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설화
효자면(孝子面)
신라시대에는 적아현(赤牙縣), 757년(경덕왕 16) 때 은정현(殷正縣)으로 고려 때에는 은풍현(殷豊縣)으로 불리어지고 1018년(현종 9) 안동부 소속이었다. 조선 때에는 풍기군(豊基郡) 은풍현(殷豊縣)으로 계속되다가 1895년(고종32) 풍기군 서면(西面) 상리(上里)하여 고항(古項), 도촌(道村), 사동(寺洞), 사성(沙星), 신기(新基), 구두(求斗), 독죽(篤竹), 진사(陳沙), 내현(內峴), 상백(上白), 하백(下白), 보곡(甫谷), 상사(上沙), 하사(下沙), 석묘(石墓), 야항(也項), 용두(龍頭), 초항(草項)의 18개 동리(洞里)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郡面) 폐합(廢合)에 따라 사곡, 명봉, 도촌, 두성, 용두, 보곡, 석묘, 백석, 초항, 고항의 10개 동으로 개편하여 영주군(榮州郡)에 편입되었다가 1923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우리 군에 편입되었다.
우리 군에서 가장 북쪽이고 높은 곳에 위치하며 동쪽은 영주시 봉현면, 남쪽은 하리면과 용문면, 서쪽은 문경시 동로면, 북쪽은 소백산맥(小白山脈)을 끼고 영주시 봉현면, 충청북도(忠淸北道) 단양군(丹陽郡) 대강면과 도계(道界)를 이루고 있다.
은풍현의 위쪽이라 하여 상리면으로 불리어졌으나, 2016년 2월 효자면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가볼만한 명소는 명봉사(계곡), 용두휴게공원, 산업곤충연구소, 백두대간 등산로가 있고 특산물은 예천종마늘, 사과, 고냉지 채소, 효자호도, 잡곡 등이 있다.
떡고개
- 위 치 : 상리면 도촌리 (덕고개)
상리면 도촌마을에서 사곡마을로 넘어가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나즈막한 고개이다. 옛날에는 가까이 인가(人家)가 없고 숲이 울창하여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이 곳을 지나는 길손은 대낮에도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고개 마루에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지나는 길손에게 떡을 빚어 요기를 시키는 인심 좋은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사실인즉 이 할머니는 천년 묵은 암여우로서 평소 사람되기를 소원하여 이를 딱하게 여긴 산신령(山神靈)이 여우에게 이르되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인간에게 적선(積善)을 베풀면 사람이 되게 해 주겠노라고 하여 이렇게 할머니로 둔갑하여 공(功)을 쌓고 있는 중이었다. 고개를 지나는 길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마음씨 고운 할머니를 칭찬함은 물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어스름한 달빛 속에 한 사나이가 이 오두막집에 문을 두드리면서 죽어 가는 목소리로 하룻밤 쉬어 가기를 간청하였다. 할머니는 쾌히 승낙하고 반가이 맞아 들였다.
이 날은 산신령과 약속한 3년이 되는 마지막날 밤이었고 하루 종일 지나는 길손이 없어서 적선을 베풀지 못해 매우 초조해 하던 차에 손님이 찾아오므로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나그네에게 떡을 대접하고 아랫목에 쉬기를 권했다.
사실 이 사나이는 사냥꾼으로서 깊은 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맹수의 공격을 받아 큰 부상을 입고 기진맥진하여 겨우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사나이는 잠이 들었고 할머니는 윗목에 앉아 이제 날만 새면 사람이 된다는 생각에 부푼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사나이의 다리에서 흘러나온 피 냄새가 코를 스치자 본능적인 욕구가 꿈틀거렸다. 밤이 점점 깊어 가면서 건강한 남자의 피 냄새는 더욱 방안을 진동하여 여우의 본능을 더욱 자극하였다. 이를 악 물고 참았으나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미친 듯이 사나이를 해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나이는 선혈이 낭자한 채 죽어 있었고 자신은 추악하고 늙은 여우가 되어 있었다. 땅을 치며 후회(後悔)하다가 바위에 머리를 쳐 박아 죽고 말았다.
그후 사람들은 떡을 주던 고개라 하여 떡고개라 부르다가 언제부터인가 덕고개로 부르게 되었다.
수수암(修水庵)의 옹달샘
- 위 치 : 상리면 도촌리 (쌍학마을 뒷산)
상리면 도촌리 쌍학마을 뒷산에 수수암이라는 거대한 바위가 있고, 바위 밑에는 맑은 샘이 있다. 원래 이 옹달샘에는 바위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 바위 옆에는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바위구멍에 대고 몇 명의 사람이 왔다고 말하면 정확히 사람 숫자만큼 그 분량대로 국수가 나와서 사람들을 대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승(老僧)이 자리를 비운 사이 욕심 많은 젊은 행자승이 바위구멍에 대고 사람이 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왔다고 거짓말을 하니 국수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화가 난 행자승은 참지 못하고 나무작대기로 그 구멍을 쑤시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벼락치는 듯한 큰 소리와 함께 바위가 갈라지며 붉은 물길이 솟아오르자, 행자승은 놀라 그 자리에서 혼절하여 죽고 말았다.
이후 암자는 없어지고 국수가 나오던 구멍은 맑은 물이 나오는 옹달샘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에서 충북 단양군 방향으로 4km 이내 용두리(야목마을)에는 도효자비(都孝子碑) 및 효공원이 있으며, 등산로와 쉼터가 있는 용두휴게공원(龍頭休憩公園)이 있었으나 현재는 목재문화체험장이 위치하고 있다.
호랑이 바위와 개바위
- 위 치 : 상리면 두성리 (구도실 앞산)
상리면 두성리 구도실 앞산 중턱에는 개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하나 있고, 조금 거리를 두고 뒤에는 호랑이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오래 전부터 이 두 바위가 보이는 곳에 집을 지으면 호랑이한테 물려 죽는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 전설을 무시하고 이 바위가 바라보이는 곳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어느 날 부인이 베를 짜다가 바라보니 바위 뒤 산봉우리에 무당이 흰 옷을 입고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날 밤 부인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그 이후부터는 마을 사람들은 일체 이 바위들이 마주 보이는 곳에 집을 짓지 않았다고 전한다.
구두실(求斗室) 또는 구도실(求道室)은 역동선생(易東先生-禹倬)이 공부하여 도(道)를 깨쳐 대성했다는 곳이다.
조우치의 묘(墓)
- 위 치 : 상리면 두성리 (왕곡마을)
그 옛날 두성리 왕곡마을에 살던 조우치라는 사람이 죽자 그 후손들이, 뒷산 봉우리 명당에 묘를 쓰기로 작정하고 이곳 두성리 구도마을로 우회 하여 운구(運柩)하던 중 마을 뒷산 길에 이르러 급한 전갈을 받았는데 내용인즉 조씨(趙氏)네가 역적(逆賊)으로 몰려 지금 금부(禁府) 나졸들이 잡으러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에 크게 당황하여 그 자리에 구덩이를 파고 상여채로 묻고는 도주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후부터 이곳을 조우치의 묘(墓), 이 일대를 조우치네 밋이라고 전해온다.
아마도 이 전설은 고대소설 <전우치전>과도 연관이 있는 듯 하다.
초장암
- 위 치 : 상리면 명봉리 (내현마을 뒤)
명봉리 내현마을 뒤에는 느름 성(城)이라는 큰 성이 있고 그 안에 초장암이라는 넓은 바위가 있다.
옛날에는 이 일대에 호랑이가 무척 많아서 주민들은 매일 불안에 떨고 있어 산신당(山神堂)을 세워 치성(致誠)을 드렸으나 그럴수록 호랑이는 곧잘 이 초장바위에 모여 놀기를 즐겨 했다.
그러던 중 산 밑에 있는 내현 마을에 조태우라는 명포수(名砲手)가 나타난 이후부터는 호랑이들이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는 워낙 명포수라 아무리 신출귀몰(神出鬼沒)한 호랑이라도 그를 당해낼 수 없어서 호랑이들은 “느름성 초장바위 놀기도 좋다마는 조태우 때문에 못 놀고 가네”라고 탄식하며 달아났다고 한다.
이곳 명봉리에는 875년(신라 헌강왕 원년)에 두운대사(杜雲大師)가 창건한 천년 고찰(千年古刹)인 명봉사(鳴鳳寺)가 있는데, 소백산맥(小白山脈)의 깊고 고요한 골짜기에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 등 큰 나무가 하늘을 덮어 계곡의 맑은 물과 산림(山林)으로 피서지, 산책로로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또한 이 사찰에는 조선 문종대왕태실비(유형문화재 제187호)와 고려 태조가 자적선사의 공적(功績)을 기린 이두(吏讀) 문자(文字)의 귀중한 연구자료인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鏡淸禪院慈寂禪師 凌雲塔碑 - 유형문화재 제3호) 등이 있다.
원(院) 터
- 위 치 : 상리면 두성리
옛날 영남(嶺南)의 선비들이 한양(漢陽)을 왕래할 때 예천에서 단양(丹陽)까지의 길이 너무 멀고 험하며, 중간에 쉬어갈 곳도 없고 인가(人家)가 없어 나라에서 이 곳 두성리에 집을 지어 쉴 수 있고 일박(一泊) 유숙하면서 밥을 지어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무인원(無人院)을 두었다고 하여 지금까지 원터라고 불러오고 있다.
용순마
- 위 치 : 상리면 고항리(용소마을)
아득한 옛날 고항리 마을 앞에는 용(龍)이 살던 소(沼)가 있었는데 얼마나 깊었는지 무려 명짓꾸리 한 감개를 다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고 한다. 소(沼) 옆에는 보리밭이 있었는데 아침이면 용(龍)이 지나간 큰 자국이 나 있었다.
그 뒤 천지개벽(天地開闢)이 되어 마을 바른쪽 백호등(白虎嶝)이 무너져 소는 매몰되어 들판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이 마을을 용순마 또는 용소(龍沼)라 부르게 되었다.
돌무덤
- 위 치 : 상리면 석묘리
1) 돌무더기가 많아 돌무대미, 또는 석묘(石墓)라 하는 이 곳은 1923년 3월 31일 이전까지만 해도 풍기군(豊基郡, 現 榮州市)에 속해 있었는데 권(權)씨 성(性)을 가진 이가 원님이 되면 이 곳이 망한다고 전해 내려왔다.
고려 말(高麗末)에 마침 권씨 성을 가진 사람이 풍기군수로 부임(赴任) 하자 이 곧 사람들이 이 마을을 저울로 달아서 풍기와 풍천으로 반씩 갈라 놓고 마을의 화(禍)를 막은 뒤에 그 저울추를 돌로 묻어 영원한 마을의 태평(太平)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 돌무덤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2) 권씨 성을 가진 이가 원님이 되면 이 곳이 망한다는 전설을 믿고 권씨 성을 가진 이가 마침 원님으로 부임하자 이 마을 사람들이 저울에서 추를 떼어 이곳에 묻고 돌무덤을 쌓았다고 한다. 권(權)이라는 글자를 풀면 저울추가 되므로 저울에서 추를 떼어 내면 결국 저울이 기울게 되어 권씨가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3) 또한 어느 해 여름, 몹시 가뭄이 들자 돌무덤을 뜯어 해치면 비가 온다하여 마을 청년들이 돌무덤을 들어내니 정말 엄청난 비가 왔다는 것이다. 그 후 들어낸 돌들은 예천읍 제방(堤防)을 쌓기 위해 실어가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춘생(春生)골과 부춘산(富春山)
- 위 치 : 상리면 석묘리
석묘리 춘생(春生)골 마을에는 나즈막한 부춘산(富春山)이라는 동산(洞山)이 있다.
1) 1362년(공민왕 11) 2월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을 피해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이 안동에 피난을 왔다가 개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곳에서 봄을 맞았다고 하여 춘생(春生)이라고 하였으며, 뒷산에 올라가 우순풍조(雨順風調)하기를 빌면서 이 산명(山名)을 부춘산(富春山)이라고 명명하고 길이 80㎝, 너비 41㎝의 화강암(花崗巖) 자연석에 “富春山”이라고 새겨 놓았다. 그 후 오랜 세월의 풍우(風雨)에 마멸되어 무심코 얼른 보면 몰라보고 지나갈 정도이며, 마을에 뜻있는 사람들이 성금(誠金)을 모아 그 옆에 새로 화강암(花崗巖)으로 다듬어 정면에 “부춘산(富春山)”이라고 새겨 놓았다.
2) 또 일설에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이 고려 왕건(王建)에게 항복하기 위하여 경주에서 송도(松都 - 지금의 개성)로 가는 길에 이 곳 춘생에서 봄을 맞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신라(新羅)가 망한 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개골산(金剛山)으로 갈 때 이 곳을 지나 월악산(月岳山)의 오누이탑을 쌓았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새목(鳥項)
- 위 치 : 상리면 초항리
백봉암(白鳳岩)이란 산봉우리에서 봉황(鳳凰) 1쌍(雙)이 목을 길게 늘이고 쉴 터를 찾아가던 중 이 마을 앞산에 날아와 앉았다 하여 봉정(鳳頂)의 뜻인 새목(鳥項)이라고 하였다 한다.
또한 외부 세계와의 인연(因緣)을 끊고 마을 어귀에 풀이 우거져 있어서 초항(草項) 또는 새목(鳥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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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22.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