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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약포광장 조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21)
작성자장병창 @ 2016.07.14 20:33:09

  약포광장 조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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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탁 : 자료유형 : subMicroFilm/ 정리번호 :  05문000250/ 등록번호 :  MF0100063/ 제명 :  簡札/ 수급 :  鄭允穆/ 연대 :  1571-1605/ 소장처 :  정경수/ 소장처주소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내용 :  안부를 전하고 灸治가 잘 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 함. 李家의 문벌과 사람됨을 칭찬함/ 제어번호 :  1285924/ 발급 :  鄭琢/ 복본수 :  1/ 관련컨텐츠관계명 연결정보 : 상위MF 試券 外 , 국사편찬위원회, 2005(//www.history.go.kr/2014)

 

  정탁 : 자료유형 : subMicroFilm/ 정리번호 :  05문000251/ 등록번호 :  MF0100063/ 제명 :  簡札/ 수급 :  鄭允穆/ 연대 :  1571-1605/ 소장처 :  정경수/ 소장처주소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내용 :  아이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을 염려하고, 沙糖 등을 보냄/ 제어번호 :  1285925/ 발급 :  鄭琢/ 복본수 :  1/ 관련컨텐츠관계명 연결정보 : 상위MF 試券 外 , 국사편찬위원회, 2005(//www.history.go.kr/2014)

 

  정탁 : 자료유형 : subMicroFilm/ 정리번호 :  05문000254/ 등록번호 :  MF0100063/ 제명 :  簡札/ 연대 :  1576年(宣祖 9)/ 연호 :  萬曆 4年/ 소장처 :  정경수/ 소장처주소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내용 :  마침 歸奴가 있어 인편으로 안부를 전하는 편지를 보낸다는 내용/ 제어번호 :  1285990/ 발급 :  鄭琢/ 복본수 :  1/ 관련컨텐츠관계명 연결정보 : 상위MF 試券 外 , 국사편찬위원회, 2005(//www.history.go.kr/2014)

 

  정탁 : 자료유형 : subMicroFilm/ 정리번호 :  05문000258/ 등록번호 :  MF0100063/ 제명 :  詩文/ 연대 :  1599年(宣祖 32)/ 연호 :  萬曆 27年/ 소장처 :  정경수/ 소장처주소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내용 :  藥圃 鄭琢(1526-1605)이 쓴 시문을 나열해 놓음./ 주기사항 :  배접함./ 제어번호 :  1286041/ 발급 :  藥圃病夫/ 복본수 :  1/ 관련컨텐츠관계명 연결정보 : 상위MF 試券 外 , 국사편찬위원회, 2005(//www.history.go.kr/2014)

 

  정탁 : 자료유형 : subMicroFilm/ 정리번호 :  05문000261/ 등록번호 :  MF0100063/ 제명 :  記文/ 소장처 :  정경수/ 소장처주소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내용 :  약포 정탁(1526-1605)이 쓴 '可一齋新創記'/ 주기사항 :  배접함./ 제어번호 :  1286073/ 발급 :  藥圃病夫/ 복본수 :  1/ 관련컨텐츠관계명 연결정보 : 상위MF 試券 外 , 국사편찬위원회, 2005(//www.history.go.kr/2014)

 

  정탁 : 자료유형 : subMicroFilm/ 정리번호 :  05문000262/ 등록번호 :  MF0100063/ 제명 :  啓文/ 연대 :  1603年(宣祖 36)/ 연호 :  萬曆 31年/ 소장처 :  정경수/ 소장처주소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내용 :  藥圃 鄭琢(1526-1605)의 '致仕' 문제에 대해 예조에서 올린 계목./ 주기사항 :  배접함./ 제어번호 :  1286108/ 복본수 :  1/ 관련컨텐츠관계명 연결정보 : 상위MF 試券 外 , 국사편찬위원회, 2005(//www.history.go.kr/2014)

 

  정탁 : 자료유형 : subMicroFilm/ 정리번호 :  05문000263/ 등록번호 :  MF0100063/ 제명 :  詩文/ 소장처 :  정경수/ 소장처주소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내용 :  藥圃 鄭琢(1526-1605)이 지은 시문을 나열해 놓음. '次韻奉呈'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음./ 주기사항 :  배접함./ 제어번호 :  1286122/ 발급 :  藥圃病夫/ 복본수 :  1/ 관련컨텐츠관계명 연결정보 : 상위MF 試券 外 , 국사편찬위원회, 2005(//www.history.go.kr/2014)

 

  정탁 : 자료유형 : subMicroFilm/ 정리번호 :  05문000264/ 등록번호 :  MF0100063/ 제명 :  詩文/ 연대 :  1599年(宣祖 32)/ 연호 :  萬曆 27年/ 소장처 :  정경수/ 소장처주소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내용 :  藥圃 鄭琢(1526-1605)이 지은 시문. '奉次洪法寺壁上韻呈八谷令史'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음./ 주기사항 :  배접함./ 제어번호 :  1286143/ 발급 :  藥圃病夫/ 복본수 :  1/ 관련컨텐츠관계명 연결정보 : 상위MF 試券 外 , 국사편찬위원회, 2005(//www.history.go.kr/2014)

 

  정탁 : 자료유형 : subMicroFilm/ 정리번호 :  05문000269/ 등록번호 :  MF0100063/ 제명 :  禮曹立案/ 연대 :  1776(영조52)/ 소장처 :  정경수/ 소장처주소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내용 :  정탁의 후손들이 정탁의 제사승계를 놓고 上言을 올려 봉사자를 가려줄 것을 요청하자 예조에서 정탁의 仲子 允偉의 후손이 제사를 봉행할 것을 명시하고 이를 입증한 문서/ 제어번호 :  1286482/ 복본수 :  1/ 관련컨텐츠관계명 연결정보 : 상위MF 試券 外 , 국사편찬위원회, 2005 (daum 2014)

 

  정탁 : 예천이 낳은 조선의 명재상 약포 정탁. 이순신을 구하다~!!약포.../ 2014.07.26/ 5조판서, 3정승을 역임하다.(이조판서 3번) 약포는 관향이 청주(淸州)이다. 청주정씨는 서원(西原)정씨라고도 한다.../ cafe.daum.net/jjmkssm15... 이순신을 배우..  | 댓글 22(daum 2015)

 

  정탁 : 약포(藥圃)대감에 얽힌 일화(逸話), 1) 불을 켜지 않은 밤에도 편지를 쓰는 시력(視力) : 약포(藥圃)대감의 약관 시절 겸암 선생(謙菴 柳雲龍)은 일찍부터 약포가 장차 국가에 공헌할 큰 인물인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의 아우인 서애 대감(西崖 柳成龍)은 약포보다는 16년이나 손아래이면서도 약포 선생의 인물됨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낌새를 알고 아우에게 약포의 비범함을 알려 주기 위하여 어느 날 저녁 아우인 서애가 보는 앞에서 밝은 낮에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가는 글씨로 편지를 써서 하인에게 주면서 이 편지를 고평(예천읍)에 있는 약포에게 갖다 드리고 그 답장을 받아서 오늘 밤까지 돌아오라 일렀다. “형님 그렇게 가는 글씨로 된 편지를 등촉을 아무리 밝혀도 읽기조차 힘들 텐데 그 답장까지 받아 오라고 하시니 이상한 분부이십니다.” 하며 서애가 말하니 겸암은, “약포는 밤중에라도 그 편지를 읽어 볼 것이며 답장도 쓸 것일세.” 하며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과연 새벽녘에 고평에 갔던 하인이 약포의 답장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온 하인에게 겸암은, “약포가 내 편지를 받아 어떻게 하더냐?” 하고 물으니, “고평에 도착하니 해가 넘어가서 어두운데 방 가운데서 촛불도 켜지 않고 편지를 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이 답장을 써서 줍디다.” 라고 대답하는 것을 들은 서애는 약포가 초인(超人)한 인재임을 깨닫고 더욱 친분을 더하여 그 어려웠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같이 손을 잡고 슬기롭게 헤쳐 나갔다고 한다. 2) 도량(度量)이 넓은 시(詩)에 콧대 꺾인 맏동서 : 약포(藥圃)가 젊었던 시절 그 맏동서 되는 사람이 아우 동서인 약포의 체소함을 얕잡아 보는 눈치가 있는 것을 안 그들의 장인되는 십독 반충(習讀 潘沖 - 용궁면 덕계리)이라는 분은 본래 지인지감(知人之感)이 있어 둘째 사위인 약포가 큰 그릇임을 알고 있는 터이기 때문에 맏사위에게 약포의 인물됨을 알려 주기 위하여 짐짓 모른 체 하고 있다가 하루는 갑자기 두 사위를 불러 앉히고 등잔불을 보고 일곱 자의 시(詩)를 지으라고 하였다. 맏사위가 먼저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 “흰 용이 구슬을 물고 강을 건너온다.(白龍含珠渡江來) 흰 용은 솜으로 된 심지, 구슬은 불꽃, 강은 접시를 상징한다.” 묵묵히 맏동서의 시를 들여다보고 앉았던 약포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모든 나라의 성안엔 한 나라의 깃발이 꽂혔다.(萬國城中揷漢幟) 모든 나라 성안… 기름이 담겨진 접시 속 깃발… 심지에 불이 붙어 펄럭이는 모습” 그윽히 아우동서가 지은 시를 들어다 보던 맏동서는 깜짝 놀랐다. 기름이 담겨진 조그만 접시를 자신은 한 개의 강(江)으로 밖에 못 보는데, 아우동서인 약포는 접시를 천하(天下)로 보는데는 그 도량과 포부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그만 질려버려서 그 다음 부터는 아우동서인 약포를 마음속으로 존경(尊敬)하며 따랐다고 한다. 3) 큰 인물임을 알아맞춘 명(明) 나라의 관상사(觀相師) : 약포가 체약(體弱)하고 키도 매우 작았다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명(明)나라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의 일이다. 천자(天子)를 만나러 궁중(宮中)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키가 너무 작아서 초라하게 보일까 염려되어 신을 한 치 정도 높여서 본래의 키보다 크게 하여 천자를 배알했다. 천자 옆에는 명나라 최고의 관상(觀相)을 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약포를 보고는 “조선 사신으로 온 저 사람의 키가 한 치만 낮았더라면 재상(宰相) 감인데 아깝구나.” 하였다. 이 말을 귓전으로 엿들은 약포는 그 다음 날 명(明) 나라 궁중에 들어갈 때는 높였던 뒷굽을 다시 낮추어 본래의 키대로 들어갔더니, 어제 그 사람이 무릎을 탁 치면서,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과연 조선에서 온 정탁(鄭琢)은 큰 인재임이 틀림없구나” 하더라는 얘기가 전하고 있다. 4) 꿈에서 얻은 용(龍)의 알 : 약포(藥圃)가 태어나기는 용문면 하금곡리인데, 고평리에 새로 집을 짓고 우물을 팠으나 웬 일인지 아무리 깊게 파도 물이 나기는커녕 한 방울도 비치지 않았다. 며칠동안 애를 쓰다가 낮에 잠이 들었는데, 꿈에 용이 꿩알만한 돌을 주면서 “이 알을 파던 우물 속에 넣으면 물이 날 것입니다.” 하였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용문면(龍門面) 금당실(金塘室)에 볼일이 생겨서 살던 옛 집터에 들렸더니 뜻밖에도 얼마 전 꿈에서 용이 주던 알처럼 생긴 돌이 눈에 띄었다. 약포는 그 돌을 도포소매에 집어넣고 고평으로 돌아와서 꿈에 용이 시키던 대로 파던 우물에 집어넣으니 이게 웬 일이냐! 그 돌이 우물 밑에 떨어지자 한 방울의 물도 비치지 않던 우물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현재 예천읍 고평2리에 있는 ‘중간샘’이라는 우물이 바로 이 우물이라고 전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 돌은 남아 있어 해마다 한 차례씩 우물을 헹구어 내고 우물 속에 들어 있는 이 돌을 닦아서 고이 우물에 모셔 넣는다고 한다. 5) 약포 대감의 체온(體溫) : 약포는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냉돌방에서 이불을 덮지 않고 잠을 잤다고 한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서애(西崖)가 볼 일이 생겨 약포와 하룻밤 자게 되었다. 한겨울철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방(冷房)에 더구나 이불도 없이 누웠으니 춥기보다는 이가 덜덜 떨려서 한참도 배기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약포는 서애에게 자기와 자리를 바꾸자고 하였다. 얼마 후 서애가 누운 자리가 차가워지자 약포는 또 자리를 바꾸자고 하였다. 번번이 약포가 누웠던 자리는 따뜻하였다. 이렇게 자리를 세 번씩이나 바꾸어 가며 길고 긴 겨울밤을 이불도 없는 냉방에서 따뜻하게 새웠다고 한다. 6) 메기북 : 메기가죽으로 만든 이 북은 크기가 지름 35cm, 둘레 119cm, 테의 너비 18cm이고, 무게가 2.3kg으로 가볍다. 이 북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해 온다. 300여 년 전 도정서원(道正書院) 벼랑아래 소(沼)가 있었는데, 이 소 위에 송아지를 자주 매어 놓고 일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송아지가 없어져 주위를 살펴보니 송아지의 꼴삐가 이 소(沼)에 내려가 있었다. 이 소에는 전부터 큰 이무기가 살고 있다고 전해와 이 이무기가 잡아먹은 것으로 생각하고 죽은 송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며칠후 큰 낚시를 만들어 이 소에 담구어 두었다. 얼마가 지나자 큰 물고기가 물렸다고 생각되어 온 동네사람들이 모여 몇 시간을 씨름한 끝에 고기를 건져 올려놓고 보니 어마어마한 큰 메기였다.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메기였으니 크기가 짐작이 갈 만하다. 이 메기를 잡아 놓고 보니 통쾌감도 느끼고 겁이 나기도 하였으나 이왕에 잡은 고기를 살릴 수 없어 가죽을 벗겨 영원히 기념하고자 북을 만들게 되었다. 이 북이 지금까지 보관돼 오면서 재미있는 일화를 남겼다. 100년 전쯤 도정(道正)에 살 때 가족이 32명이 되어 식사시간이나 가족의 모임이 있을 때에는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따로 부르지 않고 이 북을 쳐서 모이게 하였다고 하니 북의 쓰임도 다양(多樣) 했던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보관해오면서 찢어지거나 흠 없이 원형 그대로 조상들이 물려준 물건을 지금까지 정성껏 잘 보존 관리하고 있다. 정탁(鄭琢, 1526∼1605)의 자(字)는 자정(子精), 호(號)는 약포(藥圃)이다. 조식(南溟 曺植), 이황(退溪 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사(經史), 지리(地理), 병서(兵書)에 밝고 믿음과 지조가 높아 50여 년간 벼슬길에 올랐으며, 5조판서(五曹判書)와 좌·우의정(左·右議政)을 지낸 명재상으로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등 명장(名將)을 천거하여 나라를 구하게 하였으며, 특히 충무공(忠武公)을 사형 직전에 구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케 한 뒤 명량대첩의 큰 공을 세우게 하였다. 사후(死後) 1613년(광해군 5) 위성공신(衛星功臣) 1등에 녹훈(錄勳)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 되었다. 이 곳과 연계하여 볼 수 있는 볼거리는 약포 선생의 유물(遺物)을 보존·전수하기 위하여 1980년에 건축한 정충사(靖忠祠)가 있다. 이 사당에는 약포영정(藥圃影幀 - 보물 제487호)이 있고 유물로는 약포유고 및 문서(藥圃遺稿·文書 - 보물 제494호) 등을 소장(所藏)하고 있다. 정충사 건너편 호명면 황지리(도정골)에는 도정서원(道正書院)과 약포사당(藥圃祠堂 - 문화재자료 제142호)이 울창한 산림(山林) 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아래 내성천변(乃城川邊)엔 맑고 넓은 백사장(白沙場)이 펼쳐져 있다.(醴泉邑홈페이지 2013)

 

  정탁(스토리텔링 人物列傳 .12] 성석제의 숨은 샘물처럼 世上에 德을 베푼 宰相 - 藥圃 鄭琢 스토리 (醴泉) [記事] :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은 조선 중기 대학자이면서 명재상으로 유명하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극심한 당쟁 속에서도 초연하고 지조가 곧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직전 대명관계에 교두보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선조 27년(1594) 우의정에 오른 그는 성웅 이순신, 의병장 김덕영 등 뛰어난 장수를 천거하기도 했다. 또한 옥중의 이순신을 신원(죄가 없음)하는 상소를 올려 죽음을 면하게 한 일화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약포 정탁 스토리는 정탁과 두사충의 명당 일화, 그리고 이순신의 목숨을 구한 스토리를 주요 소재로 삼았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 명나라의 총사령 이여송은 두사충(杜師忠)이라는 지리참모를 대동하고 조선 땅에 들어왔다.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라는 직함의 지리참모는 전장의 지리와 형세를 분석하고, 승리를 할 수 있는 진세를 펼 수 있는 장소를 선정하도록 조언하는 직임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풍수지리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1593년 1월 평양성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면서 승기를 잡았으며, 여세를 몰아 개성까지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두사충은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명군은 패주하는 일본군을 얕잡아보고 승리를 서두르다가 한양 근교의 벽제관(碧蹄館) 싸움에서 패배를 당했고, 이여송은 말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 벽제관 패전의 원인을 묻는 과정에서 군진을 잘못 전개한 탓으로 돌려 두사충을 참수에 처하자는 의논이 장수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때 조선 조정을 대표하여 명군을 맞이했던 접반사 약포 정탁이 두사충의 능력을 아까워한 나머지 힘을 다해 죄를 감해 줄 것을 청원하여 두사충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두사충은 생명을 살려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정탁에게 천하명당인 집터(陽宅)와 묘터(陰宅) 하나씩을 잡아주며 말했다.  “대감께서 제가 정해드리는 집터에 집을 지으시면 후손 중에 대감과 같은 정승이 반드시 셋은 나올 것입니다. 대감이 돌아가신 후 무덤(身後之地)이 될 곳은 연주패옥혈(連珠佩玉穴)로서 구슬이 꿰어진 줄 가운데의 옥 모양의 천하명당입니다.” 후일 정탁은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에 있는 집터를 찾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만인지상이라는 정승이었지만, 기밀을 유지할 겸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평복 차림으로 구종 하나만을 데리고 갔을 뿐이었다. 문경새재를 넘어 주막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 정탁은 주막 주인인 노파에게 요즘 문경지방의 민심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노파는 “지금 문경 백성들은 정탁이라는 한양의 고관대작이 하필이면 이 먼 곳까지 와서 집을 짓는다 어쩐다 하여 노역에 끌려나가 시달리지나 않을지 크게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정탁은 구종에게 말머리를 돌리게 했고, 집터를 포기한 채 한양으로 돌아갔다. 두사충이 조선의 팔대명당 가운데 하나라며 잡아준 묘터는 지금의 문경시 동로면에 있었다. 1599년 일흔네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의 묘소를 살펴본다는 이유로 고향에 돌아온 정탁은 병이 생겨 다시 한양 땅을 밟지 못했다. 병세에 어느 정도 차도가 있자, 정탁은 말을 타고 구종 하나를 데리고 예천 고평리 집에서 멀지 않은 문경 땅으로 향했다. 두사충은 평생 정탁을 따라다니던 구종에게 “문경 동로의 생달리에 가면 묵은 반송이 한 그루 있는데, 그 곳에서 여차여차한 방향으로 백 걸음 이내의 곳”이라고 위치를 가르쳐 준 참이었다. 일단 목적지 가까운 곳에 도착한 구종은 반송 아래에 앉아 잠시 쉬게 되었다.

 

  “천하명당이라는 그 자리가 도대체 어느 쪽이냐?”  정탁이 묻자, 구종은 여기서 얼마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그런데 구종이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말이 미쳐 날뛰며 발길질을 하는 바람에 구종은 말굽에 차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이에 정탁은 말을 죽여 소나무 밑에 묻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이곳은 내가 묻힐 터가 아니로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까지도 문경 땅 연주패옥의 명당자리는 정확한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전국 풍수지리가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후일 두사충은 조선에 귀화하여 당대 최고의 풍수지리가로 명성을 떨쳤다. 정탁은 공자와 주자, 퇴계에 이르는 정통 유학의 계승자로서 경학에 통달한 선비면서도 풍수에 관심이 있었다. 또 천문과 지리, 병법에 능통한 실천적인 학풍의 소유자였다. 지금의 예천군 용문면 하금곡리인 금당실의 외가에서 태어난 그는 아홉 살에 어머니 한씨를 여의고 열한 살에 아버지를 따라 조상 대대로 세거해 온 안동의 가구촌으로 갔다. 열세 살부터 산법(算法)과 천문 공부에 골몰했고, 삼촌에게 경학을 배웠으며 사서를 섭렵했다. 열일곱 살 때 당대의 거유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정통 성리학을 배웠다. 스물일곱 살 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서른세 살이 되던 해 겨울 문과에 급제하여 비로소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첫 벼슬로 그가 임명된 곳은 교서관이었다. 교서관은 경서의 인쇄나 국가 제사의 향과 축문, 각종 인장의 전각(篆刻)을 담당하던 기관이다. 사람들은 정탁을 두고 장차 정승이 될 신진 인재가 뜻밖에 한직에 배속되었다고 했지만, 당사자는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평소 남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던 당시의 영의정 이준경이 그런 정탁을 보고는 “이 사람은 기이하게도 암룡(雌龍·자룡)의 관상이니 나중에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벼슬길 초년에 정탁은 승진이 그리 빠른 편이 아니었다. 서른여섯 살이 되던 해 진주에 교수로 부임했을 때 정탁은 학문과 명성에서 스승인 퇴계와 쌍벽을 이루던 남명 조식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로써 정탁은 성리학의 진전을 이어받아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퇴계의 학문과 실천궁행의 도리를 설파하던 남명에게서 동시에 배운 몇 되지 않는 제자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남명은 정탁이 서울로 돌아갈 때 “빠른 말보다는 소를 끌고 가는 마음으로 평생을 일관하라”는 가르침을 주었고, 정탁은 타고난 겸허함에 신중함을 더해 꾸준히 학자와 관리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마흔 살에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의 청요직에 들어갔다. 마흔한 살에는 예조정랑, 홍문관 부수찬,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중요한 건 그 무렵부터 정탁이 임금의 지근거리에서 삼십여 년간 경연(經筵)에 참여하여 임금의 학문과 정책 결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생 후반기에는 벼슬이 순조로워 6조 판서 가운데 예조, 형조, 이조, 병조 등 다섯 조의 판서를 지냈다. 특히 인사를 관장하는 이조판서를 세 번이나 역임했다. 생전에 좌의정과 우의정에 모두 임명되었고, 사후에는 영의정이 증직되었다. 정탁은 이조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다른 자리에 있을 때도 거듭하여 국가의 동량이 될 만한 이순신 같은 인재를 조정에서 등용하도록 적극적으로 진언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곽재우,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공을 세운 김덕령, 사명당 유정, 한백겸, 박명신 등 출중한 인재를 추천한 사람이 정탁이었다. 특히 1597년 3월 원균의 상소와 일본군의 모략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압송되어 나라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로 추국을 당하게 되었을 때 이순신에게 걸려 있는 혐의가 무고임을 변론하고, 전공과 능력을 감안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도록 극구 변호했다. 애초에 이순신을 국가를 지킬 인재로 천거했던 정탁이 이순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2차 국문을 저지함으로써 조선은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탁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백성들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될 기미를 보이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1600년 봄 일흔다섯 살의 나이에 좌의정에 임명되었다는 교지가 예천의 집까지 내려오자, 이전에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을 때처럼 간곡한 사직의 글을 올렸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무능하고 덕이 없으면서도 분에 넘친 은혜를 받은 신하로 낮추어 말했다. 하지만 성품이 온화하여 적이 없으며,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시비곡직을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옳은 방향을 찾아나간 인물이라는 평가가 훗날 정적들이 집필한 사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거듭된 사직소를 올려 마침내 사퇴 윤허를 받아 명예직인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일흔여덟 살에 영중추부사, 봉조하 등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 무엇보다도 고향과 주변의 산천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안식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때 마음의 풍경은 만년에 그가 쓴 시에 잘 드러나 있다. “고평의 푸른 들/ 해마다 아름다운 풀이 꽃을 피우고/ 다시 놓은 긴 다리가 있어/ 밝은 노을 떨어져 앞을 환히 비추는구나//  정탁은 여든 살이 되던 해 고향 집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 부고가 전해지자 임금은 몹시 슬퍼하며 사흘 동안 조회를 폐했고, 승지를 보내 부의를 내렸다. 한양의 백성들은 가게를 철시하고 거리에 나와 슬피 울었다. 이듬해 예천 남면 위라곡 언덕에 장사를 지냈으며, ‘청백하게 절개를 지켰으며 덕을 쌓음에 게으르지 않다’는 의미의 ‘정간(貞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정탁이 살았던 예천 고평리의 집과 위라곡의 무덤이 과연 명당일까. 그건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겸손과 남모를 실행으로 평생을 일관한, 푸른 풀밭을 적시는 숨어 있는 샘물 같은 존재였던 정탁은 자신이 살았던 곳과 죽어 묻힌 곳을 명당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고평리 마을에서 정탁의 호 ‘약초을 기르는 밭(藥圃)’ 같은 집 앞 푸른 텃밭에 샘물을 뿌리고 있는 촌로를 만났다. 그는 길을 묻는 내게 상추와 들깨를 마음껏 뽑아가라며 웃었다. 들깨 향, 상추 맛이 그토록 향긋하게 느껴진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嶺南日報 2011-08-31)

 

  정탁([不遷位 紀行 .50] 藥圃 鄭琢(1526∼1605년) [記事] : 약포(藥圃) 정탁(1526∼1605)은 서애 류성룡, 소재 노수신과 함께 ‘영남 3대가’로 불리며 학문과 경륜 면에서 최고의 인물로 칭송을 받았다. 특히 임진왜란 때 재상으로 큰 활약을 했던 명재상이자 대학자였던 약포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상수, 복서, 음양 등 여러 분야에 능했다. 병법도 깊이 연구했다. 벼슬길에 45년 동안 있었고, 요직은 두루 다 거쳤다. 6조 중 5조의 판서를 지냈고(이조판서는 세 번 역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로 벼슬을 마쳤다. 그리고 경연(經筵: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며 정치문제 언급)에 참여한 것이 40년에 이르렀는데, 충성을 다해 나라를 다스리는 훌륭한 계책과 의견을 개진했다. 임금도 약포의 인품과 학덕을 알기에 마음을 비우고 경청했다. 약포가 별세하자 임금(선조)이 칙사 예조좌랑 조정을 보내 제사 지낸 글(賜祭文)의 일부다. 약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 면모를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벼슬 자리 두루 두루 거쳤으나/ 여러 사람의 바람에 다 부합되었네/ 재상의 자리에 오르고/ 정권 핵심부서에 발탁되었지만/ 치우침도 기울어짐도 없어서/ 공정한 도리와 균형을 유지했고/ 과격하지도 부화뇌동하지도 않아서/ 훌륭한 명성 오래도록 누리었네/ 많은 관료들이 모범으로 삼았고/ 과인의 덕을 의지하여 이루었으니/ 물을 건널 때의 배와 같았고/ 가물 때 소낙비와 같았네/ 예전에 있었다고 들었던 것/ 오늘날 그것을 보았네.’  ◆충심어린 상소로 경각에 달린 이순신 목숨 구해 : 약포는 임진왜란 동안 사심 없는 충정으로 특히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고 모함에 빠진 걸출한 장군들을 구해내 왜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우게 함으로써 누란의 위기를 벗어나게 했다.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죽음 직전에 처했던 충무공 이순신을 구해낸 일은 그 대표적 공로로 꼽힌다. 1597년 3월, 이순신은 엄청난 전공에도 불구하고 당파 싸움 속에서 이런저런 모함과 음해로 인해 투옥되기에 이른다. 당시 임금도 오해 속에 이순신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이순신을 반대하는 세력의 기세가 높은 데다 임금의 감정도 더 악화할 수 있는 형국이라서, 누구도 이순신을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어 그의 목숨은 광풍 앞의 촛불 같았다. 약포는 이런 일을 그냥 모른 채 할 성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남의 억울한 일이 있으면 자신의 일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 해결하던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가 이순신이 목숨을 구하고 큰 공을 세워 나라를 구하게 한 ‘신구차(伸救箚)’이다. ‘인재란 것은 나라의 보배로운 그릇이라 비록 통역관이나 회계 맡은 사람도 진실로 재주와 기술이 있기만 하면 모두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마땅하거늘, 하물며 장수의 자질을 가진 자로서 적을 막아내는데 가장 관계 깊은 이에 대해서 오직 법률만 가지고 논하고 조금도 용서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순신은 참으로 장수의 자질을 가졌고, 또한 해전과 육전에 재주를 겸비해 못하는 일이 없는 바, 이런 인물은 쉽게 얻지 못할 뿐더러 변방 백성들이 의지하고 적들이 무서워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고 해서 조금도 용서할 도리가 없다 하고서 공로와 허물을 비교해볼 만한 점도 묻지 않고, 또 공로를 더 세울만한 능력이 있고 없음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리고 그간 사정을 찬찬히 살펴봄도 없이 끝내 큰 벌을 내리는 데까지 이르게 하면, 앞으로는 다른 모든 공로 있는 자들도 스스로 더 나아가지 않을 것이며, 능력 있는 자들도 또한 스스로 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일개 순신의 죽음은 아깝지 않으나 국가에 관계됨이 가볍지 않으니 어찌 우려되는 중대 사안이 아니겠습니까. …비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 문초를 특감해주어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있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은혜를 갚으려는 뜻이 반드시 누구 못지 않을 것입니다.’  ◆남의 억울한 일 보면 못 참는 성품 : 약포의 간절하고 충심어린 상소문 덕분에 다행히 임금이 마음을 돌리게 되고, 이순신은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 때 원균의 대패로 경상도와 전라도가 왜군에게 점령당하고 수군에 남은 배는 겨우 12척뿐이었다. 이순신은 거의 전멸 상태의 수군을 수습, 세계사에 길이 남을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회복했다. 이런 약포에 대해 이순신은 ‘나를 추천한 이는 서애요, 나를 구해준 이는 약포’라고 했다. 그리고 ‘무약포면 무충무공’이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이순신의 일 외에도 약포는 김덕령 장군이 사람을 죽인 일과 모함으로 옥에 갇혀 극형에 처해질 위험을 당했을 때, 나라를 위하고 장군을 아끼는 충정으로 상소문을 올려 선조 임금이 감형하라는 특명을 내려 석방하도록 했다. 특히 노수신, 이산해, 권율, 정언신 등 국가 최고위직 여러 인사들이 탄핵이나 옥사를 당했을 때도 약포는 억울함을 호소해 사면이나 감형하도록 했다. 당쟁이 극심한 상황에서 모함을 당할 수도 있는 이런 일들을 서슴없이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약포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들이다. 또한 임란 당시 세자를 도와 분조(分朝: 임진왜란 때 두었던 임시 조정으로 세자가 있던 곳)를 이끌면서 뛰어난 통찰력으로 당파와 귀천을 초월해 전국의 인재를 고루 찾아 천거, 국방력을 보충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곽재우, 김덕령, 박명현, 사명대사, 홍경신, 변홍달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약포는 원칙과 대의명분을 위해서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하는 강직한 면모와 함께 대범하고 바다처럼 넓은 도량을 지닌 인물이었다. 또한 천성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억울함을 풀어주는 성품이었다. 그래서 억울한 죄를 뒤집어쓴 사람 사이에 ‘약포공만 있으면 살 수 있다’라는 말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퇴계와 남명의 문하에서 수학 : 약포는 1526년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 외가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백담(栢潭) 구봉령과 함께 금사사(金沙寺)에서 공부했고, 15세 때는 중부(仲父) 정이흥에게 글을 배웠다. 17세 때(1542년)는 퇴계 이황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다. 약포는 남명 조식 문하에서도 공부를 했는데, 약포가 떠나는 날 남명이 그에게 “내 집에 소 한 마리가 있는데, 자네가 끌고 가게”라고 했다. 약포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 머뭇거리자 “자네의 언어와 의기(意氣)가 너무 민첩하고 날카롭네. 날랜 말이 넘어지기 쉬운지라 소처럼 더디고 둔한 것을 배워야 비로소 능히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므로 소를 주는 것이네”라고 말했다. 그 후 약포는 소의 지둔(遲鈍)함을 가르침으로 삼았고, 훗날 “평생 대과없이 국사를 비롯한 모든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남명 선생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술회했다. 1552년 성균관 생원시에 합격하고, 1558년에 대과에 합격해 교서관 정자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교서관 정자 시절, 향실(香室)에서 숙직을 하고 있을 때 수렴청정하던 실질적인 권력자 문정왕후가 불공을 드리기 위해 향실의 향을 내오라고 했다. 이에 약포는 “이 향은 종묘사직에 쓰는 물건이지 불사에 쓰는 향이 아니다”고 답하며 응하지 않았다.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 등 삼사(三司: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관직을 5년여 역임한 후 이조정랑, 예문관 직제학, 공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지내고 1595년 우의정에 올랐다. 1600년에 좌의정에 오른 후 두 번에 걸친 상소를 통해 사임을 허락받은 후 귀향, 예천(고평)에 터를 잡고 머물렀다. 약포는 별세하기 전 해인 1604년에 임진란 공적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임금은 충훈부 화사(畵師)를 예천에 보내 약포의 초상화(보물 제487호)를 그리게 하여 화상축과 교서축을 내려 보내고 그를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했다. 외교관으로 명나라에 수 차례 다녀온 약포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과 용사일기(龍蛇日記), 용사잡록(龍蛇雜錄) 등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글=김봉규 記者 嶺南日報 2012-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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