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도촌리
- 13세기 중엽인 고려 원종 때 역동 우탁선생이 이 곳에서 경사와 역학등의 학문과 도를 닦던 곳이라고 도촌이라 하는데 뒷산은 388m 서제봉이며 마을 앞 길을 솔갱이라 하는데 거기에는 큰 느티나무 5그루가 있으며 상리초등학교가 있고 밀양 박씨가 많이 산다.
- 새터·신기(新基)
도촌 남서쪽의 효자면소가 있는 마을이다. 도촌보다 늦게 면소가 여기에 세워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금은 효자면의 중심지가 된 각성촌이다.
- 벌밭양지
도촌 북쪽의 산골짜기 양지 바른쪽에 보리가 잘 된다고 하는 곳에 농토를 따라 100여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양지바른 곳에 보리가 잘 되는 밭이 있는 골이란 뜻이며 20여가구가 사는 각성촌이다.
- 쌍학(雙鶴)
쌍학사가 있던 곳에 생긴 마을이라 해서 쌍학이라 한다. 세력이 당당하던 어떤 사람이 가재봉 밑의 청학골이 명당이라고 묘를 쓰려는데 광중(壙中)을 너무 깊게 해서 학 두 마리가 날아가 버렸다고 하는 전설이 전한다.
사곡리
- 높은다리
명봉과 저수재의 갈림길에 있고 깊은 골짜기위에 밤나무로 다리를 놓고 그 위에 청솔을 깔고 흙을 덮어 우마(牛馬)가 지나다니게 해서 생긴 지명이다. 저수재를 넘어 단양(丹陽)을 거쳐 서울로 가던 길목이다.
- 상사·하사
위치의 높낮이에 따라 아랫사실(하사)과 웃사실(상사)로 불리어지며 사곡동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지형이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이라는 골짜기에 생긴 마을이며 앞산이 역동(易東)선생이 공부하던 곳이라는 백운봉(白雲峰)이다.
- 배바우ㆍ주암(舟岩)
광산 탁씨가 많이 사는 마을이다. 마을 뒷산에 흡사 배처럼 생긴 큰 바위가 노적같이 생긴 더 큰 바위를 향해 산을 거슬러 올라가는 형상을 하고 있어 생긴 마을 이름이다. 배바위 윗 부분의 직경 60cm 가량의 구덩이에는 어떤 가뭄에라도 물이 마르지 아니하고 고여 있다.
명봉리
- 안트리(내현)
어림성에서 용문면으로 넘어가는 성재(城峴)밑 수리박골 옆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명봉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옛날에 사화(士禍)를 피해 어느 선비가 개척한 곳에 20여 가구의 큰 마을이 이루어졌다.
- 양지마(양지마을)
독죽골 남동쪽 안트리 북쪽의 양지바른 곳에 안트리보다 늦게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마을 앞에는 사기그릇을 굽던 점앞들이란 골짜기가 있고 20가구의 각성촌이다.
- 독짓골(독죽)
약 800년 전에 승려들이 개척한 마을이다. 승려들이 자주 왕래하며 마음을 대나무같이 곧고 바르게 갖자는 뜻에서 독죽(篤竹)이라 이름을 지었다 한다.
- 묵새(진사)
약 300여년 전에 개척된 마을이다. 처음 마을을 개척한 박씨(朴氏)ㆍ권씨(權氏)ㆍ김씨(金氏) 가운데 박씨(朴氏)만 남아서 묵는다 하여 묵새로 부르다가 한자로 진사(陣沙)라 적게 되었다고 한다.
- 귀내기(귀락)
성황당이 있는 독죽골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지형이 거북이가 소백산에서 내려와 어천을 따라 낙동강으로 찾아가는 모습과 같다고 귀내기라 이름했다.
- 동구(洞口)
독죽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신라 때 두운대사가 창건했다는 명봉사의 동구다. 이 절에는 사두문(史讀文) 연구의 귀중한 자료인 자적선사능운탑비(941 세움)와 조선의 문종 및 사도세자의 태실이 있다.
- 치항정(추목정)
정자가 있었는데, 그 정자의 이름이 치항정(雉項亭)이라 한 것은 뒷산이 꿩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용두리
- 내동(안마)
용두리에서 제일 안쪽에 있다하여 내동(內洞)이라 하였으며 1970년까지도 10여 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교통이 불편하고 농사짓기가 곤란하여 현재는 전가구가 타동리로 이주하고 잡초가 무성하다.
- 야목(야항)
명심보감에 까지 실린 만고 효자로 후세의 귀감이 되는 철종때의 도시복 효자가 지금의 용두동 313번지에 살면서 뒷산의 땔 나무를 해다가 예천장에 팔아서 부모를 봉양했고, 뒷산의 호랑이를 타고 강릉까지 가서 6월 염천에 홍시를 구해왔다고 한다. 도효자는 전설적 인물이 아니고 실재 인물이며 지금도 마을 곳곳에 도효자의 자취가 남아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也자 모양이라고 하여 야목이라고 한다.
- 음달
충북과 도계를 이루는 야목 서쪽의 옹달마을이며 더욱 마을 뒷산이 높아서 해가 일찍 지는 마을이고 고개가 몹시 높고 길어서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는 저수령 앞 마을이다.
두성리
- 사성(沙星)
음쟁이(음정)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큰 사태가 나서 모래 무더기가 북두칠성처럼 퍼져 있다고 하여 사성이라 했으며, 역동선생이 도학을 완성하자 가르치던 스승이 떠나게 되니 사제간에 이별한 곳이라 하여 사별이라 했다고도 한다.
- 음정
음쟁이라고도 하며 역동선생이 새별 동쪽 산 밑에 운정을 지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운정이 음정으로 변음되었다고도 하고 정자에 그늘이 져서 그렇게 부른다고도 한다.
- 왕갓
왕곡(旺谷)이라고도 하는데 음정 북서쪽에 있는 곳이며 역동선생이 그의 스승 법선사를 찾아 이곳으로 왕례하였다고 왕갓이라 하며 마을 동쪽에는 수석이 아름답고 높이 3m나 되는 두성폭포가 있지만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한 명승지이다.
- 구두실
구도라고도 하는데 역동선생이 오래도록 도를 구하다가 드디어 대성했다는 데서 연유한 마을이라 한다. 동구에 있는 집채만큼 큰 바위에 언제 누가 새겼는지 모르나 구도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 흙목
토항(土項)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명풍수 박 성이라는 사람이 산천에 제사 지낼 때 향을 피운 곳이라고 하여 토향(吐香)이라고 적기도 한다. 토향(吐香)이 토항(土項)ㆍ흙목이라 와전되었다고 한다.
백석리
- 상백/하백
흰돌ㆍ백석(白石)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버금간다고 하여 소금강이라고도 불린다. 뒷산에 흰돌때문에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하며 윗마을을 상백(上白)ㆍ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하백(下白)으로 부르고 있다.
- 신기(新基)
텃골뒤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1974년 고항초등학교가 솔밭모랭이에 세워지면서 학구 분리의 편의상 백석동이 되었으며 산골이면서도 규모가 짜인 마을이다.
- 제촌(자작쟁이)
텃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깊은 산속에 자작나무가 우거져서 정자처럼 생겼었다고도 하고 자작나무로 지은 정자가 있었다고도 하는 곳이며 예부터 피난할 곳을 찾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각성촌이다.
- 텃골(아랫흔들)
동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터가 좋아서 마을이 생기기 전에 벌써 집을 지을 터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초항리
새목ㆍ새묵ㆍ봉항(鳳項)ㆍ초항(草項)이라고도 한다. 백봉산 정상에 봉황 한 쌍이 목을 길게 늘이고 쉴 터를 찾아가 이 마을 앞산에 날아 와서 앉았다고 하여 鳳項(봉항)의 뜻인 새목이라고 한다. 외부세계와의 인연을 끊고 마을 어귀에 풀이 우거져 있어서 초항 또는 새목이라고도 한다. 두 마을로 이루어졌는데 골안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을이 안새목(내초항)이고, 골밖에 있는 마을이 바깥새목(외초항)으로 상산 김씨가 개척했다고 한다. 두 마을 복판에 있는 태재산은 높이가 852m로 예천군에서는 표고가 가장 높은 마을이다.
고항리
- 고항리는 10개의 자연무락으로 형성된 리동이다.
- 큰마
뒷산이 고리목재이기 때문에 붙여진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이를 ‘고리목 담범솥’ 또는 ‘담솥’이라 하여 유명하였다.
- 용소(용순마)
아득한 옛날 이 마을 앞에 용이 살던 소(沼)가 있었는데, 천지개벽이 되어 마을 바른 쪽 백호등(白虎嶝)이 무너져 그곳이 들판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용소(龍沼)란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 새마(신기)
용소와 이웃한 이 마을은 약 170여년 전에 형성된 각성받이 마을로서 다른 부락에 비하여 마을 형성의 역사가 비교적 짧은 데서 비롯된 마을이름이다.
- 솔밭모랭이(송전)
큰마 북쪽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밖에서 보면 마을은 안 보이고 솔밭만 보여서 솔밭모랭 혹은 송전이란 이름이 붙었다 하며 또 옛날에는 피난처로 알맞았다고 한다.
- 모시골
마을터가 모시 광우리 같다고 모시골이라 한다. 풍기군수 겸암 유운룡이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했다는 겸암굴이 마을 북쪽에 있으며 웃모시골 아랫모시골로 나뉜다.
- 고약골(괴동)
옛날에 큰 고약나무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하고, 풍수설의 괴화낙지(槐花落地)라는 명당자리가 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솔밭모랭이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어미골(어동)
산세가 붕어 모양이고 이 마을은 붕어 꼬리 부분이라고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솔밭모랭이 동쪽의 마을이다.
- 문드레미(문곡)
고약골에서 북동쪽으로 뻗친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산이 문필봉(文筆峰)인데 문곡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한다.
- 모래재
모래재 밑에 있는, 고약골 북쪽의 마을이다. 현재는 이 부근으로 국도가 확장ㆍ포장되고 있다.(2008년 완공)
석묘리
- 거사골
돌무덤 북서쪽의 큰 골밑에 있는 마을이며 옛날에 분주한 세상을 등지고 조용히 지내고 싶은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 돌무덤
20세기 초까지도 이 마을은 풍기군에 속해 있었는데 권씨 성을 가진 이가 원이 된다면 이 고을이 망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고려말에 마침 권씨 성을 가진 사람이 풍기군부(豊基郡府)로 부임하자 이 골 사람들이 이 마을을 저울로 달아서 풍기와 풍천으로 반씩 갈라 놓고 마을의 화를 막은 뒤에 그 저울추를 돌로 묻어 영원한 마을의 태평을 빌었다는 돌무덤이 지금도 남아있고 매우 신성시 한다.
- 춘생
1350년 홍건적의 침입을 받아 그해 겨울 고려 공민왕이 새목에서 피난하고 이 곳에 이르러 봄이 온 것을 알았으므로 마을 뒷산을 부춘산이라고 했으며 이것을 기념하여 마을에서는 제단을 만들어 두고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신라 경순왕이 경주에서 개성(松都)로 가는 길에 이 곳에서 봄을 맞았다고도 한다.
보곡리
- 상보곡/하보곡
가재봉 중턱에 위치한 마을로 아랫보실(하보곡) 웃보실(상보곡)로 나뉜다. 옛날에 보국사(甫國寺)란 절이 있던 곳이라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 무장(조우골)
보곡과 산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이뤄진 마을이다. 한지를 만들던 지소가 있었던 마을이기 때문에 종이 만드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조우(종이)골, 조우터골이라고 불렀다. 한때 폐동이 될 위기에 있었기에 무장(茂庄)이라 개명하고부터는 마을이 번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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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22.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