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인물 및 유물소개

제목효우(孝友)의 삶을 실천하다, 남야 박손경 (南野 朴孫慶, 1713~1782)
작성자예천박물관 @ 2017.04.10 11:58:34

박손경(朴孫慶, 1713~1782)은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효유(孝有), 호는 남야(南野)이다. 박손경이 태어난 이곳은 함양 박씨 세거지로 금당맛질 반서울이라 불리던 곳이다. 산수가 수려하고 물산이 풍부하여 학자를 많이 배출한 마을로 이름이 높았다.

 

박손경의 삶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로는 효우(孝友),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를 실천한 것과, 두 번째로 과거를 일지감치 단념하고 학문의 세계로 매진한 것이다. 먼저 효우(孝友)의 삶이다 1743(영조 19) 박손경은 부친상을 당하자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상복을 벗지 않았다. 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불어도 형제가 홑이불 하나를 함께 덮고 지냈다고 한다. 또한 한 살 위인 계모를 봉양하는데도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의 상헌수필(橡軒隨筆)’ ‘박교관 손경(朴敎官孫慶)’에는 박손경의 효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는 효성이 지극했다. 계모의 나이가 겨우 한 살밖에 많지 않았으나 봉양을 잘해 뜻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집이 몹시 가난했다. 손수 계모의 방에 불을 땠는데, 계절에 따라 땔나무의 양을 조절해 온도를 알맞게 했다. 그의 나이 칠십이던 임인년, 이웃 고을인 용궁에 사는 진사 이중장(李仲章)이 그를 찾아갔다. 늦은 시간에 찾아갔지만 그를 만나지 못했다. 알고 보니 그는 수수 밑동을 캐어 다음날 계모의 방에 불을 때려고 밭에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남의 밭에는 손을 대지 않았으니, 과연 행실이 독실하고 효성스럽고 청렴했던 동한(東漢)의 선비인 것이다.

 

박손경은 아우 민경과의 우애도 두터웠다. 박손경은 아우를 한양에 거주하는 먼 인척에게 빼앗겼다. 그런데 그 아우를 데려갔던 집안이 역모에 연루되어 온 가족이 노비가 되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박손경은 아우를 위해 백방으로 힘을 쏟아 영조가 이들의 우애를 알고는 동생을 본가로 돌려보내도록 했다. 이처럼 박손경은 유가의 실천 덕목인 효우(孝友)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두 번째로는 평생 학문에 몰두한 학자의 삶이다. 박손경은 약관의 나이에 부모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지만 이내 포기하고, 평생 실천적 학문에 몰두한다. 특히나 그는 학문적으로 이름이 높아 대산(大山) 이상정(象靖),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칭송된 인물이기도 하다. 1777(정조 1) 박손경은 학문에 정통하고 행실이 덕성스러워 경상도 관찰사의 추천으로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됐으나, 노모를 모시기 위해 사양했다. 1779년 암행어사 황승원(黃昇源)은 정조에게 박손경의 학문이 사표(師表)가 될 만하다고 아뢰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됐으나, 이 또한 나아가지 않는다.

 

남야 박손경은 조선후기 모범적인 효를 실천, 아우와의 우애 역시 두터운 인물로서 관직보다는 효를 실천했던 삶을 살았다. 그의 무덤은 지내동 매봉산(梅峰山)에 있고, '남야집(南野集)'을 남겼다. 상금곡리의 회산사(晦山祠)와 금곡서원(金谷書院)에 제향됐다. 현재 금당실 마을에는 남야종가가 있으며,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211일 남야선생의 불천위제사를 모신다. 18세기 조선후기 사회를 살다간 그는 이론적인 학문을 추구하기 보다는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묻어나오는 실천을 앞세운 학풍을 견지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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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8.06.27

교육/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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