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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2,287:석문별묘...석문선생문집...
작성자이춘우 @ 2023.09.12 06:10:30

  도청신도시 예천 2,287 : 석문별묘...석문선생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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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문별묘(石門別廟) [祠堂] : 지보면 도장리 익장(益庄)의 지포서당(芝圃書堂) 곁에 있는 사우(祠宇)로, 석문 정영방(石門鄭榮邦)을 제사한다.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집이고, 목조 기와집이다.

 

  석문 별묘(石門 別廟) [祠宇] : 지보면 도장리 378-1번지(垈)에 석문 정영방(鄭榮邦)을 봉향하기 위해 조선 중기에 건립한 사당으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사당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담장의 정면과 우측면에는 사주문을 세워 출입케 하였다. 시멘트로 마감한 기단 위에 큼지막한 자연석 주초를 놓은 후 기둥을 세웠는데, 전면의 기둥은 원주를 팔각형으로 다듬었다. 간살은 어칸을 양 협칸보다 조금 넓게 잡아 어칸에는 2짝의 세살문을 달았으며, 양 협칸에는 외짝의 세살문을 달았다. 가구는 삼량가(三樑架)의 홑처마이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석문별묘(醴泉道庄里 石門別廟) : *위치 :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 378-2(지포길 83-18), *연대 : 조선 중기, *규모 : ‘-’자형 사당, 사주문 1채, 일각문 1채/ 석문별묘는 지보면 도장리에 있으며, 석문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별묘 오른쪽에는 정영방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석문강당이 있다. 정영방은 본관은 동래, 자는 경보(慶輔)이다. 조부는 진사 정원충(鄭元忠)이고, 생부는 정식(鄭湜)이며, 양부는 정조(鄭澡)이다.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이 즉위하여 실정(失政)을 거듭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은퇴하여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정영방은 1636년(인조 14) 영양의 입암(立巖)으로 이주하였다가 만년에 다시 선영이 있는 안동 송천으로 돌아와 선어대 아래에 읍취정(揖翠亭)을 지었다. 이곳에서 시르 짓고 세상을 잊고 노년을 보내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용궁현(지금의 예천군) 지보면의 마산리사(馬山里社)에 제향되었으며, 편서로 <석문집(石門集)>이 있다.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의 선어연(僊漁淵)에 있다. 도장리 마을은 태을산(太乙山) 아래에 자리를 잡은 마을이며, 태을산은 풍수적으로 여성이 다리를 벌리고 있는 형국이며, 낙동강 건너 의성 다인의 비봉산은 남성이 발기하여 곧 사정을 할 형국이라 이곳에서 큰 인물들이 많이 태어난다고 전해오는 명당이다. 현재 정사(鄭賜)의 묘가 있는 곳이 음곡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그런 연유에서 정사의 묘아래 지역은 기후가 아무리 가문 상태여도 늘 땅이 질척하다고 한다. 이 별묘는 문중에서 정한 불천위 즉 향불(鄕不)을 모신 곳으로, 기일으 음력 7월 7일과 1월 7일이다. 제향은 별묘에서 행하지 않고, 종가로 출주하여 행한다. 제물의 특징은 근채(根菜), 산채(山菜), 곡채(穀菜), 야채(野菜)를 별도의 제기에 각각 진설하지 않고, 한 그릇에 한꺼번에 모아서 진설한다고 한다. 도장리 석문별묘의 접근은 923번 지보리길에서 북측으로 난 마을 안길인 지포길을 이용한다. 이 지포길은 지보리보건소와 지보2리경로당 앞을 지난 후 북측 산자락에 터를 마련한 도장리의 10여 가옥과 지보2리를 연결하고 있다. 도장리의 이들 가옥은 북측의 야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동측에 산 능선이 흐르고 있어 서남측으로 열린 지형을 하고 있다. 석문별묘는 이들 가옥 속에 터를 마련하고, 서남향을 하고 있다. 석물별묘는 에천 석문종택의 좌측과 배면을 감싸 지나는 마을 안길을 따라 진입하는데, 이 길을 중심으로 서측에 정기원 사당이 있었으며, 동측에 석문강당이 있고, 석문강당 북측에 석문별묘가 있다. 석문별묘의 사당은 사면에 시멘트기와와 한식기와를 올린 방형 토석담을 쌓아 주변과 경계를 그었다. 남측에는 사주문을 세워 서측을 지나는 지포길에서 출입하도록 하였고, 동측 모서리에도 일각문을 세워 가옥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북측 담장 일부는 현재 무너진 상태이다. 남측 사주문 앞은 완경사를 이루고 있고, 북측과 서측은 텃밭이 있고, 우측에는 가옥이 있다. 남측 사주문은 제형으로 다듬은 주초 위에 사각기둥을 세워, 상부 하중을 받도록 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린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일각문도 한식기와를 올린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가는 원기둥을 전후 두 개씩을 세워 상부 하중을 받고 있다. 석문별묘의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자형으로, 내부는 마루구조를 하고 있는데, 좌측 칸은 장마루구조, 나머지 2칸은 우물마루이다. 중앙칸은 두 짝 여닫이 띠살문을 달았고, 좌우칸은 한 짝 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나머지 사면의 벽면은 내외에 회바름으로 마감했다. 내부에는 제례용 탁자가 있고, 배면 벽에는 나루로 감실을 꾸며 달아 놓았다. 감실 정면에는 두 짝 여당이 띠살문을 달아 놓았다.

 

  석문별묘 사당의 기단과 기단바닥은 시멘트모르탈로 마감했으며, 기단 위 주초는 자연석 주초이다 .기둥은 원기둥과 사각기둥인데, 정면 열이 기둥만 원기둥이다. 기둥상부는 민도리집의 굴도리방식으로 보아지, 장혀, 보, 굴도리가 짜 맞춤을 하고 있다. 가구는 삼량이며, 상부는 연등천장으로 열려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처마 끝은 암막새와 숫막새로 마감했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올린 팔작지붕으로, 추녀마루와 용마루, 내림마루 끝을 망와로 마감했다. 사당의 목재는 옅은 석간주 색으로 단청을 했으며, 서까래와 보 등의 마구리는 흰색을 칠했다. 서까래와 서까래 사이는 회바름으로 마감했다. 현재 석문별묘는 일부 담장이 무너진 상태이지만, 건물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건물 내부에 독특한 감실이 있고, 또한 주변에 비지정문화재와 지정문화재가 있으므로 이들을 연계하여 유지 관리할 필요가 있다.(예천군 건축문화유산 조사연구 2013년, 486-488쪽)

 

  석문선생문집(石門先生文集) [冊] : 풍양면 청곡리 포내(浦內) 출신인 석문 정영방(鄭榮邦, 1577-1650, 進士)의 시문집(奎 12286)으로, 7권 3책(4권 부록 각 3책), 목판본, 32x21.5cm,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은 19.2x16cm, 유계(有界), 10행 20자, 주쌍행(註雙行), 판심(版心)은 상하 내향 이엽 화문 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정언사(鄭彦思)가 편집하여 1821년(순조 21)에 간행된 책이다. 1802년(순조 2)과 1821년(순조 21, 柳尋春)에 된 서문과 1732년(영조 8)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서문은 정언충(鄭彦忠)과 1802년(순조 2)에 정술도(鄭述道)가 썼고, 발문은 1732년(?)에 김래주(金來周)와 1821년(순조 21)에 유심춘(柳尋春)이 썼다. ‘금계서재(金溪西齋)’라는 인기(印記)가 있다. 정영방의 자는 응보(應輔), 호는 석문, 본관은 동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제자, 일찍이 학문과 시가 자못 출중한 인물이었다 한다.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합격, 뒤미쳐 광해군의 난정이 계속되고 또 자신 역시 세상 일에 절실한 생각이 없어 여생을 오직 학문과 시로 소일하였다 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시는 그가 가장 득의로 하던 것이어서, 이 문집에 수록된 것을 봐도 전체 3책 중 2책이 모두 시로 되어 있을만큼 그 비중이 크다. 목차는, 책천(冊天)에 서(序), 목록, 권1이고, 책지(冊地)에 권2, 권3이고, 책인(冊人)에 권4, 권5, 권6, 발(跋)이다. 즉, 권수(卷首)에 정언충(鄭彦忠)과 조술도(趙述道)의 서(序)가 있다. 권1에 사(辭) 2편(日晩歌寄柳德茂 等), 부(賦, 鄭瓜亭賦竝序 等 2首), 오언절구(五言絶句, 英陽書堂題壁上 2絶 等 105首), 오언율시(五言律詩, 詠雪 等 94首), 오언배율(五言排律, 奉別晩山西行 等 5首), 권2에 오언고시(五言古詩, 龍宮學堂懷朴士虎世雄 等 23首), 육언(六言, 祥離節二墓 等 2首), 칠언절구(七言絶句, 二月見梅有感 二絶 等 163首), 권3에 일언율시(一言律詩, 題浪裏船歌曲後 等 88首), 일언배율(一言排律, 臺城柳十六韻), 칠언고시(七言古詩, 庚子臘月子老峴向松村馬上ᄋ占 等 10首), 잡시(雜詩, 敬亭吟 等 3首), 만사(輓詞, 愚伏先生輓詞 等 40首), 권4에 소(疏, 龍宮士民請견減昏朝所加下中之稅疏 및 英陽士民請復顯疏 等 2篇, 前者는 龍宮 地方에서 光海君 때 加徵되었던 下中稅를 減해 달라고 請한 上疏이다). 서(書, 上愚伏先生問目 等 7篇 : 주로 예설(禮說)에 관한 글이다). 기(記, 遺種亭記, 夢賚庵記 等 2篇), 제문(祭文, 三江書院 奉安 文忠公圃隱鄭先生 文純公退陶李先生 文忠公 西厓柳先生文 等 9篇), 지갈(誌喝, 知事趙公墓誌 等 2篇), 행록(行錄, 先生梅塢公行錄), 유사(遺事, 愚伏先生遺事 1篇), 잡저(雜著, 壬辰遭變事蹟), 마지막으로 권말(卷末)에 정래주(鄭來周), 정필규(鄭必奎), 유심춘(柳尋春)의 발(跋)이 있다. 위 시들은 또한 당대 평론가들에게 상당히 호평으로 받았던 것이 사실인 듯 하다. 우선 당대 문장으로 이름이 높던 몽예(夢예) 남극관(南克寬, 1689-1714)도 그의 시의 성격을 가리켜, '체기고묘(體氣高妙), 흥기심원(興寄深遠)'이란 평을 하였다는 말이 서문에 나오는데, 이 평론의 말은 그 뒤 여러 사람의 문장 가운데 자주 인용된 구절이기도 하다. 한편 이 문집의 서문을 쓴 또 하나의 평론가인 정언충(鄭彦忠)은 역시 그의 본령(本領)은 문(文)보다도 시(詩)가 더욱 장점인 것임을 지적한 바가 있다. 시 가운데서도 더욱이 오언근체(五言近體)가 뛰어났는데, 부록에 실린 '십유(拾遺)'에도 '그의 시 가운데 오언절구가 제일 좋다'라 하고있다. 사적(事蹟)은 주로 임진왜란 때 정영방 일족이 당했던 고난과 그 지방의 형편을 서술한 기록이다. 부록에는 정영방 본인과 관계되는 자료가 망라되어 있고, 곧 묘지명병서(墓誌銘竝序), 묘갈명병서(墓喝銘竝序), 가장(家狀), 제문, 만사, 완담향사(浣潭鄕社) 추향(追享) 때의 고유문(告由文), 봉안문, 십유 등 8편의 문장이다. 국립중앙도서관 고전운영실에 소장되어 있고, 경북대학교 도서관 중앙고서실에 소장되어 있고, 성균관대 중앙도서관 존경각(尊經閣)에 소장되어 있고, 안동대학교 도서관 중앙한적실에 소장되어 있다.(인터넷 야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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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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