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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2,355 : 석와문집...석전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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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와문집(石窩文集) [冊] : 감천면 석남(石南) 입향조인 석와 권위(權褘, 1762-1835, 進士)의 문집으로, 4권 2책, 목판본(木版本), 31.9x21cm, 반곽(半郭)은 18.2x15.5cm, 10행(行) 18자(字), 사주쌍변(四周雙邊), 유계(有界), 주쌍행(註雙行), 판심(版心)은 내향 이엽 화문 어미(內向二葉花紋魚尾)이다. 서문은 1887년에 후손 연하(璉夏, 1813-1896), 발문은 1899년(광무 3)에 이만규(李晩규)가 썼다. 표제(表題)는 '석와집(石窩集)'이다. 1899년(광무 3)에 발행되었다. 성균관대 중앙도서관 존경각(尊經閣)에 소장되어 있고, 안동대학교 도서관중앙한적실에 소장되어 있고, 그 외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동국대(서울), 영남대이다.(인터넷 야후 2001, keris 2001)
석와선생문집(石窩先生文集) [冊] : 감천면 석남(石南) 안동 권씨 입향조인 권위(權褘, 1762-1835, 進士)의 문집으로, 한국역대문집편찬위원회에서 편집하여 서울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에서 1998년에 출판한 <한국역대문집총서> 2565권(425쪽, 影印本, 23cm)에 <석탄선생문집(石灘先生文集 1)>(金相玉)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문학실에 소장되어 있고, 경북대학교 도서관 중앙국학자료실에 소장되어 있고, 안동대학교 도서관 중앙대출실에 소장되어 있고, 그 외 소장된 대학 도서관은 부산외대, 성균관대(중앙), 울산대, 원광대, 전남대, 중앙대(제1캠퍼스), 한국외대이다.(keris 2003)
석운묵첩(石雲墨帖) [앨범] : 지보면에 있는 붓글씨 앨범으로, 동래인 석운 정지일(石雲鄭之鎰, 1652-1702)이 1685년(숙종 11) 늦봄에 <석문집(石門集)>에 있는 시들을 써 두었던 것이다. 가로 21cm, 세로 34cm로 <석문집>의 잡시(雜詩)에 실린 '지포팔경시(芝圃八景詩)'를 비롯하여 절구(絶句) 6수(首)도 함께 썼다. 글씨가 생동감이 넘치고 힘차다. 정지일은 지보면 출신으로, 자는 만중(萬重), 호는 석운(石雲), 본관은 동래, 석문 영방(石門榮邦)의 증손, 고산 이유장(孤山李惟樟)의 제자이다.
석운묵첩 해제(石雲墨帖 解題) [記事] : 지보면 도장리 익장(益庄) 출신인 정양수(鄭亮秀, 1932- , 大昌中高 校長)의 익장 출신인 석운 정지일(鄭之鎰, 1652-1702, 本貫 東萊)의 글씨를 모아 꾸민 앨범에 대한 기사로, 예천문화원에서 1988년에 발행한 <예천문화> 3호 281-317쪽(37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고, 정양수선생재직기념회에서 1998년에 발행한 <송대의 40년(松臺의 四十年)> 406-406쪽(1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석원잠종제조장(韓國近現代 會社組合資料) [事業體] : 예천읍에 있던 사업체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회사조합명 石原蠶種製造場/ 목적 잠종제조/ 업종 농림업/ 본점주소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면/ 출전 經濟年鑑(1949년판)”(history.go.kr 2005)
석이 [植物] : 예천군의 바위이끼에 속하는 넓적한 이끼로, 학명은 Gyrophora eseulenta Miyoshi이고, 지의무리과에 속한다. 중국 요리로 쓰인다.
석재자원 조사연구(石材資源 調査硏究. 6) [冊] : 한국자원연구소(韓國資源硏究所) 편저로, 한국자원연구소에서 1992년에 발행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1층 서고자료신청대에 소장되어 있다. 예천 관련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www.nl.go.kr 2006)
석전 : →석평
석전골(石田谷) [골] : 보문면 간방리(澗芳里) 일방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돌이 많다.
석전놀이(石戰놀이) [民俗] : 용궁면 향석리와 대은리에서 전래된 놀이로, 이 곳 사람들은 '팡개싸움' 혹은 '팔매싸움'이라고 한다. 석전놀이와 불싸움은 향석리 주민 150여 호와 대은리 주민 150여 호의 동민들이 두 마을의 경계인 축산(竺山)의 불쓴바위 부근 능선에서 음력 정월 대보름 날 초등학생 또래부터 싸움이 시작되어 나중에는 차츰 연령이 많아져 40세 미만의 장년층까지 싸움이 이어진다. 40세 이상이 되면 이 싸움엔 참여하지 않고 중재자 역할을 하며 과열을 방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하고 격렬한 투석전과 불싸움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쳐 병원에 가거나 시비가 걸려 싸우는 일이 없으며 부상을 당하는 경우도 거의 가벼운 상처를 입는다. 이러한 위험한 싸움에도 불구하고 이 놀이가 계속 이어지는 것은 싸움을 크게 하면 할수록 그 해 농사가 대풍년이 들고 좋은 일이 생기는 반면, 작고 흐지부지하게 되면 흉년이 들거나 마을 안에 강간, 살인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이 끝나면 농사철이 되어 들판에서 일을 하다 만나거가 인근 장터에서 서로 만나도 일체 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 불문률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놀이도 한국전쟁(1950) 때까지 계속 이어져 오다가 지금은 사라졌으며, 두 마을 학생이 한 학구인 향석초등학교에서 배움을 같이한 이후부터는 화목하게 지내고 있다. 당시 격렬하게 싸웠던 불쓴바위(풀천바우) 산자락에는 잡초만 우거져 있고, 그 옛날 악동들은 저마다 훌륭한 사회인이 되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龍宮天下 龍宮商高 2003.1.10)
석전놀이(石戰놀이), 팡개싸움, 팔매싸움 [民俗] : 용궁면 향석리(鄕石里)와 대은리(大隱里)에서 한국전쟁(1950) 직전까지 전해오는 놀이로, 두 마을의 경계인 축산(竺山) 능선의 불천바위 부근에서 음력 정월에 귀신날(16일)까지 보름 간 수시로 돌을 던져 서로 싸우는 것이다. 아이들부터 시작하여 장년층까지 벌어졌다. 40세 이상은 중재자의 역할을 하여 과열을 방지하였다. 위험한 투석전(投石戰)임에도 크게 다친 적은 없고, 거의 가벼운 상처를 입었는데, 싸움이 끝나면 양편 동리 사람들은 남녀노소 다 함께 모여 떡을 나누고 술을 마시며 화합과 화해를 하는 마을 축제를 열었다.(醴泉文化 9輯 1996)
석전놀이(石戰놀이 - 싸움을 크게 하면 그해 農事 大豊年) : ㅇ 위치 : 용궁면 향석,대은리(불쓴바위), ㅇ 내용 : 향석리와 대은리에는 언제부터인가 전해내려 오는 놀이가 있다. 그것은 석전(石戰)놀이인데 말 그대로 돌을 던져 서로 싸우는 것으로 얼핏 들으면 놀이인지 싸움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으나 성격으로 보면 싸움이고, 결과적으로 보면 이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놀이이다. 이 놀이는 이 지역이 고대국가(古代國家)인 신라의 변방(邊方)으로 전쟁의 준비 또는 전쟁훈련과 관련된 놀이로 추측되고 있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다만 이 전래놀이는 부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놀이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곳 사람들은 이 놀이를 “팡개싸움” 혹은 “팔매싸움”이라 하는데 팡개란 ‘던지다‘는 뜻을 가진 독특한 사투리로서 50대 이상 장년들에게는 어릴 때의 기억을 한 번쯤 되새겨 보게 하는 놀이이다. 석전놀이와 불싸움은 향석리(鄕石里) 주민 150여 호와 대은리(大隱里) 주민 150여 호의 동민들이 두 마을의 경계인 축산(竺山 : 불쓴바위 부근) 능선에서 정월 대보름 날 초등학생 또래부터 싸움이 시작되어 나중에는 차츰 연령이 많아져 40세 미만의 장년층까지 싸움이 이어진다. 40세 이상이 되면 이 싸움엔 참여하지 않고 중재자(仲裁者) 역할을 하며 과열(過熱)을 방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하고 격렬한 투석전과 불싸움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다쳐 병원에 가거나 시비가 걸려 싸우는 일이 없으며 부상을 당하는 경우도 거의 가벼운 상처를 입는다. 이러한 위험한 싸움에도 불구하고 이 놀이가 계속 이어지는 것은 싸움을 크게 하면 할수록 그 해 농사가 대풍년(大豊年)이 들고 좋은 일이 생기는 반면, 작고 흐지부지하게 되면 흉년(凶年)이 들거나 마을 안에 강간(强姦), 살인(殺人)이 끊이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이 끝나면 농사철이 되어 들판에서 일을 하다 만나거나 인근 장터에서 서로 만나도 일제 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 불문률(不文律)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놀이도 한국전쟁(1950년) 때까지 계속 이어져 오다가 지금은 사라졌으며, 두 마을 학생이 한 학구(學區)인 향석초등학교에서 배움을 같이한 이후부터는 화목(和睦)하게 지내고 있다. 당시 격렬하게 싸웠던 불쓴바위 산자락에는 잡초(雜草)만 우거져 있고 그 옛날 악동들은 저마다 훌륭한 사회인이 되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龍宮面홈페이지 2013)
석전놀이 : →쥐불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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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