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인물 및 유물소개
김주(金迬, 1606~1681)는 의금부도사 김극계(金克繼)의 아들로 예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여정(汝定), 호는 불구당(不求堂)이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수려하였고, 성실하고 총명하여 하나의 한자를 가르치면 다른 자를 추측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6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르고,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잘 보살펴 주변사람들이 모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육경(六經)과 자사(子史), 주자의 성리서를 항상 가까이 하였고, 이단과 패설은 멀리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발하자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 1554~1637)이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가 되어 장여한(張汝翰)은 예천의병장, 김주에게는 서기를 맡겼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입격한 뒤 성균관에서 공부하였으며, 모든 유생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고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자 성균관에 있던 김주 역시 그곳으로 갔으나 성문이 닫혀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김주는 예천으로 내려와 의병을 일으킨 뒤 여러 장수들과 함께 서울로 가던 중 임금이 삼전도에서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1638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하는데 조선에서 군사를 보내주기를 청하였다. 김주는 이때 성균관 유생을 대표하여 척화상소를 올렸다. 다음해 식년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1640년 정명수가 청나라에 명에 따라 척화신(斥和臣)을 색출하여 심양으로 보내라는 명을 받고 청음 김상헌과 척화상소를 올렸던 김주를 지명하였다. 조정에서 성균관 유생으로 상소를 올린 것을 문제 삼아 심양으로 보내는 것은 부당하다 하여 가지 않았다.
김주는 내직으로 군자감 참봉,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병조와 형조의 좌랑과 정랑을 거치면서 성균관 직강이 되었으며, 춘추관을 겸직하여 인조실록(仁祖實錄)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외직으로는 김천・무장・연안・양산과 충청도 도사를 역임하였다. 성실하고 근면하여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했으며,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펼쳐 칭송을 받았다. 특히 무장현감 재임시절, 전쟁으로 소실된 관아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백성들의 사정을 두루 살피고 아전들이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무장현이 인근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되었고, 이를 어사(御使)가 임금에게 고하여 일습(一襲)을 하사받았다. 1651년 무장현을 떠날 때 백성들이 김주의 공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고, 조정에서는 말(馬)을 하사하였다. 또한 연안현감 재임시절 선정을 펼쳐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웠고, 양산현감을 재임할 때도 선정을 펼쳐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후 함평현감을 지내고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게 독서를 즐기며 자손들을 가르치다 1681년 향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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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8.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