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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2,266 : 서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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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집(西河集) [冊] : 고려 때 서하 임춘(林椿)의 원저(原著)를 중앙대 교수 진성규(秦星圭, 下里面 出身)가 역주(譯註)한 책으로, 460쪽, 22cm, 1984년 7월 20일에 전광산업사(電鑛産業社)에서 인쇄하여 서울 일지사(一志社)에서 발행하였다. [임서하문집서(林西河文集序)] : 이 책은 고려시대 서하공(西河公 林椿)의 시문집이다. 후손 상학(相鶴)이 나에게 글을 청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나는 고루하고 공의 행적이 자세하지 못하므로 사양한다."했더니만, 후손이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는 고려 때 충효가 뛰어난 문벌입니다. 공의 조부 중간(仲幹)은 시호가 충경(忠敬)으로 당시 이름난 신하였습니다. 공은 그 분의 자손으로 태어나면서 영특하고 보통아이들과는 달랐습니다. 2,3세에 이해하지 못한 말이 없었고, 또한 7세에 깨닫지 못한 글이 없었습니다. 장성함에 <성리종회(性理宗會, 失傳)> 10편(篇)과 <삼재상수지학(三才象數之學, 失傳)> 20편을 저술하였습니다. 한 번 저술이 있으매 사류(士類)들이 귀중한 옥과 구슬을 패용하 듯이 전송(傳誦)하여 장차 크게 문사(文辭)로서 국가의 성함을 울리려고 했으나, 운명은 험악하고 목숨은 짧았습니다. 미수(眉수) 이공(李仁老)이 제문에서 말하기를, '매서운 메와 눈 속의 소나무도 그 굳세고 열렬함에 견줄 수 없고, 재주는 북두칠성과 서로 다투고, 이름은 태산과 같이 멸하지 않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당시의 소중된 바와 바램이 이와 같았습니다. 공은 예천의 지과리(知過里 : 普門面 玉泉洞)에 은거하여 그 집을 희문당(喜聞堂)이라 하였습니다. 여러 번 부름을 받고 기피하였으니, 지금도 유지(遺址)가 남아 있습니다. 공의 이름은 춘(椿)이고 자는 기지(耆之)며 서하는 호(號)입니다. 삼사사(三司使)에 추증되고, 시호는 절의(節義)입니다. 공의 아들 경세(敬世)는 벼슬은 찬성(贊成)이고, 손자 숙(淑)은 좌리공신(佐理功臣)이고, 택(澤)은 판민부사(判民部事)며, 증손 난수(蘭秀)는 조선 초에 와서 절개를 지켜 금강(錦江)에 살면서 독락정(獨樂亭)을 짓고 지내니, 임금(李成桂)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한쪽 모퉁이의 강산을 내려 주시고 포상하셨습니다. 그 후 이 곳에 사당을 세우고 서하공과 같이 제사를 지냈습니다. 공의 유집은 6권이 있으니 인쇄에 붙여 널리 배포했으나, 병란(兵亂)을 만나서 분실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담인(澹印)이라는 승려가 있어 구리항아리에 담아서 약야계(若耶溪) 옆에 보관하였는데, 숙종 때 운문사(淸道 雲門寺) 승려 인담(印澹)이 이상한 꿈을 꾸고 사찰의 가까운 산록을 파서 담인이 보관한 것을 찾았으니, 기이하도다!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문필과 시에 신이(神異)한 바가 되어 그 때 상국(相國) 최공(崔錫鼎)과, 동평위(東平尉) 정공(鄭載崙)이 서로 교정하여 인쇄하였으니 이 모두가 국사나 야사에 기록된 바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청합니다."하였다. 나는 엄숙한 글을 지어 말하기를, "글이란 천하의 지극한 보배다. 그 온축되고 응결된 빛이 나타나고 감추어지는 것은 비록 운수가 있으나 끝까지 매몰되어 가리어지지 않는 것은 아마 신의 보호하는 까닭일 것이다. 푸른 바다의 구슬이나 풍성에 묻혀진 칼이 어찌 끝까지 숨어서 나타나지 않겠는가?" 공은 불세출(不世出)의 재주를 가졌으나, 큰 기상이 때를 만나지 못하였고, 금석같이 단단하고 보물같이 아름다운 수(繡) 같은 생각이 좌절되어 뒤엉킴과 비분강개(悲憤慷慨)가 시로서 나타나면, 높고 험한 산이나 큰 물줄기 같아서 휘어잡거나 건널 수도 없다. 그 안에는 아름답고 잔잔함과 정영(精英)한 기운의 빛남과, 품격의 초탈함이 내포되어 있어, 학사(學士)와 훈장(訓長)들이 엿보고 헤아려 망령되이 평가할 수 없다."하였다. 당시 이인로의 서문은, "임춘의 문장을 고문(古文)이라 하고, 시는 소아(騷雅)라 하였다. 배우는 사람들은 흠모하여 읊으면서 굴상(屈床)의 반열에 두려 한다."라고 하였으니, 누가 공과 마음이 일치되는 사람으로 양우(良友 : 李仁老)에 견줄 사람이 있겠는가?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 : 1849年 領議政) 근찬(謹撰), 통정대부 전행사간원 대사간(通政大夫前行司諫院大司諫) 용인(龍仁) 이돈상(李敦相) 근서(謹書)"
[서(序)] : 임달상(林달相)이 선조 서하공(西河公, 林椿)의 유집을 안고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 유집이 간행된 지 70년의 세월이 흘러 여러 번 병화(兵火)를 겪어서 십중팔구(十中八九)는 분실되었으므로 사라질까 두려워 조각하는 사람에게 거듭 의논하였습니다. 원컨대, 한 마디 말을 얻어 전말(顚末)을 삼을까 합니다." 하였다. 세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더욱 강권하므로, 이에 감히 손을 씻고 향(香)을 사루어 떨면서 말하기를, "옛날 비직(費直, 漢 나라 古文家)은 주역(周易)의 설명을 잘 하여 강성(康成 : 後漢 鄭玄의 字)에게서 중망(重望)을 얻었고, 창려(昌黎 : 唐 나라 韓愈의 號)는 고문(古文)을 부르짖어 여릉(廬陵)으로 인해 실력이 빛나게 되었으니, 그 온축됨이 정치(精緻)한 연고로 나타남이 불꽃같았고, 그 쌓음이 두터운 연고로 오래 전하게 되었다.
곧음으로 세상이 취사(取舍)를 삼으면 때에 따라 나타남과 은둔함이 환하지 않겠는가? 나의 천박한 견해와 식견으로도 공은 대현(大賢)일진저! 공은 고려 중엽에 살았는데, 불도(佛道)가 멋대로 행하여져 선비들이 떳떳함을 상실했으나, 홀로 택지(擇地)와 명교(名敎)를 할 줄 알아 애써서 분전(墳典 : 古代의 典籍)의 지식을 쌓아서 자만의 뜻은 죽어서도 연민(憐憫)을 받지 못했고, 굳건한 절개는 은둔해서도 번민하지 않았다. 죽음에도 정도(正道)를 얻어 죽으니, 이는 공이 시종 변하지 않음을 견지한 것이니, 비록 큰물 가운데 있는 지주(砥柱 : 선비)와 어두운 거리의 일월(日月)이라 해도 지나침은 없을 것이다. 성명(性命)의 근원을 해결하고, 상수(象數)의 이치를 넓히는 데 이르러서는 현관 비건(玄關秘鍵 : 法藏)하고, 옥시금륜(玉匙金륜 : 이와 혀)은 가는 곳마다 뛰어나서 조금도 부족됨이 없었다. 그 밖에 시문은 재주가 넘쳐흘려 분식(粉飾)을 하지 않았고, 한 자 한 폭이라도 스스로 똑 발라서 창무(暢茂)하기를 일삼지 않으니 광채가 스스로 조화로워, 칼집을 벗어나 매단 것을 푸는 지경에 이른 것 같았다. 당시 대가(大家)인 백운(白雲 : 李奎報)과 미수(眉수 : 李仁老) 같은 사람들이, 위엄 있는 봉황과 상서로운 기린과 북두칠성이나 태산처럼 추앙하니 우뚝하여 후학의 표준이 되었다. 운문사(雲門寺) 구리그릇에 소중히 보관한, <서하집>이 또한 타지 않는 옥(玉)이라는 것도 알 것이다. 나는 이 <서하집> 보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성리종회(性理宗會)>, <패림(稗林)>, <기아(箕雅)> 등의 책을 고구(考究)하면서 공의 시말을 알 수 있었거늘 하물며 조선 때 송시열(宋時烈)이 의연한 붓으로 철저히 실상을 기록했고, 호로(壺老 : 南龍翼의 號), 담옹(潭翁)의 선후(先後) 평찬(評讚)이 사림(士林)에 대단히 소중한 것이 되고 후세의 <돈사(惇史 : 惇厚한 德의 歷史冊)>가 되니, 이른바 온축(蘊蓄)이 정치(精緻)하면 나타남이 불꽃같고 쌓임이 두려우면 오래 전한다 하였으니, 취하거나 버리거나 나타나거나 숨는 것이 과거와 현재에 관계되지 않음이 없을진저. 대체로 논한다면, 공의 이학 문장(理學文章)은 낙건학(洛建學 : 洛陽의 程顥와 建陽의 朱子의 學問)에 소급되었고, 역수(易數)의 설은 악와(樂窩 : 宋 나라 邵雍)의 설을 힘써 따랐고, 고문(古文)은 목수참군(穆修參軍 : 宋 나라 사람, 參軍은 벼슬)을 따랐고, 시아(詩雅)는 원화ㆍ장경(元和長慶 : 漢唐時代) 이후의 언어는 아니니, 장차 독론(篤論)의 군자(君子)를 기다려야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숭정기원후 4을축(崇禎紀元後四乙丑 : 1865) 대려지월(大呂之月 : 12월) 중한(中澣 : 中旬)에 오천(烏川) 정해상(鄭海尙)이 서문을 짓다.
[서하집중간서(西河集重刊序)] : ...임춘(林椿) 선생은 뛰어난 재예(才藝)를 짊어지고 한 시대를 크게 울렸다. 문단(文壇)의 평가는 소장공(蘇長公 : 宋의 蘇東坡)의 풍격(風格)을 얻었다 하고, 미수(眉수 : 李仁老)의 제문(祭文)에는, "이름은 태산(泰山)이나 화산(華山)과 같이 불멸할 것이요, 재주는 북두칠성과 서로 다툰다"라고 하였으니, 당시에 인정받음이 성대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장이 전하는 것은 만 몇 편뿐이므로 정말로 태산의 한 줌 흙이요, 한 점 고기로 귀중한 솥 안의 고기맛을 알 수 없어서 말하는 사람들의 한이 되었다. 이 때 야승(野僧)이 강안(江岸)의 땅을 파서 구리로 만든 술독 하나를 얻었다. 그 가운데 시문으로 된 <서하집> 권 1책의 인본(印本)이 있었는데, 그 후 그 책은 청도(淸道) 선비의 소유가 되었다. 하의 후손 재무(再茂)가 방문하여 구독하였는데, 홍양 영장(洪陽營將)이 되어서 간(重刊)하여 널리 배포코자, 나에게 보여 주면서 교정을 요구하였다. 나는 손으로 어루만지며 여러 번 감탄하였다. 집아이 창대(昌大)와 잘못되고 없어진 부분을 정하니,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소문을 듣고 즐거이 그 일을 도와 훌륭히 인쇄하였다. 또 서문을 부탁하기에, "나는 이미 퇴락되어 그 일이 경중(輕重)이 될 것이 없고, 하물며 공의 문장이 어찌 나의 말을 필요로 하겠는가?"하면서 사양하였다. 그러나 간청에 사양할 수 없어 삼가 한 미디 말을 하였다. 무릇 빛나는 구슬과 아름다운 옥(玉)이 비록 진흙 속에 버려져 매몰되어도 그 정영(精英)한 빛은 스스로 사라지게 할 수 없고, 오랜 세월 뒤에도 빛이 발산되어 천하의 명기(名器)가 된다. 왜냐하면 천지의 보물이기 때문이다. 서하공은 높은 재주 뛰어난 기상으로 한 번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평생에 곤궁하게 떠돌아다니다 일찍 죽었다. 저 중국의 양자운(揚子雲) 같은 문장가도 녹위(祿位)와 용모로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더니, 임공은 더 심한 것 같다. 그러나 그 문장은 마침내 사라지지 않았다. 이 책은 큰 강가에 깊이 흙 속에 묻혀서 파도가 침식하고 토양이 찌는 바가 몇 백 년이 되는지는 몰라도 더러워지고 훼손됨이 없이 하루아침에 발견되니, 완연히 본래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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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