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인물 및 유물소개
윤상(尹祥, 1373~1455)은 윤선(尹善)의 아들로 예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예천(醴泉), 초명은 철(哲), 자는 실부(實夫), 호는 별동(別洞)이다. 향리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시험을 통해 양반의 신분을 획득하였고, 이 지방의 토성(土姓)이자 고려의 향리 가문이었던 예천윤씨가 양반가문으로 자리 잡는데 윤상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명민하였고 사동(使童)으로 일을 하면서 동헌(東軒)을 드나드는 길에 틈틈이 관솔(松明)을 모아 밤늦게까지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윤상은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문인이자 당대의 대유학자인 죽계 조용(竹溪 趙庸)의 문하에서 사서육경(四書六經)과 성리서(性理書)를 배우고 연구했는데, 이는 윤상의 학문적 바탕이 되었다. 조용을 통해 정몽주의 학통을 이어받아 조선 초기 성리학을 유지, 진작시켰고, 김숙자에게 『주역(周易)』을 가르쳐 정몽주 계열의 도통(道統) 계승과 학문적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567년(명종 22) 중국 사신으로 온 서국(徐國)과 위시량(魏時亮)이 "동방에 공맹(孔孟)의 심학(心學)을 능히 아는 사람이 있는가?"하고 물으니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고려의 우탁(禹倬)과 정몽주, 조선의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윤상, 이언적(李彦迪), 서경덕(徐敬德)을 적어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윤상은 경학(經學)에 조예가 깊었던 성리학(性理學)의 선구자였으며, 경북 북부 지역의 초기 성리학적 학풍(學風)을 조성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1392년(태조 1)에 진사, 이듬해 생원이 되었으며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상주와 선산의 교수를 거쳐 예조정랑이 되었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성균관 사예가 되었다. 윤상은 효성이 매우 지극하여 연로하신 부모를 위해 외직을 청하여 금산과 대구, 영천 등에서 수령을 역임하였다. 이후 사성을 거쳐 16년 동안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1448년(세종 30) 예문관제학으로서 원손(元孫, 단종)이 성균관에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학문을 가르쳤는데, 많은 선비들이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윤상은 당시 ‘경학삼김(經學三金)’이라 불리는 김구(金鉤), 김말(金末), 김반(金泮)보다 학문적으로 더욱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 많은 선비들이 그에게 배우기를 청하였다. 성균관에서 오랫동안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김시습(金時習), 대제학 김구(金鉤), 김숙자(金叔滋) 등 수많은 현관(顯官)과 명사(名士)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어 개국 이래 최고의 사범(師範)으로 칭송받았다.
1451년(문종 1) 벼슬에서 물러나 예천으로 낙향하였다. 이때 문종이 승정원에 명하여 윤상의 노고(勞苦)를 치하하며 사궤(食饋)를 내렸는데, 고령의 나이로 은퇴하는 재상에게 궤물(饋物)을 내리는 제도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미흘(현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에 터를 잡고 제자들을 가르치다 향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매년 음력 3월 8일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에 위치한 윤별동묘(尹別洞廟, 불천위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윤별동묘(尹別洞廟)

<윤별동묘>
별동 윤상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불천위(不遷位) 사당(祠堂)이다. 조선 초기 성리학 보급에 기여한 공을 기리기 위해 1456년(세조 2)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에 건립되었다. 1995년 시・도 유형문화재 제293호로 지정되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낮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막돌 초석 위 어칸에는 둥근기둥을 세우고 창방을 높였으며, 양쪽 칸에는 네모기둥을 세우고 창방을 낮게 처리했다. 어칸에는 두 짝의 열 개문을 달고 양쪽 칸에는 빛이 통과할 수 있는 광창만 두는 오래된 구성법을 보이고 있는데, 사당 건축에서는 흔하지 않은 구조와 양식이다.
지붕은 삼량가로, 양쪽 귀기둥 위에는 창방머리를 다듬어서 길게 빼고 위에는 주심을 십자로 짜서 얹는 등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외벽은 외부 배면만을 제외하고는 내・외부를 모두 회벽으로 마감하였다. 원래 사당 안에 별동집 목판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 별동 윤상의 <거위와 구슬> 이야기
윤상이 먼 길을 가던 중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주막에 하루 묵어가기로 했다. 주막에 앉아 잠시 쉬고 있을 때 주막 주인의 어린 아들이 값비싼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떨어뜨렸고, 아이 주위에서 먹이를 찾아 서성거리던 거위가 구슬을 먹이로 알고 삼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조금 뒤 아들의 구슬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된 주인은 윤상을 의심하였고 관가에 끌고 가려 하였다. 윤상은 차분한 태도로 “내일 아침까지 구슬을 찾아주겠소. 단, 저 거위를 내 옆에 묶어두시오.” 라며 주인을 설득하였다. 주인은 윤상이 도망갈 것을 염려하여 거위와 함께 기둥에 묶어두었다. 다음날 아침 거위가 똥을 누었고, 윤상은 주인에게 거위의 똥 속에서 구슬을 찾으라고 말했다. 구슬을 찾은 주인은 윤상을 의심하고 묶어두었던 일을 사과하면서 왜 거위가 구슬을 삼켰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러자 “내가 말했다면 당신은 구슬을 찾기 위해 거위의 배를 갈랐을 것 아니오. 내가 하룻밤만 고생하면 구슬도 찾고 거위도 죽지 않았을 것이오.”라 하였다. 이 이야기를 통해 윤상의 침착성과 참을성은 물론 생명을 중시하는 그의 온화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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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8.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