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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약포광장 조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3)
작성자장병창 @ 2015.11.12 07:21:48

   약포광장 조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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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전화(戰禍)를 피하기 위해 부모를 베로 묶어 생명을 구한 정탁의 효 : 정탁이 충주 현감(忠州縣監)으로 있을 때였다. 11월 어느 날, 정탁은 천기(天氣)를 보며 깜짝 놀랐다. '아뿔사, 큰 일이 날 징조로구나!' 그는 곧 동헌(東軒) 마당에 나졸들을 불러 시립(侍立)시킨 다음 엄명(嚴命)을 내렸다. "오늘밤 자정(子正)을 기해 큰 변이 있을 것이니,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경거망동(輕擧妄動)함이 없도록 하라. 특히 자기의 근무지를 이탈하는 자는 죽음을 자초할 뿐임을 명심하라. 다만 나의 명령이 있을 때 한해서 불화살만 쏠 뿐 진격도 후퇴도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엄명을 내린 정탁은 태연히 퇴청(退廳)하여 해저문 거리로 나서자, 며칠 간 못 들어간 자기 자택으로 돌아왔다. 오동지 섣달이라 날씨는 매우 추웠다. 그러나 구름도 바람도 없지만 벌써 동산(東山)에는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담. 왜놈들이 남해안에 상륙했다고는 하지만 설마 여기까지야 쳐들어올라고..." 명령을 받은 병졸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수군거릴 뿐이었다. 정탁은 집에 돌아오자, 우선 부모님에게 문안드리고 정사(政事)에 바빠 며칠 간 집에 못 들른 것을 자세히 사뢰었다. 그런 후 뜰로 나와 하늘을 다시 쳐다보았다. 둥근 달은 벌써 중천(中天)에 떠 차가운데 달무늬가 화관(花冠)처럼 에워져 있었다. "음! 도리 없지..." 정탁은 깊은 신음을 토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온 가족들을 불러 모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 밤에는 반드시 큰 난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난리보다는 오늘밤에 내릴 눈이 더 무서울 것이니, 조심해야 될 줄 안다. 아무도 불평 말고 내가 하는 대로만 보고 있거라. 그러면 오늘밤의 불행을 막을 수가 있을 것이니라." 정탁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베 한 필을 아내에게 가져오게 한 다음 손수 아내부터 차례차례로 전신을 묶어 놓은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하는 가족들의 항의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이 정탁은 부모님 방으로 갔다. "아버님! 어머님! 죄송하오나 이 베로 좀 묶어 드려야 되겠습니다." 역시 부모도 사정없이 꼼짝 할 수 없게 묶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런 괴이한 놈을 봤나." 부모는 하도 어이가 없어 호통을 쳤지만 정탁은, "죄송합니다. 오늘밤만 참고 계십시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이렇게 온 가족들을 포박 지워 놓은 정탁은 다시 동헌으로 나갔다. 그렇게 휘황히 쏟던 달빛도 회색빛 구름에 가려 밤만 깊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콩 튀는 소리와 함께 사방은 화광(火光)으로 밤을 밝히고, 함성은 천지를 진동시키는 것이었다. "아무도 경거망동하지 말고, 불화살만 쏘아라. 자기 위치를 이동해서는 안 된다." 정탁의 명령은 살얼음처럼 차갑고 무거웠다. 왜놈이 드디어 쳐들어온 것이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드디어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쌓이고 쌓이는 눈발은 순식간에 처마 끝까지 차올라 왔다. 이렇게 되자, 적군도 아군도 쥐죽은 듯 고요해지고 말았다. 그 날 새벽녘에 정탁은 미리 새끼줄로 연결한 통신망을 이용해서 새끼줄을 흔들어서 각 병사 간에 연락을 할 수 있었고, 정탁의 가정에도 눈굴을 뚫었다. 이렇게 해서 정탁의 가족만은 그래도 살아남았지만, 이웃 사람들은 집에 없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전쟁에 공포를 느껴 밤길을 떠나다가 눈 속에 대부분 파묻혀 죽고 만 것이다. 결국 정탁이 부모와 가족을 묶어 급해도 도망가지 못하게 한 것은 부모를 구한 효성이요, 형제간의 우애(友愛)가 깊은 표본이 아닐 수 없다.

 

  7) 신묘한 꾀로 증조부를 구한 정탁의 효 : 정탁의 나이 8세 때(1534), 증조부 정원로(鄭元老)가 청주 현감(淸州縣監)으로 재직할 때 항상 증손자 탁을 사랑해서 그를 곁에 두고 정무가 한가한 틈이 있을 때마다 바둑 두기를 즐겼다. 그런 원로도 기묘사화(己卯士禍) 등 어지러운 난국의 세력 다툼으로 집권자 이항(李沆)이 보낸 자객(刺客) 김자성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목숨 내기 바둑을 두었다. 원로(元老)가 매우 불리하였다. 이자성은 회심의 미소(微笑)를 띠며 소변을 보기 위해 잠시 자리를 떴다. 이때 탁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아무 말 없이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어 보이고는 종전과 같이 누워 버리는 것이었다. 원로는, 증손자가 손가락으로 짚은 곳에 눈길을 모아보니 과연 수가 있었다. 순식간에 땀이 개였다. 잠시 후 김자성이 돌아와 좌정하자 바둑돌을 가만히 놓았다. 그 순간 김자성은 사색(死色)이 되어 바둑돌을 던지며 황망히 일어나서 바람처럼 달아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때서야 탁은 눈을 비비며 증조부 곁에 정좌(定坐)하며 말했다. "할아버지! 너무 무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김자성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 또 한 수를 써야 할아버지께서 목숨을 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후 탁은 10척(尺)이 넘는 대나무를 급히 구해다가 속을 뚫은 다음 밑을 막아 그 속에 물을 채운 다음 청주를 지나 흐르는 무심천 강가의 백사장에 나가 증조부를 눕게 한 다음 그의 가슴에다 그 10척이 넘는 대나무를 세웠다. "오늘밤만 참으시면 화를 면합니다." 그래서 원로는 증손자 탁의 말대로 그 날 밤을 무심천 변의 백사장에서 새웠다. 아니나 다를가, 김자성이 상경하여 이항(李沆)에게 자초지종(自初至終)을 고했다. 이에 이항은 대노(大怒)하여 점을 쳐보았다. "으흠, 별로 걱정할 건 없어, 정원로는 이미 죽었어, 배 위에 물깊이가 10척이 넘었으니, 천하 없는 정원로라도 살아남진 못했을 것이니까" 이항은 정원로가 물에 투신자살한 줄로만 여겼다. 그리하여 정원로는 정탁의 영특한 재주로 살아남게 되었고, 그 후 벼슬도 버리고 충주로 나와 살았다. 그래서 부친 때에도 벼슬 한 번 하지 않았다.

 

  8)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모사(謀士)인 복야(僕射) 두사충이 실수하여 이여송이 그를 죽이고자 할 때 마침 탁이 이여송을 찾아보고, "죽이느니 차라리 나에게 달라."라고 하여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고, 두사충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감여요람(堪輿要覽)>이라는 풍수지리서를 지어 예천 지방의 명당 묘터 10곳을 적어주었다. 그 뒤로 예천 지방에는 많은 풍수들이 이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한다.

 

  9) 정탁이 안동인 권기(權紀)를 참봉(參奉)으로 천거하여 주었다. 권기는 <영가지(永嘉誌)> 8권 4책을 1602년(선조 35)에 서애 유성룡(西厓柳成龍)의 명으로 편술하였다.

 

  [燃黎室記述 13卷] : 처음 과거(科擧)했을 때에, 이준경(李浚慶)이 한 번 보고 큰 그릇이라 생각하여 말하기를, "용모가 자룡(雌龍)같이 되어 후일에 반드시 크게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ᄋ 영변(寧邊)으로 향할 때에, 동행하던 사람들의 논의가 서로 맞지 않았다. 그가 말하기를, "국사(國事)가 위급한 날을 당하여 마땅히 마음을 합하여 국난을 구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 당파로 갈려 다르니 같으니 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ᄋ 임진왜란 직전에 임금의 명에 따라 각기 아는 인물을 천거하였는데, 그가 곽재우(郭再祐), 이순신(李舜臣), 김덕령(金德齡) 등을 가히 장수가 될만한 인물이라고 천거하였다. 덕령이 형을 받게 되자, 그가 적을 앞에 두고 명장(名將)을 죽임으로써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것은 도저히 되지 않는 일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필경에는 죽이고 말았다. 적들이 과연 술을 들며 서로 축하하였다. ᄋ 그가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남명 조식(南冥曺植)을 뵈었는데, 작별에 임하여 조식(曺植)이 홀연히 말씀하기를, "내 집에 소 한 마리가 있는데, 군(君)이 끌고 가게"라고 하므로, 내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몰랐더니, 조식이 웃으며 말하기를, "군의 언어와 의기가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우니, 날랜 말이 넘어지기 쉬운 지라. 더디고 둔한 것을 참작하여야 비로소 능히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므로, 내가 소를 준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그는, "수 10년을 다행이 대과(大過)없이 지냈음은 선생이 주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ᄋ 탁이 시골에서 일어나서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가 되어 향실(香室)에서 숙직하고 있을 때에, 문정대비(文定大妃)가 부처에게 바치기 위하여 향실에 있는 향을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이것은 교사(郊社)에 바치는 물품이므로 안 된다."라고 거절하였다. 문정대비가 크게 노하여 법정에 내려 다스리도록 명하였으나, 이름이 크게 떨쳤고, 청직 요직(淸職要職)을 역임하였다. 사람됨이 온공(溫恭)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공손하다는 기롱을 들었는데, 비록 노복(奴僕)이라 할지라도 일찍이 악한 말로 꾸짖는 법이 없었으니, 그 후 덕함이 족히 높은 지위에 오를 만 하였다. ᄋ 어릴 때에 부친을 잃었으나, 뜻이 독실하여 학문이 정수(精粹)하였다. 오건(吳健)이 말하기를, "정탁이 노년(老年)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조정에 있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연려실기술 17권] : 처음부터 끝까지 무룻 180년 동안에 사신이 열한 번 가서 비로소 청하던 대로 되었다. 곧 우의정 대리(右議政代理) 정탁 등을 보내어 사은(謝恩)하고 증광시(增廣試)를 시행하였다.

 

  [연려실기술 18권] : 1594년(선조 27)에 대사헌 김우옹(大司憲金宇옹) 등이 정철(鄭澈)의 최영경(崔永慶)을 죽인 죄를 탄핵하자, 사간 정엽(司諫鄭曄) 등이 논의의 불합(不合)을 이유로 피렴(避嫌)하니 홍문관(弘文館)에서 처치하여 정엽 등의 체직(遞職)을 청하였고, 시론(時論)이 변하여 정탁 등이 차레로 정승(政丞)이 되었다. ᄋ 1595년(선조 28) 봄에 정탁이 이산해(李山海)의 석방을 청하니, 임금이 그 말을 좇았다. 얼마 안 되어 대간(臺諫)들이, "정탁은 정승 자리에 맞지 않는다."라고 논계(論啓)하여 체직시키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정탁이 이산해를 석방하자고 청하였기 때문에, 대간이 정탁을 탄핵하는 것은 성룡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여 남북(南北) 간의 원한은 더욱 깊어갔다. 이원익(李元翼)이 정탁의 후임으로 우의정이 되니, 남이공(南以恭) 등이 이경전(李慶全, 山海의 아들)에게 통청(通請)시켜 주려고 하였으나 정경세(鄭經世)가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있으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ᄋ 1603년(선조 36) 여름에 정탁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치사(致仕)할 것을 원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제 탁이 그의 시골로 물러가서 이내 치사를 바라니, 그 원을 풀어주는 것이 아마도 안 될 것이 없을 것 같다."라고 말하고, 드디어 대신에게 의론토록 하여 필경에는 그 청에 좇았다.

 

  [明宗實錄] : 1567년(명종 22) 6월 12일에 임금이 태묘(太廟)에서 환궁(還宮)할 때 유생(儒生), 노인, 기녀(妓女)들이 각기 길가에 채붕(綵棚)을 설치하여 놓고, 가요를 바쳤는데, 교방가요(敎坊歌謠)를 봉축한 곳에 이르러 얼마 동안 연(輦)을 멈추고 계시니, 정언 정탁(正言鄭琢) 등이 연(輦) 앞에서 아뢰기를, "이런 것이 비록 예사(例事)이기는 하지만, 연을 너무 오래 멈추시면 일국의 신민(臣民)들이 매우 미안하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온 나라가 우러러 보는 자리에서 미안할 뿐 아니라, 제사를 지낸 후여서 옥체가 수고로우신데 더위를 무릅쓰고 연을 멈추시니 더욱 미안합니다."라고 하였다.(明宗實錄 1567.6.14 1537.6.15,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西原府院君鄭公行狀考稿, 練藜室記述 15卷(壬辰倭亂) 18卷(1592 1596, 李敏求諡狀, 墓誌, 李滉) 別集 7卷(承文院), 大東野乘 50卷(1635.8.1) 51卷(1591.4.29 1591.5.15), 淡水 6輯 1977, 西厓集 2輯(1593.1 黃廷彧事件), 오늘의 忠孝敎育 趙鎭泰編著 219-221쪽, 忠武公의 生涯와 思想 175-176쪽, 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70 1786 1841, 醴泉郡誌 1939, 龍宮縣邑誌 1780, 竺山勝覽 1934, 大邱每日新聞 1983.3.9, 韓國人의 族譜, 醴泉敎育 11號 214-218쪽, 韓國醫學文化大年表 299쪽, 慶尙北道史 上卷 696쪽, 安東文化 創刊號 75쪽, 趙靖先生文集 101쪽)

 

  [明宗實錄] : 1566년(명종 21) 10월 4일 사간원 정언에 올랐는데, 왕이 환궁할 때(1567.6.12) 교방가요(敎坊歌謠)를 봉축(奉軸)한 곳에서 연(輦)을 멈추니, 정언 정탁이 연 앞에서 아뢰기를, "연을 오래 멈추시면 신민(臣民)들이 매우 미안합니다."하니, "곧 거둥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튿날, 이 일과 관련하여 체직(遞職)을 자청하니, 윤허치 않았다. 그 후 형조 좌랑(1567.6.15)이 되었다.

 

  [宣祖實錄] : 1569년(선조 2) 5월 21일에 경연관(經筵官)으로서 진주 유생의 옥사를 아뢰었고, 지평(1571.11.9)에 제수되었다. 1571년(선조 4) 4월 20일에 편찬된 <명종실록>의 편수관 중에 봉정대부 행 홍문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奉正大夫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 정탁의 이름이 있다. 그 후 이조 좌랑(1573.8.26), 사인(舍人, 1574.1.5), 집의(1574.2.17), 부응교(1574.2.29), 집의(1574.5.6)를 거쳤다. 응교(1574.6.12)일 때는 왕에게 아뢰기를, "이황은 경연에서 정성을 다했으니, 포장(褒章)하여 그의 자질(子姪)을 임용하소서."라고 하였다(1574.7.6). 승지(574.7.29)를 거쳐 1579년(선조 13) 5월 25일에는 부제학 겸 간의대 수개도감 부제조 부제학(簡儀臺修改都監副提調副提學) 정탁에게 숙마(熟馬) 1필을 하사하였다. 대사헌(1579.12.5)일 때는 박민헌의 일을 임금과 의논하였다(1580.2.23). 그 후 이조 참판(1580.4.1), 사헌부 대사헌(1582.4.9), 예조 판서(1586.11.6)를 거쳤다. 1587년(선조 20) 12월 9일 왕의 건강이 정상으로 돌아와서 이조판서 겸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 정탁에게 아다개(阿多介) 1좌(座)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1589년(선조 22) 8월 19일에 병조판서 정탁이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동년 11월 18일에 병조판서 겸 좌참찬(左參贊) 정탁을 사은사(謝恩使)로 차출하여 숭정(崇政) 품계를 가하였다. 동년 12월 26일 왕이 사인(舍人) 정탁 등에게 사은표(謝恩表)를 손수 전하고 명나라로 출발시켰다. 1591년(선조 24) 4월 16일에 정탁이 예조 판서에 올랐고, 동년 12월 9일에 우찬성 정탁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부호군(副戶軍) 권문해(龍門人)가 경가(京家)에서 객사(客死)했습니다. 권문해는 시종(侍從)을 이미 역임했으니, 상여를 고향까지 일로(一路)에서 호송하도록 예조가 공사(公事)를 만들어 행이(行移)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1592년(선조 25) 5월 17일 약방 부제조(藥房副提調) 정탁 등이 왕의 진찰을 청하였고, 동년 5월 28일에 약방부제조 정탁 등이 의관과 함께 입시하기를 청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15일 의정부 좌찬성 정탁 등이 동궁(東宮)을 모시고 있으면서 명군(明軍)과 합동 작전을 편 내용을 치계하였다. 동년 1월 22일에는 좌찬성 정탁 등이 왕세자와 대가(大駕)를 분리하지 말라고 청하였다. 동년 4월 26일에는 좌찬성 정탁이 유 원외(劉員外)를 문안하고 임금이 접견하는 일을 아뢰었다. 동년 4월 28일에는 좌찬성 정탁 등이 정릉(貞陵)을 옛 능으로 안장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아뢰었다. 동년 5월 12일에는 왕이 우찬성 정탁 등을 인견(引見)하여 왜적의 추격, 군량 조달, 경성 진무 등을 의논하였다. 동년 5월 29일에는 왕이 좌찬성 정탁 등과 중국 남병의 주둔, 경성 이어(移御) 등을 논의하였다. 동년 7월 16일에는 왕이 좌찬성 정탁 등과 진주 방어, 주청사(奏請使) 파견, 환도, 채은(採銀), 포상 등을 의논하였다. 1594년(선조 27) 9월 10일에는 좌찬성 정탁이 사단(社壇)의 수리에 대해 아뢰었다. 그 후 의정부 우의정(右議政, 1595.2.1),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1596.6.3), 의정부 좌의정(左相, 1600.2.20)에 올랐다. 1600년(선조 33) 4월 5일에는 좌의정을 사직하고 예천에 와서 머물었는데, 동년 12월 13일에 왕이 전교하기를, "행 판중추부사 정탁이 대신으로서 외방에서 퇴로(退老)하여 은거하고 있으니, 세시(歲時)에 수령을 보내어 존문(存問)하고 음식물을 제급(題給)하도록 경상도 감사에게 하유하라"라고 하였다. 1601년(선조 34) 2월 3일에는 정탁이 임금에게 전(箋)을 올려 명절에 사람을 보내 위문하고 음식물을 제급한데 대해 진사(陳謝)하였다. 1603년(선조 36) 5월 7일 왕이 예천에 있는 정탁을 영중추부사로 삼았는데, 정탁은 사람됨이 청렴하고 소탈하여 욕심이 적어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상신(相臣)으로 있다가 물러나 예천에서 늙어도 사람들이 그가 그 전의 상공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1603년(선조 36) 5월 6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의 사직을 예조(禮曹)로 하여금 의논케 하였다. 정탁이 상소하여 치사하기를 원하자(告老한 것이다. 임금이 환도한 뒤에 정탁이 노쇠하고 병이 있음을 들어 정승의 자리를 해면하였다. 예천 땅으로 물러갔는데, 이 때에 이르러 치사하기를 청한 것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정탁은 원로대신으로 나이를 들어 청로(請老)한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의 소원대로 치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 하다."라고 하였다. 동년 7월 13일 사간원이 왕에게 아뢰기를, "치사한 정탁이 예천 땅에 살고 있는데, 군수 이형욱(李馨郁)이 접대할 때에 체면을 많이 잃어서 소문이 몹시 해괴하니, 파직시키소서."하니, 왕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이 병조와 의논(1603.5.25)하였고, 사흘 뒤에도 의논(1603.5.28)하였다. 1603년(선조 36) 6월 7일에는 예조(禮曹)가 치사(致仕)한 영중추부사 정탁에게 달마다 음식을 하사할 것을 청하였다. 1604년(선조 37) 6월 25일 왕이 정탁을 호성공신 3등(忠勤貞亮扈聖功臣) 작위를 내리고 군(君)으로 봉하였다. 동년 9월 14일에는 정탁을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으로 삼았는데, 이미 치사(致仕)했지만, 새로 녹훈 (錄勳)되었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동년 10월 29일에는 왕이 이르기를, "정탁 등을 호성공신 3등에 책훈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품계와 관작을 한 자급(資級) 초천한다. 그의 부모와 처자도 한 자급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가계(加階)하라. 적장은 세습케 하여 녹봉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대대로 영원히 사유를 받게 하라. 이에 반당 4인, 노비 7구, 구사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라고 하였다. 1605년(선조 38) 10월 1일 서원부원군 정탁(西原府院君鄭琢)이 졸하였다. 동년 10월 3일 승정원이 왕에게 아뢰기를, "지금 정탁이 밖에서 졸하였으니, 조의를 표함이 성복하는 날에는 미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대신을 중히 대우하는 일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이 예를 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승지를 보내어 조문하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하니, 왕이 동부승지를 보내라고 전교하였다. 동년 10월 9일 예조(禮曹)가 왕에게 아뢰기를, "지금 정탁이 예천 땅 본가에서 졸하였는데, 그는 일찍이 이사(貳師)를 지냈습니다. 왕세자가 마땅히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함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 의하여 거행함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왕이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諡號를 請하는 글] : 1605년 9월 19일에 충근정량 호성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감 춘추관사 서원부원군(忠勤貞亮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西原府院君)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집에 계시다가 돌아갔다. 상감(宣祖)께서 공의 죽음을 듣고 매우 애도하여 사흘을 조정 회의를 거두고 승지를 보내어 조문하고 부의를 내리고 예조좌랑(趙靖)을 보내어 장사를 마쳤다. 이듬해 1606년 2월 21일 예천군 남면 위라곡 간좌(南面位羅谷艮坐, 안동군 풍산읍 오미리 새랄)에 장사지냈다. 상감께서는 유사(有司)를 명하여 장례비용을 내리게 하고 귀후서(歸厚署) 관원으로 하여금 상을 다스리게 하고 승문원 관원으로 하여금 위패에 글씨를 쓰게 하니, 이 모두는 특별한 예우였다... 공은 어릴 적부터 뛰어나게 총명해서 글을 배우면 금방 그 뜻을 깨우쳐서 스승의 노고를 덜었다... 1589년(선조 22) 9월 병조 판서일 적에 일본의 사신이 왔다. 이 때 그 답례로 우리도 사신을 보내느냐? 마느냐?로 조정의 공론이 갈팡질팡하니, 공이 의연히 말씀하되, '일본의 침략할 단서가 분명하다. 아침에는 사신을 보냈지만 저녁에는 싸울 군사를 보내어 올 것이니, 지금 떠들썩할 것이 없다.'하니, 공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많았다(9월에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내기로 결정하였고, 다음 해 3월 출발해서 1591년 정월에 돌아옴). 1590년(선조 23)에 중국에 사신 갔다가 아직 돌아오기 전에 최영경(崔永慶)이 무고를 입어 죽었는데, 언관(言官)들이 공이 최영경의 동생 여경(餘慶)을 벼슬길에 추천했다고 꾸며대서 공을 파직시켰다. 그 해 겨울에 다시 예조 판서가 되고, 좌우찬성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군이 서울 근방을 핍박하므로 상감께서 피난을 결심했다. 이 때(4월 30일) 공은 내의제조(內醫提調)로서 내의원에 기거하다가 창졸간에 호가(扈駕)하느라고 집안 형편이 어찌된 것도 헤아리지 못했다. 평양에 도착하여 선조 임금께서 철옹(鐵瓮, 평남 맹산군)으로 다시 옮기려고 할 때 공이, "대동강은 저절로 이루어진 천혜의 요충지인데, 여기서 적병을 이길 계책을 세우지 않고 암벽 깊숙한 험한 곳으로 가다가는 적병들에게 틈을 주어 허를 찔릴 터이니, 안 됩니다"라고 울면서 간하여도 이루지 못하더니 이 소문이 퍼지자 상하가 모두 당황하여 동요하니, 어쩔 수 없이 조정을 두 곳으로 나누자는 공론이 결정되었다. 세자는 광해군(光海君)이고 공은 이사(貳師)로서 급히 달려 이천(利川)에 다다르니 그 곳의 적병들이 더욱 강성하여 길이 막혀 의주로 돌아갈 때 일행이 두려워하면서 변장을 하거나 가만가만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공이 앞뒤를 넌지시 살피다가 웃으면서 말씀하되, "하늘이 우리나라를 보우할 것이니 걱정할 것 없고, 만약 불행하게도 하늘이 돕지 않으면 이런 계책으로는 이 일을 면할 수 없다."라고 했다. 다음 해 정월에 정주(定州)에 이르러서 상감과 회동하게 되었다. 이 때 제독 이여송이 평양을 공격했다. 공에게는 경략(송응창) 이하 군관들의 위문 접대 등 여러 가지 일이 밀려서 거의 쉴 틈이 없었다. 중국 칙사의 수행을 맡아 평산(平山)에 이르러 세자를 호위하여 남하하라는 왕명을 받들고 충청도에 이르렀을 때 내륙 지역은 겨우 안정되었으나 바닷가에서는 왜적이 여전히 둔거하고 있었다. 이 무렵의 시의(時議) 가 '어찌 할 수 없으니, 왜적을 거기에 얽어매어 주자'라고 했다. 이에 공은 '왜적은 반드시 패망한다.'라고 늠연히 주장했다.

 

  상감께서 재위하신 지 오래되어 공의 뜻이 깨끗하고 발라서 급한 일을 만나도 당황함이 없이 차분히 치루어냄을 아시며 더구나 정성을 다하여 어지러운 시국을 수습하고 기울어져 가는 국가 운명을 바로잡자면 모름지기 유신(儒臣)을 등용해야 되겠다는 사실을 더욱 믿게 되어 1595년(선조 28) 2월에 공이 우의정이 되었다. 우의정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황정욱(黃廷彧) 부자가 죄를 지어 심문할 적에 상감께서 '정욱은 본디 훈공이 있고 또 늙었으니 고문을 면제하고 귀양만 보내고 싶다'라고 대신들에게 물으셨다. 이에 공이 대답하기를, "형장을 조심스레 다루고 공신을 보전하는 것이 모두 성덕이옵니다."라고 했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이 일로 추관(推官)들의 허물을 논했다. 이에 공이 글월로써 사직할 것을 고집하니 상감께서 공의 뜻을 굽힐 수 없음을 알고, 지중추부사로 바꾸었다. 당초에 공이 이순신과 김덕령이 장수가 될 재목이라고 추천했는데, 임진왜란을 당하여 이순신이 해상 방어에 전공을 세웠으나 모함에 들었고, 김덕령은 용감하게 잘 싸웠으나 살인죄로 몰렸다. 이에 공이 이르되, "왜적이 아직 우리 국토를 점거하고 있는데, 그것을 막지 않고 먼저 장사(壯士)를 죽이는 것은 왜적이 들어서 안 될 일입니다.'라고 하여 상감께서 그들을 용서하여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1596년(선조 29) 여름에 주상께서 임금이 친히 왕릉에 나아갈 날을 점칠 적에 우뢰소리가 대궐 안을 진동했다. 이에 공이 상감께 진언하되, '노(魯) 나라에서는 생쥐가 재앙을 암시하여 들에 나가 지내는 제사를 중지했다고 합니다. 지금 하늘이 비상한 꾸짖음을 보이시니, 상감마마께서 왕릉에 나아가실 때가 아닙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그것이 중지되었는데 그해 가을(1596)에 전라도의 역적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났다. 그 잔당을 사로잡아 문초하니, '임금이 왕릉에 갈 때 가만히 치려고 했는데, 그것이 중지되어 이루지 못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모두 가슴이 섬뜩하게 놀랬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왜적이 호남을 유린하여 매우 어수선하다는 급보를 받고 공은 두 차례 상소하여 변방에 달려가기를 청했다. 그 글에,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려서 도탄에 빠졌고, 그 정세가 흙더미 무너지듯 하려는데, 조정의 명령은 거리가 멀거나 가깝거나 통하지 아니합니다. 어찌 조정의 200년 기업을 하루아침에 포기하고 속수무책으로 망하기를 기다리기만 하겠습니까? 저는 슬퍼하시는 윤음(綸音)을 받들고 가서 널리 펴면서 임금과 백성과 부로(父老)들을 위유(慰諭)하고 젊은이들을 이끌고 왜적이 다니는 길목의 요충을 쳐서 부수면 다행이요 또 저는 늙어서 진실로 스스로 돌격하기는 어려우나 사졸(士卒)들보다 먼저 한 번의 죽음으로서 평소의 성은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했으나, 조정에서는 공이 늙었음을 딱하게 여겨 허락하지 아니했다. 그러나 뜻있는 이들은 모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발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599년(선조 32) 세자 광해군을 따라 수안(遂安)에 가서 중전(中殿)을 문안하고 모시고 돌아오니, '지난 날 위급할 때 처자를 보전하려고 가족이 편의를 먼저 도모한 사람들의 성명을 게시하여 모든 관원들에게 보이고자 했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왜적들이 다시 쳐들어와서 어수선한 인정이 사소한 데로 끌려갑니다. 진작에 적발하여 중치하지 못한 것은 일찍이 그러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리들이 진실로 죄를 지은 것은 분명하나 나라에 큰 경사가 있으면 은혜를 널리 베풀어 구제해 주고 묵은 허물을 뉘우쳐 고치게 하는 것이 왕정(王政)이니, 허물을 용서하는 큰 뜻입니다."라고 아뢰어, 상감께서 마침내 이들을 모두 용서했다. 공이 주장하는 법의 지론은 반드시 너그럽게 용납하라는 주장이 거의 이와 같았다. 공이 처음 정승이 되던 해(1599) 벌써 74세 고령이므로 일을 감내할찌 두려워하면서 나라의 어지러움이 채 가시지도 아니했으므로 물러갈 수 없었다. 이 때에 이르러 시국이 점차 안정되고 신민(臣民)이 바른 뜻을 펼 수 있는 때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 때(1599.9)에 드디어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성묘하고 사직하고 여생을 마치고자 했다. 그 이듬해 봄(1600.2)에 나라에서 좌의정을 삼으시고 속히 조정에 들어오라고 명했으나 공은 스스로 늙고 병들어 성은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라고 사직하겠다는 글을 올리고 부임하지 아니 하니 상감께서 공의 뜻을 용납하여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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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2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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