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인물 및 유물소개
■ 김복일(金復一, 1541~1591)
- [문과] 선조(宣祖) 3년(157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3위
- [진사시] 명종(明宗) 19년(156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48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으로 용문면 죽림리 남악골(南嶽洞) 사람이다. 김진(金璡)의 다섯째 아들로 학봉 김성일의 동생이며, 퇴계 이황의 제자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가 되고, 1570년(선조 3)에 식년 문과에 예천 사람 김대명‧노전‧정윤우와 함께 급제하여 1575년 성균관학유, 1579년에 박사, 전적을 거쳐 1580년에 형조좌랑을 시작으로 호조좌랑‧공조좌랑을 지내고 1583년 호조정랑에 올랐다.
전라도 어사로 나갔을 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부린 전주부윤이 김복일의 소문만 듣고 스스로 벼슬을 그만둘 정도로 김복일의 청렴 강직한 성격이 알려져 있었다. 그 후 1584년에 강원도사를 거쳐 1587년에 울산군수로 부임 중에는 왜구의 노략질을 뿌리치고, 백성을 아끼고 공익을 위해 힘쓰는 청백리의 모범을 보여 울산 군민이 세운 송덕비가 지금도 울산향교 뒤뜰에 서 있다. 관찰사가 권세가에게 바칠 뇌물을 요구하므로 "어진 백성의 가난한 재물을 긁어다 살찐 세도가를 더욱 부자 되게 할 게 무엇이냐."라고 하였다. 또한 관찰사가 울산에 사람을 보내어 토산품을 거둬가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을 잡아 가두고는 그 이유를 관찰사에게 보고하니, 관찰사가 겉으로는 좋은 척하고 속으로는 분히 여겨 최상위로 보고한 업무 평가 보고서를 다시 찾아와 최하위로 고쳐서 올리기도 하였다.
김복일의 화살처럼 곧고 대쪽같이 바른 마음을 모두 걱정하더니, 과연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곤궁 속에서 지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도 "지금 세상에 다시는 그런 사람이 없다."라고 칭찬했고, 선조 임금도 김복일의 청렴 강직한 성격을 듣고 감탄하여 『문헌비고』, 『성리대전』 등의 책을 하사하였다. 김복일은 그 후 창원부사, 경주교수, 1590년에 지금 국립 대학인 성균관의 사예와 종3품인 사성에까지 벼슬이 오르고 풍기군수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용문면 죽림리에는 가학루(駕鶴樓)라는 집을 짓고, 그 옆에 남악정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부인은 죽림리 대수마을의 권오상(權五常)의 손녀이고, 무덤은 용문면 내지리의 용문산에 있다.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과 예천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 출처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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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8.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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