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인물 및 유물소개

제목이달의 인물 '권산해'(2019.01)
작성자예천박물관 @ 2020.09.16 14:09:30

                            

■ 권산해(權山海, 1403~1456)

본관은 안동, 자는 덕보(德甫), 호는 죽림(竹林)이며, 아버지는 권관(權寬)으로 예천 사람이다. 부인은 경혜공(景惠公) 권전(權專)의 딸로 부인의 언니가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이므로 문종의 손위 동서이자, 단종의 이모부이다.

그는 지조와 절재를 목숨처럼 여겼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일찍이 문경공(文景公) 권진(權軫)에게서 공부를 배울 때 『백이전(伯夷傳)』을 읽다 세 번 거듭 탄식하며 말하기를 “백이 숙제 같은 사람이 있고 난 뒤에야 나라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장한 후에도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여 착한 사람을 보면 향기 나는 난초를 보듯 좋아하였고, 악한 사람을 보면 독사를 보듯 피하였다.

1440년 세종이 권산해의 재행(才行)이 높다 하여 녹사(錄事)와 주부(主簿)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것은 자신이 왕실과 인척 관계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기 쉽기 때문이었다. 또 자신의 행동이 왕실, 크게는 국가에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말과 행동을 항상 신중하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1454년(단종 2)에는 종부시첨정 벼슬을 하였는데 어린 임금을 보필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자 “세조를 섬길 수 없다”라며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예천으로 내려갔다. 다음 해인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자 이 소식을 듣고 사육신과 함께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이어 “내 살아 단종을 구하지 못할 바에야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후 권산해의 가족을 비롯해 후손들은 100년 이상 어둡고 괴로운 생활을 해야 했다. 권산해가 자살하자 부인 권씨는 집 안의 모든 책과 권산해가 평소 주고받은 편지글을 비롯해 모든 문서를 불태웠으며, 권산해는 삭탈관직 당하고 가족은 영해로 유배되었다. 뿐만 아니라 권산해의 후손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금고(禁錮)에 처해졌다.

그러다 1558년(명종 13) 금고가 해제되어 권산해의 손자 권경(權經)과 권응성(權應星)이 함께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1682년(숙종 8년) 단종이 노산군에서 왕으로 복위되었고,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사당이 세워졌으나 이때도 권산해는 제외되었다. 그러다 1789년(정조 13) 후손 권종락(權宗洛)의 노력으로 당시의 종부시첨정 벼슬을 되찾았다. 1791년(정조 15) 경기·충청·경상도 유생 2천여 명이 증직(贈職)과 정려(旌閭)를 청하였다. 그 결과 이조참판으로 증직 되고, 고향 마을(용궁면 대죽리)에 정충각(旌忠閣)이 세워졌다.

시호는 충민(忠愍)이고, 경주 운곡서원(雲谷書院)과 예천 노봉서원(魯峯書院)에 제향 되었다.

- 출처 :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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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8.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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