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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광장 조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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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0일 한천생활체육공원에서 걷기운동을 하던 중 무대 서쪽 어린이놀이터 주변에 공사를 하고 있는 사장님을 만났다. 무슨 공사냐고 물었더니 약포광장을 조성한다고 하였습니다. 약포 내용을 좀 아르켜 주세요 하길래 다음과 같이 약포 정탁 님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약포광장 조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行蹟] : 처음에 교서관 교서(校書館校書)로 임명되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불우함을 말하였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다. 뒤에 옥당(玉堂)을 거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1566,10.4 1567.5.11), 형조 좌랑(刑曹佐郞, 1567.6.15), 헌납(獻納)을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서 지제교(知製敎)와 경연시강관(經筵侍讀官),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직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이이(李珥), 이황(李滉), 황윤길(黃允吉), 정철(鄭澈), 유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참여했다. 이조 좌랑(吏曹佐郞), 동 정랑(正郞), 응교(應敎)를 지내고, 1581년(선조 14)에 대사헌(大司憲) 때 장령 정인홍(掌令鄭仁弘), 지평 박광옥(持平朴光玉) 등과 뜻이 달라, 사간원(司諫院)의 계청(啓請)으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전임(轉任)되었고, 진하사(進賀使)로 명(明) 나라를 다녀왔고, 이듬해 다시 대사헌(大司憲, 1583.윤2.9)에 임명되고, 1587년(선조 20) 12월 9일에 임금이 내의원제조 정탁(內醫院提調鄭琢)에게 아다개(阿多介) 1좌를 하사(下賜)하였다. 1589년 우찬성(右贊成)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다시 명(明) 나라에 다녀오면서 임진왜란(壬辰倭亂) 직전의 외교(外交)에 힘을 썼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중 좌찬성(左贊成)으로 선조(宣祖)를 의주(義州)까지 모셨고, 1593년(선조 26)에 영위사(迎慰使)가 되어 명(明) 나라의 장수(將帥)들을 영접(迎接)했고, 계속 그들과 사귀면서 전란(戰亂) 중의 국교(國交)에 노력하고 명(明) 나라 군사(軍士)의 진중(陣中)을 돌면서 그들의 사기(士氣)를 높이고 독전(督戰)하였다. 우의정(右議政, 1594)이 되어 이순신(李舜臣), 곽재우(郭再祐), 권언호(權彦浩), 김덕령(金德齡), 유정(惟政) 등의 장재(將才)를 천거하였다. 1597년 2월 당쟁의 희생으로 모함에 빠진 이순신이 서울로 잡혀 와 죽음에 직면했을 때 혼자 끝까지 그의 출중(出衆)한 무예(武藝)와 인격을 논하며 다시 종군(從軍)시키라고 역설하며 목숨을 구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시켜 정유재란(丁酉再亂, 명량대첩)에서 큰 공을 세울 수 있게 했으니, 이것이 유명한 신구차(伸救箚)이다. 이보다 한 해 앞서 의병장 김덕령(義兵將金德齡)이 모함에 빠졌을 때도 처형 직전에서 목숨을 구해 주었다. 1600년(선조 33) 좌의정(左議政),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1603)가 되어 전후 수습에 온 힘을 기울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鄕里)로 돌아와서는 고평동계(高坪洞契)를 만들어 사회 풍교(社會風敎)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고, 고평들을 개척하여 향토 주민의 복지 증진에 힘을 쏟았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封)해졌고, 봉조하(奉朝賀)에 이른 후 기사(耆社)에 들었다. 1604년(선조 37) 9월 왕명으로 충훈부(忠勳府)가 화사(畵師)를 보내어 초상화(肖像畵, 影幀)를 그리게 하고, 그 해 11월에 화상축(畵像軸)을 하사했는데, 이 영정(影幀)은 보물 제487호로 지정되어 있다. 1605년 80세로 타계하니, 선조는 3일 간 조회(朝會)를 폐하고 슬퍼하며 제문(祭文)을 내려 애통해 했다. 호명면 황지리의 도정서원(道正書院)과 고평리(高坪里)의 정충사(靖忠祠)에 모시고, 유물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정충사(靖忠祠)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613년(광해군 5)에 위성공신(衛聖功臣) 1등에 등록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다. 1635년(인조 13) 8월 1일에는 정간(貞簡)이란 시호(諡號)가 내리어졌다. 1756년(영조 32)에 왕이 약포영정(藥圃影幀)을 보고 약포 정탁(藥圃鄭琢)의 후손인 황해도관찰사 정옥(黃海道觀察使鄭玉)을 입시(入侍)시켜 화상찬(畵像讚)을 내렸다. 저서로 <약포집(藥圃集)>, <용만견문록(龍灣見聞錄)> 등이 있다.
[鄭琢의 墓] : 안동시 풍산읍 오미동(安東市豊山邑五美洞) 166번지 위라곡(位羅谷, 옛 醴泉郡 位羅谷面 새랄)에 있는 정탁(鄭琢)의 무덤으로, 1605년(선조 38) 9월, 80세로 천수(天壽)를 다하니, 선조(宣祖)는 부문진도(訃聞震悼)하여 철조 3일(輟朝三日)하고, 도민(都民)이 파시조곡(罷市弔哭)하였다. 왕과 세자는 각각 승지와 궁관(宮官)을 보내 임조(臨弔)하였고, 이어서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치제(致祭)하였다. 승문원 관(承文院官)으로 하여금 제주(祭主)케 하고, 1606년(선조 39) 2월 21일 국장(國葬)의 예(禮)로써 위라곡 간좌(位羅谷艮坐)에 안장(安葬)되었다. 둘레 29.4m, 직경(直徑) 9.52m, 높이 2.55m이다. 묘비(墓碑)의 총 높이는 2.23m, 비신(碑身)의 높이는 1.47m, 가로 0.73m, 두께 0.3m, 비(碑) 머리 높이 0.57m, 가로 1.95m, 두께 0.55m, 기단석(基壇石)은 가로 1.18m, 세로 0.8m이다.
[壬辰倭亂] : 이순신(李舜臣), 곽재우(郭再祐), 정언신(鄭彦信), 승 유정(僧惟政) 등 탁월한 장재(將才)를 천거하여 뒷날에 나라에 큰 공을 세우게 했고, 칠순(七旬)의 늙은 몸으로 좌찬성(左贊成)으로서 몽진(蒙塵)하는 선조(宣祖)를 따라 서울을 등지고 개성(開城)을 거쳐 평양(平壤)으로, 평양에서 다시 영변 철옹(寧邊鐵瓮)까지 호종(扈從)했다. 그리고 철옹(鐵瓮)에서 분조지의(分朝之議)가 결정되어 군국대권(軍國大權)을 세자 광해군(世子光海君)에게 맡기고, 선조(宣祖)는 의주(義州)로, 세자는 강계(江界)로 헤어져 피란하기로 할 때 왕명을 받아 세자의 이사(貳師)로서 초숙우찬(草宿雨餐)으로 강계로(江界路)를 들다가 다시 춘천로(春川路)로 고쳐 이천(伊川), 이천에서 영변(寧邊)으로 임기 처변(處變), 결책 보필(決策輔弼)하면서 전전 피란(轉轉避亂)하여 불측(不側)의 변을 면케 한 피란 중 수훈(垂訓)은, 그의 <용사일기(龍蛇日記)>를 통하여 역역히 알 수 있다. 영위사(迎慰使, 1593)로서 명 나라에 경로 송응창(經略宋應昌), 제독 이여송(提督李如松) 등과 교유(交遊)하여 전시(戰時)의 대명 외교(對明外交)에 노력했고, 때로는 명군 진중(明軍陣中)을 누비며 그들의 사기를 드높여 싸움을 재촉했다. 서울이 수복된 후에는 잔위사(餞慰使)로서 의주(義州)에 나아가 돌아가는 명군(明軍)을 위무(慰撫)했다. 1593년 10월에는 <용만문견(龍灣聞見)>을 왕께 복명(復命)하고 영호남(嶺湖南)에 내려가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교련하고 난민을 보살폈다. 1596년에 김덕령(金德齡)이 금부(禁府)에 갇히는 몸이 되었을 때 정탁(鄭琢)은 힘써 구출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이 일어나자 정탁은 다시 싸움터에 나가려 했으나 선조(宣祖)는 그의 연로(年老)함과 중신(重臣)의 위치를 아껴 만류(挽留)했다. 1597년 2월, 원균(元均)의 모함(謀陷)으로 이순신(李舜臣)이 하옥(下獄)되었을 때 7차에 걸친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 치열한 당론이 두려워 중신(重臣)들은 입이 있으되 입을 열지 못하던 그 때 유독 정탁만은 죽음을 무릅쓰고 나서서 신구차(伸救箚)와 의혈상소(義血上疏)를 올려 경각에 달린 이순신의 생명을 살려내어 뒤에 장렬한 큰 공을 세워 그로 하여금 국가 민족을 구출할 수 있게 했다. ᄋ 그의 나이 72세,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이 일어나자, 다시 몸소 전장(戰場)에 나가 사기(士氣)를 북돋우고자 하였으나, 왕이 그의 연로(年老)함을 들어 만류(挽留)하였다. 그해 가을 중궁전(中宮殿)과 묘사주(廟社主)를 따라 해서(海西)를 향하여 신계현(新溪縣)에 이르렀다. 다시 소명(召命)을 받아 동궁(東宮)과 함께 환경(還京), 이렇게 거의 천리 원정(遠程)의 치구(馳驅)를 불사(不辭)하였다. 그가 이순신을 신구(伸救)한 것도 바로 정유년(丁酉年, 1597) 7월의 일이었다.
[伸救箚] : 정탁이 이순신의 하옥(下獄) 때 이를 신구(伸救)코자 올린 차자(箚子)이다. [箚文] : 엎드려 아뢰옵니다. 이순신이 대죄를 범하여 죄명이 지엄한 데에도 성상(聖上)께서 즉시 죽이지 않으시고 일단 심문을 마친 후에 다시 엄격히 추궁하기를 허락하시니, 비단 죄수를 다스리는 사체(事體)가 그러할 뿐 아니라, 성상의 인(仁)을 주장하는 생각으로 기어이 실상을 구명하여 혹시 살릴 도리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택이 죄가 있어 반드시 죽게 된 자리에까지 미치시니, 신(臣)은 지극한 감격을 이길 수 없습니다. 신이 일찍 위관(委官) 죄인을 국문(鞫問)하는 관직으로서 죄수를 문초(問招)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오나, 대개 죄인은 한 번 심문을 거치면 쓰러지는 자가 많아 그 간에 무죄한 사실이 발각될지라도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어찌할 수 없으므로, 신은 항상 이를 애석히 여기는 바이었습니다. 지금 이순신도 일차의 심문과 형벌을 거쳤으니, 만일 다시 형벌을 더한다면 엄혹(嚴酷)한 형벌로 반드시 살기를 바랄 수 없으므로 성상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본의가 손상될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임진왜란 초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덮고, 적세가 충천하던 날 국토를 수비하던 신하는 성을 버리고 도주한 자가 많았고, 국방을 전담한 장수는 군대를 보전한 이가 적었고, 정부의 명령이 사방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이때 이순신이 주사 해군(舟師海軍)을 거느리고 원균(元均)으로 더불어 적(敵)의 칼날을 꺾어버림으로 해서 국내 인심이 겨우 생기(生氣)를 얻게 되어 의사(義士)들은 용기를 돋구었고, 적에게 붙었던 자도 마음을 돌렸으니 그 공이 실로 거대하였습니다. 정부에서도 이를 가상히 여기어 관위(官位)를 높이고 통제사(統制使)의 칭호를 하사하였으니, 당연한 조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순신은 대장이므로 나아갈 만함을 보고야 나아가므로 시기를 잃지 않고 능히 주사(舟師)를 통솔하여 크게 위세를 떨쳤으니 전쟁에 임하여 피하지 않은 용맹이 원균(元均)에게도 있다고 하나, 필경 적을 함몰(陷沒)한 공은 이순신도 원균에게 그리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그때에 원균에게도 그만큼 공이 없지 않았으나 정부의 은전(恩典)이 오로지 이순신에게만 내리고 원균에게는 부족하였으므로 경향 간에서 지금껏 칭원하고 있으니 과연 애석한 일입니다. 원균이 주사(舟師)를 통솔하는 재주에 장점이 있고, 천성이 충실하여 일을 당하면 피하지 않고 충돌을 잘 하므로 두 장수가 협력하면 적을 파(破)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매양 어전에서 이 일을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양장(兩將)이 서로 불화한다고 해서 원균을 교채하고 이순신으로 주사(舟師)를 전담케 하였던 바 그는 과연 방비에 능숙하고 부하의 용사가 즐거이 쓰임으로 해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군용(軍容)이 여구하니, 왜적이 우리 주사(舟師)를 겁내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의 변방을 진압한 공이 이와 같은 데에도 혹자는 이순신이 한 번 공을 세운 후에는 다시 내세울 만한 공이 없다고 대단히 여기지 않는 이도 있으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4-5년 래(來)로 중국 장신(將臣)들은 강화를 주장하고, 중국 정부는 동봉(東封, 豊臣秀吉을 日本 王으로 封함)한다는 의론이 다시 일어나 우리나라 대소 제장(大小諸將)은 그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으니 이순신이 다시 힘을 쓰지 못한 것도 그의 죄는 아닙니다. 근일 왜적이 다시 침입할 때 이순신이 미쳐 주선하지 못한 것은 그 간 정세의 변동으로서 왠고 하니 지금 일선 장령(將領)의 행동이 반드시 정부의 명령을 기다려야 하였고, 대장이 전단(專斷)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왜적이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 정부의 비밀교서(敎書)가 적당한 시기에 전달된 여부도 알 수 없고, 해상의 풍세 순역(風勢順逆)과 뱃길의 편불편(便不便)도 또한 알 수 없었고, 주사(舟師)의 분번(分番)하는 것도 부득이한 사정은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자효(自效)하는 장계(狀啓)에 자세히 기록되었고, 주사(舟師)가 위급한 시기에 진력하지 못한 것은 그 간 사세(事勢)가 그러하였으니, 모든 책임을 이순신에게만 돌릴 수 없습니다. 전일(前日) 보고에 진술한 사건은 매우 허망하여 극히 해괴한 듯하나 부하의 과장된 말이라면 중간의 불찰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순신이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감히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해석할 수 없습니다. 대저 난리 첫 무렵에 군공(軍功)을 기록한 보고가 사실대로 일일이 기록하지 않고, 남의 공을 자신의 공으로 만들어 정부를 기망(欺罔)한 죄를 다스린다면 이순신인들 또한 무슨 변명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자타가 경쟁하는 마당에 남보다 선등(先登)하려는 마음이 없는 자가 별로 없고, 어름어름하는 사이 잘못되는 일도 있으니, 특히 윗사람이 범법(犯法)의 대소를 살피어 경중을 가려 처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대저 장신(將臣)은 군민(軍民)의 생명과 국가 안위에 중대한 관계가 있으므로 자고로 제왕들은 국방 책임을 위임하게 되면 특별히 은전(恩典)과 신의를 베풀어 중대한 과오가 아니면 절대로 보호하여 임무를 다하게 하는 그 의도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릇 인재는 국가의 보배이므로 비록 통역관이나 산학가(算學家)라 할지라도 기예(技藝)가 있다면 이들을 애중히 여기거던 하물며 대장의 재질을 구비한 자로서 적을 막는데 가장 필요한 인물을 법에만 맡겨 두고 용서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순신은 실로 대장의 자격이 있고, 육해전(陸海戰)에 능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이러한 인물은 쉽사리 얻을 수 없습니다. 전선(戰線) 지대에 있는 백성들의 촉망하는 바요, 왜적의 두려워하는 바임에도 죄명이 지엄(至嚴)하다 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공죄(功罪)의 상쇄(相殺)도 불문에 부치고 능력의 유무도 고려하지 않고 서서히 진상도 구명하지 않고, 덮어 높고 큰 벌을 내리게 되면 유공(有功)한 자와 유능한 자가 더욱 힘을 쓰지 않게 되어, 비록 원균(元均)과 같이 악감(惡憾)을 품은 자도 안심하지 못할 것이고, 내외 인심도 다같이 해이하게 될 것이니, 이는 실로 위험한 현상으로서 한갖 왜적의 다행이 될 뿐입니다. 일개 이순신의 죽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지극히 중대하니, 어찌 큰 걱정이 아니겠습니까? 옛날에도 대장을 교채하지 않고 마침내 대공(大功)을 세우게 한 이는 진목공(秦穆公)이 맹명(孟明)에게 한 바와 같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신은 멀리 인증(認證)할 것이 없고, 다만 성상의 근일 사건으로 볼지라도 박명현(朴名賢)은 일시의 맹장(猛將)으로서 일찍 국법에 저촉된 바 있었으나, 정부에서 특히 그 죄를 용서하였던바 얼마 안 되어 충청도의 변란(李夢鶴 亂)이 일어나 기축년(己丑年, 鄭汝立亂)보다 더 심하였으나 명현(名賢)이 즉시 이를 평정하여 국가에 큰 공이 있었으니, 허물을 용서하고 책임을 완수하도록 한 것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순신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빠져 거의 십악(十惡)을 범하였으니, 죄명이 지중(至重)함은 성상의 말씀과 같사옵고, 이순신도 역시 공론이 지엄하고 형벌이 두려워 생명을 보전할 가망이 없음을 알 것입니다. 비옵건대 은명(恩命)을 내리어 문초와 형벌을 덜어 주시고 공을 세워 보답하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 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보답할 뜻이 명현(名賢)만 못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 성상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공신각(功臣閣)에 초상(肖像)을 걸 사람이 어찌 오늘 죄수 속에서 일어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성상의 장수를 통솔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도리와 공효(功效)를 참작하는 제도와 허물을 고치고 반성하게 하는 길을 열어주는 은전(恩典)이 다같이 이루어지게 되어 성상의 난리를 평하는 정치에 어찌 도움이 적다고 하겠습니까? 신이 금부(禁府)의 수의(收議) 때에 충정(衷情)을 개진(開陳)한 바 있으나, 군신(群臣)의 논의에 부합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말로서 의사를 다 표현할 수 없어 우신(愚臣)의 천려일득(千慮一得)이 혹 성상의 채택되시는 바 있을가 하여 감히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지나간 말을 다시 아뢰어 성심을 표하옵고, 성상의 하교(下敎)하심을 기다리오니 만일 신의 어리석은 말이 조금이라도 국가 대사(大事)에 천분지일(千分之一)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신은 만 번 죽더라도 오히려 다행한 일이옵니다. 신이 독감에 걸리어 20일이 경과되었으나 아직 쾌하지 못하여 직접 궐하(闕下)에 나아가 뵈옵지 못하옵고, 삼가 차문(箚文)을 올려 성덕(聖德)을 번거롭게 하오니, 죽을죄를 더한 듯 하옵니다.
[鄭琢의 高坪洞約] : 정탁이 벼슬길을 물러나 고평리(高坪里)에 돌아와서 만든 향약(鄕約)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힘써 지켜야 할 사항(勤勉條) ① 임금(國家)을 섬김에 애국심을 갖고 충성을 다 합시다(事君盡忠). ② 어버이를 섬김에 지성으로 효도를 다 합시다(至誠事親). ③ 국난이 있으면 내 한몸을 나라와 겨레 위해 바칩시다(忘身殉國). ④ 외적의 침략이 있을 때는 떨쳐 일어나 물리칩시다(倡義復讐). ⑤ 능력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여 예우합시다(貴貴尊尊). ⑥ 나이 많은 분을 어른으로 존경합시다(老老長長). ⑦ 이웃과 다정하고 친척끼리 화목합시다(睦隣和族). ⑧ 공익을 앞세우고 사익(私益)을 뒤로 돌립시다(先公後私). ⑨ 납세의 의의를 바로 알고 자진 납부합시다(伸納賦稅). ⑩ 정의의 실현에는 용감합시다.(勇於爲義). ⑪ 남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맙시다(秘發陰私). 2) 행해서는 안될 사항(禁制條). ① 국가시책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함부로 논하지 맙시다(忘議調整是非). ② 지방 행정 시책의 득실(得失)에 대하여 가벼이 논하지 맙시다(輕論州縣得失). ③ 젊은 사람이 어른을 능멸이 얕봐서는 안 됩니다(以少凌長). ④ 권세나 실력이 있다 해서 약자를 능멸이 얕봐서는 안 됩니다(以强凌弱). ⑤ 척당(戚黨) 간에 불목해서는 안 됩니다(親戚不睦). ⑥ 이웃 간에 불화해서는 안 됩니다(隣里不和). ⑦ 모든 행정 법규를 어겨서는 안 됩니다(違犯官令). ⑧ 관(官)의 장을 업수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侮만長上). ⑨ 불우한 사람을 모른 체하여 돌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不救急難). ⑩ 산림을 함부로 벌채해서는 안 됩니다(천伐柴林). ⑪ 남의 묘소가 있는 산야에서 나무를 해서는 안 됩니다(천상近墓). ⑫ 남의 전답에 가축을 방사(放飼)해서는 안 됩니다(放牧禍家). ⑬ 남의 땅을 함부로 침식해서는 안 됩니다(侵占田疆). ⑭ 술에 취해 떠들썩하거나 경거망동(輕擧妄動)에서는 안 됩니다(從酒喧競). ⑮ 남과 싸우며 욕지걸이를 해서는 안 됩니다(驅鬪첨言). 16 모임에 늦게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期會晩到). 17 사회 활동에 참여 의식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無緣不參).
[人品] : 성품과 기절(氣節)이 청명(淸明)하여 신의(信義)를 지켜서 벼슬길 50년에 추호의 차질이 없었던 학덕을 겸비한 대인(大人)이었다. 성실과 신뢰로서 공사(公事)를 처리했고, 국사(國事)를 논할 때에는 매양 원리와 대체(大體)를 견지하여 당파를 초월했고, 언제나 멀리 보는 눈으로 근공소리(近功小利)를 구하지 않았다. 당적(黨籍)은 동인(東人)면서도 서인(西人)의 영수 오음 윤두수(梧陰尹斗壽)와는 매우 친분이 두터웠으니 그의 원만한 대인 관계를 알 수 있다.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오는 정탁을 한강 변에서 전송하는 윤두수의 송별시(送別詩)가 남아 있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산방(山房)에서 정탁이 시로써 이르기를, "북두칠성이 하늘에 있음으로 천하가 우러른다"라고 하니, 그와 친근한 설월당(雪月堂)이, "파도가 바다를 몰아치니 바다 속이 놀란다"라고 하였는데, 이 시에서 정탁의 그릇과 포부를 짐작할 수 있다. 정탁이 교서 정자(敎書正字)로 있을 때 섭정하던 문정왕후(文貞王后)가 불공을 위해 궁중의 향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림에 궁중에서 쓰는 향을 궁 밖으로 가져갈 수 없다 면서 그 명령을 거절하여 물의를 빚을 정도로 부조리에 냉엄했다.
[詩] : 정탁의 시론(詩論)과 시 작품은 <약포유고(藥圃遺稿)>에 있는데, 권(卷)1의 '난전습유록(亂前拾遺錄)'에 시 85수(首), '난후습유록(亂後拾遺錄)'에 시 24수가 있다. 권2는 '병신잡고(丙申雜稿)'의 편명(篇名)으로 시 133수, '난후도망록(亂後悼亡錄)'의 편명으로 만시 50수, 권3은 '송도잡영(松都雜詠)'의 편명으로 시 47수, 권5,6은 잡저(雜著)로 서(序), 발(跋), 묘갈명(墓碣銘) 각 1편, 제문(祭文) 6편, 계(啓) 2편, 서(書) 6편, 찬(贊) 잔(盞) 각 1편, 권7은 부록으로 만사(輓詞), 제문(祭文), 가장(家狀), 행장(行狀), 묘갈명(墓碣銘), 묘지(墓誌), 유사(遺事)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난전습유록(亂前拾遺錄)'의 시는 임진왜란(1592) 전에 지은 것들이다. 호당(湖堂)에 있을 때 고봉 기대승(高峰奇大升), 율곡 이이(栗谷李珥), 송강 정철(松江鄭澈) 등과 교유하면서 수창(首唱)한 시가 많다. 그밖에 연안제영(延安題詠), 백마강(白馬江), 석성제영(石城題詠) 등 지방장관을 지낼 때 지은 서경시(敍景詩)가 대부분이다. '난후습유록(亂後拾遺錄)'의 시 중에는 왜군에게 점령당하였던 삼경(三京)이 수복(1592)되어 그 기쁨을 시화(詩化)한 것도 있다. '난후도망록(亂後悼亡錄)'의 만시(輓詩)에는 송상현(宋象賢), 유팽로(柳彭老), 영규(靈珪), 변응정(邊應井) 등 임진왜란 때에 전사(戰死)한 충신들에 대한 것이 많다.
[書] :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과 주고받은 것이 대부분인데, 대개 짤막한 안부 내용이다. 연세대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밖에 <용사일기(龍蛇日記)> 등 보물로 지정된 것들도 있다.
[鄭琢에 對한 傳說] : 1) 불을 켜지 않는 밤에도 편지를 쓰던 시력 : 약포 대감(藥圃大監)의 어린 시절, 겸암 유운룡(謙岩柳雲龍) 선생은 일찍부터 정탁이 국가에 크게 공헌할 인물임을 알았다. 유운룡 선생의 아우인 서애 유성룡(西厓柳成龍) 대감은 정탁보다는 16년이나 손아래이어서 정탁의 인물됨을 잘 알아보지 못하였다. 유운룡 선생은 아우에게 정탁의 비범함을 알려 주기 위하여 어느 날 오후, 늦게 아우인 유성룡이 보는 앞에서 밝은 낮에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가늘고 잔글씨로 편지를 써서 하인에게 주면서, "이 편지를 예천 고평에 있는 정탁에게 갖다 드리고 그 답장을 받아서 오늘밤까지 돌아오너라." 라고 일렀다. "형님, 그렇게 가는 글씨로 된 편지를 등촉을 아무리 밝혀도 읽기조차 힘들 텐데, 그 답장까지 받아오라고 하시니, 이상한 분부십니다."라고 하며, 유성룡이 그 형님 유운룡에게 말하였다. "정탁은 밤중이라도 그 편지를 알아볼 것이고, 답장도 쓸 것일세." 라고 하며, 빙그레 웃었다. 과연, 밤중이 될 무렵 고평에 갔던 하인이 정탁의 답장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온 하인에게 유운룡은, "정탁이 네 편지 받아 어떻게 하더냐?" 라고 물으니, "고평에 도착하니, 해가 넘어가서 어두운데 방 가운데서 촛불도 켜지 않고 편지를 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이 답장을 써 줍디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유성룡은 정탁이 초인적인 인재임을 깨닫고, 더욱 친분을 두텁게 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의 그 어려운 시기를 같이 손잡고 헤쳐 나갔다고 한다.
2) 도량이 넓은 시에 콧대 꺽인 맏동서 : 정탁이 젊었던 시절, 그 맏동서되는 사람이 아우 동서인 정탁이 몸집이 작음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이 눈치를 안 그들의 장인되는 십독 반사형(習讀潘士泂)이라는 분은 지혜롭고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다. 둘째 사위인 정탁의 큰 그릇임을 알고 있는 터이기 때문에 맏사위에게 정탁이 큰 그릇임을 알려주기 위하여, 짐짓 모른 채하고 있다가, 하루는 갑자기 두 사위를 불러 앉히고, 등잔불을 보고 일곱 글자의 시를 지으라고 했다. 당시의 등잔불은 산초 기름을 접시에 붓고 심지를 만들어 불을 켰을 때이다. 맏사위는, "흰 용이 구슬을 몰고 강을 건너온다(白龍含珠渡江來)"라는 시를 지었다. 흰 용은 솜으로 된 심지요, 구슬은 불꽃이며, 접시를 강에 비유하여 지었다. 정탁은, "모든 나라의 성 안에는 한 나라의 깃발이 꽂혔다.(萬國城中 揷漢熾)"라는 시를 지었다. 모든 나라 성 안은 기름이 담긴 접시 속이며, 깃발은 심지에 불이 펄럭이는 모습이다. 이렇게 배포가 큰 시를 지었다. 이윽고, 아우 동서가 지은 시를 들여다보던 맏동서는 깜짝 놀랐다. 기름이 담겨진 조그만 접시를 자신은 강으로 밖에 못 보는데, 정탁은 천하로 보는 데는 그 도량과 포부가 얼마나 크고 넓은 지 그만 질려 버려서 그 다음으론 정탁을 마음속으로 존경하며 따랐다고 한다.
3) 큰 인물임을 알아맞춘 명나라 관상쟁이 : 정탁이 체약(體弱)하고 키도 매우 작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이런 일화가 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나라 천자를 만나러 궁중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키가 너무 작아서 초라하게 보일까 염려가 되어, 신을 한 치 정도 높여서 본래의 키보다 한 치가 높게 만들어 신고서 궁중으로 들어갔다. 이 때, 천자를 호위하고 있던 한 사람이 정탁을 얼핏 곁눈질하여 보더니, "조선에서 사신으로 온 저 사람은 키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재상 감인데 아깝구나." 라고 하였다. 이 말을 귓전으로 엿들은 정탁은 다음 날, 명나라 궁중에 들어갈 때는 높였던 신을 다시 낮추어 본래의 키대로 들어갔다. 어제 호위하고 있던 그 사람이 무릎을 탁 치면서, "그러면 그렇지! 과연 조선 사신 정탁은 큰 인재임에 틀림없구나." 라고 하더라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
4) 초립동을 업어 건네 준 정탁 : 그가 낙향(落鄕)하여 고평(高坪)에 살던 말년의 이야기이다. 그는 가끔 내성천(乃城川)에서 낚시를 즐기곤 했었다. 그 날도 저녁 해가 넘어갈 무렵 내성천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 온 초립동이 그를 몰라보고 그를 불렀다. "저기 낚시하는 노옹(老翁)! 저 건너에 정탁 선생이 사는가?" 라고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그의 대답. "내가 정탁 선생에게 볼 일이 있어 가는데, 나를 좀 업고 건네주게나."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검소하기 이를 데 없는 그는 그날도 허름한 촌로(村老)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는 어처구니없었지만 태연하게 그 초립동을 등에 업고 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내성천을 거의 다 건너갈 무렵 초립동은 다시 그에게 물었다. "요새, 정탁 선생은 무슨 일로 소일하던가?" 그는 다시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요사이는 낚시를 즐기다가 초립동도 업어서 물을 건네준답니다." 하고는 초립동을 강기슭에 내려놓는 게 아닌가! 초립동은 그만 아연하여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죄했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5) 정탁의 체온(體溫) : 정탁은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냉방에서 이불을 덮지 않고 잤다고 한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유성룡(柳成龍)이 정탁과 하룻밤 함께 잘 기회를 만들었다. 한겨울, 불끼라곤 전혀 없는 냉방에 더구나 이불도 없이 누었으니 춥다기 보다 이가 덜덜 떨려서 한참도 배기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정탁은 유성룡에게 자기와 자리를 바꾸자고 하였다. 유성룡은 정탁의 누었던 자리에 바꾸어 누으니, 그 자리엔 불을 땐 방보다 더 뜻뜻하였다. 얼마 후 유성룡이 누은 자리가 되 식을 무렵이 되면 정탁은 또 자리를 바꾸자고 하였다. 번번이 정탁이 누었던 자리는 따뜻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자리를 세 번씩이나 바꾸어가며, 길고 긴 겨울밤을 이불도 없는 냉방에서 따뜻하게 새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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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25.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