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인물 및 유물소개

제목이달의 인물 '김 저'(2019.05)
작성자예천박물관 @ 2020.09.16 14:17:11

                            

■ 김저(金佇, 1304~1389)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충국(忠國), 호는 율은(栗隱)이며 본명은 김저(金佇)이고 김손(金遜)은 사명(賜名)이다.

1304년 출생하였으며 1318년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1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관 9품직인 통사랑이 되었다. 그 후 고성·순천·영광 교수, 안변·구례 감무와 형조·공조·예조정랑, 도총부부총관을 거쳐 순천부윤을 지냈다. 1352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원나라로부터 국권 회복을 위한 개혁 정치를 단행하자 원나라에서는 공민왕을 내치려 하였다. 이에 격분한 율은은 원의 조정에 가서 이를 강력히 반대하다가 남황(南荒:베트남)으로 유배되어 1년 만에 풀려나 환국하였다. 이때 왕은 율은에게 손(遜)이란 사명을 내리고 자를 충국(忠國)이라 하여 총애하였으며, 그 후 성균관사성 겸 정당문학을 제수받았다. 1361년 홍건적의 침략으로 공민왕이 피난하자 왕을 예천·안동·상주로 호종하였다. 1365년 예부상서에 이어 첨지중추부사, 성균관사예, 수문전학사를 역임하였으며 정당문학 이존오(李存吾)와 신돈(辛旽)의 배척을 상소하다가 진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목은 이색 등의 청으로 6개월 만에 풀려나 성균관대사성, 예문관대제학, 공조·예조·이조전서를 역임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은풍현 율곡리에 천여 그루의 밤나무를 심고 율은거사(栗隱居士)를 자처하며 지조와 절의를 지키는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때 남하정(南下亭)을 짓고 학사고(學士庫)를 두어 남하지(南下誌)를 편찬하고 가승을 닦았다. 1378년 우왕의 간곡한 요청으로 대호군(大護軍)을 제수받았으나, 이듬해 벼슬을 내놓고 은풍면 율곡으로 정착하여 풍성군(豊城君)에 봉해졌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되고 최영이 처형되자, 최영의 생질인 율은은 1389년 최영의 측근인 전부령(前副令) 정득후(鄭得厚)와 함께 여주에 가서 폐위된 우왕을 만나 이성계를 살해하라는 부탁을 받고 돌아왔다. 곽충보(郭忠輔)와 모의하여 팔관회 행사에 거사할 것을 결정하였으나, 곽충보가 거짓으로 승낙하고는 이성계에게 그 사실을 밀고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성계가 팔관회에 참여하지 않고 집에 있자, 정득후와 함께 이성계의 집으로 잠입하였다가 문객에게 잡혀 순군옥에 갇혔다. 대간의 문책에 따라 변안열(邊安烈)·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우인열(禹仁烈)·왕안덕(王安德)·우홍수(禹洪壽) 등과 공모하여 우왕을 복위하기로 하였다고 자백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우왕은 강릉으로 옮겨지고, 다시 창왕도 폐위되어 강화로 추방되었다. 그해 11월 옥에서 죽으므로 그 시체를 저자에서 베었다. 그리고 김저의 모의에 가담한 문하평리 정지(鄭地) 등 27인은 유배되었다.

- 출처 :

• 김시우,『예천유학사』, 2016

•『유교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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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8.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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