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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2,028:사단법인...사도세자태실...
작성자장병창 @ 2022.12.24 06:06:21

  도청신도시 예천 2,028 : 사단법인...사도세자 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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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법인 한국 BBS경북연맹 예천군지도위원회 : →BBS 예천군지도위원회

  사단법인 한국청년회의소 예천청년회의소 : →청년회의소

  사당(祠堂) [터] : 1) 보문면 신월리 393번지 독제이에 있던 사당으로, 지금은 없어졌다. 2) 유천면 송지리 229번지에 있던 사당으로, 6.25전쟁(1950) 때 폐쇄되었다.

 

  사당(祠堂) : →예천고평리 묘, →예천구계리 묘, →예천노상리 묘, →예천미호리 묘, →예천삼강리 사당, →예천유리 사당, →예천율현리 산신각, →제곡리 사당, →향현사

 

  사당고개(祠堂峴) [고개] : 용궁면 금남리(琴南里) 금원 뒤에 있는 고개로, 밑에 세덕사(世德祠)가 있다.

  사당고개 : 예천의 자랑 1828 : 예천충효 27(祝 경북도립대/예천방문 354)/ 작성 장병창/ 世德祠)가 있다. 원래 금남리(琴南里) 금원 사당고개에 있었으나, 1730년 경 소실된 것을 1830년경... 郡誌 1939) 훤평서당(喧坪書堂) [터] : 용궁면 금남리 훤평촌 금강(錦江) 변에 있던 서당.../ www.ycg.kr/open.content/ko.. 예천군청(daum 2017)

 

  사당골(祠堂谷) [골] : 호명면 송곡리(松谷里) 번개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사당이 있었다.

  사당골, 사당동(祠堂洞) [마을] : 감천면 미석3리(美石三里)에 있는 마을로, 석남(石南) 마을에 살던 권씨들이 조상을 모시는 사당을 1580년 경에 세웠던 곳이다. 지금은 사당 터도 없어졌지만 골짜기 이름은 그대로 내려온다. 17가구 106명(1980)이 살고 있다.

 

  사당골(祀堂洞) : 美石里 소속으로, 석남 마을에 살던 권씨들이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던 골이라 한다. 지금은 사당터도 없어 졌지만 골자기 이름은 그대로 내려오는 마을이다.(甘泉面홈페이지 2013)

 

  사당골(祠堂谷), 서당골(書堂谷), 강당골(講堂谷) [마을] : 예천읍 고평1리(高坪一里) 불우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미 보문면으로 옮겨간 반씨(潘氏) 가문의 사당이 있던 곳이라 하여 사당골이라 불렀는데, 청주 정씨(鄭氏) 집안의 강당도 있었기 때문에 강당골, 또는 서당골로 고쳐 부르고 있다. 내성천 수신당(水神堂)도 있었고, 정화수 샘이 있는 바위에서는 정갈하고 맛이 좋은 지하수가 솟고 있다. 8가구 35명(1980)이 살고 있다.

 

  사당골(祠堂谷, 서당골(書堂谷), 講堂谷) : 예천읍 고평1리 潘씨 가문의 사당이 있던 곳이라 하여 사당골이라 불렀는데, 鄭씨 집안의 강당도 있었기 때문에 강당골, 또는 서당골로 고쳐 부렀다.(醴泉邑홈페이지 2013)

 

  사당골 : [우리 마을 이장님]살기 좋고 인심 좋은 아름다운 마을 만들 것.. 고평.../ 2017.02.10./ 방면 0.2km 지점에 있는 자연부락으로 예천읍 청복2리 월촌마을, 용정마을, 새마 마을... 자료] 자연부락명 : 고평1리 ⇒ 불우실, 사당골, 솔친정, 한길건너 고평2.../ blog.daum.net/oumlee/ 청솔네 이야기(daum 2017)

 

  사당골 : 예천군 예천읍에 대하여 [지도, 지명유래]/ 2015.09.05./ 하여 사당골이라 불렀는데, 鄭씨 집안의 강당도 있었기 때문에 강당골, 또는 서당골로 고쳐 부름. 솔친재, 솔친저 솔친정(松伐亭) 재너머, 저너머 고평1리 솔숲 속에 옛날.../ blog.daum.net/k1810316/ k12405858(daum 2017)

 

  사당골 : 예천읍 고평1리 모습/2016.12.06./ 오늘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한다. 예천읍 29개리의 현재 모습들은 20여년이 지나면... 금마교 한길건너, 한질건너, 샘동네 마을 사당골에서 바라본 고평 들판 불우실.../ cafe.daum.net/jgh6621/6YLo/ 초록향기방(daum 2017)

 

  사당골 : →옥천, →서낭댕이골

  사당동 : → 사당골

  사당바우(祠堂岩) [바위] : 용문면 내지리 둔지방(屯地坊) 북쪽 길가에 있는 큰 바위로, 앞면에 '남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6자를 음각하였다.

  사대부 가사의 형성과 전통(士大夫 歌詞의 形成과 傳統) [論文] : 브랜드 KSI논문으로,,, 이상보의 2002년 1월 논문으로, 한국고시가문학회에서 발행한 <고시가연구> 9권 57-73쪽(17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훈가이담 1781 경북 예천 배이도 1706~1786 도덕 710 청파문학10호 37 홍리가 1783 전남강진 이방익...” “...사여재가 1793 경북 예천 이천섭 1730~1807 은일 316 필사본 51 순창가 1794전 전북순창 이운영...”이 수록되어 있다.

 

  사도반세기(師道半世紀) [冊] : 감천면 대맥리 출신인 운담(雲潭) 박기찬(朴基璨 1927- , 甘泉公立普通學校, 醴泉公立農業實修學校 卒業, 初等 校長)의 저서로, 347쪽, 삽도, 사진, 22cm, 서울 신창에서 1989년에 출판하였다. KDC 370.99 4이고,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동양대이다.(keris 2005)

 

  사도세자 태봉도, 장조 태봉도(朝鮮時代󰡐胎封圖󰡑4点 發掘 : 國王 胎묻은󰡐胎室󰡑과 주변 그려…藏書閣特別展․中央博物館 展示) [記事] : 조선후기 국왕의 태(胎)를 묻은 태실(胎室)의 모습과 주변의 지리적 형세를 그린 족자 형태의 태봉도(胎封圖) 4점이 발굴, 전시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2005년 11월 18일까지 열고 있는󰡐2005 장서각 특별전-조선 왕실의 여성󰡑에 나온󰡐장조(사도세자)태봉도󰡑(1785년․100.3×62.5㎝)와󰡐순조태봉도󰡑(1806년․101.2×62.3㎝),󰡐헌종태봉도󰡑(1847년․97×60.5㎝) 등 3점과 2005년 10월 28일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왕과 국가󰡑실에 전시 중인󰡐순조태봉도󰡑(129×76㎝) 1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 장서각 소장󰡐순조태봉도󰡑와󰡐보은현속리산태봉도(報恩縣 俗離山胎峯圖)󰡑라는 표제가 붙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순조태봉도󰡑는 족자 형태와 그림의 내용, 필치까지 흡사해 한 사람의 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존하는 태봉도 4점이 새로 발굴돼 한꺼번에 전시된 것도 매우 드문 일일 뿐더러 각기 제작 시기가 다른 장서각 소장 태봉도 3점에선 도상의 변화가 엿보여 회화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태실을 설치한 것은 한국이 중국보다 앞선다. 고려시대에 이미 왕실의 제도로 확립됐으며󰡐삼국사기󰡑에 기록된 김유신의 태실까지 감안하면 신라 때부터 관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태는 태아에게 생명을 부여한 근원으로 간주됐을 뿐 아니라 태아의 일생에 미칠 길흉은 물론 왕실 및 국운과도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왕자와 왕녀가 태어나면 바로 그 해에 길지(吉地)를 골라 안장하고 태실을 만드는 것이 관례였다. 또 태의 주인공이 왕위에 오르면󰡐석물 가봉(石物加封)󰡑이라고 해 기존의 태실을 특별히 석물로 단장했다. 이런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의궤(儀軌)와 함께 태실과 주변 지세의 경관을 그려 어람용(御覽用)으로 왕실에 올린 것이 태봉도다.󰡐태를 묻은 봉우리󰡑란 의미에서 󰡐태봉도(胎峯圖)󰡑로 표기하기도 한다. 정조부터 헌종 연간에 제작된 장서각 소장 태봉도 3점은 구한말 왕실 서고의 하나인 창덕궁 봉모당(奉謨堂)에 소장됐던 것이다. 1910년 필사된󰡐봉모당봉장서목(奉謨堂奉藏書目)󰡑에 기록된 제명(題名)과 장서각 소장본 족자 겉면에 적힌 제명도 거의 일치한다. 다만 사도세자가󰡐장조(莊祖)󰡑로 추존된 것이 1899년(광무 3)이기 때문에 족자의 제명은 1899년 이후에 썼음을 알 수 있다. 장조(1735~1762)와 순조(1790~1834), 헌종(1827~1849)의 태실은 각각 경북 예천과 충북 보은, 충남 예산에 있다. 이 중 왕으로 추존되기 이전인 정조 9년(1785) 이례적으로 석물 조성이 이뤄진 장조의 태실은 태실 이름도 당시 묘호(廟號)를 따󰡐경모궁태실(景慕宮胎室)󰡑로 기록돼 있다.

 

  현존하는 태봉도 4점은 모두 종이에 수묵담채(水墨淡彩)로 그려져 있다. 태봉을 둘러싼 주변 능선을 높은 시점에서 조망한 부감법(俯瞰法)으로 태실 전체의 지형과 지세를 표현하고 있어 명산을 그린󰡐총도(總圖)󰡑 또는󰡐전도(全圖)󰡑식 구도와 유사하면서도 왕실 능묘를 그린󰡐산도(山圖)󰡑식 지형도의 특색도 포함하는 등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가령, 문종대왕의 태실이 위치한 경북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명봉사 뒤편에 조성된 장조의 태실을 그린 󰡐장조태봉도󰡑는 풍수 지리적 측면을 강조한 기존 산도식 지형도의 전통이 강하지만 속리산 아래 순조의 태실을 그린󰡐순조태봉도󰡑는 속리산의 전경을 그린 총도식 구성으로 19세기 초기 지형도의 양상을 엿볼 수 있다. 반면에 충남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 아래 위치한 헌종의 태실을 그린󰡐헌종태봉도󰡑는 겸재 정선의 실경산수화와 비슷해 태봉도 회화 양식의 진전을 보여준다. 장서각에 전하는 600여 점의 족자형식 왕실 탁본 자료 중에서 태봉도를 발굴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의 윤진영 전임연구원은,󰡒태봉도를 살펴본 결과 태실 명당의 기준은 능묘와 달리 산맥이 이어지지 않고 끊어져 있으며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한 복발형(覆鉢形) 지형인 점이 특징󰡓이라고 밝혔다.(최영창 記者 文化日報 2005년 11월 1일)

 

  사도세자 태실(思悼世子 胎室 遺蹟 ; 國家文化財 指定 推進) [記事] : 예천군은 2015년 10월 20일 조선왕실 태실 유적 복원 종합정비 연구용역이 완료됨에 따라 사도세자 태실 유적 및 문종대왕 태실 유적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신청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사도세자 태실은 화성시의 융릉과 함께 정조가 왕의 격식으로 특별히 조성한 곳으로 살아있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죽어서까지 효를 다하고자 했던 정조의 효성이 담겨있는 문화유적이다. 특히, 사도세자는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다뤄지는 인물로 그의 태실 유적이 상리면 명봉사에 위치한 것이 밝혀짐에 따라 향후 옛 왕조 태실 문화를 현대적 생명문화의 가치로 이어나가는 문화유적으로서 가치가 부각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예천군에서는 명봉사에 위치한 문종대왕 태실과 사도세자 태실 유적 복원 사업을 통해 앞으로도 조선왕조 태실문화의 산 교육장이자 정조의 효심을 보여주는 문화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한편, 예천군은 현재 87건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사도세자 태실유적을 비롯한 예천권씨 용문재사, 청단놀음 등 14건의 문화재가 현재 지정절차를 밟고 있다. 이들 문화재가 지정되는 2016년도에는 전국 23번째 경북에서 4번째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문화거점 지역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예천군 관계자는 “이번 계기를 토대로 우수한 전통문화를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지역문화에 대한 자긍심 고취는 물론 정신문화 계승·홍보를 전개해 신 도청 소재지로서 문화유산과 연계된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醴泉新聞 2015년 10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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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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