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인물 및 유물소개

제목청백리(淸白吏)의 길을 걷다, 박정시(朴廷蓍, 1601~1672)
작성자예천박물관 @ 2017.02.07 16:14:22

 

박정시(朴廷蓍, 16011672)는 박영(朴瑛)의 아들로 예천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길부(吉孚)이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고, 커서는 경사(經史)에 능통하였다. 1628년 아버지를 여의고 한빈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과 번갈아 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여 주변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1633(인조 11) 소과(小科)에 입격(入格)하여 생원, 진사가 되었다. 학유를 비롯해 박사와 전적을 지냈으며, 형조정랑을 거쳐 결성, 영암, 태안의 수령을 역임하였고, 충청도사를 지냈다. 박정시는 강직한 성품, 센 담력, 강한 의협심, 정직함과 근면함을 두루 갖춘 인물로 청백리록(淸白吏錄)에 올랐다. 태안의 수령직에서 물어날 때는 거문고와 춘추(麟經) 1부만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이를 통해 그의 청백리적 삶을 유추해볼 수 있다. 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 1621~1678)그에게는 굳고 청렴한 지조가 있다.”라고 칭송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술과 거문고를 즐기며 안빈낙도(安貧樂道)한 삶을 살다 1672년 향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정시와 거문고

 

박정시가 태안군수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태안군에서는 부임한 첫날 군수가 죽는 기이한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민심(民心)이 흉흉해지고 태안군수로 부임하는 것을 꺼리는 이들이 많아지자 담력이 세고 지략이 뛰어난 박정시가 사건을 해결하고자 태안군수에 자원하였다.

 

태안군수로 부임한 첫날, 관복을 정제하고 동헌 앞마당에 등촉(燈燭)을 밝혀 놓았다. 삼경(三更)이 되자 스산한 바람이 불면서 등촉이 모두 꺼지고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구슬피 울면서 나타났다. 그 여인은 목에 칼을 꽂은 채 피를 흘리며 박정시에게 다가와 다소곳하게 절을 하였다.

 

네가 그동안 군수로 부임한 사람들을 죽였구나! 사불범정(邪不犯正)의 공간에 어찌 귀신이 들어와 사람을 죽인단 말이냐하고 박정시가 호통을 치자 저는 저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에 찾아왔을 뿐입니다. 사또께서 저의 모습을 보고 놀라 그리 된 것이지 제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닙니다.’ 라며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털어놓았다.

 

여인은 자신이 5년 전 태안군수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와 아전(衙前)에게 겁탈을 당하였고, 죄가 드러날까 겁이 난 아전이 자신의 목을 칼로 찌르고 동헌 앞뜰에 있는 오동나무 속에 거꾸로 집어넣었다고 하였다. 너무 분하고 원통하여 구천을 떠돌고 있으니 자신의 억울함을 대신 풀어달라고 하소연 하자 박정시는 여인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튿날 아침, 새로 부임한 군수 역시 비명횡사(非命橫死)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동헌에 들어온 아전들은 너무나 멀쩡한 박정시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박정시는 여인이 말한 대로 오동나무를 베었고, 그 안에서 칼이 꽂힌 채 거꾸로 박혀있는 여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는 여인의 목에 꽂힌 칼을 뽑고 정성을 다해 장례를 지내며 원혼(冤魂)을 달랬다. 그리고 여인을 죽인 아전을 찾아내어 처벌하였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던 날 밤, 박정시의 꿈에 깨끗한 소복차림의 여인이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며 이번에 벤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들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하고 사라졌다.

 

박정시는 여인의 말대로 오동나무를 다듬어 거문고 3대를 만들었으며, 그간의 사정과 함께 이를 보고 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박정시의 처사를 칭찬하며, 2대의 거문고는 한양으로 올려 보내라 명하였다. 이에 2대의 거문고는 조정으로, 1대의 거문고는 박정시가 가지게 되었다. 이후 임기를 마친 박정시는 거문고와 춘추(麟經) 1부만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박정시의 집안과 나라에 큰일이 있을때면 거문고가 스스로 소리를 내어 알려주었다고 전해진다. 후손들이 이 거문고 이름을 자명금(自鳴琴)으로 짓고 대대로 가보(家寶)로 보관하여 왔다. 그러나 한말 당시 예천에서 양주대감으로 불렸던 희재 이유인(希齋 李裕寅, 1843~1907)이 빌려가서 거문고 뒤를 칼로 뚫어 본 후로는 스스로 우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문화관광과예천박물관팀(☎ 054-650-8316)입니다.

최종수정일2018.06.27

교육/학술

예천 인물 및 유물소개 [26쪽]페이지의  홈페이지URL 정보를 담고 있는 QR Code 입니다. 홈페이지 주소는 https://www.ycg.kr/open.content/museum/education/edu.reference/?i=1623&p=26 입니다.

이 QR Code는 현재 보시는 <예천 인물 및 유물소개 [26쪽]페이지>의 홈페이지URL 정보를 담고 있는 QR Code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