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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약포광장 조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10)
작성자장병창 @ 2015.12.21 21:04:18

  약포광장 조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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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메기북 : 메기가죽으로 만든 이 북은 크기가 지름 35cm, 둘레 119cm, 테의 나비 18cm이고, 무게가 2.3kg인 이 북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해 옵니다. 300여 년 전 도정서원(道正書院) 벼랑아래 소(沼)가 있었는데, 이 소 위에 송아지를 자주 매어 놓고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송아지가 없어져 주위를 살펴보니 송아지의 꼴삐가 이 소(沼)에 내려가 있었습니다. 이 소에는 전부터 큰 이무기가 살고 있다고 전해와 이 이무기가 잡아먹은 것으로 생각하고 죽은 송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며칠 후 큰 낚시를 만들어 이 소에 던져두었는데 큰 물고기가 물렸다고 생각되어 온 동네사람들이 몇 시간을 씨름한 끝에 고기를 건져 올려놓고 보니 어마어마한 큰 메기였습니다.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메기였으니 크기가 짐작이 갈 만합니다. 이 메기를 잡아 놓고 보니 통쾌감도 느끼고 겁이 나기도 하였으나 이왕에 잡은 고기를 살릴 수 없어 가죽을 벗겨 영원히 기념하고자 북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북은 100년 전쯤 도정(道正)에 살 때 가족이 32명이나 되었는데 식사시간이나 가족의 모임이 있을 때에는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따로 부르지 않고 이 북을 쳐서 모이게 하였다고 합니다. ※ 이 이야기는 안동을 비롯한 경북북부지역에서 전승되고 있습니다. ※ 박장영 님은 현재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에서 학예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醴泉인터넷放送 2010-01-07 오전 11:44:39)

 

  정탁(버들판의 名宰相, 藥圃 鄭琢  /詩와 함께 하는 慶北北部文化 나들이(6)) [記事] : ◇ 김영진 시인// 이 고을 저 고을 샘물 나듯 인걸도 많다만 용문면 버들판*에 또 한 재상이 났으니, 그의 이름은 정탁(鄭琢). 자(字)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여덟에 글공부 시작하여 열셋에 기삼백기삭치윤법(朞三百幾朔置閏法)** 만들어 그의 천재성이 이웃 고을에까지 전파되었더라./ 아홉에 모친상, 스물하나엔 부친상. 외로움과 가난을 슬기로 넘어 강골 정신으로 위풍을 세우고, 스물셋에 결혼하고 스물일곱에 성균관 생원시에 급제, 서른셋에 문과에 급제하니 그의 관운은 천운인가 영남 학운인가, 예천의 풍수지학인가. 마흔다섯 해에 좌의정, 우의정에 오른 후, 여든 살에 이 세상 하직하고 예천 남면 위라곡에 잠들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나올 적에, ‘칼 찬 선비’ 남명 선생이 집에서 기르던 소 한 마리를 몰고 가라면서 주신 덕담이 약포의 성격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날카로운 말은 넘어지기 쉬운 법일세. 자네의 언어와 의기는 민첩하고 날카로우니, 소의 더디고 무던한 성품을 본받게.”/ “산에 사는 나무는 더러 도끼자루가 되어 스스로 나무를 자르고/ 기름덩이는 더러 불길을 질러 스스로 몸을 태운다./계수나무는 먹이가 되기에 베이고/칠(漆)나무는 칠하는 데 쓰이기에 베인다./코끼리는 상아 때문에 죽고/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고/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다./사람들은 모두 유용한 것의 용처는 잘 알면서도/무용한 것의 용처는 모르고 산다.”(「남명집」에서)/  *지금의 하금곡리/ **천문(天文)의 태음력에 관한 이론/ #시작노트: 영남 일대엔 선비와 애국 의사가 많았다. 약포 정탁(1526∼1605년)은 예천이 낳은 조선 시대 선조 때의 명재상으로, 하늘의 왕별처럼 빛나는 걸출한 인물이었다. 가정적으로는 불우한 여건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총명과 강직한 성품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외부로부터 침략이 많았던 시기, 특히 임진왜란을 전후한 그의 활약상은 오늘날에도 필요한 인물로 부각된다.(醴泉新聞 2010년 01월 14일 13:31:06)

 

  정탁 : 謀陷에서 李舜臣을 求함/ 김영진 시인| 예천신문 | 2010.04.21 17:58/ *시와 함께 하는 경북북부문화 나들이(17)/ 모함에서 이순신을 구함/ -약포 정탁의 상소문(1)/ <김영진 시인>/ 1597년 봄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처형 직전의 이순신을 구해낸 구구절절의 신구차(伸救箚)*가 있다. “이순신은 몸소 큰 죄를 범하여 죄명조차 무섭건 만은, 성상께옵서는 즉시 극형을 내리시지 아니하시고 두남두어 문초하시다가 나중에야 엄격히 추궁함을 허락하시온 바, 이는 다만 옥사를 다스리는 체모로써만 그러하심이 아니라, 어찌 성상의 인자하신 한 가닥 생각으로 기어이 그 진상을 밝혀 혹시 살릴 수 있는 길 찾으시고자 하심이 아니오리까. 우리 성상의 호생하시는 저 죄를 범하여 죽을 자리에 놓인 자에게까지 미치시옴에 신은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사옵니다.(중략)이제 순신이 이미 한 형벌을 겪었사온데 만일 다시 또 형벌을 가한다면, 무서운 문초 아래 그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여 혹시 성상의 호생하시는 본의를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 저어합니다.(중략)혹시 저 난리 첫 무렵에 공로를 탐내어 제 공로처럼 만들어 속인 것 때문에 그것으로써 죄를 다스린다 하오면, 순신인들 또한 무슨 변명이 있사오리까. 그러하온데 세상에 완전무결한 이(全德之人)를 제하고는 저와 남이 상대할 적에 남보다 높고자 하는 마음을 품지 않은 자가 적사옵고, 또 어름어름하는 사이에 어쩌다가 잘못되어지지 않는 이가 드문 것이오매, 특히 윗사람은 그 저지른 일의 크고 작음을 살펴 경하고 중함을 가려서 처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옵니다. 대저 장수된 자는 군사와 백성들의 운명을 맡은 이요, 또 국가의 편안하고 위태함이 달린 사람이라 그 소중함이 이와 같으므로, 옛날 제왕이 국방 책임을 맡기고 특별히 은전과 신의를 보이며, 큰 허물이 있지 않으면 간곡히 보호하고 안전케 하여 그 임무를 다하게 하였던 것이온 바, 과연 거기 큰 뜻이 있사옵니다.(하략)”  그의 우국충절에 절로 고개를 숙이며, 이 시대의 진정한 신구차를 그리워한다./ *신구차 : 남의 죄가 없음을 사실대로 들어서 변명하여 구해주는 것/ 시작노트: 임진왜란은 선조(宣祖) 25년(1590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으로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보다 몇 해 전에 이미 정탁은 일본의 침략 계략을 예견하고 경고했다. 원균의 모함에 휘말려 처형 직전까지 갔던 것을 정탁은 이순신을 구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선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정탁은 이순신 외에도 많은 인재를 천거했거나 신분에 어려운 일을 당한 인물들을 지원하는 올곧은 신하였다.(daum 2010)

 

  정탁(李舜臣을 謀陷에서 求함/ 藥圃 鄭琢의 上疏文(2)/ 김영진 시인| 예천신문 | 2010.04.30 08:53/ 약포의 상소문이 하도 절절한 명문장이라 함부로 논하지 못하겠기에 계속 읽어나가고 싶다.(전회에서 이음)/  “대체로 보아 인재란 것은 나라의 보배로운 그릇이라, 비록 통역관이나 회계 맡은 사람에 이르기까지라도 진실로 재주와 기술이 있기만 하면 모두 다 사랑하고 아낌이 마땅하옵거늘, 하물며 장수의 재질을 가진 자로서 적을 막아내는데 가장 관계 깊은 이에 대하여 오직 법률로만 따지고, 조금도 용서함이 없을 수가 있사오리까.순신은 진실로 장수의 재질을 가졌사옵고, 또 한 해 전 과육전에 그 재주를 겸비하여 못하는 일이 없사온 바, 이러한 인물은 과연 쉽사리 얻지 못할 것일뿐더러 변방 백성들의 의지하는 바요, 또 적들이 무서워하는 사람이온데,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 하여 조금도 용서할 도리가 없다 하고서···(중략)···끝내 큰 벌을 내리는 데까지 이르게 하오면, 앞으로도 다른 모든 공로 있는 자들도 스스로 더 애쓰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대저 감정을 품은 원균과 같은 사람까지도 또한 스스로 편안히 있지 못할 것이오며, 서울·시골 없이 모든 인심이 해이해질 것이매···(중략)···바라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 문초를 특감해 주시와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 있게 하시오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 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은혜를 갚으려는 뜻이 반드시 저 명현(名賢)만 못하지 않을 것이온 바, 우리 성상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키심에 공로를 세울 신하가 어찌 오늘 죄수들 속에서 일어나지 않을 줄 아오리까.(중략) 어리석은 신하의 한 가닥 소원이 혹이나 성은을 입사와 성공되기를 간곡히 바라마지 않음에서 이에 감히 번거로움을 무릅쓰고···(중략)···변변치 못한 글월로 갖추어서 올리옵고 밝으신 하명이 있사옵기를 간절히 바라오며···(중략) 신이 독감으로 누운 지 이미 스무 날이 지났으나 아직 일어나지 못하와 몸소 궐 아래 나아가 아뢰옵지 못하옵고, 삼가 상소문을 갖추어서 경솔히 두려움을 무릅쓰고 존엄하신 어전에 황감히 나서게 되오니 더욱 목숨 가질 바를 알지 못하옵니다. 저버림이 없이 은혜로운 통촉이 있사옵기를 바라옵니다.” 당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에 모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칼을 무서워하지 않은 약포의 기개 앞에 머리를 숙인다. 그런 분이 살던 예천에서 태어났다는 게 자랑스럽다./ 시작노트: 이 상소문에 따라 이순신은 구제되었고, 권율 장군의 막하에서 백의종군하고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상소문은 선조를 감복시킨 명문장으로 널리 읽히는 글이다. 임진·정유 두 왜란 때 나라에 끼친 업적은 후세에 귀감이 되기에 마땅한 것이다.(차항은 백병구(白炳龜) 선생의 글을 많이 참고했음.)(daum 2010)

 

  정탁(壬辰倭亂의 숨은 策略家) : 김영진 시인| 예천신문 | 2010.04.14. 10:20/ 임진왜란의 숨은 책략가/ -약포 정탁의 애국충정 / 김영진 시인(보문면 출생)/ 약포는 임진왜란 3년 전에 왜구의 침략을 예견하고 조정에 군비 강화를 역설했다. 그의 예견대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령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피난길을 호위했고, 조정의 불화에 나라가 위급한데 당파 간에 헐뜯고만 있느냐며 힐책하는 애국충정을 보였다.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아 국문을 당해 처형의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았다. 이순신은 해전과 육전에 능한 훌륭한 장수라며 나섰다. 이런 인물은 쉽지 않아 적이 무서워한다고 했다. 아무리 죄명이 무겁다고 해도 이순신의 공과 허물을 비겨보지도 않고, “앞으로 더 큰 공을 세울 만한 능력이 있고 없음도 생각하지 않고, 또 그간 사정을 천천히 살펴볼 여유도 없이 끝내 큰 벌을 내리시면, 공 있는 자와 능력 있는 자들은 스스로 국가를 위해서 더는 애쓰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인재를 위해 자신에의 모함도 생각하지 않고 올린 상소에서 그의 우국충정을 엿볼 수 있다. 이 상소로 이순신 장군은 살아남아 왜구를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으니, 정탁의 인재를 가려내는 형안이 대단했다. 그는 많은 인재를 천거한 충신이다. 그는 노년에 고향 예천 고평동으로 돌아와 `귀거래사'를 읊었다. “어려울 때를 구제하려고 글 배웠는데/ 이 풍진 세상을 분주히 돌아다닌 지 몇 해던가/ 7년 대란에 한 가지 계책도 없이/ 백발이 된 몸으로 고향을 찾으니 부끄럼만 남네.”/ **시작노트: 임진왜란은 선조(宣祖) 25년(1590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으로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보다 몇 해 전에 이미 정탁은 일본의 침략 계략을 예견하고 경고했다. 원균의 모함에 휘말려 처형 직전까지 갔던 것을 정탁은 이순신을 구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선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정탁은 이순신 외에도 많은 인재를 천거했거나 신분에 어려운 일을 당한 인물들을 지원하는 올곧은 신하였다(daum 2010)

 

  정탁(丁酉再亂 때 죽음 무릅쓰고 上疏…李舜臣 救해 내 : 文化解說師와 함께하는 慶北의 再發見 - 45.醴泉 정충사 - 藥圃 鄭琢 先生) [記事] : 예천군 예천읍 고평에는 조선의 명재상 약포 정탁(鄭琢:1526~1605) 선생의 초상을 모시는 정충사(靖忠祠)가 있다. 약포 선생은 마지막 여생을 이곳 고평에서 보냈는데, 고평은 내성천이 물길보다 높고 넓은 들을 향해 생긴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은 조선 왕조 때 약포 선생이 임란을 수습하고 낙향해 살던 곳으로 그때는 높은 선비가 산다하여 '고사평'이라고 전해진다. 예천군청 이재완 학예연구사와 약포 정탁 선생의 15대 종손인 정경수 씨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경세제국의 명재상이었던 약포 대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정충사'를 찾아 당시를 회상해 본다. 약포 선생은 어린 시절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써 행하고 지조가 맑아 50여년을 관직에 있으면서 단 한 치의 실수도 없었으며, 극심한 당쟁 속에서도 초연했고, 포용력이 있어 동인에 속하면서도 남인의 영수인 윤두수와도 교분이 두터웠던 인물로 조명받고 있다. 그는 명종 13년(155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임금에게 간쟁이나 논박하는 일을 맡은 문관인 정언으로 활동하다 교리(정5품 혹은 종5품 관직)로 승차해 춘추관 기주관을 겸직하며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선조 14년(1581) 대사헌이 되었으나 정인홍, 박광옥 등과 뜻을 달리해 이조참판으로 전임되기도 했다. 이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이듬해 다시 대사헌에 임명돼 선조 22년(1589) 우찬성으로 사은사가 되어 재차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임란 직전 대명관계에 교두보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임란 중 좌찬성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모셨으며, 선조 27년(1594) 우의정이 되어 성웅 이순신, 의병장 김덕영 등의 장수를 천거했다. 특히 정유재란 때는 옥중의 이순신을 신원(죄가 없음)하는 상소를 올려 죽음을 면하게 한 장본인으로 후세에 더 잘 알려졌다.  이재완 예천군 학예연구사는 당시 약포는 상소문에 "이순신은 진실로 장수의 재질을 지녔고 해전과 육전의 재주를 겸비했습니다. 이러한 인물은 쉽게 얻지 못할 뿐더러 백성들의 의지하는 바가 크고 적이 무서워하는 사람이옵니다. 만일 죄명이 엄중하여 조금도 용서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공과 허물을 서로 비겨볼 만한 점도 묻지 않고, 앞으로 더 큰 공을 세울만한 능력의 유무는 생각지 않으며 그간 사정을 천천히 살펴볼 여유도 없이 끝내 큰 벌을 내린다면, 공있는 자와 능력있는 자들은 스스로 국가를 위해 더 이상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임금에게 주청했다고 한다. 이후 이순신은 백의종군하여 명량대첩에서 대승을 거둬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벼슬을 물러나 향리로 돌아온 그는 고평동약을 만들어 사회 풍교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고 고평들을 개척해 향토 주민의 복지증진에 힘을 쏟았다. 약포 선생은 선조 37년(1604) 호성공신으로 서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도정서원과 정충사에 모셔지고 있다. 약포 선생은 후대에 '임진기록' 등 임진왜란 연구의 중요한 자료를 남겼으며,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扈從)한 공으로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됐다. 같은 해 9월 조정으로부터 9월 도상(圖像)이, 11월에 도상 사유가 본가에 하사되었으며 이 초상은 현재 보물 제487호로 지정됐다.

 

  이 초상은 정탁이 79세 때의 것으로 한 인물의 생생한 개성적 면모와 공식적인 초상의 엄숙성이 함께 살아 있는 조선 중기 공신도상(功臣圖像)의 대표적 전형으로 전해지고 있다. 흐르는 듯 유연한 단령의 윤곽선, 명확한 칠분면의 얼굴 모습, 자세에 있어서도 칠분면의 의도적 과장에다 팔꿈치까지 올라온 교의 손잡이, 족좌대 위의 팔자로 벌린 발이며 공수한 옷소매 사이의 흰 속옷선, 화려한 색채의 흉배 등 조선 중기 공신도상의 전형적 특징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하다. 조선 전기 공신도상의 강건하고 힘찬 분위기가 보다 세련되고 장중한 양식으로 변화되었으나 내포된 힘을 잃지는 않았다. 80세에 가까운 백발노인의 정탁 초상은 죽음을 무릅쓴 상소를 올려 이순신의 목숨을 구해 낸 기개가 서려 있으면서도 사려 깊었던 한 인물의 품격을 전해주는 듯하다. 초상의 배경을 빈 공간으로 두었던 전기와는 달리 바닥에 채전(모직물에 색을 입힌 것)을 그려 넣어, 대상인물이 들어앉은 공간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하고 있으며, 채전의 화려한 색채와 문양으로 인해 장식적인 효과와 함께 화면에 생동감과 활기 또한 불어넣고 있다. 정충사에는 약포 선생과 관련된 유고 및 문서들이 보물 제494호로 지정돼 보관되어 있으며 진본은 모두 경북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 문서들은 임진왜란 때 좌찬성으로 선조를 호종(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던 일)해 의주까지 갔고, 명나라 사절을 영접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호종공신에 오른 정탁(鄭琢:1526~1605)의 수필초고, 교지, 녹권 등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도 약포의 비범함 알아보고 힘 합쳐 임진왜란을 극복하였다. 정충사는 약포 정탁 대감의 15대 종손인 정경수 씨가 고향에 내려와 9년째 관리를 해 오고 있다. 정씨는 약포 할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약포 할배는 약관시절 겸암 류운룡 선생(서애 류성룡의 친형)이 약포가 장차 국가에 공헌할 큰 인물인 것을 알고 있었답니다. 그의 아우인 서애 대감은 약포보다 16살 어리지만 약포 선생의 인물됨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알고 아우에게 약포의 비범함을 알려주기 위해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늦게 아우인 서애가 보는 앞에서 밝은 낮에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가는 글씨로 편지를 써서 하인에게 주고 이 편지를 고평 약포에게 갖다 드리고 그 답장을 받아서 오늘밤까지 돌아오라 이렇게 일렀답니다. 아우인 서애 대감이 "형님 그렇게 가는 글씨로 된 편지를 등촉을 아무리 밝혀도 읽기조차 힘들 텐데 답장까지 받아 오라고 하시니 이상한 분부이십니다."하며 형님 겸암에게 말하니 "약포는 밤중이라도 그 편지를 알아 볼 것이며 답장도 쓸 것일세"하며 빙그레 웃더랍니다.

 

  고평에 갔던 하인이 답장을 받아오자 겸암은 "약포가 내 편지를 받아 어떻게 하더냐"고 물으니 "고평에 도착하니 해가 넘어가서 어두운데 방 가운데서 촛불도 켜지 않고 편지를 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이 답장을 써서 주었다"고 대답하니 옆에 있던 서애가 약포의 초인한 인재임을 깨닫고 더욱 친분을 더해서 그 어려웠던 임진왜란을 같이 손을 잡고 헤쳐 나갔다고 합니다.(장석원 記者 慶北日報 2010-11-05)

 

  정탁(鄭琢]) : 출처: 브리태니커/ 1526(중종 21)~1605(선조 38)/ 조선 중기의 문신/ 정탁 :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증조부는 현감 원로(元老)이며, 아버지는 이충(以忠)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그 뒤 전적·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했다. 1568년(선조 1) 교리로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직,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조정랑·의정부사인·응교를 거쳐, 1574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도승지·예조참의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581년 이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그해 진하사(進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뒤 예조·병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호종, 영변(寧邊)에 이르러 왕자이사(王子貳師)로서 세자를 따라 이천(伊川)으로 갔으며, 이듬해에는 영위사(迎慰使)로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영접했다. 1595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황정욱(黃廷彧)을 구하려다 탄핵을 당하여 면직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몸소 전장에 나가 사기를 돋우려 했으나 왕이 그의 연로함을 들어 만류했다. 1599년 관직을 사퇴했다가 이듬해 좌의정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판중추부사·영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치사(致仕)했다.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경사(經史)·천문·지리·상수(象數)·병법 등 다방면에 능통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을 천거했으며, 이순신이 옥에 갇혔을 때에는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했다. 저서로는 〈약포집〉·〈용만문견록 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예천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daum 2010)

 

  정탁 : 약포 정탁(鄭琢)선생의 영정,보물제487호 (청주정씨)/ 지난주, 2010년 12월 14일 (화)/ 정탁(鄭琢) 약포영정 - 약포 정탁(鄭琢) 선생의 영정, 보물 제487호 鄭琢. 본관은 청주(淸州). 字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그 뒤.../ cafe.daum.net/emaeil(daum 2010)

 

  정탁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藥圃 鄭琢의 程朱學 수용 양상/ 3달전, 2010년 9월 3일 (금)/ 藥圃 鄭琢의 程朱學 수용 양상/ 金洛眞( 진주교육대학교 도덕교육과 교수 및 남명학연구소 특별연구원) )/ <국문초록> 鄭琢은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이자 관료였다. 그는 이황에게서 心學의 요체를 배워 스승을.../ cafe.daum.net/CHEONGJU/ 청주정씨(daum 2010)

 

  정탁 : [한국의 혼 樓亭 .14] 예천 호명면 약포(藥圃) 정탁(鄭琢) 읍호정/ 작년, 2009년 1월 17일/ [한국의 혼 樓亭 .14] 예천 호명면 약포(藥圃) 정탁(鄭琢) 읍호정 나라걱정 잠 못드는 老臣의 충정 고이 서려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좌·우의정 두루 거치며 45년간 국가 경영 신명 임진왜란 땐 류성룡과 함께 구국의 혼.../ cafe.daum.net/CHEONGJU/ 청주정씨(daum 2010)

 

  정탁 : 약포(藥圃) 정탁(鄭琢)선생| 자유게시판/ 현산 JHKIM/ 2009.06.18. 11:02/ 약포(藥圃) 정탁(鄭琢) 선생/ 모든 전쟁에는 침략자 쪽이든 침략 받는 쪽이든 영웅이 나오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 때의 영웅을 꼽으라면 누구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제일 앞자리에 올려놓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임란의 영웅으로서 제일 앞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도 그를 추천하고 온갖 모함으로부터 지켜준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를 추천하고 지켜준 인물이 바로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 선생이다. 선생은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이충(鄭以忠)의 둘째아들로 중종21년 (丙戌, 1526) 10월 8일 외향인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에서 출생하여 선조38년(乙巳, 1605) 9월 19일 예천군 예천읍 고평리 집에서 80세를 일기로 운명하셨다. 선생은 27세인 명종 7년(1552) 사마시에 합격하고, 33세인 명종 13년(1558) 문과에 급제하여 6조 중 5조의 판서와 좌.우의정을 역임했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시에는 동궁을 모시고 피난하는 중책을 담당하였다. 선조 37년(1604) 호종공신삼등(扈從功臣三等)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고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으며 사후 광해군 5년(1613)에는 위성공신(衛聖功臣) 1등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특히, 임란 중에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장군 및 충장공(忠壯公) 김덕령 장군에 대하여 죄가 없음을 아뢰어 구원함으로써 임란을 이끄는데 주력하였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풍수가에서는 두사충이 소점해준 집터와 신후지지에 얽힌 전설 때문에 더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집터와 신후지지에 얽힌 전설은 이렇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지리참모로 참전한 두사충은 벽제관전투 패전의 책임이 진(陣)을 잘못 쳤다는 이유로 모두 자신에게 돌아갔다. 참수될 위기에 처한 그는 우의정으로 접반사(接伴使)였던 약포 선생의 救命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선생 때문에 목숨을 건진 두사충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경북 문경군 가은읍 갈전리 아호동에 "이곳에 집을 지으면 대감과 같은 정승이 세 사람 더 나올 것이다"라는 예언과 함께 집터를 잡아주었다 한다. 선생은 두사충이 잡아준 현지를 답사하기 위해 평복으로 갈아입고 구종(驅從) 한 명만 데리고 문경새재를 넘게 되었는데 날이 어두워 주막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그곳에서 주막집 노파에게 선생이 새로 집을 지을 문경 인심을 물어보니 "앞으로 문경 백성은 아호동에 약포 대감 집을 짓는 부역을 해야 하므로 큰 곤욕을 치를 것이다"고 대답했다. 노파의 대답을 들은 선생은 자신의 집 때문에 백성들이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집 짓는 것을 포기하고 발길을 한양으로 돌렸다 한다. 그 후 선생이 낙향하여 두사충이 정해준 묘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서 반송아래까지 와서는 하인에게 “아직도 멀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하인은 손으로 갈전동 쪽을 가리키며 여기서부터 `백보이내`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갑자기 말이 뒷발질을 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화가 난 대감은 말을 죽여 노송 밑에 묻고는 "나의 터가 아니구나! "라고 탄식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장례기간 중 왕과 왕세자는 각각 승지와 궁관(宮官)을 보내 임조(臨弔)하게 하였으며 예관으로 하여금 각각 치제(致祭)하게 했다한다. 그리고 장수(葬需)까지 내려 귀후서관(歸厚署官)으로 치상(治喪)하게 하고 승문원관으로 하여금 제주하게 했다 한다.

 

  선생의 視力에 대한 逸話 : 약포 선생의 약관시절 겸암 선생은 일찍부터 약포가 장차 국가에 공헌할 큰 인물임을 알고 있었으나, 아우인 서애 선생은 잘 알아보지 못하였다 한다. 이를 안 겸암 선생은 아우에게 약포의 비범함을 알려주기 위하여 어느 날 오후 늦게 서애가 보는 앞에서 밝은 낮에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가는 글씨로 편지를 써서 하인에게 주면서 “이 편지를 고평의 약포에게 갖다 드리고 그 답장을 받아서 오늘밤까지 돌아오라”고 일렀다. 이에 서애가 “그렇게 가는 글씨로 된 편지를 등촉을 아무리 밝혀도 읽기조차 어려울 텐데 답장까지 받아 오라고 하시니 이상한 분부이십니다.”고 하자, 겸암은 “약포는 밤중이라도 그 편지를 알아 볼 것이며 답장도 쓸 것일세”하였다. 과연 밤중이 될 무렵 고평에 갔던 하인이 약포의 답장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온 하인에게 “약포가 내 편지를 받아 어떻게 하더냐?”고 겸암이 물으니, 이에 하인은 “고평에 도착하니 해가 넘어가서 어두운데도 방에는 촛불도 켜지 않고 편지를 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이 답장을 써 주었습니다.”고 대답하였다. 하인의 대답을 들은 서애는 약포가 초인한 인재임을 깨달았고 더욱 친분을 더했다고 한다. 위의 일화내용을 보면 선생의 시력이 대단했음을 느낄 것이고 겸암과 서애의 나이가 선생과 비슷하여 어릴 때부터 서로 친구사이가 아닌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선생과 겸암은 13살, 서애와는 16살이나 차이가 난다. 어른들 간의 13살, 16살 차이라면 그렇게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선생의 약관시절이면 이들은 아직 어린애다. 선생께서 약관에 막 접어들었다면 겸암은 7살이고 서애는 4살이다. 과연 이 나이에 겸암이나 서애가 선생의 인물됨을 판단할 수 있었을까?  좀더 올려 잡아 선생이 사마시에 합격하기 전의 26세로 치더라도 겸암의 나이 13살이고 서애의 나이 10살이다. 이 나이 역시도 그들이 선생의 인물됨을 판단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고 겸암이나 서애가 선생을 하늘 같이 알고 따를 나이지 친구로 지낼 나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23세에 배우자를 맞은 선생이 설마 어린 소년들과 어울려 다녔겠는가?(daum 2010)

 

  정탁(鄭琢) : 작 성 일 2003-10-27/ 홈페이지 링 크 첨부파일1 첨부파일2 □ 약전(略傳) 정탁(鄭琢, 1526∼1605)의 자는 자정(子精)이고 호는 약포(藥圃)이며 시호(諡號)는 정간(貞簡)다. 본관은 서원(西原)으로 예천(醴泉.../ nammyung.org(daum 2010)

 

  정탁(鄭琢) : 자 자정(子精), 호 약포(藥圃)/백곡(栢谷), 시호 정간(貞簡), 생졸년 1526 (중종 21) - 1605 (선조 38), 시대 조선 중기, 본관 청주(淸州), 활동분야 문신 > 문신/ [관련정보] [문과] 명종(明宗) 13년(15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위/ [생원진사시] 명종(明宗) 7년(155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66위/ [상세내용] 정탁(鄭琢)에 대하여 : 1526년(중종 21)∼1605년(선조 3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예천 출신. 현감 원로(元老)의 증손으로, 이충(以忠)의 둘째아들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성균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정언을 거쳐 예조정랑·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 도승지·대사성·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 정인홍(鄭仁弘), 지평 박광옥(朴光玉)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의 계청(啓請)으로 이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58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다시 대사헌에 재임되었다. 그 뒤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시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지리·상수(象數)·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하였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고 하였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특히, 이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李舜臣)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1599년 병으로 일시 귀향하였다가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오르고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약포집》·《용만문견록 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藥圃年譜, 淸選考(daum 2010)

 

  정탁(鄭琢) :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명종(明宗) 13년, 과거시험연도 : 1558 무오, 시험명 : 식년시(式年試), 등위 : 병과21(丙科21)/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정탁(鄭琢), 자 : 자정(子精), 호 : 약포(藥圃), 본관(本貫) : 청주(淸州)/ [이력 및 기타 사항] 시호 : 정간,호성공신/서원부원군(貞簡,扈聖功臣/西原府院君), 소과 : 1552(임자) 생원시, 전력(前歷) : 생원(生員), 관직(官職) : 좌의정(左議政)/ [가족사항] 부(父) : 정이충(鄭以忠), 조부(祖父) : 정교(鄭僑), 증조부(曾祖父) : 정원노(鄭元老), 외조부(外祖父) : 한종걸(韓從傑), 처부(妻父) : 반충(潘?)(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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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2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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