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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2,074 : 산성리...(부,예천읍 출신 장광덕 작가, 고희 기념 화집 <이곳에서 저곳으로>를 발간함...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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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리(6.25當時 美軍 醴泉 誤爆 첫 確認) [뉴스 9] : ◉앵커: 한국전쟁 당시 경북 예천군 산성리에서도 미군의 폭격으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다는 미군측의 공식 문서가 발견됐습니다. 박정호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1951년 1월 19일,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에 미군의 폭격이 실시됐습니다.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집안일을 하다가 불벼락을 맞았습니다. ◉안식모(74살/경북 예천군 산성면): 대포를 쏘니까 저리 내려갔어. ◉이기매(74살/경북 예천군 산성리): 비행기가 와도 예사로 봤지 때릴 줄은 몰랐어요. ◉기자: 일가족이 몰살당하거나 파편에 맞아 부상당한 주민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1951년 당시 경북 예천군 산성리에는 100여 가구가 살고 있었고 일부 외딴집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민가가 미군에 폭격을 당했습니다. 50년 만에 공개된 미 국방부의 비밀문서에는 당시 민간인 34명이 숨지고 실종이 30명, 부상이 72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적군의 피해는 한 명도 없었던 것으로 보고됐습니다. 미군의 오폭으로 애꿎은 민간인들만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하지만 오폭이 아니라 대량 학살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미군측이 또 다른 비밀문서에서 주민들이 적을 지원했고 폭격은 정당했다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산성리 주민들은 미군의 비밀문서에서 양민 희생이 사실로 밝혀진 만큼 정부와 미국에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KBS뉴스 박정호입니다.([사회] 입력 : 2002.02.05)
산성리(山城里) [里] : 보문면에 있는 행정 동리로, 한국 전쟁 때 순흥 안씨가 약 150가구에 1천여 명의 인구가 도란도란 모여 살던 집성촌이었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당하였다. 1999년 10월 18일 국회 국방위의 국방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국민회의 장영달 의원은 이르기를, "1951년 1월 18일 보문면 산성리에서는 미군이 양민을 학살하는데 월남전에서 악명을 떨쳤던 네이팜탄을 사용했다는 의혹이 있다."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날 낮 12시 경 미군 전투기 6대가 날아와 폭탄을 대량 투하하고, 기름을 뿌려 마을이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50여 명이 숨지고 90여 명이 부상했다"라고 밝혔다. 또 동아일보(99.10.18)에서 기록하기를, "보문면 산성리에 1950년 1월 19일 낮 12시 경 미군 정찰기 1대가 산성리 마을 상공을 저공비행한 뒤 나타난 폭격기 6대의 폭격에 의해 가옥 120채 중 88채가 전소, 48명 사망, 9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라고 하였다(韓國民族民主인터넷放送局, 인터넷 한미르 2001).
[인터넷] : 1) 아직도 가시나무 숲에는 임자 없는 시신이 그득합니다.// 1951년 1월 19일 “나는 점심밥을 먹은 후, ‘조금만 놀고 들어와라.’라는 엄마의 말을 뒤로 흘린 채 집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귀찮게 따라붙은 동생들이 걸리적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신이 난다. 친구들 역시 나와 있었다. 어른들이랑 동네 큰 형들이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 동네에 우리를 혼낼 사람들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우리들을 더욱 신나게 만드나 보다. 뭘 하고 놀까. 산으로 토끼 잡으러 가자. 아냐. 자치기 하자. 그러지 말고 눈싸움이나 하자. 결국 우리는 눈싸움을 하기로 하고, 나는 애들이랑 편을 짠다. 눈을 단단히 만든다. 마음이 분주하기만 했다. 그 때 옆에 있던 친구가 갑자기 하늘을 가리키며 수선을 피운다. 고개를 올려 위를 쳐다보니, 생전 처음 보는 멋진 정찰기가 마을 곳곳에 세워진 나무 위를 가볍게 스치듯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한참 신기해하며 그 게 마을 저 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고개가 빠질 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날카로운 소리를 날리며 쌕쌕이 두 대가 하늘 위로 우리들을 향해 점점 무섭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겁이 덜컥 나, 함께 놀던 동생들의 손을 잡고 친구들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천지를 뒤흔들 듯한 ‘꽝’ 소리! 화들짝 놀라 떨리는 손으로 살며시 문을 열어보니, 이미 마을은 내가 뛰어놀던 익숙한 놀이터가 아닌, 불에 휩싸여 검은 연기를 내뿜는 나뭇더미들과 무섭게 달려들 것만 같은 불바다였다. 옆방에서 물레질하던 엄마가 다급하게 나와 동생들을 부르고, 나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방에서 맨발로 나와 넘어지고 비틀대며 잰걸음으로 산 쪽으로 뜀박질을 했다. 그때, 바로 옆 나뭇가지에 널려 있는 채, 다리에서 시뻘건 피를 철철 흘리는 동네 먼 친척의 모습, 너무 무서워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무섭기만 하다. 막 뛰었다. 다행이 저기 산 쪽에서 아빠가 뛰어오며 나와 엄마를 부르신다. 그냥 앞만 보고 달린다. 눈에 자꾸 보이는 끔찍한 모습에 눈도 질끈 감고 막 뛴다. 아빠에게 가면 더 이상 무섭지 않을 것만 같다.
2) “내 사촌뻘되는 형이 나무에 사지가 걸려 피를 철철 흘려대는데”// “아이구, 나가 보니 온통 불길이고 형편도 없어요. 폭탄을 맞아 날아가 나무에 걸린 사람, 다리에 피를 철철 흘리는 사람, 불에 대여서 뜨겁다 카며 비명 질러대는 사람, 그득했어요.” 안병의 씨, 당시 11살짜리 아이는 이제 60세의 노인이 되어 산성리 이장을 맡고 있었다. 그 하루 동안의 무차별 폭격으로 산성리 마을에는 49명의 희생자와 90여 명의 부상자가 생겼고, 그 중에는 임산부도 6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더군다나 순흥 안씨 집성촌인지라, 그 날 폭격으로 안태기 씨는 조부 안인모 씨, 숙모 오옥난 씨, 숙모 안희구 씨 동생 안두기 씨를 한꺼번에 잃기도 하는 등 산성리에서는 아직도 1월 19일이 되면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 당시 약 150가구 약 1천 명 정도의 인원으로 꽤 큰 마을이었던 산성리는 그날 이후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찾지 못했다. “그 때가 섣달이라 눈이 하옜어요. 근데도 눈 위에 시퍼런 불이 펑펑 뛰고 불바다가 됐지, 어른들이 이야기하시길 6대의 비행기가 와서는 폭탄도 터뜨리고 기관총도 쏘고 드럼통 채 휘발유를 뿌렸다는 기라, 그래가지고 다 타버렸어요.” 산성리에는 아직도 그 때 폭격의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도 많다. 안상진(48세) 씨는 좌측 상처가 깊이 패여 있다. 이에 산성리 주민들은 1996년에 산성리 참사사건에 대한 자료를 모아 국방부에 보내는 등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을 했으나 돌아온 것은 ‘시효가 너무 오래되었고, 뚜렷한 증거가 없어서 불가능하다.’라는 서신이었다. 그 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있었던 주민들은 이 번 학살사건에 대한 여론에 힘입어 다시금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날 그렇게 폭격해대고 한 3일 후에 미군 5명 정도가 와서는 여기 사진을 찍어갔다 케요. 그래 요즘 생각해 보니, 그 것이 확실한 증거겠다 카는데, 그리고 1990년엔가 영천에 있는 탄약부대에서 폭탄을 처리하러 와서 당시 지서장이던 장정일이라는 사람하고 바위에 그 폭탄 조각들을 놓고 불을 지르고 사진까지 찍어갔다 카는데, 지금 그 것을 못 찾고 있대요. 그 사람을 만나면 그때 그 부대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사진을 보유하고 있는지 알 수 있고, 그라면 그가 증거가 되니까 그 걸 찾으려고 지금 신경을 쓰고 있어요.
3) “학살을 증명하는 기관총알 두 개는 말없이 녹슬고 있다.”// 1951년 1월 19일 당시, 미군은 정찰기로 낮게 날며 산성리를 살폈다. 그 정도면 그들은 산성리에 적이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산성리에는 인민군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정찰기가 돌아간 후 바로 뒤에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조용하기만 했던 마을을 단 몇 분 사이에, 시체들이 딩굴고 잘려진 팔다리가 주인 없이 눈밭에서 구르며 하얗던 눈밭이 순식간에 검붉어진 죽음의 땅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며칠 후, 그 곳으로 돌아와 자신들이 저지른 학살의 현장을 사진으로 담고 돌아갔다. 몇 몇 주민들이 지난 침묵의 세월을 증명하듯 녹이 슬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휘발유 드럼통의 부분 조각과 글씨 새겨진 부분이 닳고 닳아 알 아 볼 수 없는 기관총알 두 개를 보여준다.
◆ 예천읍 출신 장광덕 작가, 고희 기념 화집 <이곳에서 저곳으로>를 발간함...축하합니다.
장광덕(예천읍 용산1리 출신 장광덕 작가 인사동 아리수 갤러리 초대전) [기사] : 2월 15일∼28일 … 고희 기념 화집 '이곳에서 저곳으로' 발간/ ▲36년 동안 교직에 몸담았던 장광덕 작가는 문경여고에서 퇴임했다. 예천읍 용산1리 출신의 장광덕(문경시) 작가가 고희를 맞아 발간한 화집('이곳에서 저곳으로')을 기념하는 초대전이자 13회 개인전을 가진다. 2월 15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아리수 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번 초대전에는 10호 크기부터 80호 크기의 작품 40점을 선보인다. 작품에서 캔버스에 채색된 색깔과 일정한 방향 없이 흩어진 드로잉들은 공간을 조형적으로 장식하기보다는 작가의 체취를 더 강하게 반영한다. 색깔도 마찬가지다. 빨강 옆에 이웃해 있는 파랑 그리고 빨강과 대치된 연두, 순도 높은 색끼리의 대비는 어울리기보다 서로 마찰하는 느낌을 준다. 서성록 미술평론가는 "그의 작품은 색깔들로 아롱진다. 살아있는 존재에서 나오는 발랄함과 상그러움이 묻어나온다"며 "드로잉의 율동은 경쾌한 리듬에 맞추어 춤추는 사람들처럼 흥겹다. 그의 작품에 흐르는 정서는 어둡고 침침한 것이 아니라 밝고 화사하다. 생동감과 활기찬 움직임이 봇물처럼 넘쳐난다"고 밝혔다. 장광덕 작가는 "작업의 시간은 고통이 수반 되지만 골격을 세우기 위해서는 자신과 싸움의 연속이었다. 현재도 그리고, 지우고, 다시 여과해서 그리는 반복적인 작업을 하며 천직임을 자각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 "그동안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새로운 창작의 세계로 가고자 하는 바람으로 고희를 맞아 화집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장광덕 작가는 예천동부초(19회), 대창중(21회), 경북예술고, 계명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인천대 교육대학원(서양화 전공·석사)을 졸업했다. 경북미술대전, 대한민국 정수미술대전, 경기미술대전, 성산미술대전, 대구미술대전, 경남미술대전 심사위원, 한국미협 문경지부장 등을 역임했다. 장광덕 작가는 경북미전, 대한민국 정수미술대전, 대한미협, 대한민국 국제친환경현대미술 초대작가로 활동 중이며, 36년 동안 몸담았던 교직을 퇴임한 뒤 작품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예천신문 2023.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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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