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인물 및 유물소개
권욱(權旭, 1556~1612)은 거창현감을 지낸 권심언(權審言, 1502~1574)의 아들로 예천 용문면 북저곡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초(景初), 호는 매당(梅堂)이다. 예천 저곡리(맛질)의 안동권씨 입향조 야옹 권의(野翁 權檥, 1475~1558))가 그의 조부이다.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의 문인으로 여러 경전(經典)과 자사(子史)에 능통했고 1950년(선조 23)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말을 할 때부터 문자를 많이 알았고, 8~9세 무렵에는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에 통달하였다. 항상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을 가슴에 담아 행동하였다.
19세에 아버지가 병환으로 누워계시자 직접 약을 먹여 드리고, 변을 맛보며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다. 아버지의 병이 차도를 보이지 않자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대신 저를 데리고 가십시오.”하고 하늘에 빌었지만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다. 권욱은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르고, 3년 동안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제를 올림으로써 삼년상을 마쳤다. 그리고 어머니가 수저를 들지 못하실 정도로 거동이 불편해지자 직접 업고 다닐 만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다. 또한 형제들과 사이가 좋아 한방에서 함께 지내며 돈독한 정을 쌓았다.


<임진왜란 당시 권욱이 사용했던 도(刀)와 검(劍)>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여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을 가게 되자 정산서원(鼎山書堂)에서 역봉 이개립(櫟峰 李介立, 1546~1625), 양서 이광윤(讓西 李光胤, 1564~1637)과 함께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그리고 스승 학봉 김성일과 함께 나라를 구하기 위해 격문(檄文)을 돌려 수백 명의 의병(義兵)을 모집하고 왜적에 맞서 싸우며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상소(上疏)의 우두머리가 되어 임금이 몸소 나아가 왜적을 정벌하기를 청하였다.
향선(鄕選)으로 경릉참봉을 제수 받았고, 장흥고봉사가 되었으나 노령의 어머니가 걱정되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시냇가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뜰에 매화나무를 심은 뒤 ‘매당(梅堂)’이라 편액(扁額)하였다. 매일 아침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 뒤 어머니를 살피고, 단정한 자세로 심경(心經)과 주자서(朱子書)를 읽었다. 권욱은 마음을 나눈 친구들과 교류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가 1612년 향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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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8.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