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금능리

  • 설름, 큰마, 선름(仙?), 대촌(大村), 금릉(金陵)

    마을 뒤에 높이 200m의 봉황산(鳳凰山)이 있으므로 중국의 봉황대가 있는 금릉(金陵) 이름을 땄으며 또 뒷골 모양이 고방처럼 생겼고 거기 신선이 놀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선름(仙?)이라 했다 하며 경주 이씨(慶州 李氏)의 세거지역(世居地域)이다. 또 이 마을 안쪽에 안설름이 라는 마을이 있고, 마을은 동남향(東南向)이다.

  • 비정골, 비접곡(飛蝶谷)

    새마 동쪽에 있고, 마을의 지형(地形)이 나비가 날아가는 모양과 같이 생겼다 하여 비접골이라 하던 것이 변음되어 비정골로 불리어진다고 한다.

  • 새마, 신촌(新村)

    지보면(知保面) 너리바우에 살던 예천 임씨들이 옮겨 와서 새로 마을을 이룬 곳이라 하여 새마라 부른다. 금릉리에서는 가장 늦게 생긴 마을이다.

  • 샘마, 천리(泉里)

    설름의 한 마을이며 큰마와 안설름 사이에 있고 마을 복판에 큰 샘이 있어서 샘마라고 한다.

내신리

  • 안골, 내동(內洞)

    신당골의 한 마을이며 마을 뒤의 화봉산 동쪽에 새로 생긴 못이 있었으므로 옛날부터 신당(新塘)골이 되었으며 화봉산 기슭의 무구, 목골, 세골, 안골 중 안골에 위 치한 신당못 안쪽이고 못 뒤 남쪽이며 규모있는 전형적인 농촌이며 진성 이씨(眞城 李氏)가 산다.

  • 양지마, 양촌(陽村)

    종일토록 햇볕이 잘 드는 나지막한 언덕바지 마을이라고 양지 마을이다.

  • 새마, 샛마, 신동(新洞)

    안골에 살던 진성 이씨가 조선(朝鮮) 중엽 움달을 피하여 양지바른 곳으로 옮겨 와서 못뒤와 모산의 중간에 새로 개척한 마을이다.

  • 여스밭

    내신동의 입구 마을로 이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인 수령(樹齡) 150여년 된 느티나무가 이 마을의 상징이다. 옛날에는 숲이 우거져 여우가 많이 살던 깊은 골짜기를 약 390 년전 평산 신씨(平山 申氏)가 개척(開拓)한 단일 씨족(氏族)의 농촌 마을이다.

  • 모산, 지내(池內)

    범장골 서편에 있으며 소쿠리 테모양의 양지바른 지형(地形)이다. 또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앞에 못이 있었고, 그 못 안쪽의 동쪽에 안동(安東) 권씨(權氏)만 사는 마을이 지 내이다.

  • 큰마, 못뒤, 지후(池後)

    마을 앞에 신당못이라는 큰 못이 있었고 그 못의 뒷골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못뒤 또는 지후라고 불려지며 내신동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라 하여 큰마라고도 불려지고 있다.

  • 범장골

    신당초등학교가 있는 마을이며 풍수설에 먹는다고 하여 이 범장골에 맞추어 개를 상징화한 산이나 골이름이 주변에 많이 흩어져 있다.

  • 신당골, 신당동(新塘洞)

    신당못 부근에 있는 마을이며 1914년 전까지는 신당면(新塘面)의 중심지였다. 이 마을에는 사육신(死六臣)과 절의(節義)를 함께 한 죽림 권산해(竹林 權山海)를 모신 노봉서원(魯峯書院)이 있다.

담암리

  • 담바우, 담암(淡岩), 장암(墻岩)

    인동 장씨(仁同 張氏)가 세거(世居)하고 있는 마을로 마을 입구에서 서북쪽으로 돌아서 1km가량 떨어진 산밑 한천(漢川)변에 둘레 10m, 높이 2m 정도의 칼모양의 바위가 있었으며 바위 밑에는 항상 깨끗하고 따뜻한 물이 자생(自生)하여 고여 있어 담암이라 하였다.

백송리

  • 행소리, 흰소리, 흰쇠리(白金里), 백송(白松)

    芝山(건지산) 동남쪽에 있는 동남향(東南向)마을로 70여 가구의 진성(眞城) 이씨(李氏) 집성촌이며 그들 조상(祖上)이 이 마을을 개척할 때 백송이 있었으므로 그것으로 마을 이름을 삼았다 고 하며 지금도 그 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던 선몽대(仙夢臺) 뒤쪽을 백송터라고 한 다.

본리

  • 새랄, 사리울, 사라, 위라곡(位羅谷), 분동(分洞)

    옛 위라면(位羅面)의 중심이 본동이었으며 1490년 마을에 살던 임석룡(林石龍)이 개척(開拓)했다. 옛날 삼한(三韓)때 사기점이 있었으므로 사라울이라 하였는데 변하여 사라, 새랄이 되었다고 하며 1914년 호명면(虎鳴面)에 폐합(廢合)되면서 위라곡면소(位羅谷面所)가 없어졌다. 마을 뒤에는 두사총(杜師聰)이 잡아 준 묘터를 찾지 못하고 여기에 안장(安葬)했다는 약포 정탁(藥圃 鄭琢)의 묘가 있 어서 위라곡이라 부른다.

  • 밭마, 밤마, 외촌(外村)

    새랄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며 예천 임씨(醴泉 林氏)가 산다. 1430년 김후석(金後石)이 개척(開拓) 당시(當時) 밤나무가 많았다 하여 밤마을이라 했다고도 하며 사방(四方)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 으며 논보다 밭이 많은 곳이라는 뜻의 마을 이름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관개(灌漑) 시설(施設)이 매우 잘 된 부촌이다.

  • 가른밭, 기전(岐田)

    새날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앞 냇가의 갈대밭을 일구어 옥토로 만들고 마을을 이루었으며 갈림길이 있는 김해 김씨(金海 金氏)가 사는 마을이다. 이 마을 남쪽에 변 바지들이 있고 그 뒷골에 변바지라는 마을도 있으나 지금은 모두 가른밭이라고 부른다.

본포리

  • 버무리, 범울이, 호명(虎鳴), 본동(本洞)

    1540년 장일문(張日文)이 개척(開拓), 범이 많이 울으므로 범우리라 했다. 이 마을 이름 때문에 고려(高麗)이래 이 면의 이름이 호명면(虎鳴面)이 되었다. 옛날에 뒷산인 높이 235m의 등(藤) 암산(岩山)에는 숲이 우거지고, 호랑이가 많이 살아서 포효성(咆哮聲)이 끊이지 아니하여 범이 우는 골이라는 뜻으로 호명이라 불리었다. 고려 원종(高麗 元宗) 때 본군(本郡) 출신(出身)인 임지한(林支漢) 장군(將軍)이 평소에 범을 잘 다스려서 임장군이 이 곳을 지날 때면 범들이 반갑다고 울부짖었는데 임장군은 그 범들 중 한 마리를 길들여 타고 다녔다 하는데 때마 침 東都(경주)에서 반란(反亂)한 최종(催宗), 최사(催思)들이 만여병정(萬余兵丁)을 모아 주왕산(周王山)에 집결(集結)해 있 는 것을 범을 타고 가서 평정(平定)했으므로 왕이 임장군에게 벼슬로 상(賞)을 주고자 하 였으나 굳이 사영하고 왕의 윤허를 받아 다인현(多仁縣)을 본군(本郡) 속현(屬縣)으로 삼아서 군세(郡勢)를 확장(擴張)시켰고 임장군과 범과의 인연이 이 마을 이름을 낳게 했다고 군지(郡誌)와 고려사에 전한다.

  • 개밑, 포저(浦底)

    내성천(乃城川) 남쪽 유역(流域) 등암산 기슭에 자리잡은 범우리 동쪽 마을이고 안찔과 경계(境界)를 이루고 있는 30여 가구의 각성촌(各姓村)이며 마을 앞 농토(農土)가 비옥(肥沃)하여 논 농사를 주로 하고 있는 마을이고 서울나들이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산합리

  • 새내비, 산합(山合)

    마을 주위의 모든 산이 마을을 향해 모여드는 형국(形局)이라고 하여 산합(山合)이라 하였으며, 지세(地勢)에 따라 아릇새내비, 웃새내비로 갈라 부르는 40가구의 각성촌이다.

  • 새터, 셋트, 신기(新基)

    산합의 남동쪽에 있으며 주위의 다른 마을보다 늦게 생긴 마을이다.

  • 웅골, 우음(牛音, 于音)

    안동군(安東郡)과의 접경(接境)이며 새내비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형상(形象)이 마치 누워있는 황소가 힘차게 소리치는 모양이라고 하여 우음(牛音)이라고도 하고, 또 옛날의 움막이 있었던 골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움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 잿마, 성촌(城村)

    관내(管內) 지보면(知保面)과 안동군(安東郡) 풍천면(豊川面)과의 경계인 새내비 남쪽 고개 밑에 위치한 마을로 그 동쪽으로 협읍이란 마을이 있으나 잿마로도 부른다.

  • 사근다리

    잿마 남쪽에 있고 마을앞 개울에 겨울마다 다리를 놓는데 해묵은 나무로 놓기 때문에 다릿발이 삭아서 늘 조심해야 견딜 수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이 사근다 리가 되었다 한다.

송곡리

  • 솔무듬, 쇠무듬, 소무듬, 송분(松粉)

    사막골 동쪽이고 ?芝山(건지산)에 있는 이 마을은 조선 세조(朝鮮 世祖) 13년 정해(丁亥)때 내금위(內禁衛) 창신교위(彰信校尉) 세거지(世居地)이다. 큰 무덤처럼 생긴 봉우리 셋이 있어 소무덤이라고 했다기도 하며 철광맥(鐵鑛脈)이 있다하여 쇠무덤이라 부르기도 하고 松林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 어 솔무덤이 라고도 한다는 마을이다.

  • 사막골, 사그막골, 사곡(沙谷)

    솔무덤 서쪽에 위치한 松谷洞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며 安東에서 옮겨 온 延安 李氏가 이곳에 터를 잡을 때 마을 앞이 깨끗한 모래톱이었기 때문에 마을 이름 을 송림(沙谷)이라 한데서 유래(由來)한다고 한다.

  • 번개, 반계(磻溪)

    마을 앞에 개울이 흐르고 비가 오면 번개가 심하게 치는 곳이라고 하여 마을 이름이 번개라 불려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천리

  • 오내, 방굴마, 오천(?川), 방구(芳邱)

    방구(方九)라는 사람이 처음 들어와 살았다하여 방구(芳邱)라 했다고도 하고 마을 뒷산이 꽃나무 모양이기 때문에 방굴마라고도 했다하며, 또 이곳은 지대가 낮아서 비가 조금만 내려도 내성천(乃城川)의 물이 잠기기가 일쑤라 하여 오천이라고도 불러진다고 한다. 호명면의 중심지이며 마을 복판에 오천장터가 있다. 1660년 방구(方九)라는 사람이 개척(開拓)하여 방구(芳邱)라 하고 1750년경 김덕조(金德祖)라는 사람이 큰 내가 흐른다하여 오천이라 개칭(改稱)하였다고도 한다.

  • 홍구(紅邱, 紅九)

    방굴마 남쪽 언덕에 있는 마을이며 이곳에 아홉 성씨가 함께 들어와서 붉은 찰흙 땅위에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홍구(紅九)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現在)도 각성촌이다.

  • 거름마, 거릿마

    방굴마 북서쪽 어귀에 있으므로 거릿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천옆 내성천 나루터에서 오천장터를 드나들던 행인들이 나룻배를 기다리며 쉬어 가던 주막이 많 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 냇물에 현대식(現代式) 다리가 놓이고 교통(交通)이 편리(便利)해져서 주막 은 모두 없어지고 한 가구만 살고 있다.

  • 장터, 오천장터, 장기동(場基洞)

    방굴마 북쪽 강가에 있는 마을이다. 일제초기(日帝初期)까지 여기 장이 있다가 방굴마로 옮겨간 뒤로는 장이 서던 터도 없어지고 마을도 줄어들었다.

원곡리

  • 안찔, 안질, 안지울, 큰마, 원곡(原谷)

    1579년 장세희(張世禧)란 사람이 마을을 개척(開拓)할 때 그의 증조부(曾祖父) 안양공(安襄公)이 다닌 길이라 하여 안질이라 칭하였다고도 한다.

  • 고름장

    안찔에서 서쪽으로 5리 쯤 떨어진 곳에 21가구의 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염씨(廉氏)와 장씨(張氏)가 살며 고려장이 있던 곳이므로 고름장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고려장 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1681년 장여한(張汝翰)이라는 사람이 개척(開拓)했다 한다.

  • 갯마, 범우리개, 호명포(虎鳴浦)

    안찔 북서쪽 내성천 유역(流域)인 갯가에 있는 마을이고 인동(仁同) 장씨(張氏)가 산다. 옛날에는 냇물이 이 마을 앞으로 흘렀으며 뒤에는 험한 산이 있고 그 아래에는 깊은 소 가 있어서 범이 지나가다가 겁이 나서 울었다고 하는 곳이다.

  • 건느마, 건너마, 월촌(越村)

    안찔 큰마 북동쪽의 내 건너에 있는 마을로 6가구가 드문드문 떨어져 살고 있으며 뒤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들은 수리 시설이 잘되어있다.

  • 샛마, 새마, 신동(新洞)

    안찔과 고름장 사이에 자리한 마을이라고 해서 샛마라고 부르며 4가구가 살고,마을 뒤 북서 양쪽은 산으로 막혀 따뜻하며 겨울 바람을 막아 주는 구실을 하므로 살기 좋은 곳이다.

월포리

  • 우리개, 우린개, 인포(仁浦)

    마을 앞을 흐르는 내성천이 들을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흐르기 때문에 우리개라고 했으며 내성천이 초승달 모양으로 마을을 안고 흐르므로 인포(仁浦)라고도 한다. 마을이 커서 아룻마, 웃마로 가른다.

  • 서당마, 서당촌(書堂村)

    마을 중앙에 28문중(門中)에서 세웠다는 오川書堂(천서당)이 지금도 남아 있어서 생긴 마을 이름이며 오백이제 남동쪽에 있고 경주(慶州) 김씨(金氏)가 주로 산다.

  • 느티나무거리

    우리개 아릇마 서쪽의 길거리에 우리개의 동신목(洞神木)인 느티나무가 있던 거리 마을이다.

  • 뒷골, 후동(後洞)

    우리개 웃마 뒤쪽 큰길가에 있는 마을이며, 내성천의 맑은 물가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여름철에는 근처의 많은 피서객이 몰리는 곳으로 예천(醴泉) - 안동간(安東間)의 국도(國道), 월포(月浦) - 구담간(九潭間)의 지방도(地方道) 갈림길에 위치한다.

종산리

  • 고미, 고산(古山)

    금산(琴山) 남쪽에 있는 진성(眞城) 이씨(李氏)들이 세거(世居)하고 있는 마을이며 그들의 조상(祖上)인 이고원(李古園)이라는 이가 처음 터를 잡을 때 산세(山勢)가 거문고를 타는 형국이라고 하여 고산(鼓山) 이라 하였다고 하며 후에 고산(古山)이라 했다 하며 이동표(李東標)를 제사(祭祀)하는 고산서원(古山書院)이 있었다고 한다.

  • 양지마, 양촌(陽村)

    고미에서 구한말(舊韓末) 양지편으로 옮겨 온 진성(眞城) 이씨(李氏)들이 개척한 마을이며 산세(山勢)가 동서로 길게 뻗고 남쪽이 낮아서 햇볕이 잘 드는 집성촌(集姓村)이다.

  • 종미(宗美)

    마을 동쪽에 옛날 지방(地方) 선비들이 모여 사회(詩會)를 하던 백일장봉(白日場峯)이 있고 그 아래 평해(平海) 황씨(黃氏)들이 살며 옛날 신당면(新塘面) 소재지(所在地)였다. 황석암(黃石岩)이란 이가 터를 잡을 때 앞 산은 높고 마을 터는 아름답다고 하여 종미(宗美)라 하였다고 전한다.

  • 대금터, 개금터, 금산(琴山), 사월(沙月)

    진성(眞城) 이씨(李氏)의 세거지(世居地)를 이동표(李東標)(1644~1700)가 거문고를 타며 즐겼다는 수려(秀麗)한 금산(琴山) 봉우리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금산이라고도 하고 대금을 불며 즐 겼던 곳이라 하여 대금터라 불린다고도 한다.

직산리

  • 피실, 직곡(稷谷)

    열 두 피실이 있다고 하는데 월포리 동계(洞界)에서 풍산(豊山)으로 넘어가는 언저리 골짜기마다에 마을이 있어 피실 또는 직곡(稷谷)이라 불리고 있다. 또 이 고장이 가뭄을 많이 타는 곳이라 피농사를 짓고 살던 마을이라 하여 피실이라 불렀다.

  • 웃마을

    옛날에는 웃피실이라 하여 삼면(三面)이 산으로 평풍처럼 둘러싸여 피난하기 좋아서 피실이라고 이름지었으며 지금은 웃마을이라 부른다. 예천(醴泉) 임씨(林氏), 풍산 김씨(金氏)가 주로 살고 있다.

  • 싱골, 승골(僧谷)

    옛날 마을 위쪽 계곡에 이름 모를 절이 있어 스님들이 수도하던 곳이라 하며 그 아래 마을이라고 하여 승골이라고 했는데 싱골로 변했다 한다.

  • 주막골

    예천군과 안동군의 군계(郡界)인 피실 고개 밑에 있는 마을로 열두 피실중의 중앙에위치하고 있으며 옛날부터 교통(交通)의 요지(要地)로 나그네들이 쉬어가던 주막(酒幕)이 있었다.

  • 매밭, 매바탕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한 형상의 매봉산 밑 넓은 터에 생긴 마을이라는 뜻이라 한다.

  • 동막(東幕)

    피실고개 동쪽 산 밑에 농막(農幕)이 있던 곳이므로 동막이며 3면이 낮은 산으로 싸였고 마을 앞에는 동막못이 있고 김해 김씨(金海 金氏)가 사는 마을이다.

  • 솔리미, 송림(松林)

    직산(稷山) 1리에서 서쪽으로 약 1km에 위치한 마을이며 삼면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사이 솔숲이 우거진 곳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 솔리미라고 한다.

  • 행갈, 한갓(大枝)

    구호명역(舊虎鳴驛) 자리에서 남쪽에 있는 풍산(豊山) 김씨(金氏) 재사(齋舍) 앞, 행갈못 뒤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행갈이라 불린다. 옛날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할 때 6년이나 가뭄이 겹쳐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한 것을 명심(銘心)하고 못을 파서 물을 모으고 알뜰히 농사를 지었 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이다.

  • 팔미(八尾, 八美)

    120여년 전에 김석규(金石圭)가 이름 붙였다고도 하는 이 마을은 8개의 산꼬리가 이 마을을 향해 뻗어 있다고 팔미(八尾)라고 하며 주위(周圍)의 봉우리가 아름답다 하여 팔미(八美)라고도 하며, 또 일설에는 8성이 함께 이 마을을 개척했다하여 팔미(八美)라고 한다.

  • 황삼, 황삼이, 황산(黃山)

    100여 년 전에 황윤용(黃潤龍)이 황토산(黃土山) 밑에 이 마을을 개척했으며 황씨(黃氏) 소유의 산천이므로 황산(黃山)이라 부르며 이곳의 토질이 또한 모두 황토(黃土)빛 찰흙이다.

  • 가느미, 가내미, 웃가내미, 상간산(上艮山)

    마을 뒷산이 마치 저울대처럼 생겼고 마을 앞산을 뜸메산이라고 부르는데 내성천의 홍수(洪水)에 떠내려 오다가, 뒷산인 저울대에 걸렸다고 하는 전설이 담긴 작은 외딴 봉우리인데 이 뜸매산이 저울추와 같고 망르터는 그 저울의 가늠때 복판 에 간좌(艮坐)로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가느미 또는 간산(艮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아릇가내미, 하간산(下艮山)

    웃가내미 보다 낮은 아랫마을이고 뜸매산 옆에 청주(淸州) 정씨(鄭氏)들의 조상인 정석준(鄭碩俊)이터를 잡은 곳이라 하며 艮山面(陽山面 - 양산면)의 중심지였다.

한어리

  • 한터, 한기(閑基), 한어리(閑於里)

    조선(朝鮮) 중종(中宗) 때, 한(韓)정승이라는 이가 터를 잡고 살았다 하며 지형(地形)이 마치 연꽃이 물에 뜬 형국(形局)이라고 하고, 어지러운 세간(世間)은 피해 한가롭게 숨어 살면서 세월(歲月)을 보낼 곳이라 하여 광산 노씨(盧氏)들의 조상이 붙인 이름이라 전한다.

  • 어지리, 어촌(漁村)

    석씨(石氏)가 개척 했다고 전하고, 조선(朝鮮) 영조초신(英祖初申)서가 마을 앞 연못에서 낚시질로 소일하며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지보면(知保面)에도 어지리가 있는데 여기 는 그 당시는 용궁군(龍宮郡) 관내(管內)였기 때문에 용궁(龍宮) 어지리라 하고, 이 곳을 예천(醴泉) 어지리 라고 한다.

형호리

  • 저우리, 형호(衡湖)

    동서로 길개 뻗은 뒷산이 마치 저울대 형국인 높이 305m의 수국산(水國山)이며 마을 앞을 흐르는 내성천에 호수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하고 밀양인(密陽人) 박기(朴起) 종(宗)이 붙인 마을 이름이라 한다.

  • 골마, 곡촌(谷村)

    저우리 남쪽 골짜기에 있는 평산(平山) 신씨(申氏)가 살고 있는 마을이다. 1775년경에 이 마을에 왔을 때 마을이 긴 계곡에 위치하였다 하여 골마라 하였으며 마을 서쪽 에 있는 석벽산(石壁山) 밑에 큰 농과 같이 생긴 농바위가 있어 여름철이면 농민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황지리

  • 논실, 논곡(論谷)

    황지리(黃池里)에서 가장 큰 마을로 이 마을을 처음에 들어온 양대곡(梁大谷)이란 사람은 조선선조(朝鮮宣祖)때 동서(東西) 당록(黨論)을 피하여 이곳을 찾아 정착(定着)하여 터전을 마련하고 느티나무를 심어 마을을 보호했다 하여 논실이라 불렀다 하기도 하여 지금도 400여년 되는 느티나무를 동신(洞神)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또 갈대속에 살았다 하여 논실이라 한다 고도 한다.

  • 백골, 백곡(白谷, 栢谷)

    처음 이곳에 화전(火田)을 이룰 때 흰 돌이 많이 나왔다 하여 白谷이라 하기도 하고 또 잣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栢谷이라 했다고도 한다.

  • 소망실, 소망동(所望洞)

    사람은 살아도 마을 이름은 없었는데 마을 주위의 산이 높고 험준(險峻)해서 호랑이가 많이 살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줌으로 그 피해를 막고자 범이 도망가라고 호(虎) 망곡(亡谷), 곧 오망실이라고 하던 곳인데 그 후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아 소망(所望)을 이루 었다하여 소망실이 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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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22.05.17

곤충도시 Clean 예천마을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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