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포리(浦里)
- 토일(吐日), 토곡(兎谷)록
해가 일찍뜨는 마을이라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며 할미성 北(북)쪽에 있고 봉화토일에 살던 영덕 박씨가 이곳에 새터를 잡고 살면서 전에 살던 마을 이름을 그대로가지고 왔다고 한다.
- 할미성, 할무성, 양지마, 뒷마, 고성(姑城)
옛날에 어느 풍수가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곳 지형이 할머니가 손자를 안고 있는 노고포손형이니 여기에 집을 짓고 살면 손자가 번창할 것이라 한데서 마을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후 안동 김씨, 청도 김씨, 파평윤씨가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하며 남향이어서 햇빛이 잘 비치므로서 양지 마을이라고도 불렀고, 현내동에 있던 면사무소가 1921년 곳으로 옮겨와 감천면의 중심이 되어 파출소, 우체국, 학교, 농협, 새마을 금고 등이 있다.
- 물골, 냇골, 장터, 시장(市場)
감천면 산물 유통이 이 마을을 통하여 이루어 졌으나 1일, 6일장이 섰으나 지금은 영주, 예천으로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다.
- 건너마, 음지마, 영평(永坪)
안동 권씨가 많이 살며 한길에서 건너다 보이는 마을이며 북향이어서 그늘이 많이 지므로 옹달지고 앞들이 넓으며 기름져서 영평이라고 한다.
- 새터, 신기(新基)
할미성 남서쪽에 위치한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하며 봉수산의 형세가 마치 "키" 형국이라 이 마을이 키로 곡식을 까부러 받아 놓은 듯 산의 오른쪽에 위치하므로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은 모두 의식이 넉넉하다고 하는 만담이 전하고 있다.
- 농바우, 구부정, 농암(籠岩)
마을 앞산에 있는 큰 바위가 바닥이 100여평이 됨직하고 그 위에 농같이 생긴 바위가 또 얹혀 있어서 마을 이름이 이에 유래되어 농바우 또는 농암으로 불리어 진다한다. 이 농바우는 동네에 길을 닦던 심술궂은 청년들이 수차 이바위를 굴려 밀어 냈는데도 그 이튿날 보면 다시 제자리에 올라가 얹혀 있어 신기하게 여겨 그 뒤로부터 재앙이 없어지라고 빌던 바위라고하며 지금도 그 바위를 두들기면 '둥둥' 소리가 난다고 한다.
- 갈래미, 갈람(葛藍)
칡덩굴이 우거진 북쪽의 산 아래 남향 받이에 위치한 마을이다. 람전 갈씨가 새터를 잡고 살아서 그들의 성과 관향을 따서 마을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 토골, 분터골, 분기(粉基)
산두복골로 들어가는 도랑건너 산비탈에 옛날부터 안동 권씨가 터를 잡고 살고 있는 마을이며 깨끗한 흙인 분토가 많이 나는 곳이라 한다.
- 복골, 복곡(福谷), 포동(浦洞)
둥글고 큰 바위가 동네 어귀에 있어 이 바위를 복바위라고 하여 사람들은 이 바위에 복을 빌고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고 하는데 이 복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복골 또는 복곡이라 한다고 하며 또 지형이 복처럼 생긴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산디밭골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 나만골, 여곡(餘谷)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근의 모든 마을을 점령했으나 이 마을만은 발견하지 못하고 침입하지 못해서 무사히 남아 있었다고 하여 나만골 또는 여곡이라 하였다고한다 복골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 산디밭골, 산두밭골, 산데박골
복골 동쪽에 산골짜기 밭에 산두벼(밭벼)를 많이 심었다하여 산두박골이라 한다고도 하고 또 마을 위치가 높아 산대박(산마루의 감천방언)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쓴 것이 변음이 되어 산디밭골이 되었다고 한다.
- 새람, 새랄, 신안(新安)
농바우에서 안동김씨가 농토를 따라 남동쪽으로 이주하여 새로 안착한 마을이므로 새람이며 신안이라고 하는 아담한 마을이다.
덕율리(德栗里)
- 돌고지, 석곶(石串)
감천 - 풍기선의 도로변에 위친한 마을이며 여기서 멀리 북쪽으로 보이는 주마유이 흡사 말 형상과 같아 말이 달려오면 붙잡아 메기위하여 돌을 모아 돌 말뚝을 만들었다하여 지금 그 자리에는 큰 느티나무가 바위틈에 자라고 있고 그 나무 밑에 조그마한 암자 정암사가 있다.
- 새마, 신촌(新村)
덕율 삼거리에서 풍기방면으로 약 1500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1600년경 예천임씨가 정착 개척하여 신촌 즉 새마라 하였다 한다.
- 막싯골, 막곡(幕谷)
겨울이면 방같이 따뜻하고 여름이면 수목이 우거져 시원한 곳으로 산이 서방을 막아서 움막을 친 방 같다는 뜻이라고 하여 진성이씨가 사는 마을이다.
- 개거리, 가거리(可巨里), 과거리(科擧里)
옛날 예천임씨가 과거에 급제하여 이곳에 주거하면서 과거리, 가거리라고 하던것이 세월이 흘러 가매 차차 음전되어 개거리로 불리게 되었다고도 하고 마을앞산 모양이 개가 앉아 있는 형상이라하여 개거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못골, 모싯재, 지곡(池谷), 지촌(池村)
덕밤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200여년전에 마을 어귀의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못을 파고 예천임씨가 개척한 곳이지만 지금은 각성촌이며 못이 없어졌다.
- 새터, 신기(新基)
200년전에 상주 김씨가 정착하여 새로 마을을 이루었으며 이어서 안동김씨가 들어와 큰 동네를 이루었다.
- 수용골, 수용(水龍)
1870여년에 남인인 양주석이라는 이가 개척하여 마을이름을 양귀동이라 하였으나 산새가 용과 같고 산골 양쪽에 낮은 산과 중간에 높은 산줄기가 마치 물수(水) 지형으로 골짜기를 이루고 있어 용수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하며 또 마을 안에 못이 있어 와용음수형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 하여 수용이라 했다고도 한다.
- 덕밤, 덕율, 덕률(德栗)
크고 탐스러운 밤이 난다고하며 이 일대에서는 사람이 가장 오래 산곳이다. 예천임씨가 조선 세조때 이곳으로 옮겨와 살면서 밤을 심어 밤송이처럼 세상과 인연을 끊고 덕을 심는다고 마을 이름을 덕밤이라 했다 한다. 그 뒤 임씨는 동편마을인 새마로 옮겨가고 권씨황씨가 살고 있다.
- 이태골, 이택골, 옛텃골
밀양박씨가 떠난 옛터가 있는 골짜기에 조선조 중엽 진주강씨들이 들어와서 남향으로 마을터를 잡고 살았다는 명성촌이다.
- 호박골, 호복곡(虎伏谷)
새마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 모양이 마치 범이 엎드려 있는 형상으로 생겼다하여 虎伏谷이라 하기도 하고, 또 호박을 심으면 많이 열리던 곳이라고 하여 호박골이라 하기도 한다.
- 만맛, 만말, 만촌(晩村), 상관동(上官洞), 만장동(晩場洞)
조선 현종때 이 마을 터를 잡은 신천인 강광윤이란 선비가 처음들어 올 때 해가 저물 무렵에 들어와서 마을을 개척하였다하여 만촌이라 칭하였다고 하며 덕율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앞들이 비옥하고 넓고 햇빛을 받는 시간이 길어 벼를 심어도 농사가 잘되며 해가 늦게 져서 만촌이라 칭한다는 유래도 있다. 위치에 따라 서녘마, 안마, 웃마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관현리(官峴里)
- 홍현, 홍고개, 홍구개, 홍구동(紅九洞)
1530년후 민 혜가 마을을 개척하였다하며 이로부터 약 150년 후부터 권씨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많이 나와 홍비를 받은 사람이 아홉 사람이므로 홍구개, 또는 홍구동이라고 했다고 하며 또 마을 뒷산이 평사낙안형국이므로 홍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나래쟁이, 나루쟁이
약 130년전에 처음 마을이 생기게 되었다 하는데 산세가 마치 새의 날개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홍고개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10여가구가 살고 있다.
- 구루미, 두루미, 구루뫼, 운산(雲山)
이 마을은 의성김씨 집성촌으로 500여년전 김 모라는 선비가 정착허여 세거하고 있는 마을로 홍고개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산세가 두루미처럼 생겼다하여 두루미라 하였다고도 하고 또 구름처럼 아름다운 산 밑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구름뫼라 불렀다고도 한다.
- 화곡(花谷), 꽃실, 고실, 고곡(高谷)
1670년경 전주이씨가 처음으로 입향해서 살았다고 하는데 부용봉(688M) 남쪽에 위치하여 지형이 꽃봉오리와 같이 생겼다고도 하고 또 온갖 꽃들이 많이 피던 골짜기로 서방이 막혀있어 임진왜란때는 피난지라고도 전하고 있다. 이 마을 북쪽에는 진장촌이라는 마을이 있고 동쪽에는 꼭대기에 바위가 많은 돌고지란 외딴 산이 있다.
- 점마, 옹기골, 옹기점, 점촌(店村)
고실 동쪽에 있는 마을 약 50여년전까지 약 100년간 이곳에서 옹기를 구웠다.
천향리(泉香里)
- 벼트리, 베트리, 학교마을(校村)
1750년경 예천임씨가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귀"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이문이라 하였는데 1932년경에 김휘국, 이승우등이 마을을 다시 정리하여 햇빛이 잘 비치는 양지바른 마을이라 하여 벼트리로 불리었다 한다. 현재 삼천초등학교가 있는데 예천, 감천, 천향동, 천이 세 번 있으므로 삼천이라 한다.
- 샘밭, 천전(踐田)
1755년경 온양정씨가 개척한 마을로 마을 어귀에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줄지 않으며 추워도 얼지 않는 샘이 있다고 하여 마을이름을 샘밭이라고 한다.
- 진밭, 이전(泥田), 진전(眞田)
샘밭 남쪽에 400여년 전에 전주이씨가 처음 들어와 살때 땅이 질다하여 생긴 이름이지만 지금은 마을앞의 하상이 낮아져 질지 않다.
- 석평(石坪), 석전(石田)
오향남에 조선 영조 8년(1732)에 진성이씨, 의성김씨, 안동권씨 삼성이 마을을 개척할 때 수석이 아름답고 바닥에 반석이 깔려 있으므로 석평, 석전이라고 불렀다한다.
- 갓재미, 관산(冠山), 입암(笠岩)
오향북쪽 갓재 밑에 있고 옛날부터 이곳에 갓을 만드는 사람이 살았다고 하여 갓재미 또는 관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이 마을 뒤 산정에는 갓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이산을 관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 놋재미, 놋점, 유점(鍮店)
오향마을 서쪽 높은 산기슭에 있는 골짜기 마을인데 옛날 지하에서 녹물이 흘러나와 그 녹물로 놋그릇을 만들었다고 하여 놋재미, 놋점이라 불린다고 한다. 이 마을뒤에 유점사란 절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다고 한다.
- 오향(梧香), 오의향촌(烏衣鄕村)
오동나무가 밀직되어 오동꽃의 향기가 향긋하게 풍겼다하여 생긴 동명이라고 하며 오동나무 몇 그루가 지금도 남아 있고 수석이 매우 아름답다. 1619년에 이복기의 아들이 유점산을 개척하여 오향이라 하였다한다.
진평리(眞坪里)
- 넘바우, 너분바우, 광암(廣岩)
300여년전 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마을입구에 넓고 큰 바위가 깔려있어 마을 이름을 너분바우 또는 광암이라 부른다고 한다.
- 서뭇들, 섬두들, 도평(島坪)
임진왜란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하며 마을 앞의 석곳천이 들을 안고 감도는 모양이 마치 섬처럼 생겼다하여 서뭇들 또는 섬두들 이라한다. 1590년 안동인 김유근이란 사람이 개척하였다고 한다.
- 아트샘, 아리샘, 아룻샘(蛾山, 牙山)
400여년 전에 피난터를 찾아 이곳에 온이가 마을 앞산이 마치 어금니와 같은 지형이며 서방이 산으로 둘러 싸였으므로 길지라하여 정착한 후 마을 이름을 아산이라 했다 한다.
- 자붕이, 자붕, 자봉(雌鳳)
높이 253m의 자봉산(芙蓉峯)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자붕 또는 자봉이라 부른다고 하며 300여년 전에 권중기라는 이가 처음으로 입햐안 마을이라 한다. 마을 복판에 봉의 알처럼 생긴 작은 산봉우리가 3개가 있어 이곳을 자봉포란형의 명당마을이라고 했는데 일제 말엽에 이것을 모두 없애 버렸다고 한다.
- 질무리, 진돌, 장수(長水)
고려때 부터 있던 마을로 진작 서북쪽에 있는 부용산의 깊은 골 물이 흘러내리는 곳에 생긴 마을로 마을 앞으로는 옛날 한길이 있어 풍기와 예천을 잇는 중간 지점이므로 관원들이 쉬어가던 곳이라 한다.
- 금성골, 금성(錦城)
이 마을은 자봉의 한 모퉁이인 산기슭에 있으며 산수가 비단같이 아름답게 둘러있고 금성폭포가 있어 그 경치가 아름답다하여 금성골이라고 불러지고 있다.
- 삼거리, 주막거리
주막이 있었고 여기서 예천, 풍기, 감천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어 오고가던 나그네가 쉬어가던 마을이라 하여 삼거리 또는 주막거리라 알려지고 있다.
- 용잿마, 영잿골, 용조(龍조)
산과 골의 지형이 용을 낚는 형국이라 하여 불려진 마을 이름이라 하기도하고 또 호재사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그 절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으로 삼았던 것이 변음도어 영잿마라 불렀다고 한다.
- 진재기, 진작(眞勺)
1750년경 정광은이란 이가 개척하여 용정이라 하였으나 1860년경 정심이가 진작으로 개칭하였다. 용정사 절터 옆에 위치한 마을로 현 진평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며 지형이 마치 작자 형국이라하여 진작이라 한것이 변음되어 진재기라고도 불린다한다. 현감 권심언이 살았으며 용문면에서 안동권씨가 옮겨와서 그 후손들이 진양, 진작, 진밭등 삼진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벌방리(閥芳里)
- 용새이, 용상(龍上), 용산(龍山)
용의 형상을 한 부용봉 줄기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 중턱에 마을이 잡고 있어 용상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외벌의 맞은 편에 있고 4가구가 살고 있다.
- 사급(泗級), 사급촌(士汲村)
벌방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냇물 줄기가 서방을 둘러 흐른다고 하여 1620년경 풍산 김씨가 살면서 동명을 지형에 맞추어 지었다고 하는 곳이고 뒷산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 벌봉, 벌방(閥芳)
안 마을과 바깥 마을에서 각가 40여가구씩 주거하고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 전에 예천임씨, 감천문씨, 순흥안씨들이 같은 무렵 터를잡고 뒤이어 강능 유씨가 들어왔다 하며 이 마을뒤에 있는 주마산(508m)줄기가 마을 앞까지 닿아 문벌이 번성하리라는 뜻으로 벌방이라 했다한다. 또 마을복판에 꽃봉오리처럼 생긴 외딴산을 벌봉이라 한다. 북쪽 안마을은 내방이라 하며 남쪽 바깥 마을은 앞마 또는 외벌이라고 한다.
수한리(水閑里)
- 한티, 한터, 대치(大峙), 한기(漢基)
한티고개 밑에 있는 영주시 봉현면 하촌리와 예천군 하리면 동사리와의 접경을 이루는 곳으로 부용봉(699m)바람이 시원하고 차(寒)서 한터라고 했다하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300여년 전에 박한수라는 이가 살던 곳으로 "한(漢)이 사는 터"라 하여 한기라고도 했다고 한다.
- 무래이, 물한, 물안(物安), 수다촌(水多村)
고려말 목 정승이란이가 이곳에 살면서 서방이 높은 사느로 둘러싸여 있고 아늑하여 만물이 평안하다고 물안이라고 하고 파자해서 물안이라 했다고 하나 물아래라는 뜻 곧 산은 높고 골이 깊은 곳에 생긴 평범한 마을 이름을 한자로 취음해서 뜻을 준 것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마을 뒤 골짜기인 못골에는 지금도 목 정승이 살던 옛 집터의 주춧돌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약 500여년 전에 홍덕이란 이가 개척했다고도 한다.
현내리(縣內里)
- 안마, 안동네, 양달마, 현내(縣內)
고려시대부터 감천현이 이곳에 있어서 현청 눈안에 있었다하여 현내, 문안, 안동네라고 한다. 마을이 형성될 당시에는 최씨, 유씨, 이씨, 장씨 등이 터를 잡아 살았으며 지금은 100여 가구에 한양조씨가 가장 많이 산다. 마을 중앙에 감천이란 식수정이 있고 감천 북쪽에는 군기를 쌓아두던 군기밭이 있으며 감천현청의 자리였던 현내리 581번지는 1921년까지 감천면사무소가 있었다. 이 마을의 동쪽에는 음달마와 건너마, 서쪽에는 서쪽마 동북쪽에는 창마가 자리하고 있다.
- 창마, 창동(創洞)
안마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현내동 350번지에 있던 감천현의 민창인 억갈고가 1921년에 헐리고 그 터에 생긴 마을로 창이 있던 마을이라고 창마 또는 창동으로 불리게 되었다한다. 창이 있을대 쌓았던 담자리가 남아 있다함.
- 음달마
북쪽으로 산이 둘러쌓여 있어 해가 늦게 뜨므로 해서 생긴 이름이라한다. 여기 거주하는 주민들은 안마를 가리켜 양달마라고도 한다. 이 마을 산기슭에 권, 조 , 김, 이의 네 문중이 봉산 서당이 있다.
- 서짝마
안마에서 북서쪽으로 자리잡은 마을이며 창마 서쪽에 있으므로 붙여진 마을 이름이라고도 하고 감천현 서문 밖이라는 뜻이라고도 하는 양지바른 곳이다.
- 건나마, 건느마
현내동의 들판을 지나 앞 개울물을 거난야 이 마을에 갈수 있으므로 생긴 동명이며 앞들이 수세가 좋고 토질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되는 고장이고 안마와 마주보고 있는 마을이다.
- 평지마, 평촌(平村)
창마 남쪽에 있는 넓은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므로 평촌이며 열두산골 마을의 가장 끝 마을이고 부근에서 은붙이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고 하나 그 까닭은 아직 모른다.
증거리(增巨里)
- 증걸, 진걸, 증거(增巨), 수곡(水谷)
한양조씨 집성촌으로 산 밑을 흐르는 개울이 앞에 있는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개울은 감천지로 유임된다.
- 중미, 중산(中山), 증미(增美)
1670년경 의성 김씨의 어떤이가 개척하였다 하며 1720년경 한양인 조현상이란 이가 들어와 살았으며 높은 산 밑의 낮은 골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중산이라 부른다 한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은 현내리에 있는 감천지로 유입된다.
돈산리(敦山里)
- 산골, 산곡(山谷), 산동(山東), 산동(山洞)
조선영조 한양인 조보양이 유동에서 고방산(주마산:라치사)동쪽에 터를 잡아 산동, 산동이란 동명을 지었으며 동구에 있는 독서동에 서당을 건립하고 문도들을 모아 강학하였다. 독서동에는 장인석(將岩)이란 큰 바위가 있었는데 송원구라는 이가 깨뜨려 버렸고 앞 명금간에는 잉어바위가 천연어형으로 누워 있다 산동마을 중앙에는 거북바위와 크고 둥근 우뚝한 바위들이 군데군데 박혀 있고 주마산 동쪽에 반월산이 있어 나직한 산들이 마을을 푹 둘러싸고 있다.
- 돈닷, 돛닷, 돈답(敦沓), 돈전(敦田)
300여년전 김해 김씨가 터를 잡은 마을로 마을 복판의 지형이 낮아서 물이 고일형국이고 또 마을이 마치 돛단배의 모양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돛 닷이라 했다고 한다.
유리(酉里)
- 유동(酉洞, 幽洞)
마을의 생김새가 닭이 알을 품은 형국인 금계포란형이라 하여 유래된 동명이며 감천현과 역사를 함께한 오래된 마을로 마을 복판에는 달걀처럼 생긴 바위 계란암이 있다. 그리고 이 마을 특산품인 배(梨)는 관배(官梨)라고 하여 전에는 진상품이었다고 한다. 남산대는 78년도 대통령각하 하양김 150만원으로 하수구 150M을 개설하였으며 정부보조금으로 진입로 203M 석축을 확장하였다.
- 범바우, 호암(虎岩)
1720년경에 김해 김씨와 경주최씨가 들어와 마을을 처음 개척하였다 하는데 마을 뒷산에 있는 마치 범 같이 생긴 큰 바위가 마을을 내려다보는 형상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범바우 또는 호암이라 하였고, 또 마을이 골자기 깊숙한 곳에 있다고 하여 안마라고도 불렀다한다.
- 새마, 신촌(新村)
범바우에 살던 안동 권씨들이 본디 살던 마을로 떠나 새로 옮겨와서 터를 잡고 살면서도 본동이 그리워 새마라고 한다는 마을이다.
- 방미들, 추잣들, 방산평(芳山坪)
마을옆에 있는 산이 마치 쌀을 씨슨 이남박 형국이라 하여 유래된 이름이며 유리 앞들에 위치한 마을이다. 또 마을 앞에 외딴 산이 있는데 그 산에 추자나무가 많이 있어 추잣골이라 한다고도 한다.
미석리(美石里)
- 성남, 석남(石南)
마을 북쪽에 20여개가 넘는 마치 황새같이 생긴 입성이 있고 그 바위 남쪽에 집을 지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하며 지세의 고저에 따라 아랫석남, 웃석남으로 나누어 부른다. 310년 전에는 안동 권씨가 개척하였다한다.
- 골마, 곡촌(谷村)
귓골 남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며 석남이라기도 하는 바위 남쪽 건너편 낮은 곳에 있고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하다는 안동권씨들이 세거하는 마을이다.
- 귓골, 깃골, 귀곡(龜谷), 이곡(耳谷)
마을이 마치 사람의 귀모양으로 들 양쪽에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 앞에 큰바위들이 모여 생긴 돌무더기가 마치 거북모양으로 생겨 이 바위 때문에 한번도 외세의 침입을 받은 일이 없다고 하는 명당 마을이라 하여 귓골 또는 귀곡으로 불린다고 한다. 청풍 김씨 집성촌이고 미석이란 동명도 이 바위로 인하여 생겼다고 한다. 1780년경 김행번이 개척했다한다.
- 우뭇골, 정동(井洞)
마을 가운데 샘이 있고 수원이 풍부한 곳이며 불당골 북쪽 우뭇하게 생긴 곳에 마을이 있으며 물맛이 좋고 가뭄에도 물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우뭇골이라 한다. 일제 중엽부터 5가구가 산다. 60여년전 원주민 변구식이 석남에서 이곳으로 처음왔다고 함.
- 불당골, 불탕골, 불당곡(佛堂谷)
화전을 하던 곳이며 석남 남쪽에 불당이 있었던 자리라하여 불당골이라 한다. 조선인조 병자호란 후에 우순차이 터를 잡았다고 한다.
- 사당골, 사당동(祀堂洞)
석남 마을에 살던 권씨들이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던 골이라 한다. 지금은 사당터도 없어 졌지만 골자기 이름은 그대로 내려오는 마을이다.
- 솔미, 사당동(祀堂洞)
광복이후 영주시 문수면 벌사리에서 전주이씨가 농토를 따라서 이곳에 이주하게 될 때 이곳 들 이름을 그대로 마을 이름으로 삼았다 하는데 솔무더기 산이 있음.
- 선둣골, 선도곡(仙道谷), 선등(仙登)
10여가구가 사는 마을로 조선초 권효당이 터를 잡은 곳이라 하며 명주와의 군계에 위치하므로 경계의 선두에 있는 곳이란 뜻으로 선둣골이라 하였으며 또 선도를 닦는 사람이 살았다하여 선도곡, 선녀가 천등했다 하여 선등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1400년경 안동 권건이란 사람이 마을을 개척했다한다.
대맥리(大麥里)
- 한산(漢山), 대산(大山)
마을의 위치가 이웃 마을보다 높은 곳으로 표고 241M의 한산 앞에 위치한 고려때부터 있었다는 마을이다. 고려중엽부터 여기에 단양 우씨들이 들어와서 살면서 마을 이름을 한사이라고 하다가 조선초에 이 마을에 살던 우동지라는 이가 살인의 누를쓰자 동네 이름이 나빠서 화를 입었다고 하여 대산이라고 고쳤다한다.
- 사느실, 사늬실, 산의실(山宜谷)
쇠실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산과들이 서방으로 둘러싸서 아늑한 곳으로 한산여에 마을이 위치함이 마땅하다하여 1460년경 의성김시 김동휘가 처음으로 한산여록신기지를 개척하였다. 산의곡(산의실)이라 하였고 위치에 따라 아릇마, 웃마로 구부나여 부르기도 한다.
- 쇠실, 우곡(牛谷), 금곡(金谷)
마을뒤의 한산이 마치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이고 예날에 우부자가 돈을 많이 가졌다고 하여 쇠실이라 했다 하며 또 옛날에 이웃마을과 동떨어져서 지상 물정을 모르고도 살만한 곳이라 하여 세격실이라 하였는데 이 이름이 오래 전하는 동안 새실이 되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에도 무사하였다고 한다.
- 장잣골, 장자골(長者骨)
방탑골 뒤에 있는 골짜기에 예날 큰 부자가 살았기 때문에 장자골이라고 했다 하며 부자가 있는 곳에는 거지가 있기 마련이라 지금도 거지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동리입구에 2개가 있으며 6.25동란 전에는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2가구만이 살고 있다.
- 버리골, 보리골, 봉동(峰洞), 맥동(麥洞)
조선조 초기 때 강능 김씨들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함. 금댕이 북서쪽 골짜기에 있고 감천에서 영주로 넘어가는 버리골재가 마을 앞에 있고 마을뒷산 큰 바위가 있어 이 바위위에 빗물이 괘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아니하여 백두산의 천지와 같다고하여 이물을 천수라고 하는데 한약을 다리면 약효가 신효하다고 믿고 있다. 예천지방 방언의 "버리"는 봉과 맥의 두 가지의 뜻이 있어서 뒷사이 벌통처럼 생겼다하여 버리골 또는 봉동으로 불려오다가 일제말엽 이지역에 보리를 많이 갈고부터는 버리골, 즉 맥동으로 요사히 부르고 있다.
- 새마, 옥계(玉溪)
밑에 새로된 마을 사느실 북서쪽에 범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는 복호혈이 있다함.
장산리(獐山里)
- 노르미(장산)
말골, 권신계, 가자골 일대를 총칭하는 마을이름이며 지형이 노루가 한가로이 불노초를 뜯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유래된 이름이라한다. 1400년경 김노영이란 사람이 개척했다함.
- 소리골, 소리가, 연곡동(鳶谷洞)
마을의 바른쪽에 있는 산의 지형이 마치 솔개가 날아가는 모양(鳶谷形-연곡형)이라 하여 연류된 명칭이라 하기도하고 도 형해 손씨가 약 270년 전에 터를 잡았으며 "손씨사는골"에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50가구가 아래, 윗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 참새골, 찬새골, 한천(寒泉)
약 120년전에 황씨, 조씨가 터를 잡아서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웃소리골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마을 한복판에 있는 샘물이 매우차서 생긴 마을이름이라 한다.
- 권승개, 권신계
내성천변 말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초에 권씨성을 가진 사태 새로터를 잡은 마을이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 가자골, 가좌동(可坐洞), 가좌골(可左谷), 가곡(佳谷), 송인동(松仁洞)
조선초 영일인 정연흥이란 사람이 개척하였다하며 마을의 지형이 마치 가재처럼 생겼다하여 가자골이라 한다고도 하고 도 처음 마을을 이룰때 소나무 숲속의 다래덩쿨을 해치고 터를 다듬어 송인동이라고도 하며 배산임수한 아름다운 고장이라 하여 가좌곡 또는 가곡이라고 한다. 아래위로 떨어져서 두 동네를 이루고 아랫가자골은 마촌동에 속한다.
- 동짝말골(東斗谷), 마곡(馬谷), 마읍(馬邑)
1400년경 경주인 김노영이란 사람이 개척하였다고 하며 마을에 달마산이란 산이 있어 유래된 이름이라하며 또 마을의 지형이 말(斗)을 엎어 놓은 듯해서 말골이라 했다고 한다.
마촌리(馬村里)
- 말골, 마곡(馬谷), 마읍(馬邑), 마촌(馬村)
달마산 동족에 있는 마을로 그 산의 모양이 마치 말처럼 생겼다하여 말골이라 했다하며 이 일대는 윈래 보문면에 속하여 1914년부터 1928년까지는 보문면 소재지였는데 1983년 2월에 감천면에 편입되었다. 임영원이란 사람이 개척하였다고 전함.
- 아릇가자골, 아랫가자골, 하가자곡(下佳左谷)
장산리의 가자골 낮은족에 위치한 서족 마을이다. 마을앞 개울가에서 가재가 많이 잡힌다고 하며 지형이 바위를 지고 있는 가재 모양이라고도 한다. 1570년후 정태홍이란 사람이 개척 소나무가 많아서 처음에는 송인동이라 하다가 마을앞으로 흐르는 내성천이 있고 삼면이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 쌓여있어 형곡이 아름다워 가좌곡이라고 하였다.
- 고라골, 고랏골, 경동(鯨洞)
어분골 위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의 지대가 높아서 여름에 장마가 지면 큰물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성난 고래가 물을 토하는 소리와 같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고라골 또는 경동이라 했다 한다.
- 어분골, 어붕골
앞들이 붕어 모양이라 하여 어경골 또는 어봉곡이라고도 하며 또 감천과 예천의 어우름(분지점과 접합점)이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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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22.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