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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1,927:봉황산...
작성자장병창 @ 2022.09.14 06:09:13

  도청신도시 예천 1,927 : 봉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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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의 봉황산 지맥은 마을의 좌청룡이라는 중차대한 의미가 부여되어 예부터 비보(裨補)숲을 조성하여 보호해 왔으며, 깎여 나가고 있는 동모산 모습(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곳). 마을 앞 동모산은 노적봉으로 의미 설정되어 길격(吉格)의 '소 지르메[소 질마]' 형국을 완성시켰다. 이 길마명당 경관은 소 질마 지형과 노적봉이 모두 평지로 다듬어지면서 완전히 멸실되고 말았다. 봉황포란 형국의 형편은 그래도 조금 나은 편이다. '금릉산수지도'를 보면 봉황산이 봉황새의 형태로 그려져 있고, 그 남쪽의 동모산은 ‘새끼 봉황’의 형태를 띠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입향조 송오공은, ‘봉황산 위에 봉황이 노니 하늘이 봉의 새끼를 기르므로 내가 기뻐서 살고 있네. 영원히 장구할 만한 이곳을 즐기며 정원의 소나무와 대나무로 세상 근심을 씻으리라’는 유거시(幽居詩)를 남겼다. 봉황의 품에 안겨 살았던 선름 주민들은 모두 떠나고, 신도시 개발로 ‘새끼 봉황’인 동모산이 허물어져 내리는 현재의 상황에서 정녕 봉황포란의 명형국지는 역사적 종말을 고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봉황산이 품고 있는 봉황알 바위[鳳卵石]가 여전히 남아 있다. 봉란은 언젠가는 ‘새끼 봉황’으로 부화될 것이고, 그리되면 경주이씨 평리공파 명문가의 산이었던 봉황산 스토리는 신도청 시대의 위상에 걸맞은 새로운 장소 스토리로 거듭 태어날 것이다. 봉란석 얘기는 (하)편에서 전개된다. 봉황산 정체성 스토리의 종결점은 ‘봉황 같은 인물[사람]’이다. 입향조가 봉황 같은 후손, 신선 같은 풍모를 지닌 후손이 태어나기를 고대하며 봉황산과 선름(仙廩)마을 같은 지명들을 설정해 놓았을진대, 과연 그 소망이 이루어진 것일까. 입향조의 손자인 송은 이근성이 마을 뒤 봉황산 기슭에 봉황대라는 누정을 짓고 수양을 하면서 봉황 전설이 현실화된다.

 

  산이 높아 명산인 게 아니라 신선이 깃듦으로써 명산이 된다는, 이른바 '산부재고(山不在高) 유선즉명(有仙則名)'의 논리가 봉황산에도 통하게 된 것이다. 송은공의 묘갈명에, '어머니 정부인 광산김씨가 꿈에 봉황이 품속으로 날아드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는데, 용모가 비범하고 음성이 맑고 기운이 굳세며 자라나면서 재능과 기예가 무리에서 단연 뛰어나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며 따랐다.…(중략)… 공의 만년에 이상한 새[神禽]가 봉황대가 있는 동산의 오동나무 가지에 와서 깃을 트니 필시 봉황새였을 것이다. 영조 45년[1769년]에 타계했는데 장사지내던 날 봉황이 산마루를 배회하면서 울다가 구름 속으로 사라졌으니 누정[臺]과 산 이름이 모두 봉황인 것이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고 적혀 있다. '봉황 같은 사람'의 정체성 준거를 그런 식으로 신비화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그의 생가터와 조상 묘터를 천하에 둘도 없는 대명당으로 미화시키는 반풍수들의 한심한 작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대통령이 봉황 문장(紋章)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를 저절로 봉황 같은 사람으로 인정할 수는 없지 않는가. 공직에서 물러난 조선조 유교사회의 선비들은 대개 농사짓는 일을 겸하면서 심신을 수양하는 글공부를 했다. 왜 그랬을까. 농사는 매일 매일의 상황이 하늘의 명(命)인데, 그 명령에 따라 실천하고 일하는 것이 곧 덕(德)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천지의 운행이 덕에 의한 것이니, 사람도 그 덕을 알고 순리대로 그 덕을 쌓아 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 덕이란 하늘과 나, 내 옆의 사람과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달아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춘하추동의 계절 변화에 대한 깨달음이 곧 생로병사, 원형이정(元亨利貞), 인의예지와 같은 깨달음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송은공을 봉황 같은 사람으로 여길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그가 금릉동에 살면서 보여준 인간미 넘치는 행태에 있다. 직접 밭을 갈면서 수신제가했음은 물론, 늘 겸손하고 걱정과 즐거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었으며, 때로는 벗과 어울려 시를 짓기도 하였으니 그 누가 공의 덕의(德義)를 우러러 사모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는 진실로 지행합일의 진수를 보여준 신선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송은공을 봉황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바탕이 되었던 당시의 금릉동 배경 환경들은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봉황산이라는 지명을 빼고는 모든 게 사라지거나 변질됐다. 금릉은 금능으로, 신선이 노니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선름마을 터는 행복로 00번지로 바뀌고, 그나마 송하천[송평천]을 경계로 위 아래로 나뉘어져 있는 길 이름은 '선름길’이 아닌 '설늠길'로 표기되어 도무지 그런 무의미하면서도 정체성 없는 이름들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봉황대 누정 역시 신도시 개발로 헐려버렸는데 당시 수거돼서 보관돼 오는 봉황대 현판과 시판들을 한어리 이상원씨 댁에서 볼 수 있었다. 봉황대가 재사의 기능을 겸하고 있어 10월 시사 때는 그곳에서 망제를 지내기도 한, 평리공파 문중의 회합 장소로서도 중요한 정체성을 지닌 곳이었건만 그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이 봉황 전설의 주인공인 송은공의 묘소가 감천면 율리로 옮겨갔으니 이제 봉황 같은 인물 탄생 스토리는 이쯤에서 끝나는 듯했다. 그러던 차에 봉황산 우측[서쪽]의 긴 날개를 이루는 지맥 하나 위에 터 잡은 새 동네에 우연히 들리게 된 것은 필자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마을회관에 '봉황마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사연인즉, 고향 땅에서 멀리 떠나가기를 원치 않는 설름 이주민들을 위해 그곳에 마을을 열기[開基: 2012년에 터를 닦기 시작하고 2015년부터 집을 짓기 시작]로 했는데, 그때 토지이용 허가를 받기 위해 군청에 신청한 자연부락명이 ‘봉황마을’이었다는 거다. 그저 단순히 봉황산 자락에 입지하게 된 마을이라서 ‘봉황마을’이라고 이름 붙여졌든 아니든 봉황산의 정체성은 그렇게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하기야 봉황산이 저토록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산 위에 새롭게 조성되고 있는 신도청 둘레길을 봉황산 스토리 전시장으로 잘 활용하고, 또 산 아래에 봉황과 연관된 각종 경관물을 조성해 놓는다면 도청 신도시로서도 역사성 있는 장소 아이덴티티를 구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터이다. [이몽일 경북환경연수원 객원교수·풍수학박사](정차모 기자 예천인터넷뉴스 2019-05-21)

 

  봉황산(신도청시대 예천의 장소성과 인문魂을 찾아서 <3>신도청 봉황산 아이덴티티(하)) [기고] : 금세기에 들어와 만들어지고 있는 세종특별자치시를 비롯한 몇몇 도청 신도시들을 보면 그 아이덴티티[identity; 정체성] 수립 전략이 무척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청사나 도서관, 심지어 님비시설의 굴뚝까지 전망대로 랜드마크화 하려 하는 등, 주로 물리적인 시설물들을 통해 신도시 아이덴티티를 정립하려 하고 있다. 장소의 콘텍스트를 살려 해당 장소만의 고유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참신한 도시공간 아이덴티티 전략이 크게 부족해 보인다. 도시 공간 아이덴티티의 가치는 거주자든 관광객이든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만큼 해당 장소와 효과적으로 소통하느냐, 또는 감성적인 만족감을 얻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아이덴티티의 유형은 무수히 많다. 역사적·사회적·문화적·생물학적·국가적·민족적 정체성부터 산·강·동네·도시·지방·국토 전체 등에 대한 공간 크기별 지리적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필자의 관심 분야는 지리적 정체성, 달리 말해 장소 정체성[장소성]이다. 그런데 특정 장소에 대한 서양 지리학(geography)과 동양 풍수학의 아이덴티티 규정 방법이 많이 다르다. 지오그래피는 객관적 과학성을, 풍수는 주관적 느낌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 둘을 모두 전공한 필자는 이성적 아이덴티티와 감성적[정서적] 아이덴티티라는 말을 비유해 즐겨 쓴다. 소문난 여행지를 가보면 관광안내 책자나 입간판에 인식론상 상당히 대비되는 내용들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융기·침식·용식(溶蝕) 작용과 같은 지형의 형성 원인을 설명(explanation)해 놓은 지오그래피적 내용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와우산’이나 ‘거북바위’처럼 지형의 모양새를 묘사(description)해 놓은 일종의 풍수 물형론적인 해석이다. 전자는 이성을 일깨우는 이성적(rational) 아이덴티티로서 자연과학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감성을 자아내는 정서적(emotional) 아이덴티티로서 인문학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지오그래피 전공자들이야 전자에 관심이 많겠지만 일반 대중들은 외려 후자에 더 솔깃해 한다. 예천군 호명면 경북도청 신도시 안에 있는 봉황산의 정체성도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그것이 획일성보다는 다양성, 개별성보다는 융합성을 지향하는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시대정신에 부합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지오그래피적 아이덴티티와 풍수적 아이덴티티를 합친 융합적 땅 읽기가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꾀할 수 있도록 해줘 인간성 회복은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 장소마케팅에도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봉황은 용과 학이 만나 낳은 자식이다. 동서양이 각기 다른 눈으로 산을 보게 된 것은 인식론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서양은 산이라는 자연을 인식 주체인 나와 떨어져 별개로 존재하는 대상물[인식 객체]로 본 반면, 동양에서는 산도 나도 모두 음양오행이라는 단일 원리 하에 실존하는 존재물이기 때문에 서로 대등한 지위를 갖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보았다. 현재까지 만들어져 있는 봉황산 둘레길. 산 남서쪽과 남동쪽에서 개설이 필요하다. 서양 지오그래피는 대상물인 산의 형성 원인을 융기와 침식, 화산폭발 등으로 밝히고, 산지를 높이에 따라 1,000m 이하를 저산성 산지(低山性山地), 3,000m 이하를 중산성(中山性) 산지, 3,000m를 넘는 것을 고산성(高山性) 산지로 형식적으로 분류한다. 그런 기준으로 봉황산(211m)의 정체성을 규정하자면 그 산은 ‘넓은 지반이 융기작용으로 솟아오른 후 오랜 세월 차별침식을 받아 만들어진 저산성 산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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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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