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및 학술자료실

제목이달의 인물 '조용'(2020.10)
작성자예천박물관 @ 2020.10.19 09:40:00

 

 

■ 조용(趙庸, 미상 ~ 1424)​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고, 전교주부(典校注簿)·삼사도사(三司都事)에 제수되고, 외방에 나가서 계림부판관(鷄林府判官)을 역임하였다.

 

공양왕 즉위년에 시학(侍學), 1390년(공양왕 2) 정월에 전농시승(典農寺丞), 4월에 지평(持平)이 되었는데, 윤이(尹彛)·이초(李初)의 당(黨) 중에서 귀양가지 않은 우현보(禹玄寶)·권중화(權仲和)·장하(張夏)·경보(慶補) 등을 탄핵하여 유배보내게 하였다.

 

1392년 사예{司藝; 고려 시대 국학(國學)•성균관(成均館)에 두었던 종4품 벼슬}인 조용은 공양왕이 이성계(李成桂)와 동맹하려고 할 때 공양왕의 명령으로 초(草)를 잡았다.

 

1398년(태조 7) 7월 8일 간의대부(諫議大夫; 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정4품 관직)로 발탁되고, 9월 우간의(右諫議)로서 이조전서(吏曹典書) 이첨(李詹), 전 지선주사(知善州事) 정이오(鄭以吾)와 함께 경사(經史)에 기재된 임금의 마음가짐과 정치에 관계되는 것만을 찬집(撰集)하여 상절(詳節)을 만들어 바쳤다. 같은 해 12월 조용은 좌정승 조준·대사헌(大司憲) 조박(趙璞)·정당 문학(政堂文學) 하윤·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 이첨(李詹)·봉상 소경(奉常少卿) 정이오(鄭以吾) 등과 함께 《사서절요(四書切要)》를 찬술(撰述)하여 바쳤다.

 

1401년(태종 1) 5월에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다음 해 2월 대사성으로서 생원시의 시관(試官)이 되었다. 1402년 7월에 좌사간, 1403년 12월에 성균생원 60인의 요청으로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 겸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제수되었다.

 

1406년 9월에 다시 우부빈객(右副賓客), 1409년 8월에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우빈객, 다음 해 4월에 겸대사성을 제수받았다. 1414년 8월 예문관대제학이 되었으며, 다음 해 정월에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5년 12월에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고, 1417년 5월에 다시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다음 해 정월에 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가 되었다.

 

1421년(세종 3) 8월에는 검교의정부찬성으로서, 전토 30결과 쌀 및 콩 20섬을 하사받았고, 다음 해 6월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조용은 젊어서부터 학문에 힘써서 경사를 넓게 통하고 더욱이 성리학(性理學)에 정통(精通)하여 당시 유학(儒學)의 으뜸이 되니, 배우는 자가 태산과 북두성(北斗星)같이 우러러 보았다. 문장(文章)을 지을 때는 종이를 들고 선 자리에서 바로 끝내버렸는데, 빠르기가 귀신같았고 마음먹고 하는 것 같지 않아도 말이나 뜻이 모두 훌륭하였다. 조용은 집이 가난하여 서적(書籍)이 없으므로 남에게 빌리고, 다 본 후는 반드시 돌려주었는데 한번 본 것은 평생 잊지 않았다. 젊어서 국학에 유학(遊學)할 시절에 한 학생이 《원조문선대책(元朝文選對策)》을 새로 입수(入手)하여 귀중히 여겨 남에게 잘 보이지 않았다. 조용이 빌리려고 하니, 학생이 허락하지 않아서 3일 동안만 빌도록 청하여 빌렸다. 조용은 빌린 기한이 되어 돌려주면서, "이 책이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하니, 학생들은 희롱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그 후 학생이 그 대책을 읽으니, 용이 그 옆에 누워서 한 편(篇)을 외는데 한자도 틀리지 않았다. 학생이 크게 놀라 다른 편을 시험하니 전후집(前後集)을 다 마치도록 모두 틀리지 않았다.

 

조용은 부모를 지성으로 섬겼다. 그 모친이 병으로 괴로워해, 용이 밤낮으로 걱정하고 울며 옷띠를 풀지 않고 스스로 글을 지어서 기도하더니 얼마 되지 않아서 병이 나았다. 부친의 상(喪)을 만나서는 몹시 슬퍼하여, 밤이면 부르짖고 울며, 낮에는 흙을 메어다가 무덤을 만들었다.

 

성품이 곧고 청검(淸儉)하여 한번은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을 적에 회동관(會同館)에 있으면서 방 밖에 나가지 않으니, 예부(禮部) 관원이 보고, "재상(宰相)이 매매(賣買)하는 일을 모르니 참 어진 재상이다."하였다. 평소(平素)에 세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나는 재주도 없으면서 임금의 은혜를 과하게 입었으나, 털끝만한 은혜도 갚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만 임금을 속이지 않았던 단 한 가지 일로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을 뿐이다. 너희들은 나의 뜻을 보고 내 말을 들어서 생각을 여기에 두도록 하라."하였다.

 

무당을 좋아하지 않아서 제사할 만한 귀신이 아니면 제사하지 않았고, 임종 때에는 자제(子弟)에게 경계하여 불사(佛事)를 하지 않도록 하였다.

 

평생에 조수(操守)한 것이 이와 같았으나 그의 성질이 편벽되고 급하여 위엄과 무게가 없으며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주가 모자랐으므로 세상에서 이것을 단점(短點)으로 여겼다. 죽은 뒤에 조회를 3일 동안 철폐하고 관에서 장사를 도왔다.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는데 도덕(道德)과 박문(博聞)이 문(文)이고, 청백하게 절조(節操)를 지킨 것이 정(貞)이다.

 

-출 처-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해동잡록(海東雜錄)』

작성자 : 학예연구원 오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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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8.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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