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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2400:선몽대...
작성자이춘우 @ 2024.01.06 06:10:03

  도청신도시 예천 2,400 : 산몽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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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자 제자인 우암(遇庵) 이열도(李閱道, 1538~1591)가 1563년에 세웠다. 어느 날 잠을 자다가 하늘 에서 신선이 내려와 선몽대 자리에서 노니는 꿈을 꾼 뒤 정자를 지었다. 지형이 기러기가 백사장에서 한가로이 쉬는 모습이다. 풍수상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의 명당이다. 앞에는 강이요, 뒤에는 산이 둘러쳐진 배산임수형 명당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경관 덕에 명승 제19호, 예천 8경으로 선정됐다. 선몽대가 들어선 마을은 백송리인데 흰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선몽대 뒤쪽을 백송터라고 부른다. 백송리의 진성이씨 입향조는 이열도의 아버지 이굉(李宏)이다. 이굉의 아버지 이하(李河)는 이황의 둘째 형이었는데 예천에 살던 박심의의 딸과 결혼하면서 예안에서 예천으로 들어왔고 이하의 둘째 아들인 굉은 백송마을을 개척해 진성이씨 입향조가 됐다. 이열도는 백송마을 진성이씨 집안의 스타였다. 어릴 때부터 학업에 뜻을 두어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에 통달했으며 어려운 말과 글의 뜻을 잘 이해했다. 1576년(선조 9) 병과에 급제, 승문원 정자로 벼슬을 시작해 사헌부감찰, 예조정랑을 거쳐 고령 현감으로 나아가 선정을 펼쳤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평안도사로 승진하였다. 1587년(선조 20) 다시 내직인 형조정랑이 되었다. 이어 금산군수, 강원도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경상도 경산군에 흉년이 들어 민심이 피폐해지자 고을을 다스릴 책임자로 이열도를 천거했다. 그는 경산에서 학업을 일으키고 먹고사는 문제와 같은 민생의 근본을 세워 부임 1년여 만에 고을을 안정시켰다. 어느 날 도백에게서 보자는 연락이 왔다. 책의 표지 글씨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이열도는 당대의 명필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이열도가 크게 소리쳤다. "말할 것은 공사뿐이거늘 붓을 놀리라고 모독을 하느냐" 그는 그 길로 탕건을 벗어던지고 선몽대에 들어와 다시는 벼슬길을 나아가지 않았다. 공사 구분을 못하고 굶주린 백성 구휼에 바쁜 사람을 불러서 고작 책 표지 글을 써달라는 도백을 인정할 수 없었고 그런 풍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공직 사회에 비수를 날렸다. 도연명이 '쌀 다섯 말의 녹봉을 받으려고 하찮은 인간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며 '귀거래사'를 쓴 뒤 고향으로 돌아간 결기를 꼭 닮았다. 선몽대로 돌아온 그는 글을 읽고 후학을 가르치며 자연을 벗 삼고 살다가 1591년(선조 24) 향년 54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선몽대는 조선의 스타급 선비들의 문집 같다. 종조부이며 스승인 이황이 선몽대 편액글씨를 직접 써주고 시도 보내왔다. 이황이 편액글씨를 써준 덕에 이황의 제자인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약포 정탁이 다녀가며 시를 남겼고 한음 이덕형과 청음 김상헌도 시를 남겼다. 1599년 가을에 참봉 조여익이 향시에 합격한 뒤 약포 정탁을 찾아왔다. 조여익은 이열도의 사위다. 그는 선몽대를 이야기 하며 이황이 지은 칠언절구를 보여준다. 스승의 시를 마주한 정탁은 옷깃을 여미고 세 번 되풀이 해 읽은 뒤 절구를 차운해 시를 짓는다.//

 

  선생의 선몽대는 이미 폐허가 되었지만 先生仙夢已成虛/ 남긴 시를 되새겨 외우니 배알하는 듯하네 追誦遺詩拜謁如/ 서법은 지금도 응당 어제 쓴 것 같으니 書法至今應似昨/ 조밀한 글자에 성긴 행간 분명하구나 分明字密又行疎/ 주인께서 스스로 청허한 곳에 터를 잡으니 主人自能卜淸虛/ 낭원과 현도도 이곳보다 못하리 閬苑玄都此不如/ 꿈을 깬 후 몇 번이나 선몽대 위에 누워서 夢罷幾回臺上臥/ 하늘 가득 밝은 달빛에 성긴 별을 보았던가 滿天明月看星疎/ 바위 가의 높은 대가 온 허공을 끌어당기고 巖畔孤臺控八虛/ 적송은 구불구불 늙은 교룡 같구나 赤松蟠屈老虯如/ 새벽바람의 산시는 시끄럽다 조용해지고 曉風山市喧還靜/ 강가의 저녁 비 세차다가 다시 성글어지네 暮雨江郊密復疎/ 백년의 세월이 눈길 돌리듯 짧은데 百歲光陰轉眄虛/ 선몽대의 맑은 흥취, 끝없이 넓네 一臺淸興浩難如/ 늘그막에야 속세의 꿈이 헛됨을 깨달았으니 晩來始覺塵寰夢/ 전원으로 돌아가려는 계획 서툴지 않겠지 歸去田園計未疎/ (하략)/ - 정탁의 시 퇴계 선생 '선몽대' 시에 차운하여 조여익에게 보여주다 敬次仙夢臺退溪先生韻示曺汝益 五首//

 

  선몽대는 다산 정약용 집안과도 관계를 맺었다. 정약용의 7대조인 정호선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본 뒤 시를 남겼고 정약용 자신은 예천군수인 아버지 정재원을 따라 이곳을 다녀가면서 기문과 시를 남겼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선대 할아버지의 시판의 먼지를 닦아내고 시를 읽는 장면이 감동적이다. "하루는 아버지를 따라 약포 정상국(정탁) 때의 문신의 유상을 배알하고 길을 바꾸어 이 누대에 올랐다. 배회하며 바라보다가 이윽고 벽 위에 여러 시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관찰사를 지내신 나의 선대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것이었다. 시판이 깨져 글자가 갈라지고 한 쪽 구석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으나 자구는 빠진 것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고 나에게 읽으라고 하고서 말씀하시길 '공이 일찍이 영남에 관찰사로 내려왔을 때 이 누대에 오르신 것이다. 공이 지금부터 2백여 년 전에 사셨던 분인데 나와 네가 또 이 누대에 올라와서 즐기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느냐' 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명하여 그 시판의 시를 옮겨 본떠 공장에게 번각하고 다시 단청을 입혀 걸어 놓게 하시고 기를 쓰라고 하셨다" -정약용이 쓴 '선몽대기' 중에서 [ 글 사진 / 김동완 여행작가]/(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7-08-11)

 

  선몽대(선비의 정신 오롯이 새겨진 곳...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9호 '예천 선몽대) [기사] : 백금의 모래 빛이 곡선을 그리며 춤을 추듯 끝없이 펼쳐지고 울창한 숲과 모래밭은 수줍은 남녀가 경계하듯 다름에 서로의 미를 받쳐주고 있다.

 

  선비의 정신이 오롯이 새겨진 곳, 신선이 쉬어가는 풍광을 가진 곳이 경북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선몽대 일원이다.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9호다. 백송리는 옛날 예천군 위라면의 작은 성(지성·枝城)이었던 백송은 입향조가 마을을 개척할 때 흰 소나무가 있었다고 '흰소리, 흰 쇠리, 백송' 등으로 불렸다. 입향조는 바로 퇴계 이황의 조카인 이굉이다. 입향조의 아들은 내성천과 우암산이 부딪치는 절벽에 정자를 지어 학문을 닦고 풍류를 즐겼다. 맑은 물과 소나무 숲, 절벽이 어우러져 신선이 노닐었다는 이 선몽대를 배경으로 많은 학자가 배출됐다. 진성 이씨 입향조가 마을에 뿌리를 내린 이후 많은 인물과 박사들이 나와 '박사마을'로도 불린다. 빼어난 산수에 걸출한 인물이 어우러진 마을이다. 선몽대 숲은 선몽대와 선몽대 뒤편의 백송리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우리 선조들의 풍수 사상이 깃든 전통적인 마을 숲으로 100~200여 년 수령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수해방비림, 방풍림, 수구막이 숲(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거나 풍수상 단점을 보완할 목적으로 물길 등을 막기 위해 조성한 숲) 및 비보 림 (풍수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숲)의 역할을 해 온 것으로 보인다. 22일 오후 강바람이 볼을 때리고 심술이 난 구름이 해를 가려 어깨가 좁아지는 쌀쌀한 날씨다. 선몽대로 가는 송림길은 짙은 솔 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드넓은 백사장이 시원함을 전해주고 따듯한 한 잔의 진한 커피가 그립다. 선몽대 일원은 하늘이 내린 선경이 뭔지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찾아와 시를 주고받던 곳이며, 강과 함께 숨 쉬어온 역사문화 지리서의 중요한 한 장이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내성천의 강물과 10리에 이르는 넓은 백사장이 역사적 유래가 깊은 선몽대와 숲과 함께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자아내고 있는 곳으로 경관적·역사적 가치가 큰 경승지로 평가"되는 곳이다. 선몽대숲은 은행나무길이 끝나면 다시 울창한 가로수 길로 이어진다. 이방인을 낯설어하는 마을에서부터 내성천으로 향하는 개울과 정성 들여 갈아놓은 골짜기의 밭 사이에 길은 운치가 그득하다. 청량한 그늘이 끝나면 문이 활짝 열리듯 내성천 물길과 십 리에 이른다는 백사장과 빼어난 소나무들이 장관을 이룬다. 넓은 것은 낮고 높은 것은 그윽해 평온함과 적막함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린다. 송림에는 두 개의 비(碑)가 있다. 하나는 '선대동천(仙臺洞天)'이라 새겨진 비다. '선몽대가 산천에 둘러싸여 훌륭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산하호대(山河好大)'로, '산이 좋고 하천은 크고 길다'라는 의미다. 단순한 각자의 완벽한 설명이다. 송림이 끝날 무렵 우암의 기념비가 있고, 멀지 않은 천변에 선몽대가 보인다. 선몽대는 우암산이 내성천으로 뛰어드는 벼랑에 있다. 선몽대에서 약 5km 상류에 있는 고평교와 그 아래 형호교 일대에서는 강에 펼쳐진 거대한 모래톱이 유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 또는 계절에 따라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꾸고 있다 10여 년 전 만해도 드넓은 백사장이 형성돼 있었지만 지금은 영주 댐 등으로 물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모래톱이 곳곳에 형성돼 백사장이 줄어들고 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대체로 모래 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원을 세웠는데, 강모래의 움직임을 통해 지금은 에너지라고 말하는 기의 흐름을 잘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성천에는 이산서원이 있고 중류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조정에 천거한 약포 정탁의 위패를 모신 도정서원이 있다. 또 하류에는 용궁 학교가 옛 향기를 느끼게 한다. 소나무숲은 천변을 따라 150m 정도 넓고 길게 조성되어 있다. 숲은 마을로 들어오는 허한 북풍의 기운을 막아준다. 언젠가 제방을 쌓으면서 나무줄기가 상당한 깊이로 묻혔다고 한다. 줄기 부분이 흙에 묻히면 나무뿌리와 줄기는 숨을 쉬지 못하고 끝내는 말라 죽는다. 이곳의 몇몇 나무들은 밑동 주위에 자연석을 두르고 얕은 못처럼 파 놓았다. 숨 쉬시라는, 오래 사시라는 배려다. 쉬이 보기 어려운 굵은 줄기와 거북 등 같은 수피가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나무들의 시간을 가늠케 한다. 선몽대는 1563년(조선 명종 18) 퇴계 이황의 문하생인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 1538~1591)가 세운 정자이다. 우암은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노는 꿈을 꾼 뒤 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그때가 1563년, 그가 26세 때다. 퇴계는 직접 선몽대 현판과 시를 써서 종손자에게 보냈다. '솔은 늙고 대는 높아서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하고 / 흰 모래 푸른 절벽은 그리기도 어렵구나 / 내가 지금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니 / 전날에 가서 기리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지 않노라' 우암은 백송에 돌아온 이후 농사짓고 후학을 기르며 선몽대에서 노닐다가 54세에 세상을 떠났다. 앞으로는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乃城川)의 널따란 백사장이 내다보이고, 뒤쪽으로는 울창한 소나무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주변 풍광이 가히 절경이다. 진경산수화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선몽대는 선경을 이룰 만큼 경치가 아름다운 정자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퇴계이황의 친필 편액과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의 친필시가 새겨진 시판이 걸려 있다. 매년 정월 보름에 이곳에서 동제가 열리며, 선인들의 자취가 깃들어 있는 전통공간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큰 경승지로 평가되고 있다. 2006년 11월 16일 명승 제19호로 지정됐다. 예천군과 진성이씨 백송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선몽대 일대는 기러기가 내성천에서 먹이를 먹고 백사장에서 한가로이 쉬는 형상이라 해서 풍수학적으로는 '평사낙안 형'(平沙落雁 形)이라 전한다. [경북일보 이상만 기자 공동취재](정차모 기자 예천인터넷뉴스 202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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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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