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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2,252:서예...서울나들이...
작성자이춘우 @ 2023.08.08 05:58:12

  도청신도시 예천 2,252 : 서예...서울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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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예(書藝) [冊] : 지보면 수월리 출신인 권상호(權相浩, 1954- , 大昌高 卒業, 서울 신일高 敎師) 등의 저서로, 48쪽, 삽도, 26cm, 서울 동아출판사에서 1999년에 출판하였다.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한국교원대, 한국교육개발원이다.(keris 2003)

 

  서예인예천군연합회(書藝人醴泉郡聯合會) [團體] : 예천군 지역 서예인들의 모임(회장 한중섭, 회원 80명)으로, 회원들의 권익 증진과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군민의 날 지역 작가 서예전을 개최하고, 무료로 가훈써주기, 지역 문화 발굴 행사를 실시한다.(醴泉新聞 2003.4.3.)

 

  서옹독첩(西翁櫝帖) [古書] : 19세기에 발행된 책으로, 예천 함양 박재묵(朴在黙)의 소장본을 촬영한 마이크로필름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청구기호 MF A지수 107)되어 있다.

 

  서우도(西憂道) [마을] : 용문면 사부리(沙夫里)에 있는 마을로, 서창(西倉)과 우망(憂忘), 그리고 지도실(知道室) 등 세 마을을 합하여 부르던 마을 이름이었으나, 광복(1945) 후에 이 말이 사라졌다.

 

  서우회 [團體] : 1990년에 결성된 동창회 모임으로 시작하여 1993년부터 친목단체로 변경하였다. 친목 도모, 지역 사회 봉사, 불우이웃돕기 등을 하였다. 회장은 황진섭(1996), 한병열(1999, 회원 16명)이다.(醴泉新聞 1996.3.7 1999.2.4)

 

  서울가구점 예천지점(韓國近現代 會社組合資料 : 近現代) [事業體] : 일제 때 예천읍에 있던 사업체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회사조합명 서울家具店/ 목적 의장, 찬장/ 사장/대표 鄭在用, 安基鎭, 金學柄/ 본점주소 경상북도 영주군 영주읍 영주리 434-1/ 지점주소 경북 예천군 예천읍 서본리 27, 경북 예천군 예천읍 서본리 1-2/ 출전 광업및제조업사업체명부”(history.go.kr 2005)

 

  서울경제신문 예천지국(서울經濟新聞醴泉支局) [터] : 예천읍 노상리(路上里)에 있던 신문사 지국으로, 지국장은 김중기(金仲基, 1965)였다.

  서울나들이(京津) [傳說] : 개포면 경진리에 있는 나룻터로, 내성천과 한천이 합류하는 곳이다. 영남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갈 때 호명면의 오천을 경유해서 이 곳 한천변 주막집에 들렀다가 이사리 안동고개를 경유,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을 다녔다. 이곳은 통행객이 많아서 벙어리도 3년을 여기에 살면 말문이 트이고, 거지도 3년 만에 부자가 안 되면 빌어먹을 팔자를 타고났다고 했다. 그러나 돈을 벌면 여기를 떠나야 그 살림을 지킬 수 있다는 지형이라고 하며, 옛날의 주막 모습은 현재는 찾아볼 수 없고, 각성촌(各姓村)으로서 아직도 이곳을 '서울나들이'로 부른다.(정휘승 慶北 홈페이지 2000)

 

  서울나들이(京津 : 開浦面 京津里) [記事] : 내성천과 한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과거보러 서울로 갈 때 호명면 오천을 경유해 한천 변 주막집에 들러 이사리의 안동고개를 경유하여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다녔다. 이곳은 통행객이 많아 벙어리도 3년을 여기서 지내면 말문이 트이고, 거지도 이곳에 살면 3년 안에 부자가 안 되면 빌어먹을 팔자를 타고 났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돈을 벌면 반드시 여기를 떠나야 살림을 지킨다고 하며, 지금도 3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당시 영남의 남쪽 지방에서 서울로 소금, 특산물 등 조공을 보낼 때 이곳 나루터까지 배로 물자를 운반하였다. 서울로 가는 물자를 운반하였던 나루터라 하여 󰡐서울 나루터󰡑 또는 󰡐서을 나들이󰡑라고 불리어졌다. 지금은 옛날에 번성했던 주막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각성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포면 소재지와 지보 방면, 예천읍 방향으로 가는 경진 삼거리 지점이다. 금리와 경계 마을을 일명 검바우 또는 갈가리라고 하는데, 고려 유신인 노포 안준이 조선 개국 후 귀양지를 이곳으로 옮겼던 곳으로, 그의 후손 안승종이 집승정을 짓고 살았으며, 이황이 지은 시인 집승정 십운은 중국까지 널리 알려졌다. 덕수 이씨도 살던 터인데 임진왜란 무렵 예안 김씨의 임윤안이 영주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이래 지금은 그 후손의 집성촌이 되었다. 이곳은 옛 노포면의 중심지역으로서 경진리 301번지는 노포면소터이고, 또 경진리 329번지는 옥동서원이 자리한 남향마을이다. 인근의 동송리 진입로는 옛날 지형이 험준하여 도둑떼들이 들끓었다. 서울나들이를 거쳐 한양 가는 길손들을 괴롭히고 주머니를 털었을 뿐 아니라 행인들의 왕래도 방해하여 이곳을 󰡐도둑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포장을 하여 마을 진입로가 되었다. <자료 = 예천군>(醴泉新聞 2006년 08월 24일 13:37:18)

 

  서울나들이(京津) [傳說] : 내성천과 한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과거보러 서울(漢陽)로 갈 때 호명면 오천을 경유하여 한천변 주막집에 들러 이사리의 안동고개를 경유하여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다녔다. 이곳은 통행객(通行客)이 많아서 벙어리도 3년을 여기서 지내면 말문이 트이고, 거지도 이곳에 살면 3년 안에 부자가 안 되면 빌어먹을 팔자를 타고 났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돈을 벌면 반드시 여기를 떠나야 그 살림을 지킨다고 하며, 지금도 3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당시 영남의 남쪽 지방에서 서울로 소금, 특산물 등 조공(朝貢)을 보낼 때 이곳 나룻터까지 배로 물자를 운반하였다. 서울로 가는 물자를 운반하였던 나룻터라 하여 ‘서울나룻터’ 또는 ‘서울나들이’라고 불리어졌다. 지금은 옛날에 번성했던 주막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각성촌(各姓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포면 소재지와 지보 방면, 예천읍 방향으로 가는 경진삼거리 지점이다. 금리와 경계 마을은 일명 검바우(劒岩) 또는 갈가리라고 하는데, 고려 유신인 노포(蘆浦) 안준(安俊)이 조선 개국 후 귀양지를 이곳으로 옮겼던 곳으로 그의 후손 안승종(安承宗)아 집승정(集勝亭)을 짓고 살았으며, 이황(李滉)이 지은 시 ‘집승정 십운(集勝亭 十韻)’은 중국까지 널리 알려졌다. 덕수 이씨도 살던 터인데, 임진왜란 무렵 예안 김씨의 김윤안(金胤安)이 영주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이래 지금은 그 후손의 집성촌이 되었다. 이곳은 옛 노포면(蘆浦面)의 중심 지역으로서 경진리 301번지는 노포면소 터이고, 또 경진리 329번지는 옥동서원(玉洞書院)이 자리한 남향 마을이다. 인근의 동송리 진입로는 옛날 지형이 험준하여 도둑 떼들이 들끓었다. 서울나들이를 거쳐 한양 가는 길손들을 괴롭히고 주머니를 털었을 뿐 아니라 행인들의 왕래도 방해하여 이곳을 ‘도둑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포장을 하여 마을 진입로가 되었다.(醴泉消息 第351號 2006.11.25)

 

  서울나들이(京津) : 京津里 소속으로, 한천(漢川) 내성천(乃城川)이 합류되는 곳에 있는 마을이다. 영남(嶺南)의 선비들이 서울로 과거(科擧)보러 갈 때 이 나루터를 건너 조령(鳥嶺)을 넘어가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었으므로 조선말까지는 매우 붐비던 곳이다. 특히 이곳은 벙어리도 3년만 머물면 의식(衣食)걱정은 없을 정도로 돈을 모을 수 있으나 돈을 벌면 이 마을을 떠나야 살림을 지킬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3대(代)를 사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開浦面홈페이지 2013)

 

  서울나들이(京津) : ㅇ 위치 : 개포면 경진리, ㅇ 내용 : 내성천과 한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영남(嶺南)의 많은 선비들이 과거(科擧) 보러 서울(漢陽)로 갈 때 호명면 오천을 경유하여 한천변(漢川邊) 주막집에 들러 이사리의 안동고개를 경유하여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漢陽)으로 다녔다. 이곳은 통행객(通行客)이 많아서 벙어리도 3년을 여기서 지내면 말문이 트이고, 거지도 이곳에 살면 3년 안에 부자(富者)가 안 되면 빌어먹을 팔자를 타고났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돈을 벌면 반드시 여기를 떠나야 그 살림을 지킨다고 하며, 지금도 3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당시 영남의 남쪽 지방에서 서울로 소금, 특산물(特産物) 등 조공(朝貢)을 보낼 때 이곳 나루터까지 배로 물자를 운반하였다. 서울로 가는 물자를 운반하였던 나루터라 하여 “서울나루터” 또는 “서울나들이(京津)”라고 불리어졌다. 지금은 옛날에 번성했던 주막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각성촌(各性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포면 소재지와 지보 방면, 예천읍 방향으로 가는 경진삼거리 지점이다. 금리와 경계 마을을 일명 검바우(劍巖) 또는 갈가리라고 하는데, 고려 유신(儒臣)인 노포(蘆浦) 안준(安俊)이 조선 개국 후 귀양지(流配)를 이곳으로 옮겼던 곳으로, 그의 후손 안승종(安承宗)이 집승정(集承亭)을 짓고 살았으며, 이황(李滉)이 지은 시(詩)인 집승정 십운(集承亭 十韻)은 중국까지 널리 알려졌다. 덕수 이씨도 살던 터인데 임진왜란 무렵 예안 김씨의 김윤안(金胤安)이 영주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이래 지금은 그 후손의 집성촌(集成村)이 되었다. 이곳은 옛 노포면(蘆浦面)의 중심 지역으로서 경진리(京津里) 301번지는 노포면소(蘆浦面所) 터이고, 또 경진리 329번지는 옥동서원(玉洞書院)이 자리한 남향마을이다. 인근의 동송리 진입로는 옛날 지형이 험준(險峻)하여 도둑 떼들이 들끓었다. 서울나들이를 거쳐 한양 가는 길손들을 괴롭히고 주머니를 털었을 뿐만 아니라 행인들의 왕래도 방해하여 이곳을 “도둑골”이라 하였다. 지금은 포장(鋪裝)을 하여 마을 진입로(進入路)가 되었다.(開浦面홈페이지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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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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