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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예천2,562:손효조강당...솔개들과예천농업고등학교...
작성자이춘우 @ 2024.06.16 06:09:31

  도청신도시 예천 2,562 : 손효조 강당...소개들과 예천농업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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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당은 경사진 산자락에 터를 조성했기 때문에 정면의 농경지보다 높게 자리하고 있다. 강당 남측에는 현재 사람이 살지 않은 살림집과 창고와 화장실이 있으며, 북측에는 창고가 있다. 강당을 제외한 건물들은 모두 근래에 건축한 건물들이다.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한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에 툇마루를 꾸며 출입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평면은 중앙에 1칸의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같은 규모의 온돌방이 있다. 마루간은 배면 쪽에 두 짝 여닫이 우리판문을 달아 놓았으며, 좌우 온돌방은 마루 쪽으로 외여닫이 출입문을 2개소씩 달아 놓았다. 또한 좌우 온돌방은 측면 쪽에 각각 외여닫이 출입문을 달아 놓았다. 강당은 경사면에 터를 잡고 정면에 높은 자연석기단을 축조한 후, 자연석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다. 남측 방의 아궁이는 정면 기단 위 툇마루 아래에 꾸며 놓았고, 북측 방 아궁이는 북측 가단 위에 꾸며 놓았다. 이들 방의 굴뚝은 배면 기단 위에 각각 꾸며 놓았다.

 

  기둥은 정면 툇기둥만 원기둥이고, 나머지 기둥은 사각형이다. 기둥 상부는 초익공방식으로 짜 맞춤을 한 후 상부 보를 받도록 하였고, 주간의 창방과 도리받침장혀 사이에는 소로를 꾸며 장식하였다. 대청 상부는 오량가구로 짠 후 장연과 단연을 받도록 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고, 처마 끝은 와구토로 마감했다. 현재 강당은 훼손된 상태를 보면 오랫동안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높이 쌓은 정면의 자연석 기단은 일부분 붕괴가 진행되고 있으며, 강당의 남측 방과 북측 방의 측면과 배면 처마가 붕괴된 상태이며, 내부 벽체 또한 붕괴된 상태이다. 대청의 마루는 일부분 소실된 상태이다. 지붕의 기와는 전체적으로 흘러내려 수습이 필요하다. 이외의 나무 상태는 양호한데 올 여름이 지나면 완전 붕괴될 것으로 보여 강당은 빠른 시일 내 해체보수가 필요하다.(예천군 건축문화유산 조사연구 2013년, 534-535쪽)

 

  손효조 강당 : 다인 상우록(尙友錄) - 다인의 인물. 다인에는 어떤.../ 2016.03.01./ 이르렀다. □ 손효조(孫孝祖. 1604~1670) 본관은 경주. 자는 성휴(聖休), 흥지의 손자... 승훈랑(承勳郞)이며 풍양 와룡동에 강당을 짓고 후진을 길렀다. □ 손흥지(孫興.../ cafe.daum.net/sabukim11/AZFI/ 둔굴재(daum 2017)

 

  손효조 강당 : 예천의 자랑 4053 : 손태원(2)-손해진-손혜정-손효조-손후자-손흥지-송경-송경애(1)/ 작성 장병창/ 손효조(孫孝祖) : 1604-1670, 풍양면 와룡리 출신, 자는 성휴(聖休... 정(掌樂院正)이었고, 와룡리(臥龍里)에 강당을 짓고 후진을 길렀다. 지금도 강당이 남아.../ www.ycg.kr/open.content/ko/participate/.. 예천군청(daum 2017)

 

  손흥지 묘(孫興智墓) [墓] : 풍양면 와룡리 사정(沙井)에 있는 경주인 달관자 손흥지(達觀子孫興智, 1556-1619)의 묘소이다. [傳說] : 손흥지가 위독하자, 홍성지 도사(洪性智道士)로 하여금 묘소를 잡도록 하였다. 홍성지는 몽미리(夢味里)에 있는 청산(靑山)에 잡아 주니, 유족들이 이르기를, "대지는 큰 강을 접해야 하는데, 강이 없으므로 잘못 잡아 주었다." 라고 착각하고 못 마땅히 여기니 홍성지는 대강인 낙동강이 보이는 사정(沙井)에 묘터를 잡아 주었다. 사실은 청산(靑山)보다 못하다고 한다. 그 형국이 지렁이 또는 미꾸라지혈이라 하는 바, 아마 홍성지가 섭섭했는지 비방으로 이르기를, "광중(壙中)에 소금 3되을 넣으면 좋겠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묘를 쓴 뒤에 홍성지는 달아나면서 이르기를, "이 묘의 발복은 동몽 진사(童蒙進士)가 나면 발복이 끝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솔개들과 예천농업고등학교(우리들의 이야기, 푸른 바위 이야기) [기사] : 생각해 보면 아득히 먼 옛날이야기다. 거슬러 올라가 1962년도부터 우리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올해가 2009년이니 47년 전 집에 나이로 열일곱에 예천농업고등학교에 입학을 한다. 예천의 동쪽을 흐르는 한천을 건너면 예천의 곡창 솔개들이 시작된다. 솔개들이란 이름은 소나무(솔)가 울창한 개펄(갯들)이란 뜻에서 솔개들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예천농고는 솔개들의 중간쯤 자리하고 있는 유서 깊은 학교이다. 예천이라는 곳은 아주 작은 시골 군청소재지이고 이웃 안동이라는 예천보다 네배 정도 큰 도시가 있다. 그런데 안동농고는 예천농고보다 2년 늦은 1930년에 개교를 했었고, 예천농고는 1928년 예천공립농업보습학교란 이름으로 개교를 했다. 도시 규모가 큰 지역에 중등교육기관이 먼저 설립되는 게 일반적인데 안동보다 도시 규모가 훨씬 작은 예천에 중등교육기관이 먼저 설립된 이유는 솔개들 때문이라고 했다. 1920년대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는데 일본 사람들이 쌀 맛을 보니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쌀 중에서 예천 솔개들에서 나는 쌀이 제일 맛이 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냇가 옆에 있는 들을 갯들이라고 부르고 갯들에서 나는 쌀만해도 맛이 있는데 주변에 소나무가 울창한 갯들에서 나는 쌀이니 얼마나 맛이 있었겠는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충성심이 대단한 일본사람들이 자기네들의 천황폐하(?)에게 맛있는 쌀을 보내기 위해 소위 말하는 천황폐하 진상미를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방법으로 예천이라는 오지에 당시로는 대단한 중등교육기관에 속하는 예천농고를 세웠다고 한다. 1962년 3월 곽희모, 권혁정, 박찬억, 김대학, 김태석, 조진해, 조홍래(가나다 순) 7인이 예천농업고등학교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예천농고는 학반 편성이 동반, 서반, 남반, 이렇게 3학급이었는데 학급당 인원이 60명 정도였으니 180명 정도, 전교생은 600여명 되었으니 아주 큰 학교였었다. 같이 공부하고 웃고 떠들며 지냈던 학창시절이 끝난지 이미 50여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 이후에 살아갈 운명이 결정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 졸업 후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교사 생활로 정년을 마친 혁정이나, 진해나, 나나 다 그 당시로는 별로 특별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가 없었다. 진해와 나는 집이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고등학교 3년간을 한방에서 자취를 했었고, 훗날 대구교대에도 2년간을 같이 자취생활을 했었기에 청소년기에 누구보다 친하게 지냈었다. 어떤 친구들은 우리를 보고 빛과 그림자라고 할 정도로 항상 붙어 다녔기에 나는 진해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편이다. 진해나 나나 자취방에서 학교까지 왔다갔다하며 적당하게 시간을 보내다 시험 때가 되면 밤샘 벼락치기 공부를 하고 토요일 되면 집에 가서 일주일 먹을 쌀이나 가져오고 하며 생활한 그저그런 별 볼일 없는 존재였었다. 혁정이도 집이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부모님이 계시는 집에서 학교에 다녔다. 혁정이는 가정형편이 우리 보다는 살기가 많이 좋았던 걸로 기억이 되는데 학교생활은 진해나, 나와 같이 그저 그런 생활로 일관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렇고 나머지 진짜 물건들은 나머지 4명이다.

 

  곽희모 : 희모는 예천군이 아닌 이웃 문경군 출신이다. 문경에도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굳이 예천농고를 희망해 왔으니 말하자면 유학을 온 셈이다. 유학생 희모를 말할 것 같으면 공부하는 것 말고는 팔방미인이다. 다 출중했었는데 그 중에서 노래를 아주 잘 불렀다. 고등학교 2학년 때라 기억되는데 개포면 장터에서 팔월 한가위를 기념해서 가요 콩꾸르대회가 있었다. 성인들만 참가할 수 있는 대회인데도 희모는 용감하게 사복을 입고 참여를 했다. 우리도 사복을 입고 박수부대로 참여를 하고.... 희모는 <무너진 사랑 탑>이란 노래를 불렀다. 휘영청 밝은 달이 내리 비치는 개울가 가설무대 많은 군중들의 뭇 시선을 받으며 희모는 마이크를 잡고 열창을 했다. - 반짝이는 별빛아래 소근 소근 소근 대던 그날 밤/ 천년을 두고 변치 말자고 댕기 풀어 맹세한 님 아 / 사나이 목숨 걸고 바친 순정 모질게도 밟아놓고 / 그대는 지금 어대 단꿈을 꾸고 있나/ 야속한 님아 무너진 사랑탑아. - 노래가 끝나자 우리는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우레와 같은 큰 박수를 보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입상은 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남이 하지 않는 일에 대한 우쭐한 생각 그리고 약간의 스릴을 느끼기도 하고 선생님들에게 발각이 되어 혼이 나지 않을까 가슴을 조이기도 했었지만 늠름하고 용감한 희모 덕분에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었다. 가요제가 끝나고 달빛이 하얗게 비치는 신작로를 10리 정도 걸어 예천까지 왔었던 기억이 있다. 희모는 노래뿐만 아니라 사회성이 좋아 누구와도 인간관계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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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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