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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1,922:봉우리산...봉화골
작성자장병창 @ 2022.09.09 10:10:49

  도청신도시 예천 1,922 : 봉우리산...봉화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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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우리산 : →봉우재

  봉우재(烽火峴, 烽火峰), 봉화산(烽火山) [고개] : 예천읍 석정리 석정(石井) 뒤 서암산봉수대(西庵山烽燧臺)로 올라가는 고개로, 가파르고 너머에는 용산리 새박골이 있다.

 

  봉우재 : 예천읍 지명유래/ 2011.12.22./ 웃골(烽火谷) : 물탕골 옆에 있는 골짜기. 봉우재 밑이다. ▪ 새터(新基, 新里) : 석정... 흑진개쪽이다. ◦ 龍山里 ▪ 본래 예천읍 북읍면의 지역으로서, 용처럼 생긴 산.../ blog.daum.net/ibjc115/ 새천년 희망의 땅 웅..(daum 2017)

 

  봉우재(烽燧山) [山] : 유천면 고림리 안고림(內高林) 뒤에 있는 산으로, 봉화(烽火)터가 있다.

  봉우재, 봉수대(烽燧臺), 봉수산(烽燧山), 봉화재(烽火재) [山] : 지보면 암천리(岩川里) 갈포 남서쪽에 있는 고개로, 옛날 봉수대(烽燧臺)가 있어서 마을의 어려운 일을 봉화로 전하였다고 한다. 이 곳은 지보면 대죽리(大竹里), 암천리(岩川里), 어신리(漁薪里), 신풍리(新豊里)의 피앗골의 경계에 있다. 높이 199m이다.

 

  봉우재, 봉우리산, 봉수산(烽燧山) [山] : 감천면 포리 감천시장(甘泉市場) 뒤에 있는 높은 산으로, 높이 245m이다. 현내리(縣內里)에 걸쳐 있고, 마고(麻姑)할미가 쌓았다는 조그만 성이 있다. 옛날에 봉화(烽火)를 올렸다고 한다. 현재는 정월 대보름날 달 구경하는 장소가 되고 있다.

 

  봉우재 : →고성산, →봉수산, →봉우재산, →봉화재, →소이산

  봉우재산, 봉우재 [山] : 지보면 신풍리(新豊里) 피앗골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 봉화대(烽火臺)가 있었는데, 임진왜란(1592) 이후에 폐쇄되었다. 신풍리의 피앗골, 어신리(漁薪里), 암천리(岩川里), 대죽리(大竹里)의 경계 지점으로, 해발 199m이다.

 

  봉운 김태한 박사 정년퇴임 기념 논문집(鳳雲金泰漢博士停年退任紀念論文集) [冊] : 김동석을 중심으로 한 본 논문집편찬위원회에서 편집하여 대구 계명대학교 출판부가 1989년에 출판한 책으로, 451쪽, 23cm이다. 지보면 지보리 406번지 상락(上洛) 출신인 봉운 김태한(金泰漢, 1923- , 啓明大 總長)의 정년퇴임 기념으로 출판하였다. 안동대학교 도서관 중앙대출실에 소장되어 있고, 그 외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계명대(동산), 영남대, 한동대이다.(keris 2003)

 

  봉웃골, 봉화골(烽火谷) [골] : 1) 예천읍 석정리(石井里) 물탕골 옆에 있는 골짜기로, 봉우재 밑이 된다. 2) 예천읍 용산리(龍山里) 새박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석정리 뒤 서암산봉수대(西庵山烽燧臺) 밑이 된다.

 

  봉웃골(烽火谷) : 예천읍 석정리 물탕골 옆에 있는 골짜기로, 봉우재 밑이다.(醴泉邑홈페이지 2013)

  봉웃골 : 예천읍 지명유래/ 2011.12.22./ 용산이라 하였는데, 석문정, 효동을 병합하여 용산동이라 해서 예천읍에 편입됨. ▪ 검북골 : 봉웃골 서쪽에 있는 마을. 봉우산과 백마산 밑이다. ▪ 고래장등 : 새박골.../ blog.daum.net/ibjc115/ 새천년 희망의 땅 웅..(daum 2017)

 

  봉재꿀농장(체계적인 꿀벌의 품종관리가 위기 해결책 //봉재꿀 농장 김인석(용문면) 대표) [기사] : 꿀벌의 품종을 개량한 이유는 실질적으로 개량된 품종을 농가에 보급, 생산량을 늘려 농가소득을 올리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밀원 관리하고 장원벌의 품종 관리가 절실, 대출에 국한된 대책들은 아쉬움이 커... "로열젤리를 벌집 한통에 몇 병씩 생산해 낸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사기꾼이 중국에서 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쫓아내려고 다 같이 갔었습니다." 김인석 씨는 그때 처음으로 벌의 품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고 갔는데 한눈에 봐도 벌의 움직임이 우리가 보던 것과 달랐고 실재 생산량도 달랐습니다." 그래도 믿기 어려웠던 김인석씨는 그 사기꾼(?)에게 알을 밴 여왕벌을 사서 키우면서 생산량의 차이를 직접 확인했고 벌의 품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품종의 차이는 무수히 많습니다. 혀의 길이나 꿀낭(꿀담는 주머니)의 크기도 다르고 침을 쏘고 죽을 때 나오는 독샘의 향도 다릅니다." 이런 차이는 곧 생산량의 차이가 되었지만 1년이 지나자 생산량은 다시 줄어들었다. "제가 얻어온 품종이 자연 상태에서 교미가 이루어지다 보니 다른 종들과 섞이면서 바로 다음 해부터 생산량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김인석 씨는 벌의 품종도 관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곤충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참여하며 꿀벌의 품종개량(육종)에 매달리게 되었다. "8년을 매달려 일했습니다. 인공수정기를 하루에 4시간씩 들여다보느라 눈도 다 버렸고,새벽 두시고 세시고…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일했습니다." 김인석 씨는 연구에 보다 집중하기 위해 자신이 키우던 벌통들도 모두 치울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꿀을 채취하러 나가는 벌들을 잡아 기절을 시키고 하나하나 무게를 재고 내보낸 다음 다시 들어오는 벌들을 잡아 기절시키고 무게를 재어가며 벌통별로 꿀을 얼마나 가져오는지 비교하고, 여왕벌이 하루에 알을 몇 마리씩 낳는지도 확인하고..." 그 고생과 방법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김인석 씨는 성공했다. 그가 개량에 성공한 '장원벌'은 국가유전자원으로 등록됐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상도 받았다.

 

  "품종개량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후 관리입니다. 품종을 개량한 이유는 실질적으로 농가에 보급해서 꿀 생산량을 늘려 농가소득을 올리기 위해섭니다." 벌들은 교미가 공중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반경 20킬로미터 내에는 다른 품종의 벌이 없어야 한다. 여러 세대를 거쳐도 품종을 순수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섬으로 가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김인석 씨도 2년간 울릉도에서 지내며 '장원벌'을 공급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품종관리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정부의 지원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민간단체나 지자체가 감당하기에는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김인석 씨도 울릉도에서 2년 만에 나오게 되었고, 관계기관은 '장원벌'의 관리를 민간단체에 넘겼다.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벌을 공급받는 농가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생산량에 실망했고 이는 김인석 씨가 제일 안타까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외국에서는 정부가 품종을 관리하고 농가에서는 해마다 씨앗을 사듯이 여왕벌을 사서 농사를 짓습니다." 연구에 바친 15년의 세월을 생각하면 너무 아깝고 억울하지만 김인석 씨는 지금이라도 관리가 된다면 상관없다고 말한다. "사실 옛날처럼 꿀이 많이 나오는 시기는 다시 오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지구온난화가 미치는 영향이 곤충들에겐 무척 큽니다. 작년엔 꿀 생산량이 80퍼센트가 줄었고 올해는 85퍼센트가 줄었습니다. 대부분의 양봉농가가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보여도 꽃송이의 크기가 달라졌고 화밀(꿀)의 양도 달라졌다. 꽃향기가 줄어들면서 벌의 활동량도 줄었고 자연적으로 꿀의 생산량도 줄었다. "요즘 양봉협회에 젊은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30-40대가 많이 늘었는데 저야 자식도 다 키웠고 크게 문제될게 없지만, 그 사람들은 아이들도 키워야 하고, 이렇게 한해 두해 농사에 실패하면 버티기 어려워집니다." 주 밀원인 아카시아도 사라져가고 있고, 다음 밀원을 심어도 10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김인석 씨는 벌써 늦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밀원 관리하고 벌의 품종도 관리해야 하는데 정부의 대책이 대출에 국한되어 있어서 너무 답답합니다." 더 늦기 전에 돈으로 당장의 위기를 넘기기보다 답을 알고 있는, 정도로 걸어가는 게 문제를 해결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예천신문 2021.06.25.)

 

  봉평나루(鳳坪津) [나룻터] : 예천군 현동면(現 義城郡 多仁面)에 있던 나룻터로, 현동면 관내에는 다인나루, 문정자나루와 더불어 3대 나룻터가 있었는데, 모두 낙동강을 건너는 장소이나, 그 기능은 조금 차이가 있었다. 문정자나루는 주로 여객의 편의를 주는 곳이고, 다인나루는 주로 사람 편의와 무역을 겸한 곳이고, 이 곳 봉평나루는 주로 사람은 물론 관원의 공무 수행을 위한 역로 연결의 특수 기능을 담당하였다. 1972년 풍지교(豊知橋)가 가설되어 육로 교통이 발달하자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이 나룻터들이 폐쇄되었다.(my.netian.com 2002)

 

  봉평리(鳳坪里) [古洞] : 임진왜란(1592) 직후 예천군 현동면(醴泉郡縣東面)의 행정 동리로, 원래 신라의 달기현(達己縣, 多己縣) 소속 지역이었는데, 757年(경덕왕 16)에 상주 다인현(尙州多仁縣) 소속이 되었다. 1274年(원종 15)에 보주(甫州, 醴泉郡) 다인현(多仁縣) 소속이 되었고, 1599年(선조 32)에 예천군 현동면 봉평리(醴泉郡縣東面鳳坪里)가 되었다. 1906년에 비안군 현동면 봉평리(比安郡縣東面鳳坪里)로 이관되었고, 1914년에 동정리(東井里)와 합쳐서 의성군 다인면 봉정리(義城郡多仁面鳳井里(1里)) 봉평(鳳坪, 鳳山, 三鶴)과 대골 두 마을이 되었다. 미리 정착한 사람들은 떠나가고, 삼학은 1750년대 정창봉(鄭昌鳳)이 지보면 도장리에서 이 곳으로 와서 큰 느티나무에 학 세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정착하였고, 댓골은 1600년대 엄태구(嚴泰求)가 대곡사(大谷寺) 입구에 자리잡아 대곡걸이라 부른 것이 댓골이 되었다. 1700년대 영월인 엄성석(嚴聖碩)이 유천면 용암리에서 입주, 1830년대 함안인 조성학(趙性學)이 지보면 지보리에서 입주, 1840년대 전의인 이양문(李養文)이 안동 풍산 용기동에서, 김해인 김제덕(金濟德)이 풍양면 고산리에서 입주, 1860년대 경주인 이준해(李俊海)가 감천면에서 입주, 1870년대 안동인 권영길(權寧吉)이 단촌면 후평리에서, 남원인 양수남(梁秀南)의 조부가 풍양면 공덕동에서 입주하였다.(多仁面志 1992)

 

  봉항 : →새목

  봉현동 : →봉암동

  봉현재(鳳賢齋) [齋舍] : 지보면 매창2리 445번지 소재, 나주 정씨 입향조인 정희복(丁希福)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재사로, 매화촌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초옥으로 건립하여 낙음정(洛陰亭)이라 하였으나 1920년에 와가로 고쳐 봉현재라 하였다. 1994년에 중건하였다. 재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인데, 좌측 2칸의 전면 칸은 툇간으로 구성하였다. 가구는 오량가(五樑架)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醴泉郡誌 2005)

 

  봉화골 : →봉웃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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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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