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상금곡리

  • 금당실

    금당곡(金塘谷) 혹은 금곡(金谷)이라고도 한다. 감천(甘泉) 문씨가 이곳을 개척하였다 하는데 그의 사위인 박종인(朴從鱗)과 변응영(邊應寧)이 정착하여 지형을 피니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하여 연못을 상징해서 금당(金塘)이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름난 풍수 남사고(南師古)가 말하기를 이 마을과 맛질을 하나로 보면 서울과 흡사하나 큰 냇물이 없음이 아쉽다고 하여 그 뒤부터 "금당맛질 반서울"이란 말이 생겼다고 하나 또한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곳 중의 하나로 정감록에는 "금당실은 우리나라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병화(兵火)가 들지 못한다"고 해 임진왜란 때 온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용문면의 요지가 돼 면사무소와 파출소, 우체국, 초.중학교, 농협 등 기관들이 터를 잡고 있다. 용문중학교와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800m나 뻗어있는 수령 200년이 넘는 송림들은 방풍림 역할을 해 마을의 혼풍을 막아 수백년 세월 온화한 전통을 이어지게 하고 있다. 또 면사무소 앞에는 300년된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어 이 마을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해주고 있으며 면민들의 안식처와 휴식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다. 예천군은 금당실 마을에 고가옥과 도로, 담장을 보수하여 전통적인 옛 모습으로 재현하고 있다.

  • 오미봉

    금당실 뒤에 있는 산으로 높이 200m이며 매우 수려하다. 다섯가지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봉우리라는 뜻인데 오미(五美)란 아미반월(雅眉半月), 유전모연(柳田暮煙), 선동귀운(仙洞歸雲), 용사효종(龍寺曉鍾), 죽림청풍(竹林淸風)을 말한다.

  • 동지미(동지뫼기)

    오미봉 동쪽에 있는 산이다.

  • 명구바우(鳴狗바우)

    오미봉에 있는 바위인데 금당실 앞산이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이고 뒷산 바위형이 명구형(鳴狗形) 이어서 범이 나타나면 개가 운다고 하여 매사에 조심하라는 교훈을 준다.

  • 양주대감 집터

    전 법무대신 이유인(李裕寅)이 양주목사로 있을 때 피난하기 위하여 여기에 아흔아홉칸의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후손들이 팔고 이사해서 지금은 터와 담장 일부만 남아 있다.

  • 느티나무

    면사무소 앞에 있는 높이 21m 둘레 7m의 나무로 1830년대에 원주인 邊(변)연錫(석)이 심은 나무에 매년 정월 보름날 洞祭(동제)를 지내고 있다.

하금곡리

  • 여각(閭閣)

    하금곡리의 가장 큰 마을로, 예천인(醴泉人) 권국주(權國柱)의 아내 함양박씨의 열녀각이 마을 앞에 있다하여 여각 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 용두(龍頭)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지형에서 나온 이름이다.

  • 남짝

    여각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 새마

    여각 북쪽에 새로 된 마을로 현재는 용화사(龍華寺)가 자리잡고 있다.

  • 버들밭(柳田, 큰마)

    여각 서쪽 들에 있는 마을로 이절(李節)이 개척할 때 마을 앞에 버드나무 밭이 있어 버드나무 가지에 꾀꼬리가 둥지를 튼 유지앵소형국(柳枝鶯巢 形局)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 인산(仁山, 개금재, 계금자, 게금재)

    여각 북쪽에 있는 마을로 게금(개아)이 많이 있었으며 또한 인산서원(仁山書院)이 있었다.

  • 오룡골(五龍)

    하금곡에 있는 집터로서 예천인 권선(醴泉人 權善)의 다섯 아들이 태어난 곳이다. 그 다섯 아들은 권오행((權五行)(文科,正郞)), 오기(五紀(文科,左通禮), 오복(五福(文科,校理)), 오륜(五倫(進士)), 오상(五常(進士,參奉))이다.

  • 용화사(龍華寺)

    1973년에 김인식이 새마 동네에 안으로 이주하여 1980년에 사찰(寺刹)을 신축하였다.

성현리

  • 복천(福泉. 福田)

    성현리에서 두 번째 생긴 마을이다. 왜고개 북쪽에 있다. 고려(高麗)때 복천사(福泉寺)가 있었고 정난무(鄭蘭茂), 정윤우(丁允祐)가 차례로 개척한 마을이다.

  • 중리(中里, 중마, 지우실)

    성현리에서 제일 먼저 생겼고 제일 큰 마을로 紙鳩谷面(지구곡면)(渚古面(저고면))의 소재지(所在地)여서 중리(中里)라고 한다. 1914년에 폐지되었다.

  • 천내(川內,省岩)

    왜고개 동쪽에 있는 마을로, 용문천(龍門川) 안쪽이 된다. 마을 앞길에 큰 바위가 있어 다니기에 불편(不便)하므로 살피고 다니라는 뜻에서 성암(省岩)이라 했다고 한다. 1580년경 한표(韓漂)가 이 마을을 개척(開拓)할 때 당시(當時) 마을 가운데 냇물이 흘러서 천내(川內)라 하였다 한다.

  • 왜고개(瓦峴,애고개)

    중마 동쪽 왜고개 밑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어느 며느리가 시어머에게 쫓겨나 아이를 업고 떠나 가다가 이곳에서 죽었다 하여 애고개라 하고 기와공장이 있었다.

  • 삼귀정터

    복천(福泉) 서북쪽 냇가에 있는 터이다. 더미가 셋이 있는데, 흙으로 된 둘은 들 가운데 있고, 돌로 된 하나는 냇가에 있어서, 마치 삼태성처럼 되었다. 돌더미 위에 정자를 짓고 삼귀정이라 하였는데, 장마에 떠내려가서 그 터만 남아 있다.

  • 병암정(屛巖亭)

    정자들 동쪽에 있는 정자(亭子)로 병풍(屛風)처럼 생긴 큰 바위 위에 있는데 뒤에는 푸른 산(山)이 솟아 있고 밑에는 연못이 있어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예천권씨(醴泉權氏)의 정자(亭子)이다.

덕신리(德新里)

  • 덕암(德岩, 덤바우)

    덕신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전주 이씨(全州 李氏)들이 터를 닦았다. 이 마을 서쪽에 있는 큰 바위 밑에는 굴이 하나 있었는데 여기는 도둑들의 은거지가 되어 이웃 마을에 피해가 심해져 그 바위에 도덕암(道德岩)이라 크게 새겨 놓고부터는 도둑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바위의 이름은 도둑바위에서 덕암(德岩)으로 바뀌게 되었고 마을 이름도 덕암(德岩)이 되었다.

  • 상강골(생강골, 光洞, 生光洞)

    덕암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반남인(潘南人) 박기원이 17세기 후반에 개척하였다. 양지(陽地)바른 곳이므로 생광(生光)골이라 하였다.

  • 대골(댓골, 竹谷, 꼬꼬댓골, 宅谷, 新里)

    덕암 북쪽 골짜기에 새로 된 마을로 대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 앞산이 닭의 둥지 모습을 하여 닭이 알을 낳고 내려앉은 형국이라 한다. 또한 집터가 좋다고도 한다.

  • 고사리골

    덕암 뒤에 있는 골짜기인데 고사리가 많이 있다고 한다.

방송리(芳松里)

  • 개방(開芳, 개뱅이, 개배이)

    반송(盤松)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병자호란(丙子胡亂)(1636) 후 김이갑(後 金爾甲)이, 본래(本來) 살던 반송(盤松)에서 이곳에 와 마을을 개척(開拓)하면서, 선대(先代) 김(金)주의 충절(忠節)이 활짝 꽃피라고 붙임 이름이라 한다.

  • 반송(盤松, 반소이, 陽地마, 陽地村, 陰地마, 陰地村)

    방송리(芳松里)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자연부락(自然部落)이 많아 열두 반소이라고도 하는데 양지(陽地)마,음지(陰地)마가 대표적이다. 마을 앞에 여러 그루의 반송(盤松)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新基(새터)

    독적골 남서쪽에 있는 새로된 마을인데 방송리에서 가장 늦게 이루어졌다.

  • 독적골(독짓골,독자골)

    반송(盤松) 서쪽에 있는 마을로 동네에 상점(商店)하나가 독점(獨占)하여 원래 독점(獨占)골이라 하였다. 손동이란 풍수(風水)가 이 마을 지형(地形)이 항아리 모습이므로 항아리는 목이 가장 소중하니 그 목을 다치지 말라는 말에 따라 항아리 목 부분에 해당(該當)하는 음지(陰地)마 뒷고개를 소중히 여긴다고 한다.

  • 당대(塘頭,당뒤)

    반송(盤松)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 연못이 있었으므로 연당(蓮塘) 뒤의 마을이고, 뒷산이 부처등이기 때문에 불당(佛堂) 뒷 마을이기도 하다.

노사리(盧沙里)

  • 가실(佳谷,佳實)

    국사봉(國師峰) 남서쪽, 사라(沙羅) 대방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뒤에 의성 김씨가 개척(開拓)하였다. 남쪽만 터지고 동남북쪽은 높고 낮은 산(山)들로 둘러싸인 분지(盆地)이다. 온갖 산과(山果)가 풍성(豊盛)하여 가실(佳實)이라고 한다.

  • 沙羅(沙里,새랄)

    노사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1675년에 강릉(江陵) 최씨(崔氏)가 개척(開拓)하여 신기(新基)라는 뜻의 새랄이라고 했다. 이웃 마을 가실(佳實)과는 민속(民俗)부터가 다르다. 산중(山中)의 마을이면서 동신제(洞神祭)가 없는 것이 특색이고 평해(平海) 황씨(黃氏)의 집성촌(集性村)이다.

  • 산작골(새마,南山)

    가실(佳實)에서 보면 이 마을 앞山이 남쪽에 있으며 산이 낮고 좁은 골에 1850년경 농토를 따라 생긴 마을로서 1987년부터 한 집도 없다.

구계리(九溪里)

  • 九溪(九溪里, 구려울, 구렐, 구럴, 구걸, 구내, 구렬, 구열)

    이 마을 앞 개천이 아홉 여울로 되었다 하여 구려울, 줄여서 구렬, 또는 구계(九溪)라 한다. 또 양지(陽地)마,음지(陰地)마로 가르기도 한다. 이 마을 집들이 모두 반듯반듯하여 옛날부터 '구렐가서 집 자랑하지 말고, 금당실 가서 옷자랑 하지 마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 주막거리(주막걸, 거리마, 溪村)

    구렬 남쪽에 있는 마을로 1830년대 주막(酒幕)을 짓고부터 마을이 形成되었다 하나, 현재는 구렬의 마을이 커짐에 따라 마을의 구분(區分)이 없어져 그 위치(位置)도 추정(推定)하기 힘들게 되었다.

  • 흠거리(홍거리, 흠골)

    구렬 앞들에 물을 대기 위해 통나무로 만든 홈통을 걸어 두었던 곳에 마을이 생기니 여기를 흠거리 또는 홍거리라 한다.

죽림리(竹林里)

  • 대수(대숲, 竹沼, 竹所竹林)

    예천권씨(醴泉權氏)가 세거(世居)하는 마을인데, 마을 중앙(中央)에는 울릉도에서 15세기(世紀) 중엽에 옮겨 왔다는 향(香)나무가 있고, 예천권씨초간종가별당도 있다.

  • 野塘(야당)

    대수 동쪽들에 있는 마을로 들에 있는 금당실(金塘室)이란 뜻이다.

  • 草澗精舍(초간정사)(亭)

    죽림리 353번지에 있는 정자(亭子)로, 큰 반석(盤石)위에 정자(亭子) 6간(間), 장판각(藏板閣) 4간(間)이 있으며, 앞에 큰 내가 돌아 흐르고 소나무 숲이 울창해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직 리(直 里)

  • 곧은골(고등골, 渚西谷, 直谷, 直洞)

    곧은 골짜기가 되므로 곧은골, 고등골, 또는 직골(直谷)이라 하였는데 예천임씨의 집성촌(集性村)이다. 이 마을은 광주 노씨(盧氏)가 미리 터를 잡아 저서골(渚西谷)이라 불렀는데 임응락(林應樂)이 다시 개척할 때 지형을 살피니 마을로 들어오는 골짜기가 매우 곧고 바르므로 고든골이라 하다 1914년부터 직동(直洞)으로 표기했다.

두천리(杜川里)

  • 뒤낫(디낫,니내,杜川,仁川,仁谷洞)

    두천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영월 신씨(寧越 辛氏)가 개척(開拓)했다고 하나 지금은 사부리(沙夫里)에서 이거(移居)한 경주 손씨(慶州 孫氏) 집성촌(集性村)이다. 두운선사(杜雲禪師)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이 마을에 내(川)가 흐르고 있다.

  • 水項(수리목, 수루목, 물목)

    예천 임씨(醴泉 林氏)가 이 마을을 개척(開拓)할 때는 물이 귀(貴)했으나 장차(將次) 물이 이 동네를 넘어 갈 것이라는 뜻으로 물목(水項)이라 이름하였는데 과연(過然) 1952년 마을 서쪽에 운암지(雲岩池)가 건설(建設)되었다.

  • 용바우(龍岩, 굼바우, 궁바우)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가에 크고 넓은 바위가 있는데 용(龍)이 또아리 틀던 곳이라 하여 용(龍)바우라 일컫기 때문에 마을 이름도 이에 유래(由來)한다.

  • 국사봉(國師峰)

    뒤낫의 뒷 山(732m)인데, 두천리(杜川里)와 유천면(柳川面) 마천리(麻川里), 문경군 동로면(聞慶郡 東魯面)과의 경계지점(境界地點)이다. 이곳에 명당(明堂) 묘(墓)터가 있으나 묘(墓)를 쓰면 비가 오지 않는다 하여 한해(旱害) 때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사부리(沙夫里)

  • 憂忘(憂忘골)

    서창(西倉) 북서(北西)쪽에 있는 마을로, 순흥 안씨(順興 安氏), 경주 최씨(慶州 崔氏)가 차례(次例)로 들어와서,지형(地形)이 오망하게 생겨서 우망(憂忘)골이라 하였다 한다. 또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안(安) 총각이 최(崔) 소저(小姐)와 결혼한 이튼날 의병(義兵)으로 가서 소식(消息)이 없자 최소저(崔小姐)는 기다림에 지쳐 죽으니, 그녀를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고 이제는 근심을 잊으라는 뜻으로 우망(憂忘)이라는 마을 이름을 삼았다고도 한다.

  • 西倉(새마)

    예날 민창(民倉) 국창(國倉)이 있던 마을로 창(倉)이 이 마을의 서쪽에 있었으므로 서창(西倉)이라 했는데 마을 이름도 이에 연유하여 서창이 되었다고 한다.

  • 元沙夫(沙夫領, 沙夫, 사부랭이, 仙遊洞)

    사부리의 원(元)마을인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경주 김씨(慶州 金氏)와 전주 이씨(全州 李氏)가 들어와 마을이 열렸다고 한다. 그들은 마을 앞의 큰 바위에 삼봉산하선유동(三峰山下仙遊洞)의 칠자(七字)를 새기고 선유동(仙遊洞)이라 하다가 1900년경(年頃) 모래가 뜬다는 소문(所聞)이 있어 사부동(沙夫洞)이라 하였다.

  • 知道室(知道谷)

    지도곡이라고도 하는데 이 마을 뒤의 불당(佛塘)골에는 知道庵(지도암)이란 암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 마을 이름을 지도실이라 지었다고 한다. 또 쥐도새도 모르게 피난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 마을 앞에는 반송(盤松) 한 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명장(名將) 이여송(李如松)이 중국에서 벼루 속에 솔씨를 넣어 와서 심은 나무라고 하는데, 지금이 마을의 동신(洞神)나무라고 한다. 현재는 기념물(제111호)로 지정 되어있다.

내지리(內地里)

  • 구점(店里, 店地, 博雲堂, 博雲데이, 白雲堂)

    둔지방 서쪽 운암지(雲岩池)의 못뚝 아래에 있는 마을로, 그릇점이 있어서 점리(店里), 점지(店地)라고도 하고, 17세기(世紀) 後半(후반)에 어떤 스님이 두 사람이 이곳에 박운당(博雲堂)이란 도장(道場)을 짓고 마을을 개척(開拓)하였다 하여 박운당(博雲堂)이라고도 하고, 또 박운당(朴雲堂)이란 이가 책을 읽던 곳이라 하여 박운당(博雲堂)이란 이름이 생겼다고도 한다.

  • 洞口(동구)

    용문사(龍門寺) 입구에 있는 마을이며 이 고장 두천(杜川)에서 태어난 두운선사(杜雲禪師)가 처음에 이 마을 뒤에 두운암(杜雲庵)이란 절을 지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두운선사(杜雲禪師)를 만나러 올 때 청룡(靑龍) 두 마리가 동구(洞口)에서 인도(引導)한 것을 기념(記念)하여 왕명(王命)으로 뒷 산(山)을 용문산(龍門山),절을 용문사(龍門寺)로 고쳐 부르고, 절 앞 일주문(一住門) 옆에 있는 용(龍)못은 그 용(龍)이 살던 못이라 전한다.

  • 屯地方(屯地坊, 屯地房, 둔지뱅이, 店地)

    새마 북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두운선사(杜雲禪師)를 만나러 올 때, 이 곳에 군사(軍士)를 주둔(駐屯)시킨 곳이라 하여 둔지(屯地)라 부른다고도 하고, 또 둔사(屯士)를 두고 둔전병(屯田兵)을 토착시켰던 마을이라 하여 둔전병리(屯田兵里), 또는 둔지병리(屯地兵里)라 하다가 둔지방(屯地坊)이 되었다고도 한다.

  • 새마(新村)

    내지리 남단에 새로된 마을로 내지리에서 가장 크다. 둔지방에 살던 김문용(金文龍) 등이 1930년생(年代)에 이 곳 농장을 따라 내려 와서 새로 이룬 마을이다. 현재(現在) 이 마을은 각(各) 성씨(姓氏)들이 모여와 각성(各姓)받이 마을로 알려져 있다.

  • 枾木실(枾木谷, 柴木洞, 枾木實, 枾木室, 枾木)

    안골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감나무가 많이 있다. 15세기(世紀) 후반(後半)에 조씨(趙氏)가 이 마을을 개척(開拓)했다고 하는데, 다른 곳은 산짐승이 무서워 입산(入山)을 못하고 이 곳만은 산(山)이 낮아 들어왔다고 한다. 땔나무가 많아 시목실(柴木室)이라 했는데 1830년생(年代)부터 감이 많이 나서 시목실(枾木室)로 개칭(改稱)했다고 한다.

  • 안골(內洞동)

    둔지방이나 범드미 안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동구(洞口)에 살던 사람들이 농토(農土)를 따라 이곳으로 들어왔다.

원류리(院流里)

  • 새터(새터마, 新基, 草澗亭)

    원류리의 가장 중심(中心)되는 마을로서, 19세기(世紀) 후반(後半)에 신원(新院)에 살던 사람들이 옮겨왔다고 한다. 앞냇가에 초간정(草澗亭)(죽림리 구역)이 있다. 이 마을은 그냥 초간정이라고도 한다.

  • 팔찌기(八積, 八賊)

    문촌 동쪽에 여덟 사람의 부자가 살고 있어 여덟 노적가래가 있었으므로 팔적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하고, 도둑골에 8명의 도둑이 있었다고 하고 팔적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 허릿골(흐릿골, 허리골, 希夷, 希里, 流里, 希弟, 本流)

    원류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이 마을 사람들은 정감록(鄭鑑錄)의 십승지지(十勝之地)가 바로 여기라고 주장(主張)한다. 한길에서 안보이는 마을이므로 피난처로 알맞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 마을 이름을 따서 유리면(流里面)이 되었고, 유리면 소재지(流里面 所在地)이었다. 마을 뒤에 방아 살개처럼 생긴 형제봉(兄弟峰)이 있고 그 봉(峰)의 낮은 목의 지형(地形)이 허리처럼 생겼다고 허릿골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 문촌(문村)

    허리골 남쪽 큰길가에 있는 마을로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전에 감천 문씨(甘泉 文氏)가 개척(開拓)하여 문씨(文氏)의 마을이란 뜻이라고 하나 지금은 모두 떠나고 각성촌(各性村)이 되었다.

  • 鳴犬地(面境地, 민경지)

    민경지라고도 한다. 면의 경계선 지점이란 뜻이었는데 변음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용문면이 유리면(流里面)과 제고면(諸古面)으로 되어 있을 때, 이 마을이 경계지점이었다. 이 곳 지형이 개처럼 생겼다고도 하고 또 앞산에는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의 명당(明堂)이 있다고 한다.

선리(仙 里)

  • 두들마(邱村, 邱田, 神仙골, 仙洞, 아랫마, 下村)

    구릉지에 자리한 마을로 마을 뒤 바둑판처럼 생긴 신선(神仙)바위가 있는데 여기서 신선들이 바둑을 두며 놀았다는 전설(傳說)이 있어 선동이란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한다.

  • 聖主골(聖主洞, 큰마, 聖谷)

    구촌(邱村) 동쪽에 있는 마을로, 선리에서 제일 크며, 정옥(鄭沃)이 마을을 개척(開拓)할 때 성군(聖君)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성주(聖主)골이라 하였다 한다. 뒤에 도덕봉(道德峰)이 있다.

  • 한밭(大田)

    형제봉(兄弟峰) 아래에 있는 마을로, 경주(慶州) 정씨(鄭氏) 집성촌(集性村)이다. 큰 밭 자리에 터를 잡았다고 해서 한밭이라 한다.

  • 새마(샘마, 샛마, 新村)

    두둘마와 한밭 사이에 새로 된 마을인데 어디든 파면 물이 나온다고 샘마라 부르다가 두들마와 한밭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고 샛마, 새마라고 부른다고 한다.

  • 城안(城內)

    어림서의 안 마을이란 뜻으로 성비라고도 한다. 어림성 예천성(醴泉城)과 풍기성(豊基城)이 서로 등을 대고 있는 토성(土城)이다.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군 남후면에 있던 공민왕이 친히 임석하여 쌓은 성이란 뜻이라 하나 삼국사기에는 고구려(高句麗) 동천왕이 여기까지 왔었다고 적혀 있다. 강원도 등지에서 이주한 각성(各性)이 살고 있다가 모두 떠나고 현재는 양수발전소가 조성중에 있다.

  • 절골(寺谷)

    한밭 뒤 청룡사(靑龍寺) 앞뒤에 있는 마을이다. 청용사의 자리는 큰 호수였는데 어느해 여승이 정월(正月) 초하룻날 여기에서 청룡(靑龍) 두 마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청룡사(靑龍寺)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능천리(能川里)

  • 방두들(안방두들, 內芳邱)

    능내 서쪽 둔덕에 있는 마을로서1700년경(年頃) 함양 박씨(咸陽 朴氏)가 개척(開拓) 하였다.아름다운 둔덕에 있다하여 방구(芳邱)라 하였다. 그 뒤, 이 마을의 들머리에 또 마을이 생기자 이 마을을 내방구(內芳邱), 새로 생긴 마을을 외방구(外芳邱)라 하였다.

  • 外芳邱

    1830년경(年頃) 이룩된, 방두들의 바깥 마을이란 뜻이다.

  • 웃능내(上能川, 上能內, 上能, 書堂골)

    능내 위쪽에 있는 마을로서, 높은 산기슭에 마을이 있어 아래쪽에서 보면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아 '하늘 아래 첫동네'라고도 한다. 능(陵)처럼 생긴 산(山)과 냇물이 있다고 하여 능내(陵川)이라고도 했는데 지금은 능천(能川)으로 적고 있다.

  • 아릇마워아랫마, 아래能內, 河能, 능내, 能川)

    원래(元來) 능내(陵內)였으나 잘못되어 능천(能川)이 되었고, 웃능내보다 늦게(1850年頃)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능천리(能川里)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제곡리(渚谷里)

  • 渚谷(小渚谷, 藷谷, 맏일, 작은맛질)

    큰맛질(大渚里)의 서(西)쪽에 있는 이 마을은 큰 맛질과 함께 예부터'금당맛질 반서울'이란 말이 있을 만큼 크고 짜임새 있는 마을이었다 하며, 처음 마을을 개척(開拓)한 권의(權儀)가 3형제(兄弟) 중(中) 맏이어서 맏길(맛질)이라 하였다 한다. 또 높은 산이 사방(四方)으로 애워싼 가운데에 큰 들이 열렸으므로 맏일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 양갓(兩岐)

    1910년경(年頃) 인동 장씨(仁同 張氏)가 개척(開拓)하였고, 곧이어 의성인(義城人) 김현모(金顯模)(1881∼ ?)가 보문면에서 이곳에 이거(移居)하여 세거(世居)하고 있다. 뒷산 육녀봉(六女峰)에서 내려 보면 길이 탕건같이 생겼고 길 때문에 나눠진 마을이 두 개의 갓과 같으므로 양갓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는 마을이 산기슭에 있어서 생김새가 기다랗고, 한쪽 구석에 위치(位置)하여 양기(讓岐)라고도 한다.

  • 野翁亭(야옹정)

    작은맛질 서남(西南)쪽에 있는 정자(亭子)로 현감(縣監) 권심언(權審言)이 권의(權儀)의 장이소(杖履所)에 1566년(年)에 세웠다. 처마끝 기와에 글자를 넣었다.

  • 六女峰沼(沼)

    양갓 남(南)쪽 육녀봉 아래에 있는 소(沼)로서, 산세가 금반형(金盤形)이어서 육선녀(六仙女)가 목욕(沐浴)하고 갔다고 한다.

대제리(大渚里)

  • 큰맛질(大渚)

    작은 맛질과 내를 사이에 두고 東쪽에 이뤄진 마을이다. 이 곳에 옛날 마(藷)가 많이 생산(生産)되었기 때문에 저곡(藷谷)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관아(管衙)에서 오기(誤記)하여 저곡(渚谷)이라 하다가 1914년(年)에 대저(大渚)라고 하였다.

  • 주막걸(주막거리, 酒幕街)

    작은 맛질과 큰맛질 사이의 큰 길가에 있는 마을이며 이 곳을 지나 상리(上里)의 저수재를 넘어 서울로 가는 나그네들에게 침식(寢食)의 편의를 제공하던 길가의 마을이다. 옛날에 시장이 있어서 장터걸 이라고도 한다. 해마다 정월에 서낭제를 지낸 뒤 그 다음날 여기서 맛질골 열두 마을 젊은이들이 모여서 줄다리기와 별신굿을 하던 곳이라 한다.

  • 민트리고개(민트리재, 밑에고개, 문재, 文嶺, 文峙)

    큰 맛질 동북(東北)쪽에 있는 고개로 감천면 천향리 석밭으로 넘어간다. 과거(科擧)보러 한양(漢陽)으로 가는 선비들이 미트리(짚신)를 많이 가지고 이 고개를 넘었다 한다.

하학리(下鶴里)

  • 텃골(基洞, 基谷, 初洞, 下里)

    하학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데, 대저리(大渚里)와 더불어 큰맛질이라고 한다. 이 텃골은 맛질에서 가장 오래된 첫골이기도 하고 맛질의 본터라고도 한다. 맛질의 세 서낭 중에서 어미서낭당이 여기에 있다.

  • 白鶴(재달, 才達, 煮茶谷)

    텃골 남(南)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백학산(白鶴山) 밑이 되는데, 높은 재(고개)가 있다. 이곳 근처(近處)(예천읍 생천리)의 정산서원(鼎山書院)에서 공부(工夫)하던 선비들이 이곳의 배리산을 백학(白鶴)이 깃을 접고 막 둥지를 내려 앉는 모습이라 하여 백학(白鶴)이라 불렀다 한다.

  • 石立(거리마, 돌신거리, 돌선끝)

    텃골 남서(南西)쪽 큰길 가에 있는 마을로 큰 돌이 서 있다. 석립(石立)은 1960년대(年代)부터 불리어졌다. 원래(元來) 이 마을 앞에 중세(中洗)거리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1886년(年) 병인년대홍수(丙寅年大洪水)로 떠내려가고 석립(石立)으로 옮겼다고 한다.

  • 음지마(陰達마, 아랫맛질)

    석립(石立) 북(北)쪽 음달(陰達)쪽에 있는 마을인데 맛질의 아랫 마을이 된다. 북향(北向)이고 뒷산이 높아 햇빛이 잘 안드는 곳에 사는 곳이지만 의식(衣食)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명당(明堂) 마을이다.

  • 기애집골(지애집골, 기아집골)

    제달골의 막바지에 있는 마을로서 기와지붕인 김씨(金氏)들 재사(齋舍)가 있었으므로 기애집골이라고 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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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22.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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