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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2,533 : 소작쟁의...소전약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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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쟁의(小作爭議), 농민운동(農民運動), 풍산소작인회 은풍출장소(豊山小作人會 殷豊出張所), 은풍소작인사건(殷豊小作人事件), 은풍농민회(殷豊農民會) [運動] : 소작료(小作料)를 중심한 문제 때문에 농민 단체가 결성되고 농민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1920년 10월 청도군(淸道郡)에서 나타난 것을 효시(嚆矢)로 전국에 번져 서울본부를 두고, 송병준(宋秉峻)을 회장으로 한 조선소작상조회(朝鮮小作相助會)가 성립되었다. 이 회는 지주 및 소작인으로 조직되어 전국에 지부(支部)를 두었는데, 송병준이 정치적 야심을 만족시키려는 내심이 있어 지주 중심의 단체로 변모하였다.
그래서 이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1923년 2월 대구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 간부 정운해(鄭雲海)가 동회에 농민부(農民部)를 설치하여 달성군내의 농민대회를 개최한 것이 최초이다. 예천에서도 1924년 1월 용궁면 읍부리 지주암본소태랑(岩本小太郞)은 소작료를 너무 많이 요구하여 소작인의 원망과 비난이 많았는데, 그 중에 가혹한 예를 들어 보면, 그 동리에 사는 김백옥(金白玉)의 소작하는 논 6두락에 총 수확이 5섬 2말인데, 소작료를 6섬을 달라하므로 만약 청구하는 소작료를 다 주면 부족분은 어찌하고, 소작인은 무엇을 먹고사느냐 하여 무수한 불평을 말하고, 소작료 4섬을 지주의 마당에 내어버리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 후 풍산소작인회(豊山小作人會, 1923,11), 풍기소작인조합(豊基小作人組合)이 조직되고 1925년에는 예천군에 파급되어 소작인회가 조직되었다.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농민이 전 인구의 8할이고, 그 중 소작농이 약 7할을 차지하여 지주들은 소작인을 착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작 단체에 가입하는 농민의 수가 급속히 증가되었다. 그러나 예천 등지의 소작단체는 지주들에 대한 반감으로 들고일어나 협박 폭행을 일으킨 자가 있어 검거되니 회원이 점차 줄게 되었다. 1929년 6월 현재 예천의 농민단체와 회원 수는 예천농민조합(醴泉農民組合) 1,768명, 풍서농민회(豊西農民會) 207명, 동지보지부(知保支部) 500명, 동 용문지부(龍門支部) 537명, 동 은풍지부(殷豊支部) 550명, 풍양노농회(豊壤勞農會) 112명, 개포지부(開浦支部) 170명이었다. 1926년에 풍산소작인회 예천하리은풍출장소(醴泉下里殷豊出張所, 下里愚谷)에서 회원 이중기(李中基)와 비회원(非會員) 한순교(韓舜敎) 사이에 소작쟁의사건(小作爭議事件)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동년 3월 초순에 이중기(李中基)를 위시하여 그 회 간부 5명이 검거된 후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중택(中澤) 예심판사의 심리를 받다가 동년 7월 6일에 예심이 종결되었는데, 이회승(李會昇), 남병태(南炳台), 오성무(吳成武)는 불기소가 되고, 이용만(李用萬), 김영희(金永熙), 남병인(南炳寅), 이중기(李中基), 남태영(南太榮)은 대구지방법원 합의부 공판에 부쳐졌다. 변호사 조주영(趙柱泳), 김완섭(金完燮), 손치은(孫致殷)이 자진하여 변호하기로 하였다. 1926년 8월 10일에 대구지방법원 합의부에서 제1회 공판이 열리었는데, 입회 검사로부터 기소된 업무방해죄 이외에 또 소요죄도 구성되었으므로 실지 임검할 필요가 있다 하여 재판장이 공판을 무기로 연기한다고 하였는데, 동 16일에 동 법원 판사와 검사는 안동군 풍산에 있는 이 출장소의 본부인 풍산소작인회(豊山小作人會)에 출장하여 회관을 수색하는 동시 몇 종의 서류까지 압수하여 가지고 그 길로 은풍출장소(殷豊出張所)로 왔다. 1926년 9월 6일에 풍산소작회는 동 회관에서 집행위원회를 열고 은풍출장소를 은풍소작회로 독립시키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동년 12월에 있을 정기총회에 상정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1926년 10월 3일에 대구지방법원 금천(金川) 재판장과 산전(山田) 검사, 서기, 통역생 등 4명이 예천에 출동하고, 그 다음날 하리면 우곡동(愚谷洞)과 송월동(松月洞)에 가서 임검한 후 증인으로 신소작인(新小作人) 한순교(韓舜敎) 형제를 비롯하여 4,5명의 증인 심문을 마치고 그 다음날인 5일에 대구로 돌아갔다. 그리고 1926년 10월 13일에는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은풍소작회 출장소 집행위원 남병태(南炳台)를 구인하여 갔다. 동 19일 대구지방법원 제2호 법정에서 다시 개정되었는데, 금천(金川) 재판장의 심리와 산택(山澤) 검사의 입회로 피고에게 대강 심문이 있은 후 입회 검사로부터 일장 논고가 있는 후 구형이 있었는데, 이용만(李用萬)은 1년 6개월, 김영희(金永熙)와 남병인(南炳寅)은 각 1년, 이중기(李中基)와 남태영(南太榮)은 각 10개월이었다(南炳台는 이직 大邱地方法院 檢事局에서 取調 中). 변호사 이풍구(李豊求), 김완섭(金完燮), 손치은(孫致殷) 등으로부터 극력무죄 변론이 있은 후 재판장으로부터는 동 26일에 언도되었는데, 이용만(李用萬)은 1년 6개월, 김영희(金永熙)와 남병인(南炳寅)은 각 10개월, 이중기(李中基)와 남태영(南太榮)은 각 8개월(但 未決 日數 各 3個月 算入)이다. 그리고 미결 중에 있던 남병태(南炳台)는 25일에 무사 방면이 되었다. 안동군 풍산소작인회에서는 1926년 12월 5일에 풍산 가설 광장(假設廣場)에서 제5회 정기총회를 열었는데, 5천여 명이 모여 은풍출장소 독립에 관한 건은 다시 집행위원회에 일임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래서 그 다음날 집행위원회가 동 회관에서 열렸는데, 은풍출장소의 독립은 유보하기로 결의하였다. 1927년 3월 23일에는 안동에 원적(原籍)을 두고 경주 사회운동자 유주적(柳周赤, 原名 柳淵述)이 은풍소작쟁의(殷豊小作爭議)와 관련되어 안동경찰서에서 경주까지 출장한 전평(田平) 순사부장(巡査部長)에게 호송되었다가 그 이튿날 안동검사국으로 넘어갔다. 그 후 대구형무소에 입감(入監)되었던 김영희(金永熙), 남병인(南炳寅), 남태영(南太榮), 이중기(李中基, 李用萬만 服役中)가 순차로 출감되어 점차 은풍출장소의 진용을 정돈하고 1927년 4월 30일 집행위원회를 열고 풍산소작인회로부터 분리하여 독립단체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동년 6월 4일 하리사설강습소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풍산소작인회로부터 분리 독립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은풍농민회로 개칭하고, 집행위원은 남병태(南炳台), 김영희(金永熙) 외 13명이 피선되었다. 은풍농민회 집행위원들은 동년 6월 18일 하리면 우곡동 회관에서 제1회 위원회를 열고, 농총(農總) 가맹, 회원 정리, 지세 부가금의 소작인 부담 거부, 금비(金肥) 사용 시는 반분씩 부담, 소작료는 논 4할 5분 이내, 밭은 4할 이내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東亞日報 1924.1.18 1926.7.26 1926.8.12 1926.8.21 1926.9.11 1926.10.9 1926.10.16 1926.10.21 1926.10.26 1926.12.25 1926.12.28 1927.3.29 1927.5.10 1927.6.3 1927.6.27)
소장역(訴狀驛) [冊] : 1900년(광무 4) 경상도에 소재한 역토(驛土)의 작인(作人)과 사음(舍音) 등이 탁지부(度支部)에 올린 각종 청원서, 소장(訴狀)과 이에 대한 탁지부 관리의 지령을 묶어 놓은 책(규 21655)으로, 1책(235張), 필사본, 25x17cm이다. 청원서와 소장 이 외에 역토 조사를 맡은 파원(派員)이 올린 보고서도 일부 수록되어 있다. 1894년 갑오승총(甲午陞摠)으로 인해 종래 면세 특권이 부여되던 역토, 둔토(屯土)의 면세지 혁파(革罷)와 출세(出稅) 조치가 단행된 후 여러 차례 역둔토 조사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 역둔토에 대한 중앙 관리인의 중간 수탈, 역둔토 토지 경작을 둘러싼 분쟁 등 여러 문제가 파생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출된 농민들의 소장이 규장각에 많이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이 중 경상도 역토와 관련한 소장을 묶은 것으로, 내용은 역토에 혼입된 사토(私土)의 소유권 환수 요청, 인상된 도조액(睹租額) 인하 요구, 역토에 대한 탈경(奪耕) 호소, 버려진 역토 이용 요청, 사음 차정 요청 등이다. 청원인을 살펴보면, 용궁의 지보역민(知保驛民) 조용필(趙鏞弼) 등, 예천의 수산역(水山驛) 동임(洞任) 등이다. 경상도 지역 역토의 분포와 경작 상황, 그리고 당시 진행된 역토조사사업의 성격을 살피기 위해 참고할 자료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91년에 간행한 <각사등록(各司謄錄)> 49, 경상도 보유편(補遺篇 1)에 영인되어 있다.(심재우 인터넷 야후 2001)
소전, 쇠전, 쇠장, 우시장(牛市場) [場] : 예천읍 남본2리(南本二里) 외남본에 있는 예천의 소의 시장으로, 원래 동본1리 현 상설시장에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겼다.
소전 약론
文學)> 12권 1호 211-224쪽(14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keris 2003)
小篆 略論) [學術저널] : 예천 출신
인
전동 : →소릿골소
(이의활(李義活, 1951- , 大邱가톨릭大 敎授)의 논문으로, 영남중국어문학회에서 1986년에 출판한 <중국어문학(中國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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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