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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1,916:봉산서당...봉산서원...(축,사도세자태실과 장조대봉도)
작성자장병창 @ 2022.09.01 05:56:46

  도청신도시 예천 1,916 : 봉산서당...봉산서원...(부,효자면 소재 사도세자 태실과 장조 대봉도, 30일 문화재청의 보물로 지정됨...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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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산서당은 진입로에서 산길 남측으로 올라가서 숲 사이에 평지의 중앙에 북향을 하고 있다. 봉산서당 전면 마당은 풀숲이 우거져 있으며 과거 연못으로 추측되는 자리가 있으며, 측면과 배면에 나무가 둘러싸여 있다. 봉산서당은 사방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어 출입이 어렵다. 봉산서당은 북쪽의 산을 바라보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정면 3, 측면 2칸 규모이다. 평면은 중앙의 1칸 규모의 우물마루 대청을 중심으로 정면으로 0.5칸 규모의 툇마루와 양측에 1.5칸의 온돌마루를 두었다. 툇마루는 누마루의 형식이며, 숫대살 평난간을 두르고 양측면에 쪽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하였다. 중앙의 대청은 배면에 널판문을 달아 놓았으며, 양측 온돌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띠살청판 여닫이문을 달았다. 양측 온돌방은 정면에 두 짝 여닫이 띠살창문을 달았고, 밖으로 한 짝 여닫이 띠살문을 달았으며, 문의 크기가 벽면 높이의 절반으로 작다. 봉산서당의 기단은 자연석과 흙으로 축조하고, 시멘트로 마감했다. 온돌방은 정면의 기단에 아궁이를 배면 기단 위에 굴뚝을 만들어 놓았다. 주초는 정면 누마루 주초가 시멘트로 마감되어 있으며, 나머지 주초는 자연석주초로 하고 있다. 주초 위에는 사각기둥을 올려놓았으며, 정면 누마루 시멘트주초 위에는 원형기둥을 올려놓았다. 기둥 상부는 직절익공형태로 창방과 보아지, 주두, 도리받침장혀, , 보리가 짜 맞춤을 하고 있다. 누마루 정면은 원형기둥을 하였으며, 기둥 상부는 소로수장으로 꾸몄다. 보아지는 정면을 직절하고 내부는 초각을 했다 .가구는 오량이며, 건물의 좌우의 움직임을 잡아주는 자연목 도리를 대청 고주상부에 짜 맞춤을 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서까래 사이는 제사벽으로 마감했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린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벽체와 앙토는 회바름으로 마감했었다. 정면 툇간 상부에 鳳山書堂현판을 달아 놓았고, 내부 대청상무에 鳳山書堂記편액 2개를 달아 놓았다.

 

  현재 서당은 이건 이후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소실되었고, 현재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관리가 소홀하다. 이 상태가 유지되면 붕괴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늦기 전에 유지 관리 계획을 수립하여 조치하는 것이 필요하다.(예천군 건축문화유산 조사연구 2013, 508-509)

 

  봉산서당(‘예천 봉산서당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지정 : 영남지역 초창기 서당 현태 잘 지니고 있어 역사건축적 가치 지녀) [기사] : 예천군(군수 김학동)2021730일 감천면 현내리 소재 예천 봉산서당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88호로 지정됐다고 밝혔다. 이번에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예천 봉산서당은 영남지역 초창기에 건립된 서당으로 퇴계학파를 대표하는 학봉 김성일의 제자인 성오당 이개립이 강학활동을 위해 1597년에 건립했고 이후 1784년 지금 위치로 옮겼다. 성오당 이개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로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더불어 봉산서당을 건립하고 강학활동을 했으며 사후에도 제자들과 10여개 문중이 모여 만든 감천 봉산유계에 의해 유지보존 되고 있다. 봉산서당은 조선시대 민간 교육기관으로 그 형태가 오늘날까지 비교적 잘 남아있으며 건립에 관한 기록도 전하고 있어 역사건축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축 유산이다. 김학동 군수는 이번에 지정된 봉산서당을 비롯해 우리 지역의 소중한 문화재 보존관리에 최선을 다하겠다.”군민들께서도 지역 문화재 보호에 앞장서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예천뉴스 2021.07.30.)

 

  봉산서당(예천 봉산서당문화재 지정서 전달) [기사] : 영남지역 초창기 서당 현태 잘 지니고 있어 역사‧건축 가치 높아/ 예천군은 2021 813일 오후 120분 군수실에서 경상북도 문화재(문화재자료) 688호로 지정된 예천 봉산서당 문화재 지정서 전달식을 가졌다. 날 김학동 군수는 봉산서당 관리단체인 감천 봉산유계 이정태 대표에게 지정서를 직접 전달하고 문화재 지정을 축하하는 한편 우리 지역 문화재 가치를 되새기는 시간도 가졌다. 감천면 현내리에 소재한 예천 봉산서당은 1597년 성오당 이개립이 건립한 영남지역 초창기 서당으로 그 형태가 오늘날까지 비교적 잘 남아있다. 히 건립에 관한 기록도 전하고 있어 역사적․건축적 가치를 지닌 건축유산으로 그동안 성오당 사후 제자들과 10여개 문중이 모여 만든 감천 봉산유계에 의해 유지․보존 돼 왔다. 학동 군수는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시기에 우리지역 문화유산 위상을 드높인 이번 문화재 지정을 매우 뜻깊게 생각하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문화유산의 발굴과 보존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편 예천군은 이번 문화재 지정으로 국보 1, 보물 22건 등 국가지정문화재 35건과 도 유형문화재 21, 문화재자료 29건 등 총 12건 문화재를 보유하게 됐다.(예천신문 2021.08.13.)

 

  봉산서원(鳳山書院) [] : 예천군 현내면(醴泉郡 縣內面, 현 의성군 다인면 덕미2) 음지곤대(陰地昆大) 뒷편 서원등(書院嶝)1681(숙종 7)에 창건되었던 서원으로, 봉산서원이라 함은 당시 비봉산(飛鳳山) 아래인 금곡(金谷)에 세우려고 한 데서 연유한 듯 하다. 예천인 수헌 권오복(睡軒 權五福, 1467-1498, 校理, 醴泉邑 鄕祠宇에도 祭享), 예천인 제평 권맹손(霽平 權孟孫, 1390-1456), 안동인 제촌 권장(霽村 權檣, 1489-1529), 감천인 옥계 문관(玉溪 文瓘, 1475-1519), 예천인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 1534-1591), 의성인 남악 김복일(南嶽 金復一, 1541-1591), 안동인 매당 권욱(梅堂 權旭) 7(七賢)을 제향하였다. 대원군 때(1868) 훼철되어 지금은 '서원등(書院嶝)'이란 유지만 남아있다. 그러나 서원 건립 연대에 관하여는 <예천군지>마다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예천군읍지 정조본(醴泉郡誌正祖本)> 1780년 판에는 1708(在郡南五十里肅廟戊子), <조선여승람(朝鮮輿勝覽)> 1925년 판에는 1681(在多仁縣肅宗辛酉建), <교남지(嶠南誌)>에는 1634(在郡南五十里仁祖甲戌建)이라고 되어 있다.

 

  또 그 터에 대해서도 세 가지 설이 있다. 1) 의성군 다인면 덕미2(義城郡多仁面德彌二里) 75번지 음곤(陰昆)의 설, 18332월에 예천군수 입안(醴泉郡守立案), "봉산서원 옛터(舊基)1796년에 매매했고, 또한 봉산서원환매(換賣), 봉산서원 매매문건(賣買文券)"의 문구가 있고, 마을 부근에 서원등(書院嶝)이라는 밭이 있고, 서원 터에는 묘 1기가 들어 서 있고, 가끔 와편(瓦片)이 발굴된다. 2) 다인면 용곡리 산 15번지의 아랫쇠실(下金谷, 당시 縣內面 牛谷里) , 그 뒤 1681년 경 예천 유림(儒林)에서 음곤(陰昆)으로부터 북쪽 약 3km 거리인 이 곳에 서원을 세우고자 부지를 마련하고 터를 닦고 건축 자료를 준비하는 등 만반의 대책을 세웠으나 당시 이 마을 안동인 김영득(金榮得, 1629-1690, 武科) 등의 완강한 반대에 부딛쳐 이 일이 예천 관아에 송사(訟事)로까지 비화되었으나 결국 세우지 못하고 1688년 경 풍양면 효제리(豊壤面 孝堤里, 當時 縣西面 孝堤里)로 이건하게 된 듯하다. 이 곳은 마을 바로 뒷산이고, 지금도 여기 정동향(正東向)의 서원터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주춧돌이라는 정으로 다듬은 돌들이 마을 공동우물의 샘돌과 축대로 군데군데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안동 김씨의 대사성공파보(大司成公派譜, 己亥譜) 권지오(卷之五)의 기록에, "김영득이 봉산서원 건립에 제하여 예천 관아를 누차 행차하던 중 귀로에 낙동강을 건너다가 급증하는 홍수로 강 위에서 죽었다."라는 기록이나 이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말들과도 일치하고, 용곡리(龍谷里)에서 짓지 못한 건축 자재는 낙동강물로 운반되어 현 효제리(孝堤里)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이는 노주 김태일(蘆洲金兌一, 1637-1702)이 쓴 봉산서원의 상량문이 이 곳이나 덕미리(德彌里)를 배경으로 한 글인 것 같다. 3) 풍양면 효갈2리 산275번지 효제(孝堤) 동쪽에 있었다는 설, 정서향(正西向)의 집터에는 아직도 5개의 주초석이 남아 있고, 기와 파편이 딩굴고 있다. 앞의 들 이름이 서원앞들이라고 하고, 당시 개뱅이(龍門面 開芳里) 의성 김씨 등 유림에서 예천 다인현 현내면 우곡리(醴泉多仁縣縣內面牛谷里, 多仁面 龍谷3洞 金谷 山 15번지)에 건립하려고 터로 닦고 재목도 가져와서 만반의 준비를 하였으나 주민의 완강한 반대에 부딛쳐 모든 재목을 낙동강으로 운반해서 이 곳에 세웠다고 한다. 그 곳에도 서원터가 있고, 당시의 초석이었다고 하는 돌들이 공동우물터에 옮겨져 있다. 훼철(1868)될 때 서원의 마루 등은 효제(孝堤)에 사는 정선 전씨(旌善全氏)가 뜯어다가 그들의 집마루를 놓았다고 한다.(醴泉郡邑誌 1780 1841 1895, 醴泉郡誌 1939, 多仁面誌 1992, 醴泉文化 51992, my.netian.com 2002)

 

  봉산서원(鳳山書院) [인터넷] : 의성군 다인면과 예천의 접경 지대이나 위치 확인 불능이다. 1634(인조 12) 창건, 1869(고종 6) 훼철되었고, 배향 인물은 권오복(權五福), 권맹손(權孟孫), 권장(權檣), 문관(文瓘), 김복일(金復一), 권문해(權文海), 권욱(權旭)이고, 현재는 향사치 않는다.교남지37권 예천군편에 이 서원에 대해 기록(在郡南五十里. 仁祖甲戌建. 享校理權五福, 追享齊平公權孟孫, 郡守權檣, 校理文瓘, 司成金復一, 承旨權文海, 參奉權旭)해 놓았다. 봉산서원은 권문해 등 예천 권씨, 권장 등 안동 권씨, 문관 등 감천 문씨, 김복일 등 의성 김씨 등을 봉향한 서원이다. 권문해 등의 문집이나 그들의 행적을 다룬 글에서 이들을 봉산서원에 봉향하였다는 기록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천군 다인현(현 의성군 다인면)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다인면 어느 쯤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써 확인할 수 없다. 예천 권씨 종가의 종손 권영기 씨의 말에 의하면, 의성군 다인면과 예천의 접경 지대에 있었다고 하지만 어디쯤이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 효자면 소재 사도세자 태실과 장조 대봉도, 30일 문화재청의 보물로 지정됨...축하합니다.

 

  사도세자 태실과 장조 대봉도(사도세자 태실 그린 '장조 대봉도' 보물 지정! : 효자면 소재...) [기사] : 예천군 효자면 소재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태실과 주변 풍경을 그린 '장조 태봉도(莊祖 胎封圖)'2022830일 보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왕실을 그린 태봉도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역사성과 희소성이 높고, 제작 동기와 시기가 분명하며 태실 관련 왕실 회화로 역사적·미술사적 가치가 높아 '장조 태봉도'를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장조는 사도제자의 사후 추존된 칭호다. 당쟁 속에 불운하게 살다가 뒤주에 갇혀 죽은 그에게 영조가 시호 '사도'를 내렸고, 1776년 왕위에 오른 아들 정조는 아버지의 시호를 '장헌'으로 높였다. 1899년 고종은 장헌을 장조로 추존했다. 태봉도는 1785(정조 9) 정조(正祖)의 아버지 사도세자(장조)의 태실(胎室)과 주변 풍경을 그린 것이다. 장조의 태실은 1735년 출생 후 예천군 효자면에 있는 명봉사(鳴鳳寺) 뒤편에 마련됐다. 1785년 사도세자로 추존됨에 따라 난간석(欄干石)과 비석 등 석물이 추가로 배치됐다. 그림 속 태실은 수많은 산봉우리가 에워싼 타원형 구도 안에 자리 잡았다. 멀리 상단에는 뾰족한 원각봉(圓覺峯)을 그리고, 가운데에는 명봉사(鳴鳳寺)와 문종태실(文宗胎室)을 배치했다. 그 위로 사도세자의 태실인 '경모궁 태실(景慕宮 胎室)'을 그렸다. 그림 속 태실은 이중으로 된 연꽃지붕이 있는 개첨석에 팔각의 난간석을 두르고, 앞쪽에 거북 받침에 표석(標石)이 세워져 있다. 좌우 사방으로 활짝 펼친 듯한 구도에 주요 장소에 지명(地名)을 써 놓은 방식과 줄지어 있는 삼각형 모양의 산들, 짙은 먹으로 거칠게 표현한 봉우리 등 지도식 표현이 두드러진다.(정차모 기자 예천인터넷뉴스 202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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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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