그 때까지 그들의 동정을 살피고 있던 자객은 밤이 으슥해지자 이러한 사실도 모른체 신방으로 들어가 초저녁에 가늠해 둔 신랑의 가슴에 비수(匕首)를 힘껏 찔렀다. 이를 본 신랑은 그 즉시 줄행랑을 쳤으며, 이튿날 새벽 신방의 문을 열었던 원은 눈 앞에 비친 참상에 아연질색을 하고 뉘우쳤지만 소용없었으며, 그나마 체통으로 인해 사랑하는 딸을 오동나무 곁에 묻어버리고 근심에 잠기고 말았다.
이로 인해 병을 얻은 원은 사직(辭職)하고 귀향(歸鄕)하여 그 후론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사연을 들은 원은 그들을 재촉하여 간밤에 말하던 그곳에 찾아가니 과연 오동나무 두 그루가 서 있어 나무를 벤 후 거문고 두 개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두 개 중 한 개는 태안군에, 다른 하나는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가져와 자손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그 후 구한말(舊韓末) 당시의 세도가 양주대감 이유인(李裕寅)이 빌려 가서 낡은 거문고 줄을 갈아 2년 여간 쓰다가 다시 돌려주었으나 그때 고친 이후부터 스스로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록 자명금의 구실은 못할지라도 당시의 애상(哀想)을 새긴 이 거문고는 그 후 여러 번 갈아 끼웠지만 스스로 우는 일이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자모연(子母淵)에 서린 모자(母子)의 정(情)

  • 위 치 : 용문면 상금곡리

옛날부터 용문면 선리 마을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1) 십여세 되는 문광필(文光弼)이라고 하는 아이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생활이 방탕(放蕩)하여 나날이 술과 여자로 허송세월(虛送歲月) 만하고 이들 모자(母子)를 돌보지 않아 집안은 항상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으며 가족의 끼니도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광필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동네 앞 연못에 빠져 죽으려고 뛰어들었다. 이 때 그는 어머니를 구하려고 쫓아갔으나 이미 물에 빠져 죽었다. 이를 슬퍼한 그는 어머니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자신도 그 물 속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동네 사람들은 이 두 모자의 시체를 찾기 위하여 물 속을 아무리 뒤졌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모자는 서로 꼭 켜안은 채 시체가 되어 물 위에 떠올랐다 한다.
2) 예천군지(醴泉郡誌) 고적조(古跡條)에 따르면 옛날 평해(平海) 수군(水軍)이었던 문광필이라는 젊은이가 살았는데 그의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정분이 나서 어머니를 돌보지 않게 되자 마침내 질투심(嫉妬心)을 못 이긴 어머니는 마을에 있는 못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를 알게 된 그는 황급히 달려가서 어머니를 구(救)하려고 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 미치지 못했다. 비탄(悲嘆)에 잠긴 그는 기어이 어머니를 따라 못에 몸을 던졌다. 다음날 못에는 서로 꼭 껴안은 모자(母子)의 시체(屍體)가 떠올랐다. 어머니를 따라 애처롭게 죽은 아들을 기리는 뜻에서 그 못을 자모연(子母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못터라고 전해지는 곳에는 지금은 그 곳을 모두 메워 논으로 변하고 웅덩이만 남아있다.

어사금(御賜琴)의 신비(神秘)

  • 위 치 : 용문면 구계리

조선(朝鮮) 태종(太宗) 임금이 그의 여섯째 왕자인 희령군(熙寧君)이 음율(音律)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거문고 한 개를 내려준 일이 있었다.
그 후 희령군의 자손들은 이 거문고를 어사금(御賜琴 - 유형문화재 제241호)이라 하여 대대로 가보(家寶)로 생각하여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는 와중에 종가 계통의 후손이 끊어져 버리고 경기도(京畿道) 광주(廣州)에 있던 희령군 사당(祠堂)마저도 불 타버리고 말았다. 희령군이 분가할 때 궁중(宮中)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이라곤 모조리 불타버리고 말았는데, 이상하게도 어사금(御賜琴) 한 개만 용케도 남게 되었다. 이 거문고는 희령군의 끝집 자손 한 사람이 영남(嶺南)으로 이사를 올 때 가지고 왔다. 그리고 몇 대(代)를 지나 병성(秉誠, 1771~1839)의 대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어느 해 가을, 갑 속에 있는 거문고에서 소리가 울렸는데, 그 소리는 깊이 있으면서도 영롱하고 그윽한 소리여서 온 가족이 모두 이상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자 며칠이 지나 당시의 임금인 정조(正祖)가 병성(秉誠)에게 희령군의 사당을 모시게 하라는 분부의 교지(敎旨)가 내려졌는데, 당시의 사회 제도로 보아 희령군의 사당을 모신다는 것은 여간 명예(名譽)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명예가 있을 것을 미리 알려 준 어사금은 정말로 신비로웠다고 하겠다.
이후 그는 희령군의 사당을 수축하고 후손들에게 대대로 이 사당을 모셔 받들게 하였는데, 그 후에도 이 어사금은 후손들에게 스스로 신비로운 소리를 내어 길조(吉兆)를 알려 주었다고 하며 지금도 희령군의 사당에 고이 간직되고 있다.

원(元)나라에서 김이암(金李庵)에 보내 온 부처그림과 은향로(銀香爐)

  • 위 치 : 용문면 구계리

고려 중엽(中葉) 용문면 구계리에 김(金)씨와 이(李)씨 성을 가진 두 집이 살고 있었다. 당시 고려(高麗)를 지배하던 원(元)나라에서는 고려 조정(朝廷)에 대하여 매년(每年) 처녀(處女)를 공물(貢物)로 바치게 했는데, 어느 해 이 마을 두 처녀가 뽑혔다. 그녀들은 멀고도 먼 이국만리(異國萬里) 원나라 서울까지 끌려가게 되었는데, 두 처녀는 서로를 의지하고 도와 가면서 원나라 황제의 총애(寵愛)를 받아 왕비(王妃)가 되었다. 두 처녀는 귀한 왕비가 되었지만 고향을 잠시도 잊지 않았으며, 그리움을 견딜 수 없어 고려 조정에 부탁하여 자기들이 살았던 집 뒤에 작은 암자(庵子)를 짖게 하고 이름을 김이암(金李庵)이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큰 부처그림 하나, 작은 부처 백여 개를 그린 그림과 향로(香爐) 한 쌍을 이 암자에 보냈다고 한다. 그 후 두 처녀가 연(輦)을 타고 고향을 찾아와 그들의 부모를 뵌 후, 그 연을 김이암터 앞에 묻어 이곳을 연무덤(輦墳)이라 한다.
조선 말에 빈대로 인하여 폐사(廢寺)되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으며, 이 암자에 보관되었던 부처그림은 미면사(米麪寺 - 문경시 동로면)에 전해지고, 은향로(銀香爐)는 <예천군읍지(醴泉郡邑誌)>와 <교남지(嶠南誌)>엔 용문사(龍門寺) 정수암(淨水庵)에 보관되었다고 전해지나, <예천군지(醴泉郡誌)>엔 군수(郡守) 김귀현(金龜鉉)이 서울로 보냈다고 한다. <예천군지>가 1939년 편찬(編纂)된 것을 생각해볼 때 김귀현(金龜鉉)이 일본인(日本人)에게 상납(上納)하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그 후 김귀현은 왜인에게 빌붙어 전라도 도지사가 되었다.
국보급(國寶級)의 부처그림과 은향로가 우리 군에서 사라진 것은 참으로 애석하기 짝이 없다.

명(明) 나라 왕(王)이 내린 유엽배(柳葉盃)

  • 위 치 : 용문면 성현리

용문면 성현리 정재진(丁在鎭) 씨가 소유하고 있는 유엽배(柳葉盃)는 버들잎처럼 생긴 우리나라에서 매우 보기 드문 술잔이다.
이 유엽배는 그의 선조(先祖)인 정윤우(丁允祐)가 문장이 뛰어나 명나라 신종(神宗)으로부터 상(賞)으로 받은 것인데 모두 6개였으나 지금은 5개가 남아 있다. 이것의 재료는 구리에 황금(黃金)을 혼합한 오금(烏金)이다.
잔(盞)의 크기는 각기 다르나 가장 큰 것은 버들잎 모양의 길이가 11cm, 너비 5.7cm, 높이 5cm, 좌우(左右) 양쪽의 길이 5.6cm, 너비 1cm의 손잡이 부분이 붙어 있고, 가장 작은 것의 길이는 8.5cm, 너비 4.5cm, 높이 4cm, 손잡이 길이는 4.7cm, 너비 1cm이며, 가장 큰 것 안에 차례로 담으면 한 개의 술잔처럼 보인다. 이 집안에 따님이 시집갈 때 초례상의 술잔으로 사용했다고 <예천읍지>에 전해온다.
정윤우(丁允祐, 1539~1605)의 자는 천석(天錫) 호는 초암(草庵), 본관은 나주(羅州), 도승지, 병조참의를 지냈다. 생원(生員)과 진시(進試)를 거쳐 1570년(선조 3)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 1위로 급제(及第)하여 감사(監司)를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그의 아버지 응두(應斗)는 중종(中宗) 때의 문신(文臣)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선조(宣祖)가 즉위(卽位)하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또 그의 조부 옥형(玉亨)은 중종(中宗) 때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고 병조참판(兵曹參判) 때 명(明나)라에 다녀와 병조판서(兵曹判書), 좌찬성(左贊成)에 오르고 마침내 금천군(錦川君)에 봉(封)해진 대대(代代)로 나라 안과 밖에서 많은 업적(業績)을 남겼다.
그에 대한 일화로 “8도 감사를 지내면서 굶어 죽었다”고 전해 오는데 그 만큼 청렴(淸廉)하게 살았다고 한다.

초간정(草澗亭) 기둥의 도끼 자국

  • 위 치 : 용문면 죽림리 초간정

초간정(草澗亭 - 문화재자료제143호)은 용문면 원류마을 앞 울창한 수림(樹林)과 기암괴석(奇巖怪石)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 경승지(景勝地)에 우뚝 서있는 정사(亭舍)로서 1582년(선조 15) 초간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건립하였다. 초간선생(草澗先生)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백과사전(大百科辭典)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 보물 제878호)>을 편찬한 퇴계 문하(退溪門下)의 대학자이다.
전설1 : 옛날 어느 선비가 과거(科擧) 준비를 하다가 초간정 난관을 백 바퀴 돌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전설에 따라 난관을 돌다가 정자 밑 소(沼)에 빠져 죽었는데 남편을 잃은 부인이 원통하여 기둥을 도끼로 찍어 흠집을 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지금도 그 자국을 볼 수 있다. 선비가 빠져 죽은 그 소(沼)의 깊이가 당시 명주꾸리 1개를 펴도 모자랄 정도로 대단히 깊었다고 하나 지금은 많이 메워져 있다.
전설 : 1864년경 용문면 죽림 대소의 예천권씨(醴泉 權氏)들이 정자 주위를 거꾸로 100바퀴 도는 자에게 정자(亭子)를 주겠다고 하자 어느 초립동이 99바퀴를 돌고 나머지 1바퀴를 돌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익사(溺死)하자, 그 어머니가 도끼로 찍었다.
전설 : 옥매라는 기생(妓生)이 장고춤을 추다 물에 떨어져 죽자 화가 난 그의 어머니가 도끼로 찍었다.
주변에는 노송(老松)이 우거져 있고 물이 맑아 여름철에는 쉼터와 휴식처로 많은 사람이 찾고 있으며, 용문사(龍門寺)가 4km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항우(項羽)는 오강(烏江)을 건너지 않는다는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

  • 위치 : 용문면 하금곡리

권오복(權五福 : 1467~1498)은 본관이 예천(醴泉)이고 오기(五紀)의 아우이며, 자는 향지(嚮之), 호는 수헌(睡軒) 또는 소유(小游)이다.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홍문관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했으며 문장 필법이 탁월하여 한원(翰苑)에 뽑혀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사관이 되어 사초(史草)를 쓸 때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쓴 김종직의 글을 김일손(金馹孫)이 삽입하고 그는 사전(史傳)을 적어 넣었는데, 그 뒤 이극돈(李克敦), 유자광(柳子光)이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다가 이 사초를 보고 연산군(燕山君)에게 보고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김일손 등과 같이 극형(極刑)을 받았다.
그는 죽음의 형틀 앞에서도 꿋꿋이 기개를 버리지 않은 충신이요 열사였다. 이 때가 노친(老親)을 봉양하기 위하여 교리(校理)로 있다가 외임(外任) 3년째인 32세 때이며, 중종 때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고 예천 봉산서원(鳳山書院)에 모셨다. 그의 유고(遺稿)는 종손(從孫) 달성부백(達城府伯)이던 초간 권문해가 주워 모아 출판하고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사람들의 이름을 책 뒤에 붙였다.
특히 김일손과 교분이 두터워 시고(詩稿)를 고쳐달라고 시(詩) 한 수를 지어 같이 보냈는데 「뱀을 그리면서 발을 붙인 것을 졸(拙)하다 말고, 까뀌를 둘러 콧등에 붙은 흙 깎아 뗄 수 있겠는가(畵蛇着足休嫌掘 須把風斤斷堊?)」라고 하자, 「내게 영인(郢人)의 자귀(斤)가 없는데 어찌 향지(嚮之)의 콧등에 붙은 흙을 깎아 뗄 수 있겠는가(吾無風斥何以 斷嚮之之堊也)」라고 하였다.
공이 죽고 난 후 천계(天啓) 연간에 어떤 이가 상(喪)을 당하여 묘지를 과천(果川)에 정하였더니 그 곁에 고분(古墳) 하나가 있었는데 그 자제되는 사람이 역사 감독을 하는데 역군(役軍)의 잘못으로 고분 앞에 계절(階節) 돌 몇 조각을 빼내어 버렸더니 그날 밤 꿈에 홍포(紅袍)를 입은 장자(長者)가 고분에서 나오더니 몹시 화난 듯한 표정을 띄우므로 절을 하며 “누구냐?” 물었더니 “나는 한림(翰林) 권수헌(權睡軒)이다.”하고 무덤을 가리키며, “저게 나의 집인데 근자에 역군들이 와서 내 집을 짓밟고 뜰돌을 빼내어 심히 불안케 하거늘 그대가 어찌 금하지 않느냐?”하였다.
그 사람 역시 선비이므로 공에게 청하여 묻기를, “선생이 항우는 오강을 건너지 않는다(項羽不渡烏江)는 부(賦)를 지으신 분이 아니요?”하니 “그렇다.”하였다. 그 선비는 “예, 그러십니까? 빨리 고쳐 드리겠습니다.” 하고 꿈을 깨니 땀이 흘러 온몸을 흥건히 적셨다. 이튿날 고분(古墳) 앞에 가서 깨진 곳을 고치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연려실기술, 무오명현록)

국사봉(國師峯)

  • 위치 : 용문면 두천리 (뒤낫마을 뒷산)

국사봉은 뒤낫 마을 뒷산(732m)에 있는데, 용문면 두천리와 유천면 마천리, 사곡리와 문경시 동로면 인곡리와 경계지점(境界地點)이다.
국가에서 봉화대(烽火臺)를 세웠던 곳이라 하여 국사봉이라 불렀다고 하나 세워진 시기는 알 수가 없다. 이 곳에는 명당 묘터가 있으나 묘를 쓰면 이 고장에 비가 오지 않는다 하여 묘(墓)를 쓰지 못하며 극심한 한해(旱害) 때엔 용문(龍門) 면민(面民)들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 한해(旱害)가 계속되면 묘가 있는가 확인하여 묘가 있으면 파내기도 했다고 한다.
또 산불이 나서 국사봉 정상(頂上)에 불이 붙게 되면 하늘에서 비가 내려 불을 끈다는 전설도 있다.

용바위(龍岩)

  • 위치 : 용문면 두천리

두천리(杜川里) 마을 앞에 흐르는 개울가에 크고 넓은 바위가 있는데, 용(龍)이 또아리를 틀던 곳이라 하여 용(龍)바위라 일컫고 마을 이름도 이에 유래(由來)되었다고 한다.
또 지금부터 약 200년 전 경주(慶州) 손씨(孫氏) 진후(鎭厚, 1829~1901)라는 선비가 이 곳 큰 바위에 용암대(龍岩臺)라는 정자(亭子)를 지어 지나가는 길손들을 쉬게 하였다고 하여 용바위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선유동(仙遊洞)

  • 위치 : 용문면 사부리 (사부렝이)

사부리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을 피하여 경주(慶州) 김씨(金氏)와 전주(全州) 이씨(李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 뒷산이 매봉, 응봉, 증봉(시루봉)의 3개의 봉우리가 있고 삼봉(三峰) 아래 신선들이 놀았다 하여 선유동(仙游洞)이라 하였으며 마을 앞에는 “삼봉산하 선유동(三峰山下 仙遊洞)” 이라는 일곱 글자를 새겨 놓았다.
1900년 경 모래가 뜬다는 소문이 있어 마을 이름을 사부렝이(沙浮里)로 고쳤다고 한다.

사부리(沙浮里) 약수(藥水)터

  • 위치 : 용문면 사부리

사부렝이(沙浮里) 마을 서편에 200여 년 전에 생겼다고 알려지는 이 약수터는 피부병(皮膚病)에 특별한 효험(效驗)이 있다고 이름났으며, 이 약수터에 갈 때는 뱀이나 부정(不淨)한 것을 보면 약물이 나오지 않는다고도 하며, 길이 막혀 약수터에 이르지도 못하게 넝쿨 등이 길을 막는다고 한다.
약수는 가뭄이나 장마 때도 나오는 물의 양(量)이 늘 같다고 한다.

거북바위

  • 위치 : 용문면 사부리

사부리 마을 앞 느티나무 밑에는 거북바위가 있는데 현재 머리가 없는 상태이다.
옛날 사부리에는 천석(千石)을 수확하는 천석꾼이 많았다고 전해온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무렵에 유명한 스님이 길을 가다 두천리 사람들을 보고 선유동(仙遊洞)에 가면 마을 앞에 거북바위가 하나 있는데 머리가 두천을 보고, 항문은 선유동으로 두고 있어 그 바위를 그냥 두면 두천리는 가난을 면치 못한다면서 선유동의 거북머리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두천리 청년들은 몰려가 거북의 머리를 깨뜨리니 깨뜨린 머리에서 피가 흘러 60여 년 동안이나 땅이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둔지방(屯地坊)

  • 위치 : 용문면 내지리

새마 북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두운대사(杜雲大師)를 만나러 올 때 이 곳에 군사를 주둔시킨 곳이라 하여 둔지(屯地)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둔토(屯土)를 두고 둔전병(屯田兵)을 토착시켰던 마을이라 하여 둔전병리(屯田兵里), 또는 둔지병리(屯地兵里)라 하다가 둔지방(屯地坊)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이 마을의 시작은 정감록(鄭鑑錄)을 믿는 권씨(權氏)가 용문사의 앞산인 월봉(月峰)에서 남으로 10리 되는 곳에 병화(兵禍)가 못 미치는 십승지지(十勝之地)가 있다고 믿고 지금의 이 마을 앞 천장골에 터를 잡은 적이 있다고 하나 그는 다시 “여기는 자손(子孫)을 보전할 수는 있어도 귀(貴)히 될 수는 없는 곳이다” 하여 그 옆 골짜기인 구수골로 옮겨 살면서 뒤주처럼 사방이 꽉 막힌 곳이란 뜻으로 여기를 두지방 (杜地坊)이라 했다고 하는데 이 이름이 변하여 둔지방(屯地坊) 또는 “둥지뱅이”가 되었다고도 한다.

청룡사(靑龍寺)

  • 위치 : 용문면 선리 520-2

어림성(御臨城) 산록(山麓)에 소재하고 있는 이 사찰의 조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부석사(浮石寺)를 짓기 전에 감천면 주마산(走馬山)의 마두(馬頭)를 진압하기 위해 감천면 증거리 한천사(寒天寺)와 이 곳의 청룡사(靑龍寺)를 먼저 세웠다고 부석사기(浮石寺記)에 기록되어 있다. 오랜 세월(歲月)이 흐르는 동안 사찰이 허물어진 것을 1935년 경 불심(佛心)이 두터운 김준팔(金俊八)이 보호각 겸 법당과 요사를 지어 관리하여 오다가 1978년 12월 보조사업으로 중수했다.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 보물 제424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蔗那佛 坐像 - 보물 제425호),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는 청룡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절아래 선리(仙里) 마을에 전해 내려온다.
옛날 이 절터가 호수자리로 어느 정월(正月) 초하룻날 이 호수에 청룡(靑龍)이 하늘로 오르는 것을 어느 보살(菩薩)이 보고 절을 지을 곳이라 하여 사찰을 세웠는데, 낙성식날 “이슴”이라는 영물(靈物)이 크게 울면서 도망가기에 이 보살이 그것을 잡으라고 하여 이를 잡아 배를 가르니 뱃속에는 유난히 반짝이는 작은 구슬이 나와서 이를 부처 속에 넣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청룡사(靑龍寺)라 명명하였다. 그 뒤 큰 홍수(洪水)가 나서 절이 매몰되었다고 한다.

벼락바위(雷巖)

  • 위치 : 용문면 선2리 (절골 앞)

이 마을 절골 앞에는 큰 바위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벼락을 맞아서 갈라졌다고 한다.
이 바위 정상에는 움푹한 부분이 있는데 산모(産母)가 이 바위 앞에서 왼손으로 돌을 던져 넣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전해진다.
또 어떤 여인이 이 바위에 정성(精誠)을 들여 소원을 빌었는데 그 정성이 부족하여 하늘이 벼락을 내렸다 하여 벼락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곳에는 청룡사(靑龍寺)가 있는데 규모는 적으나 주변경관이 아름답고 병든 사람의 휴양지(休養地)로 적격이다. 문화재(文化財)로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 보물제424호)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遮那佛坐像 - 보물제425호)을 소장하고 있다.

맛질 서낭당

  • 위치 : 용문면 대제리

이 마을에는 여느 서낭당과 달리 세 곳이 있는데, 정월 보름에 함께 제사를 지내고 별신굿도 하고 줄다리기도 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상주(尙州)에 사는 조(趙) 대감에게는 어여쁜 딸이 있었는데 이웃에 사는 가난한 총각과 사랑을 하다가 대감의 노여움을 사게 되자 도망을 나왔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딸을 찾기 위하여 뒤를 쫓아오다가 지쳐서 텃골 어미서낭이 되었고, 그 딸은 맛질 뒷재인 민트리를 넘다가 처녀서낭이 되었으며, 대감의 딸을 따라 오던 총각은 작은 맛질 총각서낭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건물을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많이 낡아 있다.

도덕암(道德岩)

  • 위치 : 용문면 덕신리

마을 서쪽에 있는 덤바우봉(峯)에 높이 3.5m, 너비가 3m나 되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밑에는 굴이 하나 있다.
옛날 이 바위굴이 도둑의 은거지가 되어 이웃 마을에 피해가 심하였는데 마을에 젊고 기개가 있는 한 젊은 선비가 이 바위에다 도덕암(道德岩)이란 글씨를 크게 새겨 놓고부터는 도둑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이 바위의 이름이 도둑바위에서 덕암(德岩)으로 바뀌게 되었고 마을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어 덕암(德岩)이 되었다고 한다.
도둑골이 덕암으로 된 것은 밉지 않은 전설이지만 도둑골을 도둑놈과 결부시키는 것은 비약이다. 도둑골이란 지형(地形)이 도두룩하여 사람이 집을 짖고 살다 마을을 이루기에 불편이 없다는 고유어 지명이다.
또한 이 마을 입구에는 “개구리바위”가 있는데 논바닥에서 산등성이로 3m 가량 높이에 개구리처럼 붙어 있다 하여 붙여졌으며, 이는 백마산(白馬山)의 뱀바위와 눈싸움을 한다고 한다.
정월 초에 실을 걸고 제물을 얹어 놓고 기원(祈願)하기도 한다.

권별(權鼈)

  • 위치 : 용문면 죽림리 대수마을

전설 1) 초간 권문해(權文海)가 혈육이 없어서 쓸쓸하였다. 길가에서 쓰러진 자라(鼈)를 구해 주었다. 꿈에 용왕(龍王)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니, 부인이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 꿈에 용왕이 점지하였다고 하여 이름을 권별(權鼈)이라고 하였다.(朴榮濬 ‘韓國의 傳說’ 韓國文化圖書出版社 1972 第8卷 441쪽)
전설 2) 언젠기 권문해가 조정에서 물러오던 길에 자라를 팔려는 사람을 보고, 그 자라를 측은히 여겨 많은 돈을 내고 한강(漢江)에 다시 넣어 주었다. 미물의 생명까지도 아꼈던 선생의 자비(慈悲)로움을 엿볼 수 있다. 그 후 자라는 보은(報恩)의 뜻으로 현몽하여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였으나 아무런 바랄것이 없다는 권문해에게 만득자(晩得子)를 안겨주게 되었고, 이 아들이 바로 권문해의 독자인 권별(權鼈)이다. 그 후 권별의 후손들은 여로(旅路)에서도 자라를 보게 되면 구하여 살려 보내준다.
전설 3) 권문해는 일찍이 급제하여 벼슬을 하였는데, 슬하에 혈육이 없는 것을 몹시 섭섭했다. 그런데 시름시름 앓던 부인이 그만 죽고 말았다. 자식을 낳지 않았지만 그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몇 해 후 주위 사람들의 권고로 후처(後妻)를 맞이했다. 그러나 누구의 탓인지 자식이 생겨나지 않아 술퍼했지만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권문해는 길가에서 죽게 된 자라를 불쌍히 여겨 그것을 살려주었다. 그날 밤 꿈에 웬 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용왕인데 내 아들을 살려 줘서 고맙소. 그 보답으로 그대에게 무엇이든 줄까 하는데,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오?”라고 말하자, “예. 아무 것도 원치 않사오나 다만, 가문을 이을 후손이 없음이 한(恨)이 되고 있사오니, 자식을 점지해 주옵소서”라고 청하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 내 그대에게 옥동자가 태어나게 해 줌세.”라고 하더니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후 과연 부인에게 태기(胎氣)가 있어 만삭(滿朔)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 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용왕의 아들인 자라로 인해서 아들을 얻었다하여 이름을 자라 「별(鼈)」자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자손들은 자라를 먹지 않고, 길을 가다가도 자라를 보면 꼭 구해 주곤 했다. 같은 권씨라도 안동 권씨와는 통혼(通婚)을 한다는 것이다.
권별(1589~1671)은 용문면 죽림리 출신, 자는 수보(壽甫), 호는 죽고(竹所), 본관은 예천(醴泉), 초간 권문해의 독자,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병자호란(1636) 때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에 갔으나 삼전도(三田渡) 굴욕을 듣고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살면서 경사와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기자조선 이래 고려 말까지 왕실의 사적과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의 인물열전을 집대성한 <해동잡록(海東雜錄)> 14권을 저술하였다. 수직으로 용양위 부호군(龍양衛副護軍)에 올랐다

금당(金塘) 맛질 반(半)서울

  • 위치 : 용문면 상금곡리, 하금곡리, 제곡리, 대제리, 하학리

금당(金塘)은 상금곡리와 하금곡리, 맛질은 제곡리, 대제리, 하학리를 합친 마을로 금당과 맛질을 반서울이라 부른다.
전설 1) 명풍 남사고(名風南師古 : 李滉 弟子)가 말하기를, “ 이 마을과 맛질을 하나로 보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음이 아쉽다.:라고 하여 그 뒤부터 ‘금당 맛질 반서울’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전설 2) 조선 말엽 금당실(金塘室) 99칸 집 주인 양주대감 이유인(楊州大監 李裕寅)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경상감사, 법부대신, 한성판윤 등의 벼슬을 역임한 세도가였다. 그는 맛질에 살고 있는 처사(處士) 권경하(權經夏)의 집에 자주 놀러 가는데, 그 행렬이 한양의 왕가행차(王駕行次)와 흡사하고, 또 맛질에 와서 자주 교유(交遊)한다고하여 ‘금당 맛질 반서울’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嶺南의 傳說) 또한, 법부대신(法部大臣)으로 있을 때 서울 나들이 행렬이 컸다고 한다.
전설 3) 18세기에 높은 벼슬에 올라서 국왕을 보필하고 국사(國事)를 보살 핀 이 곳 출신이 많아 반조정(半朝廷)이라는 뜻에서 불리어졌다고 한다.
전설 4) 조선 초기 이성계(李成桂, 太祖)가 용문(龍門)을 도읍으로 정하기 위하여 그의 신하 권중화(權仲和, 柳川面 星坪里 出身)에게 닭을 한 마리 주면서, “이 닭이 울기 전에 용문에 도착하면 도읍을 정하겠노라.”라고 했는데, 닭이 이 고개를 넘어서면서 울었기 때문에 여기를 ‘금당 맛질 반서울’이라고 전하여 온다.
전설 5) ‘맛질’이란 작은 맛질에 우거(寓居)한 권의가 맏아들이어서 맏길(맛질)이라고 했으며, 또 마을 근처의 산과 들에서 마(薯, 고구마科 屬하는 山藥)가 많이 나서 ‘마를 캐는 길목’이라고 맛질이 되었다고 한다. ‘반서울’이란 권의의 아들 7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높이 되어서이다.

대골

덕암 북쪽 골짜기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기라고 했으며 대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댓골, 대골, 죽곡(竹谷)이라고도 했다고 하며, 또한 마을 앞산이 닭의 둥지 모습을 하여 닭이 알을 낳고 내려앉는 형국이라 하여 꼬꼬댓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옛날 선기도사라는 도인(道人)이 이 마을의 가난한 집에 시주하러 가서 후한 대접을 받고 집 터를 잡아 주었더니 이 집이 나중에 천석(千石)꾼이 되매 집터가 좋다고 해서 택곡(宅谷)이라 했다고도 한다.

부처님 앞에서의 거짓말

용문사(龍門寺)의 큰북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說話)가 있다
옛날 서울과 부산의 거짓말쟁이가 천하제일의 거짓말쟁이는 자기라고 자찬(自讚)하던 중, 서로의 소식을 듣고 ‘한번 만나서 내기라도 해봐야지’하고 각자 집에서 출발, 산천을 구경하며 예천(醴泉)에 도착했다. 예천이라면 금당 맛질과 용문사를 빼놓고 지나칠 리 없는 두 양반, 용문사를 찾아 하루를 부처님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오후 시간, 경내(境內)를 구경하던 중 서로의 행색을 살펴보니 시골 촌뜨기는 아닌 지라 통성명(通姓名)을 하게 되었다. 나는 서울 사는 김 아무개요...나는 부산 사는 박 아무개요... 서로 놀라는 눈치였으나 태연한 척 더 이상의 인사가 필요 없었다.
서울 김서방이 먼저. “아, 우리 집 뒤뜰에 오동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놈이 금년에 자란 새순이 너무 커서 꼭대기 가지를 잘라 북을 매려고 하나 그에 마땅한 가죽을 찾지 못했으니 답답한 마음 누가 알겠소”.
이 말을 들은 부산의 박 서방은 김 서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포 전에 우리 집 외양간에 있던 암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마굿간이 조금 비좁아 송아지 꼬리를 쬐끔 잘라서 그 가죽으로 북을 매려니 그만한 통을 짤 나무가 없어 당초 북을 맬 수가 없구려”. 했다나. 그럭저럭 해서 만들어진 북이 용문사의 큰북이었다니…
이 이야기는 용문사 큰북이 얼마나 큰 규모로 만들어졌나를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 속의 두 거짓말쟁이에게서 우리는 거짓말이라기보다 부처님 앞에서도 이러한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배포와 해학(諧謔) 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의 얼굴 한번 쳐다보고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말이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겐 신선한 웃음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거짓말을 간직한 큰북은 1984년 5월 8일 화재로 불타고, 다시 제작(製作)했으니 그 배포 큰 거짓말도 다 불타 버렸는지 새로 만든 큰북은 옛 전설을 뒤로하며 무더위 속 경내를 소리 없이 지키고 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예천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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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8.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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