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군에바란다

이곳은 군정발전을 위한 참여 공간이며 본 란을 통하여 제시한 각종 의견 등에 대하여는 민원사무로 접수되지 아니 하므로 민원사무로 처리를 원하는 경우에는 민원신고센터 를 통하여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 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제목약포광장 조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4)
작성자장병창 @ 2015.11.13 06:32:47

  약포광장 조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4)

---

 

 

  4년 후(1603)인 78세(4월)에 이르러 치사하고자 상소를 올리니, 상감께서 거듭 공의 뜻을 수용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어 선유하시기를, '육정(六丁)으로도 공의 뜻을 굽힐 수 없으니 이 세상에서 이런 일은 일찍 듣지 못했다.'라고 했다 하고, 영중추에 오르고 치사가 허락되었다. 그 해 겨울 호성공신에 책훈되고 서원부원군을 봉하고 경상도에 명하여 봉조하(奉朝賀)의 녹을 지급하게 했다. 이에 이르러 공이 또 '늙은 신하는 때맞추어 조회를 참여하지도 못했으며 공신을 책록할 때 군신이 모여 맹세하던 일에도 참여하지도 못했는데 굳이 나라의 관례에 따라 은총이 넘치는 녹봉을 부질없이 주고받은 일이야말로 국가와 이 늙은 신하 서로의 허물이 될 뿐입니다.'라고 사양했다. 그러자 상감께서는 답지(答旨)를 내리되, "원훈 대신으로서 시골에 물러가 살면서 이제 또 녹봉을 사양하는 것은 매우 예도에 어긋난다. 그리고 본도에서 녹봉을 주는 것은 진실로 훈구 대신을 우대하고자 하는 나라의 뜻에서 우러나온 바이니 어찌 굳이 사양해서 스스로는 결백하고 나라의 성의는 받들지 아니하려는가? 공의 집안의 생계가 매우 넉넉하지 못해서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 사방에 벽만 덩그러이 들러있어 두 접시의 반찬도 갖추지 못할 만큼 가난하면서 끝내 녹봉 받기를 구차하게 사양하지 말라."라고 했다. 상감께서 공을 예우함이 이처럼 한결같았으니, 그 임금에 그 신하가 있음을 보여 주었도다. 공이 평소에 건강하고 잔병이 없어서 춘추의 명절에는 반드시 묘소 선산(先山)에 나아가 성묘를 하되 발걸음이 청장년 때와 같았고, 산수 간에서 자연을 즐길 때도 문중의 두 세 노인들과 더불어 지팡이를 짚고 종일 소요할 뿐이니 들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지난날의 정승인 줄 몰라볼 만큼 검박했다. 그리고 고향의 친구들과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면서 근심 걱정 잊고 흥취를 돋우지 아니함이 없었다. 여씨향약(呂氏鄕約)에서 당시에 준행할 만한 내용을 가려서 존비 관계의 분수를 정하고(貴貴尊尊), 나아가고 물러섬에 예절과 양보하여야 하고(進退禮讓), 장례 때 서로 도와주고(死喪相恤), 급한 환난 때 서로 구조(急難相救助)하는 조목들을 마련해서(이는 지금까지 전하는 高坪洞約 約文임) 봄가을에 강회(講會)를 할 때 백성들이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우리말로 풀이해서 깨우쳤고, 예천 사람들이 이제껏 그대로 따르고 폐하지 아니한다. <중략> 돌아가신 이듬해 2월에 장사지내고 고을 사람들이 향현사(鄕賢祠)에 추가로 배향(配享)하고 제향(祭享)을 받든다. 공은 맑은 기상과 단아한 모습으로 즐거워하고 타고난 자질을 스스로 삼가서 지키고 도에 가까움이 정련한 금(精金)이나 좋은 옥(良玉)과 같아서 한 번 보고도 지니고 있는 바를 알만 했었다. 일찍이 퇴계(李滉) 선생 문하에서 공부해서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며 수양하는데 법도가 있었다. 곁들여서 천문, 지리, 상수(象數, 易學과 數理), 병법까지도 훤히 꿰뚫었다. <중용>과 <대학>을 더욱 좋아해서 늙어서도 밤에 홀로 앉아 조용히 외우기를 힘썼다. 그리고 공이 항상 말하기를, "원(元) 나라의 큰 학자 허노재(許魯齋)의 말에, '나는 소학(小學)을 신명처럼 공경하고 부모같이 존경한다.'라고 했으니 사람들이 진실로 허노재와 같이 공경하고 믿는다면 어찌 성현의 도에 이르지 못할까봐 근심하겠는가"하고 공은 여러 책에서 가려뽑아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의 조목으로 소학 연의(小學衍義)를 만들고자 했으나 이루지는 못했다. 공이 처음 벼슬길에 나서니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의정이던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이 공을 처음 보자 큰 그릇이라고 하면서, '얼굴이 암 용(龍)과 같으니 뒷날 반드시 크게 귀히 되리라'라고 했다. 중국에 갔을 때 관상가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당신은 참으로 어진 사람이니, 만 백성의 생명을 구제할 것이며, 키나 얼굴 모습이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아니하나 그 우뚝함이야말로 많은 무리 중에 야학(野鶴)이 뛰어남과 같으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우러르며 친압하지 못하리라.'라고 했다. 공의 마음가짐이 충신(忠信), 관평(寬平), 비겸(卑謙)으로 자처하고 너와 나를 생각함에 있어서 미물에게도 그러했으며 미천한 사람에게도 오만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옷, 갓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으며 비단옷을 입지 아니하며 광대들의 노래와 진기한 물건을 한 번도 이목(耳目)에 가까이하거나 입으로 말한 적도 없으며 가산(家産)의 경영을 도모한 적도 없어서 공이 돌아가시자 여러 아들들이 하나같이 살림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공이 청환과 고관의 자리를 두루 거치면서도 권세를 피하기를 마치 더러운 것 보듯 하고 항상 미관말직에도 있지 아니하는 사람같이 처신했으며 이익보다 의리를 앞세워 거센 물결에도 휩쓸리지 아니하고 우뚝했다. 기쁜 일이 있을 때 훼방을 놓는 것을 매우 싫어해서 가차(假借)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혹 뜻하지 않게 죄를 지었을 때는 비록 소원(疏遠)한 사이라도 달려와서 오직 약포 공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고 했으며 공도 또한 그들을 위하여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찾아서 구제해 주었다. 국사를 논함에 이르러서는 먼저 대체(大體)를 살피고 명분을 중히 여기며 반드시 원대한 계획에 힘쓰고, 눈앞의 공리에 휩쓸리지 아니했다. 그 때 널리 군대를 모집하느라고 사천(私賤)도 군에 입대하면 속량(贖良)되게 하고, 또 군량이 모자람을 걱정하여 공명(空名) 사령장을 발급하였다. 공은 이 때 그것이 절대로 옳지 못한 일이라 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기자(箕子)께서 법률을 마련한 이래로 종과 주인의 관계는 임금과 신하의 분수와 같으니 어찌 주인을 배반하고 나라에 충성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상전을 배반하라고 유도해서 나라를 나라답지 아니하게 하는 바이요, 벼슬을 파는 것은 한(漢) 나라의 악습인데, 지금 공훈의 서열을 무너뜨리고 편안히 앉아서 곡식을 파는 무리와 화살과 돌 사이에서 죽음을 무릅쓴 사람을 같은 자리에 놓고 공신(功臣)이라고 한다면 어찌 군사를 격려하여 적장의 목을 베라 하고 적진의 깃발을 뭉게 버리라고 명령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논난하는 사람이 없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을 때는 모든 일을 사절했지마는 정치의 잘 잘못을 들으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족들에게 이르되, '내가 성은을 입고도 보답하지 못하여 죽더라도 눈을 감을 수 없으니, 나의 자손들이 내가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를 생각하던 정성을 알고 나의 뜻을 계속해 준다면 나는 유감이 없겠다.'라고 했다. <중략> 이제 공이 돌아간 적이 30년이 지났고 또 공의 사적을 소상히 알릴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이에 공의 손자 시형(時亨)이 이 일을 나에게 청하므로 삼가 그 사적의 줄거리를 이와 같이 적어서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청하노라. 이민구(李敏求, 1589-1670) 근찬", 묘는 안동시 풍산읍 오미동 새랄 위라곡(位羅谷)에 있고, 신도비(神道碑)가 있다.(司馬榜目, 文科榜目, 襄陽誌 1661, 醴泉郡誌 1939)

 

  정탁(醴泉의 人物 藥圃 鄭琢 先生) [記事] : 감천면 증거리 출신인 조동윤(예천군 문화관광과장)의 기사로, 예천군의회에서 2004년 7월에 발행한 <의회보> 제5호 144-156쪽(13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목차는, 1) 머리말, 2) 약포 정탁의 생애, 3) 학문과 교유 관계, 4) 임란 극복과 역할, 5) 고평동 향약 실시로 민심 교화, 6) 문인, 7) 유적 및 저서이다.

 

  정탁(藥圃 大監의 얼을 찾아서) [記事] : 정충사(靖忠祠, 예천읍 고평리 466)는 임진왜란을 수습한 예천 출신 명재상인 약포(藥圃) 정탁(鄭琢) 대감의 영정을 비롯, 연적, 벼루, 용사일기, 문집, 기로연도, 갓, 용사잡록, 교지 등 많은 유품이 보물로 지정되어 전시되고 있다. 약포 대감은 임진왜란(1592년~1597년)중에 선조 임금과 왕세자(광해군)를 모셨으며 난이 끝나자 좌의정, 영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여 난후 수습에 온 힘을 기울인 재상이다. 공은 난중에 곽재우(홍의장군), 이순신, 김덕령 등을 천거했으며, 그들이 당쟁의 희생으로 죽음에 직면했을 때 빠른 판단과 상소로써 그들을 구해낸 것은 역사에 길이 전해져 오고 있다. 1526년(중종21) 예천군 용문면 버들밭(하금곡리)에서 이충(以忠)의 아들로 태어나 본관은 청주요, 자는 자정(子精)이며 호는 약포(藥圃)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어려서부터 총명이 남달라 여덟 살에 벌써 글을 깨쳤으며 경사(經史), 지리(地理), 병서(兵書) 등에 두루 통해 믿음으로써 행하고 지조가 맑아 50년간의 벼슬길에서 조금의 실수도 없었으며 극심한 당쟁 속에서도 초연했고 포용성이 있어 대인 관계가 원만해서 동인(東人)에 속했지만 서인의 영수인 오음, 윤두수와 교분이 두터웠다. 교서 정자(校書正字)라는 최 말단 종9품이 당시 수렴 청정하던 문정왕후 윤씨가 어느 절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궁중에 있는 향을 가져오게 했으나 향의 출납을 맡아 보던 약포가 단호히, ꡒ궁중의 향은 종묘사직의 제사에 쓰일 뿐이요 궁외로 가져갈 수 없다ꡓ고 거절했다는 일화는 약포대감의 강직한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모사인 두(杜) 복야가 실수하여 이여송이 그를 죽이고자 할 때 마침 약포가 이여송을 찾아보고 죽이느니 차라리 나에게 달라고 해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며 두사충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감여요람(堪輿要覽)이라는 풍수지리서를 지어 예천 지방의 명당 묘터를 10곳을 적어 주었다. 그 뒤 예천 지방에는 많은 풍수들이 이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몰려들어 지금까지 500년을 헤매고 있다. 1552년(명종7)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1566년 정언(正言)이 되고 1568년(선조1) 교리(校理)로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을 겸직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81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정인홍, 박광옥 등과 뜻이 달라 이조 참판으로 전임되고 이 해에 진하사로 명나라를 다녀왔었고 이듬해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1589년 우찬성으로 사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임란 직전의 명나라와의 외교에 힘을 썼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모셨다. 이어 우의정이 된 그는 장재(將才)를 찾으라는 어명을 받들어 이순신, 곽재우, 권인호, 유정, 김덕령 등을 천거했다. 1593년(선조26) 영위사(迎慰使)가 되어 명 나라의 장수들을 영접했으며 계속 그들과 사귀면서 전란중의 국교에 노력하고 명나라 군사의 진중을 돌면서 그들의 사기를 높이고 독전했다. 왕세자 광해군의 스승으로 임란 중에는 평북, 강원, 함경도 등을 전전하면서 세자를 보필했고, 서울 수복 후에는 기위사(饑慰使)로 철수하는 명 나라 군사를 의주까지 가서 전송했으며, 그 해 10월 <용만문견록>을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용만문견록>은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의 상황과 명나라 장군의 내왕을 맞고 보낸 일이며 그들과 주고받은 문서 등을 기록해 선조가 사정을 알도록 한 기록으로 당시의 군사, 정치, 외교, 사회상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약포는 세자와 함께 영남과 호남 등지에서 근왕병을 모집, 훈련시키면서 난민 구제에 힘썼으며 1594년 우의정이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싸움터에 나가 군사들을 독전하려 했으나 선조 임금은 연로(年老)하다고 만류했다. 그 해 2월 원균의 모함을 받은 이순신이 서울로 잡혀왔을 때 재상들은 이순신이 무고한 줄 알면서도 변호하지 못하고 6,7차에 걸친 중신회의에서 이순신을 비호하던 중신들마저 반대파의 집요한 모함을 두려워해 입을 다물었을 때 약포 혼자 끝까지 이순신의 출중한 무예와 인격을 논해 다시 종군시키라고 역설해 처형 직전에 목숨을 구하여 백의종군케 하고 명량대첩의 큰 공을 세울 수 있게 했으니 이 것이 저 유명한 신구차(伸球箚)다. 이보다 한해 앞선 선조 29년(1596년) 1월 의병장 김덕령이 모함에 빠졌을 때 처형 직전에서 김덕령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며 선조 임금으로부터 말 1필까지 하사받게 했다. 이와 같이 약포는 사물의 판단이 공정했으며 조금의 착오도 없었다. 1600년(선조33) 좌의정 3년 후 영중추부사로 난 후 수습에 온 힘을 기울이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 예천으로 돌아와 예천읍 고평리에 터를 잡았다. 약포는 여기서 고평동계(향약)를 만들어 백성을 교도했으며 사회 풍교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고 고평들을 개척해 향토 주민의 복지 증진에 정성을 쏟기도 했다. 1604년 선조는 약포의 공을 기려 호성공신으로 서원부원군을 봉하고 충훈부에 하교해 영정을 그려 하사했고 1605년 80세를 일기로 서거하니 선조 임금은 3일 간 조회를 폐하고 슬퍼했으며 제문(祭文)을 내렸고 서울 백성들은 철시(撤市)하고 통곡했다. 정충사(靖忠祠)는 약포 정탁 대감의 영정과 유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1976년 12월에 착공해 1980년 12월 준공했다. 부지 4,110평에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겹처마의 영정각과 정면 3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유물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관리사 및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집인 신삼문을 비롯해 주소, 담장 197m, 안내판, 변소 등을 세웠고 유물관에는 김석종 당시 예천군수의 준공기문이 있다. 약포 대감의 영정과 유물은 원래 고평리 89번지에 있던 것을 현재의 정충사(고평리 466번지, 고평역전 안골 뒷산)로 옮겼다.(윤현숙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5-06-11 오전 11:49:43)

 

  정탁(鄭琢) [記事] : 1526-1605, 용문면 하금곡리에서 출생하여 예천읍 고평리로 옮겨 살았다. 호는 약포(藥圃), 17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의 참된 뜻을 배우고, 뒷날 진주 교수로 있으면서 남명 조식(曺植)으로부터 강직한 선비 정신을 배웠다. 대사헌과 좌찬성을 거쳐 좌의정에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선조를 의주(義州)까지 호종했던 정탁은 1594년에는 김덕령(金德齡), 곽재우 등의 명장을 천거했고, 이순신 장군이 옥에 갇히자 무고함을 극력 주장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하도록 하는 등 뛰어난 학문과 강직한 인품으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70세의 거유(巨儒)인 정탁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으나 역모의 누명을 쓰고 옥사했던 29세의 광주(光州) 출신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억울함을 선조에게 주청하여 석방을 탄원했던 정탁의 상소문 초고본(51x69cm)이 남아있다. 이 상소문은 1596년(선조 29)에 임금에게 올려졌다. 이 상소문에서 정탁은, “김덕령의 명성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면서, “그가 역모에 가담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데다 왜적들이 퍼뜨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상소문은 이어,  ”아직도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이 때 한 이름 난 장수를 죽인다면 남쪽 지방이 장군과 장수들은 불안에 떨게 되어 적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적고 있어 김덕령의 죽음이 의병과 관군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 상소문의 초본은 고서화 연구가인 최효상(서울 거주)이 최근 안동에서 발굴해 공개해 낸 것이다. 최씨는,  ”당시 명당 있던 정탁과 같은 선비들이 김덕령 구명에 적극 나섰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중요한 문헌“이라고 하였다. 정탁은 말년에 ’송죽음(松竹吟)‘이란 시에서 이르기를,  ”송죽은 정기(正氣)를 갖추었으니/ 식물 중에 어진 군자(君子)네/ 모든 풍상 다 겪은 뒤에/ 바야흐로 굳은 절개 알 수 있다네“라고 하였다.(www.kwangsankim.or.kr 2002)

 

  정탁 [記事] : 한국문집총간(031_169a) 퇴계집(退溪集, 1573)에 실린 퇴계 이황(李滉)의 자정 정탁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退溪先生續集卷之五/ 書/答鄭子精/ 奉接惠書。具審辱訪意切。固知君有此懷。苦於委頓。杜門謝客。非一二數。於今獨否爲難。故前書云云。假使欲一相面。今與明。乃曾祖忌。又十七日。宗姪行時祭。十六是致齊日。雖病難參祭。何可不齊而?應他事耶。君行想必其前發向醴泉。相違至此。可歎。然相見。更有別說何事。洪相前寄書。頃已修報。似聞不蒙矜察。大抵滉心跡爻象。大段狼狽。今雖假辭於子貢。日陳百喙。恐終歸於無益。奈何奈何。洪相詩律。亦已拙和。恐或反致訶斥。故時未呈上耳。餘未一一。謹奉謝復。/ 安道來時。奉來內賜二程全書。惶感無地。但伏覩二先生眞像。似以明道。換伊川誤刻。未審本館。曾已勘改否。至爲未安。故敢白。”이다.(www.minchu.or.kr 2006)

 

  정탁 [記事] : 한국문집총간(031_306a) 퇴계집(退溪集, 1573)에 실린 유도원(柳道源)의 약포 정탁에 대한 기사로, 그 내용은, “退溪先生文集攷證卷之二/ 第三卷詩/ 次韻答友人/ ...淸風谷口子鄭貫淸州。故使淸風谷口字。/ 酌泉吟不易案貪泉在廣州。(吳隱之)古人云此水。一?懷千金。試使夷齊飮。終當不易心。/ 鄭子精號藥圃。居安東。後移醴泉。生嘉靖丙戌。?角登門。得聞心學之要。加踐實之功。壬辰之亂。盡心國事。晩又斂退。西厓稱其善始善終。官右議政。諡貞簡。○案子精時爲晉州敎授。”이다.(www.minchu.or.kr 2006)

 

  정탁 [記事] : 한국문집총간(039_397a) 약포집(藥圃集, 1818)에 실린 약포 정탁(鄭琢)의 연보로,  그 내용은, “藥圃先生年譜錦堂/ 藥圃先生年譜錦堂/ 世宗嘉靖五年二中宗大王十一年丙戌十月初八日。寅時先生生于醴泉郡北金堂谷三九洞第。三九洞。卽先生外鄕也。母夫人韓氏進士諱終傑之女也。嘗夢有日異。生先生云。○先生生有異表。穎秀異凡兒。議政公奇愛之。/ 十二年癸巳先生八歲○始受學。卽通大義。不煩程督。女思日進。/ 十三年甲午先生九歲十二月。丁母夫人憂。/ 十五年丙申。先生十一歲隨議政公。往安東佳丘村。卽父鄕也仍居焉/ 十七年戊戌。先生十三歲與柏潭具公鳳齡。讀書金沙寺。柏潭嘗曰。某與藥圃。同年同?。契愛甚篤。藥圃十三歲。患?症?。某潛入病所。則?痛定起坐。布算滿房。考驗朞三百氣朔置閏之法。其才之穎敏早成如此。而過自?晦。世與知者云。/ 十九年庚子先生十五歲○先生自??。受業於仲父三嘉縣監諱以興。年?志學。通經書。歷覽朱子綱目等書。/ 二十一年壬寅。先生十七歲游退溪李先生之門。先生卯角登門。得聞心學之要。加實之功。不以口耳爲事。踐/ 二十四年仁宗王元年大乙巳先生二十歲春。自佳丘。隨議政公。復居于金堂谷。/ 二十五年王明宗大元年丙午先生二十一歲夏。丁議政公憂。葬于外塋堤洞。執戚盡禮。盧墓終喪。/ 二十七年戊申先生二十三歲六月。服?。○秋。聘夫人潘氏。孝子觀物堂諱沖之女。檢閱李公?之外孫女也。/ 三十一年壬子先生二十七歲春。中成均生員。是秋。□大學。齋懦從事句讀。先生獨講究天人之理。人咸異之。/ 三十二年癸丑。先生二十八歲讀書紹修書院。尹進士義貞同游/ 三十六年丁巳先生三十二歲季夏。以啓蒙書一帙。贈趙月川士敬。穆○先生與月川同門。契誼篤厚。以道學相勉。先生有啓蒙二帙。以一件贈之。要取質於退溪先生。卷端書勉意。而題云梅巖書。侮巖。初號也。月川亦有小識。

 

  三十七年戊午先生三十三歲冬。中文科。先生未第時。與雪月堂金公富倫。同棲山房嘗夜坐聯句。先生首吟曰。星斗在天天下仰。金公驚曰。他日必居廊廟。而負山斗之望。因續吟曰。波濤驅海海中驚云。/ 三十八年己未。先生三十四歲分校書館。世以新進入芸閣稱屈。而先生不少介懷。課程匠役。讐校魚魯。一以至誠。時洪訥庵某爲提調。歡曰。大器也。他日必遠到。李東皐浚慶少許可。見先生曰。此官雌龍顔。異人也。後必大貴。且先生初?校書時。人爲之語曰。政丞歸校書館。蓋先生公輔之望。已屬於釋褐之初云。/ 三十九年庚申。先生三十五歲補校書正字。先生嘗直宿香室。時明廟不豫。文定王后將供佛事。命取香於香室。先生曰。此是用郊社之香。非供佛之物。拒不承命。文定大怒。命下吏。物論偉之。○先生嘗以公事。謁領相忍齋洪公暹。公待以異禮。甚致敬焉。先生退。其子弟怪其過自降屈。公曰。非汝所知也。此人厚德碩量。他日必登吾座。不可以平常體貌待之云。/ 四十年辛酉。先生三十六歲授成川敎授。本邑校有古規。新敎授至。諸生以紬段當?脩。先生曰。敎授於諸生師長也。師弟之間。豈以貨爲禮乎。遂痛革之。敎以禮義。循循勉進。士風丕變。移授晉州敎授。先生在晉日。從南冥曺先生游。深被推許。見得壁立千?氣像。故先生之始終全節。蓋有得於此云。子允著生。/ 四十二年癸亥先生三十八歲夏。卜寓居于明禮坊。退溪李先生有書曰。聞占得佳園於南山下。想退食逍遙。消遣塵勞。可賀。然緊要處。亦不在此。此不可不知云。蓋出於勉學之意也。/ 四十三年甲子。先生三十九歲由博士。出爲護送宮。○子允偉生。○三月。有春園寓興十絶。上退溪先生。退溪先生有次韻/ 四十四年乙丑先生四十歲秋。陞成均館典籍。擢拜司諫院正言。退溪先生以書賀曰。君今入薇垣。交舊相賀。然其憂責亦不輕。且勉且愼。以副時望云。以言事罷。未幾敍。又拜正言。先生入言地。遇事敢言。有古諍臣風。首劾尹元衡專擅誤國之罪。繼論李戡, 尹百源, 沈通源等。朝著肅然畏憚。/ 四十五年丙寅。先生四十一歲遷禮曹正卽。/ 穆宗隆慶元年丁卯先生四十二歲春。選授弘文館副修撰。○移拜兵曹佐卽, 禮曹正卽。○轉司諫院獻納, 司憲府持平。○復爲修撰, 副校理校理。先生處經幄。首尾垂三十年。隨事啓沃。盡忠畢懷。不以激觸取名。一以誠意。感動上心。上亦虛已受之。/ 二年宣祖大王元年戊辰。先生四十三歲累遷獻納, 持平兵曹正卽, 佐卽。/ 三年己巳先生四十四歲五月一十一日。入侍朝講。與大司憲朴應男, 獻納閔德鳳, 經筵官辛應時。各陳晉州儒生獄事。/ 四年庚午先生四十五歲十二月。退溪先生訃至。爲位哭之。與諸同門。會哭於金鶴峯所館。二十六日。入侍夕講。洪聖民啓曰。國家不幸。大儒卒逝。聞計之日。贈以議政。中外感激。此人學問。爲東方宗師。集大成之人也。先生進曰。東方學問之人。雖或有之。至於造詣之精深。踐履之純固。則唯此一人而已。其進退出處。辭受取予。皆可爲後人模範。上曰。聞其有病。特令遣醫。而未及救。悼恨何極。先生曰。聖上待大臣。可謂極盡而無欠闕矣。必用其道。然後方盡待賢之道也。/ 五年辛未。先生四十六歲子允穆生。○拜修撰○製進退溪李文純公賜祭文○三月。會葬退溪先生。有祭文/ 六年壬申。先生四十七歲拜吏曹佐卽。/ 神宗萬曆元年癸酉。先生四十八歲轉吏曹正卽。陞議政府檢詳舍人。○遷司僕寺正○遷掌令, 司諫,執義。二年甲戌先生四十九歲秋。由副應敎。陞通政。拜同副承旨。/ 三年乙亥。先生五十歲陞都承旨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 尙瑞院正。/ 四年丙子先生五十一歲秋。辭遞都承旨。/ 五年丁丑。先生五十二歲拜大司成。○遷禮曹參議○冬。出爲江原道觀察使。先生按關東。政尙寬恕。撫學凋察。欽恤刑獻道內滯囚。次第平反。到春川。進供時。忘設前箸。先生不以爲意。主?欲治其罪。?止之。游楓獄時。察擔輿僧用力勞苦。給以米布鹽藿。尤崇學重儒。所至輒聚士講學。到平海。有庭卒觸士子衣巾而汚之。意郡守武人。賤待儒冠。致有此事。杖庭卒以警之。/ 七年己卯先生五十四歲春。復入爲都承旨。兼帶如故。/ 八年庚辰先生五十五歲春。陞授嘉善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帶如故。/ 九年辛巳先生五十六歲四月。拜大司憲。掌令鄭仁弘請罷吏曹佐卽李敬中。先生不從。逐各啓所見。避嫌而退。諫院啓請遞先生。而使仁弘出仕。劾敬中罷之。○五月。拜吏曹參判兼同知經筵, 義禁府事, 五衛都摠府副摠管。用大臣薦。以尹毅中首擬刑曹判書受點。大司諫李珥發論。兩司合啓劾大臣之誤薦。請推。上只推吏曹。不允改正之啓。未幾。辭遞。○冬。復拜吏曹參判。/ 十年壬午。先生五十七歲監修欽敬閣。先生精於象數之學。少時陶山門下。已曉渾儀制度。及立朝。承命造璣衡。故宣廟敎書中。有璣衡創妙齡之句。○特命陞資憲。拜漢城府判尹, 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冬。奉使皇京。先生在京師。有相者見之曰。公眞仁人他。異日當濟萬民云。/ 十一年癸未先生五十八歲春。自皇京復。命。○四月。拜行大司憲。○拜工曹判書○八月。上章乞暇。還鄕焚黃。○九月。辭遞工判及兼帶。○十一月。拜大司憲。/ 十二年甲申先生五十九歲五月。啓請審理?獄。時久旱。命賓廳各陳所懷。故有是啓。/ 十三年乙酉。先生六十歲拜禮曹判書。遷大司憲。○俄轉拜吏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夏。辭。遞。十四年丙戌先生六十一歲春。喪長子允著。○拜大司憲。十六年戊子先生六十三歲春。拜刑曹判書。先生天性忠信公恕。慈詳惻?。屢入秋部及憲府。治獄按囚。每傳寬議。多所平反。故人或陷罪?測。雖疏?異趨。必曰。唯藥圃公。活我云。○十月。轉拜吏曹判書。先生三長東銓。時朝紳分裂。各立門戶。互相傾奪。而先生毅然獨立於頹波之中。小無偏倚。前後銓注。一以至公。斥遠私謁。以杜邪徑。嘗有私干先生者。先生曰。君才當薦。何爲踵吾門乎。竟不用。/ 十七年己丑先生六十四歲九月。遞吏判。旋授兵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時日本使適至。廟堂議報聘便宜不決。先生毅然曰。賊逆端業見。藉令信使在朝。兵鋒在夕。此講之悔也。及至壬辰。倭賊果大逞如先生言。人服其先見。/ ○鄭汝立獄事起。入參庭鞫。○冬。特加崇政。假右議政銜。奉使皇京。子允穆從/ 十八年庚寅先生六十五歲二月初一日。渡江。四月晦。竣事。回自皇京。在道聞言者構以曾薦擬崔永慶之弟。論罷。前年汝立之獄。高士崔永慶以非辜誣死。不悅先生者。謬謂在亞銓時。官永慶之弟餘慶。論罷之。○冬。敍知中樞府事。○轉拜禮曹判書。/ 十九年辛卯先生六十六歲七月。拜崇政大夫, 議政府右贊成兼知經筵, 春秋館事。/ 二十年壬辰先生六十七歲四月壬寅。倭大擧入寇。己未。扈駕西行。時昇平日久。外寇猝至。朝廷遑遽。遣巡邊使申砬。爲李鎰繼援以禦賊。日望捷音。及敗報至。都城大震。上猝決去?之行。先生以內醫提調。起居藥房。不問家累所在。蒼黃扈駕。是夜宿江店。翌日。扈駕至開城府。留三日丙寅。扈駕至平壤府。仍留。○六月戊戌。上箚請堅守平壤。不許。五月。申?敗沒。臨津失守。賊鋒逼大同江。大駕發向寧邊府。平壤軍民遮道。願勿往守城。先生急詣政院。請從?情。留守本府。至涕泣爭之。不從。○己亥。扈駕發平壤。辛丑。至寧邊府。旣至寧邊。吏民先潰。上下震撓。已不可爲。遂決分朝之議。○壬寅。以貳師承命。陪東宮。向江界路。時大駕發向義州啓。王世子發向江界路。先生與領相崔興源, 判書李憲國, 參判沈忠謙, 參判尹自新, 承旨柳希霖。承分扈之命。從至熙川。右相兪泓, 右贊成崔滉追至。○丁未。與從行諸宰。馳啓大朝。改春川路。當初。朝議之要往江界者。欲令觀便。踰雪寒嶺入關北。據險避亂。而聞賊已入關北。改向春川。兪相泓主議也。○七月戊辰。陪東宮。夜到伊川縣。峽路危險。而時當盛?。草宿雨餐。艱苦萬狀。先生雖在蒼黃顚沛之際。而無躁容遽色。如立治朝隨事進規。多所裨益。至伊川。聞東方賊勢甚盛。不得前進。留二旬。○己巳。上狀行在。論東官一行。姑留伊川。詳探賊奇。觀勢去就之狀。兼陳收攬人才。唯在爵賞。而當此板蕩之日。無尺布斗粟。可充賞資。至於除拜一事。亦緣行在隔遠。往復之際。動失事機。俱爲可憫。故敢遵權宜從事之命。差出及時應補之官。一邊任事。一邊啓稟之意。詳見日錄。○時大駕播越西?。以誅討興復之責。專委於分朝。除拜爵賞。皆命權宜處斷。先生與從行諸宰。日仕賓廳。裁決庶務。絡繹馳啓大朝。先生沈靜簡黙。而臨機應變。算無遺策。其措置建白。多出於先生云。○甲戌。上狀行在。分朝一行。崎嶇山峽。從官散落。及到伊川。避亂朝士。稍稍來集。逃竄守令。漸復官次。體貌粗成。號令亦行。軍勢漸振。而諸邑經賊蕩盡。分朝支供軍糧。辦應無路。故行?各邑。令步兵番布及貢物。減半作米。捧上分朝。又行會近道。停番軍。依例立番。海西近於關西。故令起送行在。具狀馳啓。詳見日錄。○戊寅。入直摠府。時賊鋒圍逼三面。無前進之路。丙子。聞賊已入谷山地。先生與諸宰。入對東宮。夕直宿摠府。○庚辰。上狀行在。時各道列邑守宰。或戰亡。或逃或死。民皆散亂。殺掠攻劫。故權差朴春男。爲春川府使。成泳爲驪州牧使。義兵將金千鎰陞秩僉知。邊琇喪師失律。故使之從軍責效。具狀馳啓。詳見日錄。○甲申。上狀行在。時兩司以陪東宮。棄江界入危地。欲摘發首倡加罪。故上狀自劾。言跋涉之際。博採衆議。或自計?首倡之罪。全在臣等。惶恐待罪云云。又啓言黃海一道。陷賊已久。民不堪殺虐。皆思奮起討賊。而無將領可以依歸云。故發遣李?。往鎭谷山, 遂安等地。一以收拾海西。一以應接西京聲援云云。詳見日錄。○乙酉。陪東宮。夜踰風壁峴。向成川。聞賊兵來逼。蒼黃離發。而賊梗東路。不得前進。崎嶇阻折。?向成川一行?慄。多變服詭行。觀望先後。先生歎曰。天若祚我東。必無此事。設或不幸。豈可以智計免乎。○上狀行在時列邑守宰。多空。無人把守。黃海, 江原之賊。往來遍滿。民被殺虐。故以高陽, 積城, 交河, 楊口等邑及京畿水使。姑先權差。使之遮截之意馳啓。又啓言分朝所住。民皆驩悅歸附。朝廷氣脈。旁通諸道。獻級日至。各起義兵。頗有?復之望。李時言遇賊突陣。斬其先鋒。威名甚著。皆願爲將。故差黃海防禦使云云。詳見日錄。/ ○八月辛卯。陪東宮。始至成川府。留三朔○丙申。上狀行在。江原監司柳永吉。竄山谷。無意策應。故權差姜紳發遣。伏且使巡邊使李鎰。前進平壤。與李?軍相爲?角。賊兵熾盛處空邑守令權差之人。姓名開錄。具狀馳啓。詳見日錄。/ ○丁酉。上狀行在。巡邊使李鎰。欲由江東路。□抵平壤。與李?軍遮截賊路。故使之姑留觀勢。以定所向。而具狀馳啓。又言因安邊儒生。聞關北守令多曠。民思自奮討賊。而無將領云。故德源府使, 永興判官。姑先差出。麻田, 漣川兩邑假守。李亨男, 金?。頗有禦賊之功。故仍爲權差云。詳見日錄。○辛丑。上狀行在。時平壤之賊。過半上去。海西留屯之賊亦不多。而畿內則屯聚。四處結陣。湖南勤王之兵。勢難直?。故通諭於全羅兵使崔遠, 義兵將金千鎰。使之由延安, 白川。先?海西之賊。由中和□?平壤。具狀馳啓。且請設科取士。以充分朝守衛之卒。詳見日錄。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25.12.10

페이지만족도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성에 만족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