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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2412:선정비...선조실록...
작성자이춘우 @ 2024.01.18 06:09:18

  도청신도시 예천 2,412 :.선정비...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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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④ 군수 유건환 영세불망비(郡守兪建煥永世不忘碑) : 1862년(철종 14) 5월에 세웠다. 4) 용궁면 읍부리 용궁역 앞산의 만파루(萬波樓) 옆에 있는 역대 용궁 군수(龍宮郡守)와 현감(縣監)의 선정 및 거사비(去思碑)들로, 원 위치는 용궁에서 예천쪽의 도로변 가야리(佳野里) 입구에 있었다. 그 후 지금의 용궁초등학교(龍宮初等學校) 동쪽 송림 구 만파루(舊萬波樓) 남쪽으로 옮겨 놓았다가 1988년 만파루 복원과 함께 그 옆으로 다시 옮겨 세웠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① 암행어사 조윤승 영세불망비(暗行御史曺公潤承永世不忘碑) : 1897년(광무 1)에 세웠다.

 

  ② 현감 성교묵 흥학거사비(縣監成侯敎黙興學去思碑) : 1857년(철종 8)에 세웠다. ③ 도순찰사 신석우 거사비(都巡察使申相國錫愚去思碑) : 1859년(철종 10)에 세웠다. ④ 관찰사 엄세영 송덕비(觀察使嚴公世永頌德碑) : 1897년(광무 1)에 세웠다. ⑤ 현감 김승규 청절비(縣監金侯勝圭淸節碑) : 1888년(고종 25)에 세웠다. ⑥ 군수 김상일 청덕선정비(郡守金侯相一淸德善政碑) : 1899년에 세웠다. ⑦ 군수 권병직 영세불망비((郡守權侯秉稷永世不忘碑) : 1897년(광무 1) 3월에 세웠다. 재임 중인 1898년 6월에 제작된 용궁십면도(龍宮十面圖)를 경남 거창읍(慶南居昌邑) 김태순(金泰淳)이 보존하고 있다. ⑧ 현감 이만윤 영세불망비(縣監李侯晩胤永世不忘碑) : 1892년(고종 29)에 세웠다. ⑨ 현감 한진규 영세불망비(縣監韓侯鎭奎永世不忘碑) : 1885년(고종 22)에 세웠다. ⑩ 군수 장용환 선정비(郡守張侯龍煥善政碑) : 1903년(광무 7)에 세웠다. ⑪ 현감 유태형 애민선정비(縣監柳侯台衡愛民善政碑) : 1890년에 세웠다. 5) 유천면 고림리(高林里)에 있는 군수 치적비(郡守治績碑)이다. 6) 지보면 도화리(道化里) 창마 앞에 있는 용궁현감 한종규(龍宮縣監韓宗揆)의 선정비로 1712년에 세웠다. 이 비석을 광복 후, 마을 앞 개울의 돌다리로 사용했더니, 마을에 재화(災禍)가 끊이지 않으므로, 다시 제자리에 세우고 환경도 미화했다 →한종규 영세불망비. 7) 지보면 마전리 (麻田里) 구마전 동쪽 등성이 마을 가운데 있는 비석들이다. ① 관찰사 이유인 착세선정비(觀察使李公裕寅窄世善政碑) : 1901년 8월에 세웠다. ② 현감 이윤수 ᄋ폐선정비(縣監李侯胤秀ᄋ弊善政碑) : 1859년(철종 10)에 세웠다. ③ 현감 유교목 애민선정비(縣監柳侯敎睦愛民善政碑) : 1873년(고종 10)에 세웠다. ④ 현감 정인량 영세불망비(縣監鄭侯寅亮永世不忘碑) : 1893년(고종 30)에 세웠다. ⑤ 군수 이상일 애민선정비(郡守李侯相一愛民善政碑) : 1899년(광무 3)에 세웠다. 8) 풍양면 괴당리 경찰풍양파출소(警察豊壤派出所) 안 느티나무 밑에 있는 비로, 1893년(고종 30)에 부임한 예천군수 조원하(醴泉郡守趙爰夏)의 선정을 기리는 비이다. 비문(碑文 : 賢侯趙公爰夏去思碑 三年親政 一心行仁 靖難爲局 救弊安民 連値荒歲 廣濟飢人 朝開勳府 州笠貞珉 乙未 書面)이 음각되어 있다. 이 비는 원래 괴당리 261번지 부근에 6기가 있었는데, 1959년 경 이대일(李大一)이 괴당리 145번지에 모아 세웠던 것을 돌다리도 놓고 축대도 쌓아 지금은 찾을 길 없고, 다만 1기만 경찰풍양파출소에 남아 있다 →조원하거사비. 9) 하리면 은산리 현촌(縣村) 동구 엄나무 밑에 있는 4기의 역대 풍기군수(豊基郡守) 선정비로, 동쪽에서부터 차례로 그 비명(碑銘)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군수 장석기 영세불망비(郡守張公錫岐永世不忘碑). ② 군수 권명규 선정비(郡守權公命圭善政碑) : 1859년(철종 10) 11월에 세웠다. ③ 군수 이용하 선정비(郡守 李公龍夏善政碑) : 1868년 4월에 세웠다. ④ 군수 홍희철 영세불망비(郡守洪公羲喆 永世不忘碑) : 1885년 8월 3일에 도감 이기상(都監李起相)이 세웠다.

 

  선정비(善政碑) [碑] : 조선시대 예천군 현내면, 현동면, 현남면(현 의성군 다인면)에 있는 예천 군수들의 선정비이다. [內容] : 이후 현영 공덕비(李侯顯永公德碑, 서릉리 면표지곁, 1877년에 부임), 군수 이원세 공덕비(郡守李元世公德碑, 서릉리 面標識곁), 군수 유철 청덕 영세 불망비(郡守兪撤淸德永世不忘碑, 양서2리 서동마을, 癸未 5月 세움), 군수 심유행 선정비(郡守沈濡行善政碑, 양서2리 서동마을, 戊戌 2月 세움), 군수 유진 ᄋᄋ비(郡守柳袗ᄋᄋ碑, 양서2리 서동마을), 군수 서종일 애민 선정비(郡守徐宗一愛民善政碑, 봉정1리 대골, 庚申 10月 세움), 현감 민통수 청덕 선정비(縣監閔通洙淸德善政碑, 봉정1리 대골, 丁巳 10月 세움), 군수 조원하 휼민 선정비(郡守趙爰夏恤民善政碑, 봉정1리 대골, 乙未 5月 縣東, 縣南 세움), 현후 정대위 애민선정비(縣侯丁大緯愛民善政碑, 봉정1리 대골, 壬寅 5月 縣四面 세움), 군 이방 정대일 보관 불망비(郡吏房鄭戴一補官不忘碑, 봉정1리 대골, 乙未 5月 세움), 군수 윤경의 청덕 불망비(郡守尹景儀淸德不忘碑, 달제1리 洞會館앞, 道光 2年 9月 세움), 군수 송ᄋᄋ ᄋᄋ비(郡守宋ᄋᄋᄋᄋ비, 달제1리 洞會館앞, 下半身 없음), 군수 이후 만수 청백 선정비(郡守李侯晩綏淸白善政碑, 달제2리 비릇재, 石壁을 基壇으로 했음), 군수 홍후 용관 영세 불망비(郡守洪侯用觀永世不忘碑, 봉정2리 郡道邊)(多仁面志 1992)

 

  선조시집유묵(先祖詩集遺墨) [文化財] : 에천읍 고평리 466번지에 있는 필사본(筆寫本) 등 1책으로, 국가 보물 제494-7호(1968.12.19 指定)이다. 정완진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 左議政)의 얼을 추모하고, 그가 남긴 유물을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 지은 유물각(遺物閣)에 전해오는 ‘약포 유고와 문서’(보물 494호)들 가운데 하나이다. 정탁은 이황이 문인이었다. 1558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까지 올랐으며, 임진왜란이 터지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다. 천문, 지리, 군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임진왜란 중에는 곽재우, 김덕령 등의 뛰어난 장수들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1597년 3월에 이순신이 옥중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되자 적극 말려 그를 구했다. 저서로, <약포집(藥圃集)>,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이 유묵은 1책으로 되어 있으며, 정탁이 쓴 시문집이다.(文化財廳 홈페이지 2002, www.ocp.go.kr 2002)

 

  선조실록 : 선조실록 72권/ 선조 29년(1596 병신 / 명 만력(萬曆) 24년) 2월 9일(병오) 1번째 기사/ 비변사에서 토잔에 험조․죽령에 토성이나 목책․공주에 포루 등의 설치를 건의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조령(鳥嶺)․죽령(竹嶺)․토잔(兎棧) 등의 지역은 실로 천험의 요새가 되는 곳입니다. 지금 조령에는 이미 관방(關防)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곳만을 의지해 견고함을 삼고자 한다면 그 형세가 너무 단약한데, 그 아래 이화현(伊火峴)과 요성(聊城) 및 양산(陽山) 길도 아직 남아 있으니 반드시 다시 토잔에다 험조(險阻)를 설치하고 신원(新院)의 들에다가 크게 둔전(屯田)을 열어 조령과 더불어 서로 보익의 형세가 되게 한 후에야 충주(忠州)의 문호가 굳건해질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종전부터 공문을 보내 주지시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아직까지 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반드시 일을 주장하여 조처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궁(龍宮)과 토잔은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만약에 근실한 사람을 얻어 그 고을의 수령으로 삼고 상주(尙州)․문경(聞慶)과 합세하여 다스리게 하면 토잔의 일은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용궁의 새 현감 이지(李祉)는 자상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감당할 수 있겠으나 수비의 조치는 아마 그의 장기가 아닌 듯합니다. 상주(尙州)에 사는 주부(主簿) 김각(金覺)은 난이 일어난 처음에 기병(起兵)하여 군공(軍功)으로 6품(六品)에 오른 사람이니, 이곳 사람들을 단속하여 둔전을 만들고 험조를 설치할 계책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이지를 체차(遞差)하고 김각으로 대신하여 이 일을 전담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죽령에는 영상(嶺上)에다가 토성(土城)을 쌓거나 혹은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단양(丹陽)․청풍(淸風)․풍기(豊基)의 군사와 합세하여 지키게 해야 합니다. 단양 군수 서희신(徐希信)은 사은숙배를 하지 않고 부임하였기 때문에 본사(本司)에서 임무를 면대해주지 못하였습니다. 새 감사가 부임할 때에는 특별히 이를 강정(講定)하여 지시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공주(公州)는 관방(關防)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곳인데 근래에 잔파(殘破)됨이 너무 심합니다. 그러나 만약 훌륭한 수령을 얻는다면 관가(官家)의 회복은 역시 쉬울 것이며, 또 산성(山城)도 연전에 이미 수리하였다고 합니다. 이정란(李廷鸞)이 부임한 후 다시 형세를 살펴 포루(砲樓)를 설치할 만한 곳이 있으면 비록 나무로 만들더라도 일시적인 적은 막을 수 있으니 편리한 대로 조치할 것을 또한 각각 말하여 보내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2책 646면/ 【분류】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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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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