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인물 및 유물소개

제목이달의 인물 '정광필'(2020.05)
작성자예천박물관 @ 2020.09.16 14:33:03

 

 

 

 

 

정광필(鄭光弼), 1462~1538)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정구령(鄭龜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주목사 정사(鄭賜), 아버지는 이조판서 정난종(鄭蘭宗), 어머니는 장사랑 이지지(李知止)의 딸이다.

 

1492(성종 23)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 학유(學諭의정부 사록(司錄봉상시 직장(直長)을 역임하였다. 성종실록의 총재관(總裁官)인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은 정광필을 뽑아 도청(都廳)을 삼고 편집을 맡겼다. 1504(연산군 10) 직제학을 거쳐서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했다가 아산(牙山)으로 유배되었다.

 

1506(중종 1)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른 뒤 이조참판·예조판서·대제학을 거쳐 1510년 우참찬(右參贊)으로 전라도도순찰사(全羅道都巡察使)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기민구제(飢民救濟)에 공헌하였다. 다음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19(중종 14)에 수상(首相; 정승)이 되었다. 임금이 사정전에서 신하들에게, “천재(天災)의 원인이 될 만한 정치의 잘못이 있는가를 물었다. 송재 한충(松齋 韓忠;1486~1521)이 나와 아뢰기를, “전하께서 비록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 잘 하기를 힘쓰시나 비루한 자가 감히 수상(영의정인 정광필을 말함)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재변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며, 좋은 정치를 가히 바랄 수가 없습니다하였다. 이에 우의정(右議政) 신용개(申用漑;1463~1519)는 신진선비가 얼굴을 마주하고 대신을 배척하는 풍토는 근절되어야 한다며 한충의 죄를 논하고자 하였다. 정광필은 손을 저어 말리면서 오히려 젊은 사람들의 바른말하는 풍조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이에 신용개를 비롯한 대신들이 정광필의 말에 탄복하였다.

 

153170세에 궤장(几杖)1이 하사되었다.

 

1533년 영의정에서 물러나 회덕현(懷德縣)에 있을 때, 후임 영상 김안로(金安老;1481~1537)로부터 장경왕후(章敬王后) 국장 때 총호사(摠護使)로서 능지(陵地)를 불길한 땅에 잡았다는 무고를 받아 김해(金海)로 유배되었다.

이는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해 부마가 되어 호곶목장(壺串牧場)을 받아 밭을 일구고자 하였으나, 이를 저지한 일로 김안로의 원한을 샀기 때문이었다. 이후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사약을 내려서 죽이는 일)되자 곧 풀려나 영중추부사(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에 두었던 정1품 관직)가 되었다.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회덕서원,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향사되었다.

 

[출 처]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

동래정씨문집해제(東萊鄭氏文集解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작성자 학예연구원 오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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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8.06.27

교육/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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