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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1,854 : 보문사...(부,예천군 출향인 6.1지방선거 당선자 2명(구자민,이지연), 28일 더 확인됨...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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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사(佛紀 2553年 부처님 오신 날 普門寺 燃燈 法會 奉行) [記事] : 불기 2553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부처님의 은덕을 기리고 자비가 온 누리에 펼쳐지기를 바라는 봉축 연등법회가 2009년 5월 1일 오후 7시 학가산 보문사에서 봉행됐다. 봉축 법요식에는 김수남 예천군수, 장대복 군의회 부의장, 이현준 도의원, 남시우 예천군의원, 스님, 신도 등이 참여한 가운데 봉행됐다. 이날 법회에서 송재선 신도회장은 "불기2553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오탁의 삶 속에서 파묻혀 탐, 진, 치 삼독에 눈이 어두워 지혜를 잃어버린 저희들은 산 같은 죄업을 참회하고 기도하여 이 세상을 바른 신심으로 장엄하기를 발원한다고 개식사를 했다. 이날 법회에서 보문사 도문 주지스님은 "부처님 오신 날 밝히는 연등은 지혜를 밝히는 연등이기도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 아래 모두가 하나 됨을 나타내는 등이기도 하다"며 "모두가 상생과 화합의 가르침을 깨닫고 실천해 주길 바란다."고 봉축사를 했다. 김수남 예천불교연합신도회장은 "부처님의 넓고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여 이웃과 사회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불자가 되길 바란다."며 도청이전으로 지역의 발전과 군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을 확신한다며 신도님들의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삼귀의례를 시작으로 헌화, 찬불가, 반야심경, 법어, 봉축사, 봉행사, 발원문 등의 순서로 법요식이 거행됐으며 탑돌이와 마지막으로 연등띄우기 행사를 가졌다.(醴泉인터넷放送 2009-05-01)
보문사: 한국사론/ 朝鮮前期篇 > 4. 文化 > Ⅰ. 編纂事業 > 2 : 高麗朝의 史館과 史官 : 高麗時代에 편찬한 史書로서 傳存하고 있는 것은 三國史記와 三國遺事·帝王韻記·海東高僧傳뿐이다. 그러나 高麗는 初期부터 歷史를 담당한 기관으로 史館을 설치하고 歷史를 기록하는 官員으로 史官을 두어 날마다 일어나는 歷史的 사실을 기록하여 史藁(史草)를 작성하고, 임금이 사망하면 그 임금의 實錄을 편찬하고 기타 史書도 많이 편찬하였다. 新羅 이전의 史官制度는 기록의 미비로 알 수 없으나, 高麗太祖 王建이 泰封王 弓裔의 臣下로 있을 때 理性을 상실하고 사람을 잘 죽이는 弓裔가 어떤 날 王建을 보고 “卿은 어제 말에 왜 사람을 모아서 謀叛하려고 하였느냐”하니, 王建은 웃으면서 부인하였다. 때마침 掌奏 崔凝이 弓裔 옆에 있다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階下로 내려가 王建의 옆을 지나면서 낮은 목소리로 自服할 것을 권고하여 禍를 면하였다는 記事가 있다.(註 001 高麗史 卷 1, 太祖 1(總書)) 이 記事는 信憑性이 희박하나 掌奏 崔凝이 붓을 들고 弓裔王 옆에 있었다는 것은 믿어도 좋으며, 그것이 바로 史官의 임무다.
이러한 식의 史官은 新羅 時代에도 있었을 것이나 記錄의 미비로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高麗史 百官志 春秋館條에 의하면 高麗는 國初부터 國史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史館을 설치하고 監修國史·修國史·同修國史·修撰官·直館(直史館) 등의 史官을 두었다고 記錄되어 있다. 그러나 高麗太祖 建國 초기부터 이러한 制度가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史館은 中國에서도 唐나라 官制에 처음으로 보이는 것이다.(註 002 唐書 卷 46, 志 第36 百官志(史館)) 新羅와 泰封의 제도를 그대로 사용한 高麗建國 草創期에 있어서 史館制度만 唐制로 채용하였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高麗가 唐制를 채용하여 官制를 개혁한 것은 제6대 成宗時代의 일이다. 그러므로 史館도 成宗원년(982)에 唐制에 의하여 官制를 개혁할 때에 설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成宗 이전에 國史를 기록하는 史官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史館이 成宗時代에 설치되었다는 것뿐이다. 崔凝과 같이 임금 옆에서 붓을 들고 國史를 기록하는 史官은 成宗 이전에도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高麗는 成宗 때 史館을 설치하고 監修國史·修國史·同修國史·修撰官·直館 등 職을 둔 것 같은데, 監修國史는 原則的으로 門下府 侍中(首相)이 겸하는 것이나, 큰 編纂事業이 있을 때에는 글 잘하는 二品 이상의 文臣이 겸하기도 하고, 修國史·同修國史는 二品 이상의 文臣이 겸하고, 修撰官은 翰林院의 三品 이하의 官員이 겸하는 것이나 큰 編纂事業이 있을 때에는 翰林院 이외의 三品 이하의 文臣도 이를 겸하고 그 數는 제한이 없었다. 直館은 專任으로 八品의 文臣이 이에 임명되고 定員은 4명이었다. 다시 말하면 修撰官 이상은 兼職이요 直館 4명만이 專任인데, 直館은 史館의 실무를 담당하는 자로서 교대로 宮中에 宿直하고 時政을 기록하여 史藁를 작성하는 것이 그 임무였다. 그러므로 高麗前期의 史官은 주로 直館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高麗末期 忠烈王 34년(1308)에 史館을 文翰署와 합하여 藝文春秋館이라 하였다. 文翰署는 王命과 기타 國家의 모든 文翰을 지어 바치는 기관으로 高麗初期에는 泰封의 제도에 의하여 元鳳省을 설치하고 文翰을 담당하게 하였다. 뒤에 이것을 學士院으로 개칭하고 顯宗 때에 翰林院이라 하였는데, 忠烈王원년(1275)에 元나라의 압력으로 官制를 개혁할 때 文翰署라 한 것이다. 이때 즉 忠烈王 34년에 이르러 史館과 합하여 藝文春秋館이라 하고, 大詞伯(大提學)·詞伯(提學)·直詞伯(直提學)·應敎·供奉·修撰·注簿·檢閱을 두어 文翰과 國史를 兼掌하게 하였다.
忠肅王 12년(1325)에 이것을 다시 藝文館과 春秋館으로 분리하여 春秋館에 領館事·監館事(이상 首相兼), 知館事·同知館事(이상 二品이상 文臣兼)·充修撰官·充編修官·兼編修官(이상 三品이하 文臣兼)·供奉(正七品)·修撰(正八品)·檢閱(正九品)을 두었는데 供奉 이하가 春秋館의 실무를 담당한 專任 史官으로 定員은 供奉·修撰 각 1명, 檢閱 2명이었다. 그러므로 高麗末期에는 供奉·修撰·檢閱을 가리켜 史官이라 하였다. 그런데 恭愍王 5년(1356)에 反元運動을 일으킬 때 春秋館을 초기의 史館으로 還元하였다가 同 11년(1562)에 다시 春秋館으로 고치고, 恭讓王 원년(1389)에 藝文館과 합하여 藝文春秋館이라 하였다. 高麗朝의 實錄編纂 : 高麗에서 처음으로 實錄을 편찬한 것은 顯宗時代에 太祖로부터 穆宗에 이르기까지의 七代事蹟 36卷을 편찬한 것이다. 顯宗원년(1010)에 契丹의 침입으로 滿月臺의 延慶宮이 全燒됨에 따라 宮內에 두었던 歷代의 史籍도 다 타버렸다.
顯宗 4년에 先代의 역사를 편찬하기 위하여 參知政事 崔沆을 監修國史, 禮部?書 金審言을 同修國史, 禮部侍郞 周佇, 內史金人 尹徵古, 侍御史 黃周亮, 右拾遺 崔?을 修撰官에 임명하였다. 이것이 高麗史에 나타나는 최초의 史官의 임명이다. 高麗史 黃周亮傳에 의하면 그 후 이 사업은 黃周亮이 주가 되어 각처의 史料를 수집하여 太祖로부터 穆宗에 이르기까지의 七代事蹟 36卷을 편찬하였다. 高麗史 卷首 高麗世系의 論에 기록되어 있는 太祖實錄은 七代事蹟 중의 太祖事漬을 가리켜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七代事績은 곧 七代의 實錄인 것이다. 다음 顯宗實錄은 記錄에 보이지 아니하고, 德宗實錄은 李齊賢의 德宗?에 德宗實錄을 증거로 帝王韻記의 잘못을 批評한 것을 보면(註 003 高麗史 卷 5, 世家 5德宗(?)) 德宗實錄은 편찬되었던 것이 명백하다. 단 東國文獻備考 藝文志에 德宗實錄을 李齊賢撰으로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靖宗·文宗·順宗·宣宗·獻宗實錄도 記錄에 보이지 아니한다. 肅宗實錄은 仁宗2년에 사망한 李德羽가 일찍이 肅宗實錄을 편찬하였다는 기사가 있는 것을 보면(註 004 高麗史 卷 15, 仁宗 2年 3月 己巳) 肅宗實錄은 편찬된 것이 확실하고, 睿宗實錄은 睿宗이 사망하고 仁宗이 ?位하자 곧 中書侍郞 平章事 韓安仁의 建議에 의하여 寶文閣學士 朴昇中, 翰林學士 鄭克永, 寶文閣 待制 金富軾을 編修官에 임명하여 睿宗實錄을 편찬하였다.(註 005 高麗史 卷 15, 仁宗?位年 9月 乙亥·卷 97 韓安仁傳·卷 98 金富軾傳) ... 요컨대 海印寺史庫 소장 實錄은 高宗 14년(1227) 창설한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蒙古의 亂을 피하여 彰善島로 옮기고, 元宗 10년에 倭寇를 避하여 珍島로 옮겼다가, 다시 海印寺로 돌아온 것인데, 禑王 5년(1379)에 倭寇가 海印寺 入口에 있는 冶爐縣까지 침입하므로 이것을 善山 得益寺로 옮기고, 同王 7년(1381)에 다시 忠州 開天寺로 옮겼다는 것이 東國輿地勝覽과 陽村集에 記錄되어 있다. 註 017 017 陽村集 卷 16, 送 裵仲員修撰?史七長寺序·東國興地勝覽 卷 28, 善山都護府 得益寺·卷 14, 忠州牧 開天寺 닫기 그런데 高麗史 禑王 7년 9월 條에는 倭寇가 寧海 丑山島에 침입하므로 甫州(醴泉) 普門社 소장 史籍을 忠州 開天寺로 옮겼다고 記錄되어 있어, 善山 得益寺 소장 實錄은 바로 開天寺에 간 것이 아니라, 당시 內陸 各地에 횡행하던 倭寇의 亂을 피하여 일단 醴泉 普門寺를 거쳐서 忠州 開天寺로 간 듯하다. 그리고 開天寺에 옮긴 實錄은 禑王 향년(1383)에 倭寇가 忠淸道地方에 침입함으로 말미암아 竹州(竹山) 七長寺로 옮겼다가 恭讓王 2년(1390)에 다시 忠州로 옮겼다.(註 018 今西龍 上揭書/ 中村榮孝 日鮮關係史の硏究 中卷, 朝鮮全州史庫とその藏書)(http://db.history.go.kr/2014)
◆ 예천군 출향인 6.1지방선거 당선자 2명(구자민,이지연), 28일 더 확인됨...축하합니다.
예천군 출향인 6.1지방선거 당선자(6·1 지방선거 출향인 당선자 2명 더 확인돼) [기사] : 서울 관악구라선거구 구자민(33), 구미시차선거구 이지연(55) … 2022년 6월 28일 현재 총 11명 집계) [기사] : ◇ 구 자 민 예천읍 출신 국민의힘 서울 관악구라선거구/ ◇ 이 지 연 예천읍 출신 더불어민주당 구미시차선거구/ 지난 6·1 지방선거에서 기초의원에 당선된 예천출향인이 2명 더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8일 현재 출향인 당선자는 총 11명으로 늘어났다. 서울 관악구라선거구에서 국민의힘 후보로 나서 무투표 당선된 구자민(33) 당선인은 예천읍 출신으로 어머니는 석금순(예천초 56회) 씨다. 관악구라선거구는 국민의힘 1명, 더불어민주당 1명이 무투표 당선됐다. 구미시차선거구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당선된 이지연(55) 당선인은 재선이다. 예천읍 출신으로 아버지는 이종열(예천읍) 씨다. 차선거구는 더불어민주당 1명, 국민의힘 2명, 무소속 1명이 선거를 치렀다. <당선인 현황> : ◆구자민(예천읍 출신) △서울 관악구라선거구 △정당: 국민의힘 △출생년도(나이): 1988(33세) △직업: 정당인 △학력: 성보고등학교 졸업 △경력: (전)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Webservice PM, (현)국민의힘 관악갑 당원협의회 대변인 △득표율: 무투표당선/ ◆이지연(예천읍 출신) △선거구: 구미시차선거구 △정당: 더불어민주당 △출생년도(나이): 1967(55세) △직업: 구미시의회의원 △학력: 영남대학교 문과대학 사회학과 제적(1985.03~1986.03) △경력: (현)구미시의회의원, (현)구미시의회 의회운영위원회 부위원장 △득표율: 31.99%(예천신문 2022.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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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