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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1,926:봉황산...
작성자장병창 @ 2022.09.13 06:11:24

  도청신도시 예천 1,926 : 봉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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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황산 : 김경룡의 세상보기(183)/ 2015.02.02 | GBN 경북방송/ 거무산과 봉황산을 우백호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수천 년의 역사를 품은 경상도를 휘감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변의 시루봉을 안산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곳...(daum 2017)

 

  봉황산(신도청시대 예천의 장소성과 인문魂을 찾아<2> : 신도청 봉황산 아이덴티티(상)) [기고] : 우리 땅에는 봉산, 황산, 비봉산, 봉미산, 명봉산 등 봉황 계열 이름을 가진 산이 많다. 마을터 발복이든 집터나 묘터 발복이든 그저 봉황 같이 빼어난 후손이 많이 태어나기를 바라는 우리 조상들의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천군 호명면 금릉리(金陵里)에 있는 봉황산도 예외는 아니다. 17세기부터 경주이씨 평리공파(評理公派) 후예들이 그 산 밑의 금릉리에서 세거해 왔는데, 그 역사지리적 장소 정체성[장소성]이 온통 봉황 계열 일색이다. 산, 바위, 정자, 사람 이름 등 그 어느 것 하나 봉황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금릉1리의 대부분 땅이 2008년 경북 신도청 이전지로 수용되면서 그곳은 말 그대로 상전벽해가 됐다. 유서 깊던 마을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동족집단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던 봉황대(鳳凰臺)라는 누정도 헐려 버렸으며, 입향조 묘소를 비롯한 선대 묘들도 하나같이 마을 밖 타지로 이장(移葬)되었다.

 

  주민들이 애지중지했던 마을의 좌청룡 지맥은 도로 개설로 군데군데 끊어지고, 마을의 부귀를 보장했던 노적봉 형상의 안산(案山:앞산)인 동모산(東慕山·132m)은 통째로 뭉개져 평지로 바뀌어 가고 있다. 토지 이용의 효율성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적 논리가 그런 개발 양태의 든든한 백이 되고 있다. 도대체 21세기가 어떤 시대인가. 농업과 공업이 풍미하던 시대를 지나 교통통신의 발달로 국가 간 경계는 퇴색되고 세계 여러 지역 간 또는 지방 간의 직접 접촉과 교류가 빈번해지고 있는 문화의 시대, 그 중에서도 특히 아이덴티티(identity)가 지배하는 시대이다. '동일성(同一性)' 또는 '정체성(正體性)'으로 번역되는 아이덴티티 개념은 본질적으로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장소 간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된 일종의 사회적 산물이다. '동일성'은 내부적인 '같음'을, '정체성'은 외부와의 '다름'을 각각 강조한다. 이제는 마을이나 도시도 아이덴티티가 빼어난 곳일수록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다. 외국인 관광객은 차치하고서라도 도청 신도시로 이사해 오는 이주민의 입장을 고려해서라도 옛 터전의 감동 스토리들이 담긴 장소들은 마땅히 보존되어야 한다. 무장소성의 새 건물들을 신도시 안에 빼곡히 채워 넣은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제아무리 도청 신도시라 할지라도 장소성을 강화하는 것이 이주민들로 하여금 진정성 있는 향토애를 가지고 오래도록 그곳에 정주하게끔 하는 방책인 거다. 봉황산 일대의 장소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옛 거주 역사 관련 자료들을 모아 앞으로 건립될 신도청 박물관 안에 전시하는 동시에, 그 중 장소성 홍보에 유익한 자료들은 현재도 변함없이 건재하고 있는 봉황산의 둘레길 곳곳에 글과 그림으로 전시하여 신도시 터의 '뿌리 깊은 정체성'을 알리는 것이다. 봉황산의 옛 아이덴티티는 버리기 아까울 정도로 너무나 빼어나다. 또 다른 하나는 예전의 금릉리 선름(仙廩)마을의 주산(主山)이었던 봉황산이 이제는 신도청 구역 안에 들어가 도청 신도시의 부주산(副主山)[주산은 검무산]이 되었으므로 마땅히 그런 공간 위상 변화에 걸맞은 새로운 장소 정체성을 수립하고 또한 거기에 부응하는 경관물을 새롭게 조성하는 것이다. 예천군 호명면 봉황산은 높이 211m의 나지막한 산이다. 그 산 아래에는 조선후기 이래 경주이씨[월성이씨] 평리공파의 세거지였던 금릉리 선름마을이 있었다.

 

  경북도청 신도시로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봉황산·금릉리·선름마을 같은 지리적 지명(地名) 아이덴티티에다 경주이씨 평리공파라는 사회적 동족집단 아이덴티티가 뚜렷이 드러나는 장소였다.봉황산 일대의 장소 정체성은 평리공파 파보(派譜)에 실려 있는 두 개의 아이덴티티 맵(map), 즉 ‘금릉산수지도(金陵山水之圖)’와 묘지도(墓地圖)에서 잘 드러난다. 산도(山圖)라고도 부르는 이 두 그림은 특정 마을터나 묘터 주변의 산세와 수세 등을 그림으로 그려 그 공간이 풍수적으로 길지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종의 풍수 지형도다. '금릉 산수도'에 나오는 봉황산과 금릉동이라는 땅이름은 이백의 시, '등금릉봉황대'에 착안한 일종의 유교 이데올로기적 지명이다. 마을 뒷산에 우뚝 솟은 큰 바위가 봉황대를 연상하게 하여 산 이름을 봉황산으로 짓고, 또 중국 봉황대가 있는 금릉의 이름을 따 금능이라 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오지만 우리말 금능은 아무래도 한자어 금릉을 잘못 표기해 생긴 듯하다.

 

  그림에 나타나 있듯이 봉황산 품안의 마을은 금릉동과 샛마[間村], 안선름[內仙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봉황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좌우 지맥들이 마을터를 잘 감싸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산합리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흐르는 송하천(松河川: 개천이라서 작은 점선으로 표시돼 있음: 선름 출신 평리공파 39세손 이상원 씨는 이 개천을 송평천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함) 물길이 놓여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세를 띠며, 개천 너머로는 나지막한 동모산이 안산이 되어 주산격인 봉황산에 조응하니 장풍득수의 입지 조건도 충족된다. 동모산 묘지도의 혈(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첨지중추부사 한남(漢南) 이서봉(李瑞鳳)은 금릉리 입향조 호조정랑 송오(松五) 이백영(李白永·1622~1710)의 차남으로서 한성좌윤 송은(松隱) 이근성(李謹成·1694~1769)의 부친이기도 하다. 묘지도는 항상 명당 혈처(穴處)를 중심으로 주변 지세가 그려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남쪽에 있는 동모산을 지도의 위쪽에 놓고 분묘의 위치를 번호를 매겨가며 상세하게 표시하고, 북쪽의 봉황산은 지도의 아래쪽에 대충 그려 놓았다. 족보의 앞쪽에 그런 묘지도를 싣는 이유는 조상묘의 위치 정보를 기록으로 남겨 후손들이 묘지를 잃어버리지 않게 한다는 실용적인 목적이 있다. 또한 파조나 중흥조의 명당 묘 발복으로 인해 이만큼 후손들이 잘 살게 되었다고 하는, 즉 묘지를 매개로 한 혈족들의 문중 소속감과 일체감을 진작시켜 궁극적으로는 종족[종중]집단의 아이덴티티를 더욱 굳건히 구축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 경주이씨 평리공파 집성촌인 금릉리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봉황산 좌청룡 맨 끝자락의 송은공 묘와, 마을 앞 동모산의 한남공 묘, 그리고 동모산 바로 남쪽 남송산(南松山)에 있었던 입향조 송오공 묘터의 발복이 생활공간인 금릉리 마을터의 명당 발복에 못지않게 자신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믿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마을터는 말할 것도 없고 이들 선산이 모두 도청 신도시 개발 대상지로 수용되는 바람에 입향조는 예천읍 봉덕산 자락으로, 송은공 묘는 예천군 감천면 율리로 각각 이장돼 가고, 오직 한남공 묘만 옛 마을 터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봉황산 기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세거지의 정체성을 그 정도로 잃어버릴 지경이면 '한 가문의 장소적 뿌리가 거의 통째로 뽑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적 요인이 장소 아이덴티티[장소성]를 만들었지만 인간적 요인에 의해 장소 아이덴티티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공교롭게도 이름자에 '봉황 봉'자가 들어있는 한남공 이서봉의 묘가 마을 앞산인 동모산에서 뒷산인 봉황산으로 옮겨지며 고향에 끝까지 남게 되었다.

 

  과연 봉황산이 그의 유해를 떠나보내지 않으려고 보듬어 안은 것일까. 옛 금릉리 경주이씨 평리공파 문중은 자신들의 아이덴티티 구축의 중요한 매개물로 작용해 왔고 또 앞으로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이 묘역을 과연 어떤 경관물로 단장해서 혈족의 역사지리적 정통성과 장소적 정체성을 이어나갈 것인가. 그 내용은 (하)편에서 언급된다. 봉황산은 예천군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릉성 산지 중의 하나다. 멀리서 바라본 산체(山體)의 전체적인 형태는 반달 모양이다. 이 산이 제대로 된 지명 아이덴티티[정체성]를 갖게 된 것은 17세기 후반 평리공파 28세손 이백영이 그 산 아래로 옮겨 살면서부터다. 남쪽에서 바라본 옛 선름마을 모습. 봉황산 오른쪽 기슭에 봉황대가 보인다. 그 당시 명문가들은 대개 배산임수 지세와 넓은 농경지를 갖춘 명산 하나를 점거한 후 주변 자연경관에 귀격(貴格)의 각종 이름을 부여하면서 그곳을 세거지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 금릉·봉황산·간촌(間村)·대촌(大村)·선름 마을(신선이 노니는 마을) 같은 지명은 그래서 생겨났으며, 이후 평민들 사이에 한자 지명이 샛마·큰마·설늠·금능 같은 순우리말 땅이름으로 불리면서 이중·삼중 중복되는 지명이 생성되었다. 금릉리 삶터의 풍수형국 이름도 양면성을 띠기는 마찬가지다. 예부터 ‘소의 형상을 한 땅에서는 부유해지고, 봉황의 형상을 한 땅에서는 귀해진다’는 ‘우부봉귀(牛富鳳貴)’라는 말이 전해오는데, 소와 같이 부지런하면 가난을 면할 수 있고, 청운의 꿈을 안고 공부를 하면 부유하지는 못하나 귀함을 얻을 수는 있다는 뜻이다. 양반들의 꿈이 입신양명에 있었다면 과거시험에 응시조차 할 수 없었던 평민들은 ‘부자라도 되어야겠다’는 소망을 가졌을 게 뻔하지 않는가. 소와 봉황의 모양새를 동시에 갖춘 산은 거의 없지만, 봉황산 아래의 옛 선름마을은 희귀하게도 바로 그런 우부봉귀 명당이었다. 봉황산을 포함한 마을 전체 지세를 봉황포란 형국으로 본 주민이 있었는가 하면, 동네 터만 부분적으로 떼어내 그것을 길마[질마]형 명당 터로 본 주민도 있었기 때문이다. 양반들이 봉귀명당설을 희구했고, 평민들이 우부명당설을 소망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지금은 도청 신도시 개발로 토지가 정리되어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지만 예전의 선름마을은 소 질마[말 안장]처럼 양쪽이 높고 가운데가 옴폭 꺼진 지형 위에 동서로 두 마을이 나뉘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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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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