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인물 및 유물소개

제목이달의 인물 '박주종'(2019.09)
작성자예천박물관 @ 2020.09.16 14:23:52

 

 

 

 

 

 

 

 

 

 

 

 

■ 박주종(鍾, 1813~1887)

 

자는 문원(聞遠)이고, 호는 산천(山泉)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박필녕(朴弼寧)이고, 어머니는 류성룡(柳成龍)의 후손인 풍산 류씨 류정조(柳貞祚)의 따님이다. 박주종의 학문은 퇴계의 학문을 바탕으로 박손경(朴孫慶)·박기녕(朴箕寧)으로 이어지는 가학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향시에 여러 번 합격은 하였으나 문과에 급제하지는 못했다. 고향에서 강학 활동에 힘썼으며, 영남 남인들의 입장을 반영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851년(철종 2)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묘 배향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1855년(철종 6)에는 사도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만인소(萬人疏)에 참여하였다. 또한 사도세자를 추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수록한 「청경모궁전례소(請景慕宮典禮疏)」를 만들었으며, 전례소를 올리게 된 배경을 「경모궁전례사의(景慕宮典禮私議)」로 작성하였다. 박주종은 당시 안동 유림 사회를 분열시켰던 류성룡계의 병산서원과 김성일(金誠一)계의 여강서원(현 호계서원)과의 분쟁인 병호시비를 조정하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1862년(철종 13) 임술민란이 발생하자, 온건한 입장에서 삼정에 대한 제도적 개선론을 담은 삼정구폐책(三政救弊策)을 내놓아 우등 5인 안에 들었다. 당시 어지러워진 현실은 삼정의 문란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극복하려면 옛 제도의 정신을 회복하고, 수령을 신중히 선택하며, 조정에서 먼저 절약할 것을 주장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자 영남지역에서는 만인소를 올렸는데, 1877년(고종 14)에 소두(疏頭)가 되어 서원 복원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이 일어나 의복제도를 고치라는 시행령이 내리자 「청물개의제소(請勿改衣制疏)」를 올려 전통 의제를 고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1850년(철종 1) 우리나라 향약 관련 역사에 대한 분류사인 『향약집설(鄕約集設)』을 정리하였고, 1868년(고종 5)에는 문물 백과사전인 『동국통지(東國通志)』를 편찬하였다. 『동국통지』는 단군 이래 조선 순조 때까지 한국 역사를 기전체 형식에 따라, 천문(天文)‧오행(五行)‧지리(地理)‧제사(祭祀)‧예악(禮樂)‧병위(兵衛)‧형법(刑法)‧식화(食貨)‧예문(禮文)‧학교(學校)‧선거(選擧)‧백관(百官)‧여복(輿服)‧율력(律曆) 등 14개의 지(志)로 구분하여 기록한 책이다. 또한 여러 성현과 송·명의 옛 선비들의 격언이나 지론을 자료로 삼은 격언집인 『면학유감(勉學類鑑)』과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배척하는 『수양만설(修壤謾設)』을 지었다. 이외에 그는 교감(矯監) 작업을 하였는데, 박손경의 『주서강록간보차의(朱書講錄刊補箚疑)』와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 등을 교감하였다.
1887년(고종 24) 봄, 병이 깊어지자 청(淸)·신(愼)·겸(謙)·졸(拙) 4자를 후손들에게 유훈으로 남겼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김시우, 『예천유학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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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8.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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