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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2,077:산성리...(부,예천방문1698)
작성자이춘우 @ 2023.02.14 06:07:03

  도청신도시 예천 2,077 : 산성리...(부, 예천방문 1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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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리(韓國戰爭 美軍爆擊現場 醴泉 山城里를 가다) [記事] : 한나 아렌트는 20세기를 폭력의 세기라고 했다. 그러나󰡐폭력󰡑이라는 단어만으로 20세기를 규정짓기에는 20세기는 너무나 잔혹했고 그 시대를 살아 온 사람들은 억울했다. 인류가 휘두르는 천만 가지의 폭력 중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전쟁이라면 전쟁이 낳은 가장 극단적인 폭력은 민간인 학살이다.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던 산골 사람들이 어느 날 맑은 하늘을 가르고 마을 상공을 지나가던 비행기를 쳐다보다가 비행기에서 떨어트린 폭탄과 기관총에 맞아 처참하게 죽어갔다고 한다면 우리는 영화󰡐웰컴 투 동막골󰡑을 떠올릴 것이다. 영화 동막골에서는 다행히 주인공들의󰡐영화 같은󰡑활약으로 참사를 막아냈지만 이곳 산성리에서는 실제로 이런 참사가 빚어졌다. 산성리는 한국전쟁 당시였던 1951119일 미 공군에 의해 무차별 폭격을 당해 69호에 이르던 마을이 초토화되고 사망과 실종 64명을 포함해 136명의 사상자를 낸 우리 현대사의 가슴 아픈󰡐동막골󰡑이다. 이날 일행들은 2005628일 안동MBC에서 방영한 󰡐산성리 폭격의 진실󰡑의 담당 PD인 강병규 PD의 안내로 산성리를 방문했으며, 마을 주민들의 증언과 강 PD의 취재기를 들은 뒤 위령제를 지내고 고인들의 억울한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산성리 폭격의 비극을 대강 정리하면 이렇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많이 바뀐 19511월 미군은 38선 이남에 남아 있던 북한군의 도주로 차단과 빨치산 소탕을 위해 충북과 경북의 경계를 이루는 소백산맥 지대의 전선에 전투력을 집중한다. 미군은 195011월의 중국군 참전으로 수세에 몰리자 화력이 우세한 공중 폭격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으며 이는 북한 지역 뿐 아니라 소백산맥 전선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당시 이 전선을 맡고 있던 10군단 사령관 알몬드(Edward. M. Almond) 장군은 일명󰡐지구소각작전󰡑의 신봉자로󰡐적이 없더라도 그들이 은신할 가능성이 있는 마을을 미리 네이팜으로 폭격하여 태우는 것이 최고의 전술󰡑이라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1951119187공수연대의 요청에 의하여 산성리에 3차례의 공중 폭격이 감행되었고 임산부, 노약자 어린이가 대다수인 136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1952년 미 8군과 5공군의 감찰감이 합동으로 조사해 보고한󰡐합동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산성리 뒷산인 학가산에 북한군 10사단이 집결한다는 적정이 있었고 미군은 소개령을 내린 뒤 마을을 폭격하고 폭격은󰡐대성공󰡑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정작 소개령이 내려진 곳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는 신전리에 내려졌고 네이팜탄은 산성리에 쏟아졌다. 자연 여건이 비슷한 상성리를 신전리로 오인한 오폭이다. 그러나 미국과 산성리를 오가며 이 참사를 취재한 강병규 PD의 입장은 다르다. PD, 󰡒산성리 사건을 단순한 오폭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강 PD󰡐당시 미군의 작전은 10군단 사령관 알몬드가 주도한 무차별 조직파괴정책이었으며, 이는 산성리뿐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 작동했다. 이는 한반도 내의 인간을 사람으로 보지 않은 미군의 야만적 행각이었다.󰡑고 주장했다. 어린 나이에 이 참사를 겪은 생존자인 마을 주민 안희득(당시 12) 씨는󰡐1차 폭격 후 30분 이내에 마을을 휘감은 화염으로 맑은 하늘의 해가 보이지 않았다󰡑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장정들은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거나 일을 나간 사람이 많았고 주로 집안에서 길쌈을 하던 아낙네들과 마을에서 뛰어놀던 어린 아이들이 폭격을 당해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기관총이 임산부의 배를 관통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허리가 잘려나간 사람도 있었다.󰡑는 증언은 당시의 비극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주민 대책위를 맡고 있는 안태기(58) 씨는󰡒정찰기가 한 차례 마을을 돌았는데 비가 왔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비가 아니라 마을을 불태우기 위해 뿌린 휘발유였다. 그러고 나서 세 차례 폭격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한 때는 하루 저녁에 40여 호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바람에 이웃 마을에서는 곡소리가 무서워 이 마을을 출입하지 못했다󰡓고도 했다. 안희득 주민대책위원장은, 󰡒좌익이 뭔지도 몰랐던 마을을 이렇게 무참하게 박살내고 억울한 사람들을 만들었으니 명예 회복은 물론이고 정당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동안 보도가 나간 뒤 국방부에서 한 차례 다녀갔을 뿐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우리 살아생전에 (보상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며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를 질타했다. 우리 민족은 20세기를 좌우 이념 대립의 최전방에서 가장 극명한 대립과 불신, 전쟁의 광기를 겪으며 살았다. 그것은 삶이 아니라 지난한󰡐삐침󰡑의 과정이었으며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상처와 원한으로 남아 있는 치유 불가능한 과거사가 되어 있다. 그러나 더한 비극은 21세기가 깊어가도 그 상처를 치유하고 넋을 달래줄 길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지난 세기 동안 자신들이 벌린 어떤 전쟁에서도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고 어떠한 보상도 한 적이 없다. 그런가 하면 우리 정부는 아직도 허울뿐인 좌우의 분열을 넘어서지 못하고 연일 색깔론에 목을 매고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민간인 학살 문제도, 특별법이 통과되기는 했으나 진상규명은 물론이려니와 명예 회복이나 보상은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 상황이다. 위령제를 지낸 일행들이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는 동안도 고추대궁을 뽑고 메밀단을 추스르는 촌노들의 손길은 여느 때와 같았지만 여기저기서 억울한 원혼들의 곡성이 들리 듯 찬바람이 일어 학가산을 맴돌고 있었다.(황성한 醴泉인터넷放送 2006-03-18)

 

  산성리(地域 民間人 虐殺 眞相糾明 結果 未知數年內 最終報告書도 힘들 듯) [記事] : 김모씨(72대구시 북구)는 아버지만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다. 김씨는 "한국전쟁을 앞둔 19505월쯤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부친이 누군가의 밀고로 빨갱이로 몰렸다""청도군 각북지서의 순경에게 연행된 뒤 현재까지 소식이 없는 상태"라고 눈물을 흘렸다. 김씨는 200611월 대구 북구청을 통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진상 규명을 요청했다. 이모씨(66대구시 북구)1949년 부친과 삼촌을 잃었다. 당시 마을에서 좌익활동을 한 사람을 도왔다는 이유로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 뒷산에서 군과 경찰에 의해 희생됐다. 이씨 역시 200611월 진실화해위에 진상 조사를 신청했다. 대구경북지역의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질 것인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진실화해위는 2007315일 과거사 진실규명 신청사건 9,154건에 대해 조사 개시를 결정한 상태다. 이에 따라 진실화해위는 2007379일 대구 북구청에서 '청도 민간인 희생사건''경산코발트 광산사건'의 관련 유족 21명을 대상으로 신청인 조사를 벌였다. 17일에는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일대를 들렀고, 19일엔 대구시 동구 일대의 민간인 학살 현장을 답사했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청도 및 경산사건의 경우 200611월 각각 163건과 114건의 진상규명 요청이 접수됐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현재 신청인 조사는 50% 정도 진척됐다""신청인 조사가 끝나는 대로 참고인 및 가해자 조사가 시작되고 대구교도소 사건, 대구보도연맹 등 나머지 사건과도 연관해 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 규명 작업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사건 조사 인원이 90여 명밖에 되지 않은데다 관련법상 조사기간을 연장할 수 있는 시한이 2012년까지여서 제대로 일을 진행하기가 어렵다는 지적이다. 실제 진실화해위측은 접수사건 9,154건 중 대구경북지역의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한 게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진실화해위 김산영 조사관은 "지난 79일 조사 때도 장소를 구하지 못해 진실화해위로 파견된 북구청 직원의 도움으로 겨우 북구청 사무실을 빌릴 수 있었다""가해자 조사가 오래 걸리는데다 자료 조사도 미진해 올해 안으로 최종 결과 보고서가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복녕 대구지역 피학살자유족회장도 "거창과 마산, 순천 등 일부 지역은 오래 전부터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고 조사가 활발한 상태이지만 대구는 지지부진하다"면서 "현재 살아남은 유족목격자가 소수인데다 타지로 이주한 유족도 많아 조사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갈태웅 記者 쿠키뉴스 2007320)

 

  @예천방문 1698

 

  예천군 육상(예천군, 육상 전지훈련지로 각광 : 매년 1만여명 이상 방문으로 지역경기 활성화에 큰 기여) [기사] : 예천군(군수 김학동)에서 육상 전지훈련을 받기 위해 전국 각지 선수단 발길이 이어지고 있어 지역 경기 활성화에 도움을 주고 있다. 동계 전지훈련 기간인 20231월부터 현재까지 약 7천여명 선수단이 육상 훈련 인프라가 갖춰진 예천스타디움 실내육상훈련장과 모래사장 훈련장 등에서 영하의 기온에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선수단들은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두 달여 간 관내 숙박업소와 음식점 등을 이용하고 관내 주요 관광지를 방문하는 등 지역 경제에 큰 활력이 되고 있다. 이처럼 전국 각지에서 선수단들이 예천을 찾는 이유는 국내 유일 육상 실내 돔 훈련장을 보유하고 있어 계절과 날씨에 상관없이 훈련을 진행할 수 있고 특히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전지훈련과 굵직한 대회 유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군은 올해 전국 최대 규모의 육상대회인 ‘KBS배 육상경기대회를 포함해 7개의 전국 및 도 단위 대회와 국제대회인 20회 예천아시아U20육상경기선수권대회를 개최할 예정이어서 1만명 이상 선수단이 방문할 예정이다. 예천읍 한 상인은 전지훈련 기간에는 숙박업소에 공실이 거의 없고 식당에는 선수들로 가득하다.”육상선수들의 전지훈련이 지역경기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학동 예천군수는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행정으로 각종 대회와 전지훈련 유치에 박차를 가하고 육상의 메카 예천군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예천뉴스 2023.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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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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