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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2,261:서정평제...서짝마
작성자이춘우 @ 2023.08.17 05:55:12

  도청신도시 예천 2,261 : 서정평제...서짝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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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평제(西亭坪堤) [堤防] : 예천읍 서본2리 신예천교(新醴泉橋) 부근에 있던 제방으로, 1791년(정조 15) 홍수 때 무너져서 군수 이학영(李學永)이 쌓았다. 1832년(순조 32) 여름에 대홍수로 다시 무너졌다. 1843년 봄에 이학영의 손자인 경상 감사 이경재(李景在)의 도움을 얻어 군수 김기현(金箕絢)이 다시 쌓기 시작하여 1845년에 준공했다. 이를 기념하여 예천 사람들이 모두 "이공김공제(李公金公堤)"라로 하며, 기념비(碑銘 : 西亭坪堤事蹟碑, 幹事都廳 權夏正)를 세웠으나, 그 후 그 비는 없어졌다.(西亭坪堤事蹟碑文, 幹事都廳 權夏正)

 

  서정평제 : 조선시대 예천군의 재해 현황(예천고을원(장병창 저서)에서 발췌)/ 2013.03.28./ 정조 15)에 큰 비가 와서 약포 정탁이 1599년에 쌓았던 고평제(예천읍 고평리)와 서정평제(예천읍 서본리)가 무너졌다. 1793년(정조 17) 예천군수 이학영이 고평제와 서.../ cafe.daum.net/yms1/K6BK/ 용문중학교 제1회 동창회 | 댓글 1(daum 2017)

 

  서정평제 : 예천의 발자취 - 조선시대 8/ 서정평제를 완공하고 각각 사적비를 세움. ■ 1850(철종 1) 예천 천주교 신도들, 왜관 신나무골로 옮김. ■ 1852(철종 3) 박현령, 소요정(용문 대제)을 창건. ■ 1856(철종 7) 6월 화재로.../ www.ycehn.net/news/articleView.html?idxno=723 예천e희망뉴스(daum 2017)
 

  서정평제 : 예천의 발자취 - 조선시대 7/ 권산해를 제향. 군수 이학영, 고평제, 서정평제를 다시 쌓음. ■ 1798(정조 22) 권진락, 권문해가... 농업인대학 개강식 열려 경북 예천군 예천읍 시장로 118번지 2층.../ www.ycehn.net/news/articleView.html?idxno=669 예천e희망뉴스(daum 2017)

 

  서정평제 : 예천의 자랑 2678 : <예천고을원> 출판(2)</예천고을원>/ 출판되었다. 예천읍 백전리 출신 백산(栢山) 장병창(張炳昌, 1942-, 中等校長)의 편저로, 27cm, 도표, 456쪽, 서울 예일출판사 제작으로 예천군과 예천문화원에서 2011년 8월에 발행하였다. 목차.../ 181. 김이호(1789-1793.6) : 고평제, 서정평제가 무너짐 =206, 182. 이학영(1793.6-1794) : 서정평제를 쌓음 =207/ www.ycg.kr/open.content/ko/participate/free.bulletin/?command=e.. 예천군청(daum 2017)

 

  서정평 제방 : 西亭坪 堤防 修築期成會, 각 지주들이 모이어 결정, 工費 豫算은 六萬 圓(醴泉)/ 신문명: 동아일보 1934년/ 날짜: 1934-09-03/ 분류: 연속간행물 > 신문 > 동아일보/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신문자료/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西亭坪堤防 修築期成會, 각 지주들이 모이어 결정, 工費豫算은 六萬圓(醴泉)/ 발행년월일 1934-09-03/ 발행구분 석간/ 면수 03/ 단수 08/ 표제어 제방․축제(堤防․築堤)//

 

  서정평 제방 : 西亭坪과 高坪 兩 堤防 計劃, 불원간 착수하고저 진정, 慶北道에서 設計 中(醴泉)/ 신문명: 동아일보 1934년/ 날짜: 1934-12-04/ 분류: 연속간행물 > 신문 > 동아일보/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 신문자료/ 신문명 동아일보/ 기사제목 西亭坪과 高坪 兩堤防計劃, 불원간 착수하고저 진정, 慶北道에서 設計中(醴泉)/ 발행년월일 1934-12-04/ 발행구분 조간/ 면수 03/ 단수 01/ 표제어 제방․축제(堤防․築堤)//

 

  서쪽 미흘 : →미울 서쪽마

  서종일 선정비(徐宗一善政碑), 비 [碑] : 예천군 현동면(醴泉郡縣東面, 現 多仁面 鳳井1里) 대골 대곡사(大谷寺) 입구에 있는 비로, 예천 군수 서종일(徐宗一, 1727年 赴任)의 비(碑銘 : 郡守徐侯宗一愛民善政碑 庚申 十月 日立)이다. 이 마을 대곡절(大谷寺)은 서울로 통하는 역로(驛路)의 길목이었으므로 오가는 손님 눈에 잘 보이도록 선정비를 세우게 되었다. 원래는 역로 여러 곳에 있던 비들을 1980년에 면장이 대곡사(大谷寺) 입구에 모아 세웠다.

 

  서죽골 : →시줏골

  서지 김윤식 시 연구(西芝 金潤植 詩 硏究) [學術저널] : 예천 출신인 조두섭(趙斗燮, 1948- , 大邱大 敎授)의 논문으로, 경산대학교 경산문화연구소에서 2000년에 발행한 <경산문화연구> Vol.4 No.1 159-179쪽(21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 주제어 서지 김윤식 시 순수 농민시 시적 사유구조이다. [초록] : 지금까지 김윤식에 대한 전기적 연구나 자료 정리 차원의 현상적 연구를 벗어나 그의 작품에 나타난 시적 사유구조를 밝혔다. 이러한 작업은 자유당과 군사 독재의 정치적 담론에 의하여 주체가 망각되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압도하던 시대를 살아가면서, 오직 세상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살려고 한 김윤식의 시적 주체 구성 형태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김윤식 시는 파토스적인 저항시와 순수 농민시의 두 갈래로 시적 특징을 정리할 수 있다. 먼저 파토스적인 저항시는 4.19에 촉발된 1960년대의 김수영․신동엽의 참여시보다 앞선다는 점에서 시사적 의미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여 김윤식의 현실 응전시는 4.19에 의하여 촉발된 것이 아니라 4.19를 촉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자리가 분명하게 된다. 즉 그의 저항시는 당대 학생운동 결과에 고조된 분위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내발된 정의감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문학사에서 4.19 열기에 의하여 태동된 4.19 문학의 단초는 김윤식의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과 같은 2.28 문학에 있다. 김윤식 저항시의 사유구조의 핵심은 타자의 동일화 담론에 대한 응전으로서의 파토스이다./ 또 다른 농민시는 농부 시인으로서 자연과 은밀한 교감을 통하여 아우라를 느끼며 자연의 질서를 깨달아가는 기쁨을 노래한 시이다. 이 깨달음은 우주 만물의 근본인 이(理)의 질서에 의한 유가적 인식론이기도 하다. 김윤식의 자전적 농민시가 전략적인 것은 정치적 현실의 경직성에 대응하는 하나의 알레고리를 드러내는데 있다. 그 알레고리는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김윤식 시의 이 두 가지 시적 사유구조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가 살아간 시대는 주체가 주체를 온전하고 바르게 구성할 수 없는, 정치적 담론이 주체를 억압하거나 그들의 논리에 주체를 종속시키던 몰주체적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파토스적인 저항시나 서정적 농민시는 이상적인 주체를 구성하는 과정의 자전적 시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즉 그의 시는 주체가 타자가 되어 주체를 구성하는 자전적 기록이다. 그의 자전적 시에서 중요한 점은 자신을 자신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타자의 담론에 대한 저항이라는데 있다./ 이러한 사유구조는, 그가 스스로 자신을 규정한 '西芝'라는 주변인(marginal men)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주변인이란 시적 저열함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 담론 구성체를 극복하려는 전략이다. 이 전략의 시적 사유구조가 자전적 시 쓰기 형식이다. 자전적 시 쓰기는 자신의 주체를 탐색하는 또 다른 주체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일정한 구조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텍스트 밖의 주체가 텍스트 내의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시의 의미는 분명하게 된다. 정치적 담론을 텍스트 내의 주체와 텍스트 밖의 주체가 역동적으로 구성하려는 균형감이다. 그는 이 균형감의 준거를 이(理)의 질서에 두고 있다. [목차] : 목차/ Ⅰ. 논점의 제기 = 159/ Ⅱ. 자전적 시 쓰기 = 161/ Ⅲ. 2.28시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 = 168/ Ⅳ. 순수 농민시 = 174/ Ⅴ. 결어 = 177(keris 2006)

 

  서지재(棲遲齋) [齋舍] : 지보면 대죽리(大竹里)에 있던 재사(齋舍)로, 유해종(柳海宗)이 서식하던 곳이다.(醴泉郡誌 1939, 朝鮮寰輿勝覽 1929) →만죽정

  서짝마 [마을] : 감천면 현내리(縣內里) 안마에서 북서쪽으로 양지바른 곳에 있는 작은 마을로, 창마 서쪽에 있으므로 서짝마라고 한다. 감천현 서문(甘泉縣西門) 밖이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서짝마 : 봉산서당 이야기/ 2014.09.07./ 1895년(고종 32) 예천군 감천면에 편입되었다. 현내리는 ‘서촌’, ‘창촌’, ‘평촌... 봉산서당(鳳山書堂)이 있다. 서촌(西村)은 ‘서짝마’라고도 불린다. ‘창촌’의.../ cafe.daum.net/redfox1211/W4cl/48 딸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들..(daum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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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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