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예천의 자랑(1810) : 예천 충효 (10)(附 유천면 사곡리, 살기좋은 생태우수마을로 겹경사...축하합니다/경북도립대 라오닐, 2년 연속 선정...축하합니다/예천방문 336)
---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어 <영남삼강록>에 실린
한씨(韓氏) : 본관은 청주, 중리(重理)의 딸, 영월인 신상익(寧越人辛相益)의 아내,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어 <영남삼강록(嶺南三綱錄)>에 그 행적이 실리었다.(醴泉郡誌 1988)
---
임란 때 시누이와 함께 낭떨어지로 자결한
한씨(韓氏) : 1569(선조 2)-1592(선조 25), 풍양면 우망리 출신, 본관은 청주, 행(荇)의 딸, 동래인 참봉 정영후(參奉鄭榮後)의 아내,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마음이 대쪽같아 휘지 않는 성미였다. 출가(出家)해서는 시부모께 지극한 효도를 다하고 친척간에 온순 화목한 본을 보이며 현숙한 덕행을 지녔고, 시누이 정소저(鄭小姐)도 유한한 성품이었다.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 그 해 5월 2일에 왜놈들이 들이닥치니 시누이 정씨(鄭氏)와
함께 마을 뒤 대동산(大同山) 속에 숨었다가 왜놈을 피하여 낙동강의 낭떨어지로 자결하였다. 1619년(광해군 11)에 우망리(憂忘里)에 정려비(旌閭碑)를 세워 쌍절각(雙節閣)이라고 하였고, 그 곳을 ''''쌍절리(雙節里)''''라고 하였다. 또한 말뚝바위라고 하는 자결(自決)한 바위에는 ''''쌍절암(雙節巖)''''이라고 새겼다. 한씨의 묘는 지보면 노현산 자좌(老峴山子坐)에 있다. [浣潭誌] : 임진년(壬辰年, 1592) 4월 25일에 갑자기 왜놈이 (豊壤面
憂忘里에) 드리닥치니 온 집안이 허둥지둥 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큰집 조카(鄭榮後 鄭榮邦) 형제가 가족을 이끌고 대동산(大同山)으로 들어갈 때, 두 조카들이 모두 나이가 젊으니 온 집안의 일들을 내(鄭沚) 한 몸이 맡아서 치루어야 되겠고, 여러 대에 걸쳐 벼슬하던 집안이 이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온갖 계책이 다 소용이 없더라. 5월 초순에 왜적들이 일관봉(日觀峰)에 올라 달리고 부딪치는 듯한데 앞에는 낙동강이요, 마침 비가 와서 큰 물이 넘친다. 집안에
부리는 종 평석(平石)으로 하여금 두 조카를 부축하여 강을 건너고, 또 가족들을 보호하여 완담(浣潭, 知保面 馬山里)으로 갔는데, 이것은 평석이 물헤엄을 잘하는 공이 켰었다. 아! 장질부 한씨 (長姪婦韓氏)와 처녀 질녀 정씨(處女姪女鄭氏)가 의리를 지켜 강 언덕에서 물에 떨어져 죽었으니, 그 참혹하던 일을 어찌 차마 말로써 표현할 수 있으랴.(龍宮縣邑誌 1780, 雙節閣 碑文(鄭經世), 石門 鄭榮邦의 文集 中 壬辰遭變事績, 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1939,
朝鮮 輿勝覽 1929, 大韓忠義孝烈錄 1042쪽, 浣潭誌 1992)
---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시묘할 때 꿩과 호랑이가 함께 살았던 한택리(韓澤履) : 旣載
남편이 죽은 27년 뒤 아들을 가문을 잇자 자진한 허씨(許氏) : 旣載
어버이 병환에 입으로 종기의 고름을 빼내고, 대변을 맛보고, 잉어와 꿩이 도와준 현봉점(玄鳳漸) : 旣載
남편의 병환에 멀리까지 가서 약을 구하고 기도하니 산삼을 구하여 효험을 보자 포상된 현씨(玄氏) : 旣載
상을 당해 시묘하는데 호랑이가 도와 주어 포상을 받은 현지도(玄志道) : 旣載
부모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여 표창을 받은 홍국희(洪菊姬) : 旣載
임란 때 남편이 죽자 평생 음식과 옷을 간소하게 한 홍씨(洪氏) : 旣載
임란 때 남편이 죽자 익사하여 <삼강행록>에 실리고 정려된 홍씨(洪氏) : 旣載
---
효행이 지극한
홍의(洪의) : 1836(헌종 2)-1900(광무 4), 예천 출신, 일명 재장(載璋), 자는 장옥(璋玉), 본관은 남양, 숙(淑)의 후손, 학생 원묵(原默)의 장자, 재구(載玖)의 형이다. 효행이 지극하였고, 부모 사후(永感下) 유학(幼學)으로서 1882년(고종 19) 증광 진사과에 3등 37위로 합격하였다. 1895년에 편집된 <예천군읍지>의 도청(都廳)이었다. 묘는 유천면 연천리 도정(道井) 뒤 임좌(壬坐)에 있다.(族譜, 醴泉郡誌 1895, 司馬榜目,
醴泉郡誌 1939)
---
효행으로 참봉에 천거된 홍하적(洪夏績) : 旣載
---
부모의 병에 단지하여 소생시켰고, 상을 당해 평생 시묘살아 정려된
황계옹(黃啓翁) : 1756(영조 32)-1835(헌종 1), 본관은 창원, 좌찬성 사우(左贊成士祐)의 후손,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부모께서 병상에 들자 3차에 걸쳐 단지(斷指)하여 소생시켰고, 부모께서 돌아가시자 종신토록 시묘하였다. 이 일을 임금이 듣고 1892년(고종 29)에 정려(旌閭)하였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贈職)하였다.(醴泉郡邑誌 1895, 醴泉郡誌 1988)
황계옹 효자비(黃啓翁孝子碑) [碑] : 예천읍 백전2리 271번지 구마이에 있는 비로, 창원인 황계옹(昌原人黃啓翁, 1756-1835)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1892년(고종 29)에 국가에서 세웠다. 원래 비각과 함께 잣밭고개에 있었는데, 당시일본인 지주 현판(脇阪, 와끼사까, 썩백이)의 대지(垈地) 소유권 강제 발동으로 현 위치로 옮겼다. 구마이에서 용문통로 노변의 집 뒷산 도덕산(導德山) 산록 노천에 있는데, 순찰사 이경(巡察使李景)의 상소(上疏)에 따라 정려(旌閭)되고, 황계옹(黃啓翁)은 통정대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황 효자는 평소에 남달리 효성이 지극했을 뿐더러 양친이 중환으로 목숨을 다하려 할 때 손가락을 끊어 선혈을 마시게 하여 정성껏 간호하여 아버지는 5년, 어머니는 10년의 수명을 연장케 했고 부모가 돌아간 후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같이 시묘하고 묘소 주위를 깨끗이 했다. 비의 좌대(座臺)는 20cm, 비신(碑身) 높이는 80cm이다.
---
효행이 있는 황문원(黃文源) : 旣載
남편이 죽자 음식을 30일간 끊고 자진하여 정려된 황씨(黃氏) : 旣載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던 황씨(黃氏) : 旣載
임란 때 자결한 황씨(黃氏) : 旣載
아버지의 병환에 하늘에다 제 몸으로 대신할 것을 빌고 3년 시묘한 황영운(黃永雲) : 旣載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고 상을 당하자 매일 성묘하여 표창된 황영채(黃永彩) : 旣載
---
아버지의 10년 간 병환에 지성껏 효도한
황육증(黃六曾) : 본관은 평해, 준량(俊良)의 후손, 아버지가 10년 간 병으로 앓고 있을 때 지성껏 효도하여 참봉(參奉)을 지냈다.(嶠南誌 1937, 醴泉郡誌 2005)
---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짤라 피를 드려 소생시키고, 3년 시묘한 황재원(黃在元) : 旣載
---
忠部
의열단원인
강기만(姜基滿) : 독립운동가, 예천군 출신, 의열단원(義烈團員)이었다.(高警 277쪽, 獨資(11) 141쪽, 民族 (中) 483쪽, 獨立有功者功勳錄(8) 69쪽)
---
임란 때 원종5등훈에 기록된 강영(姜霙) : 旣載
---
세조 때의 원종공신인
강자신(姜子愼) : 1397(태조 6)-1454(단종 2), 자는 신지(愼之), 본관은 진주, 장령 종덕(宗德)의 장자, 자의(子儀)ㆍ자보(子保)ㆍ자검(子儉)의 형, 거인(居仁, 平壤判官)ㆍ거의(居義, 井邑縣監)ㆍ거례(居禮, 翰林)ㆍ거정(居貞, 別提)ㆍ거충(居忠, 監察)ㆍ거효(居孝, 舍人)의 아버지이다. 음사로 경덕궁직, 1442년(세종 24) 12월 개령 현감(開寧縣監), 이때 아랫사람들이 청백리로 존경했다. 도관 좌랑, 감찰을 거쳐 1452년(문종
2) 2월에 도사, 1457년(세조 3) 원종공신에 오르고, 마전군수(麻田郡守)를 역임했다. 묘는 경기도 개풍군 진동면 대위리 두용골 간좌(艮坐)에 있다.(世宗實錄, 文宗實錄, 인터넷 야후 2001)
---
세조 때의 원종공신인
강자의(姜子儀) : 선초의 문관, 감천면 천향리 정전(井田) 출신, 본관은 진주, 장령 종덕(宗德)의 2자, 자신(子愼)의 동생, 자보(子保)ㆍ자검(子儉)의 형, 성주판관 우(遇)의 아버지이다. 1424년(세종 6) 사직으로서 좋은 말을 진상하라는 임금의 유시를 가지고 제주(濟州)로 안무사에게 건너갔다. 1455년(세조 1) 12월 27일 주부(主簿)로서 원종2등공신에 녹훈되었고, 창령 현감(昌寧縣監)을 지냈다. 묘는 감천면 천향리 정전 능촌마을 뒤에
있는데, 15세손 회수(會秀)가 갈명을 짓고, 형수(馨秀)가 글씨를 썼다.(世祖實錄, 朝鮮王朝實錄 2輯 277ㆍ700면, 7輯 102면, 인터넷 야후 2001)
---
감찰어사로서 고려가 망하자 감천면 천향리로 숨어 맥수가를 부른 강종덕(姜宗德) : 旣載
임란에 창의하여 좌도 소모사가 된 강주(姜 ) : 旣載
임란 때 백의로 종사관을 한 강진(姜震) : 旣載
---
임란 때 왜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싸워서 적을 많이 죽인
강찬광(姜纘光) : 1569(선조 2)-1592(선조 25),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진주, 여성(汝성, 1542-1583)의 아들, 아버지가 1583년(선조 16)에 왜구(倭寇)들에게 피살된 후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 용궁(龍宮)쪽으로 처들어오는 왜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싸워서 적을 많이 죽였다. 이에 조정에서 참의(參議)를 증직(贈職)하였다.(醴泉郡誌 1939, 三綱錄)
---
김진양의 탄핵에 동조했다가 정몽주 살해 후 유배당한 강회백(姜淮伯) : 旣載
임란 때 창의하여 의병과 군량을 모아 공을 많이 세워 <용사록>에 실린 고경복(高景福) : 旣載
임란에 의병장으로서 적을 막는 여덟 가지 계책을 얻은 고상안(高尙顔) : 旣載
---
세조 때의 원종공신인
고수영(高壽永) :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개성, 부사 약하(府使若河)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1455년(세조 1) 12월 27일 사용(司勇)으로서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1457년(세조 3) 4월 17일 왕이 사정전에서 술자리를 베출고 부장들에게 무사(武事)에 힘쓸 것을 명하였는데, 선전관으로서 아랫자리에 있다가 임금께 술을 올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도 또한 말해 보라."하니, 대답하기를, "유학자의 마음 쓰는 곳에 신은 진실로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무사에 마음을 다할 뿐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하였다. 그 후 탄핵을 받아 영일(迎日)로 귀양가 충군(充軍)되었는데, 1463년(세조 9) 윤 7월 28일에 석방되었다. 부사(府使)에 올랐다.(竺山勝覽 1934, 世祖實錄)
---
임란 때 창의한
고승복(高承福) : 1526(중종 21)-?,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개성, 참봉 윤원(參奉胤元)의 아들, 인조 때 발탁되어, 두 군(郡)의 군수를 역임하면서 모두 치적이 있었다. 임진왜란(1592) 때 창의(倡義)한 일이 <용사록(龍蛇錄)>에 실려 있고, 언행과 문사(文詞)가 영남의 으뜸이었다.(竺山勝覽 1934)
---
세조 때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된 고약회(高若淮) : 旣載
---
구한말 군자금 모금타가 옥고를 치뤄 건국훈장에 추서된
고윤한(高閏韓) : 1878(고종 15)-?, 용궁군(龍宮郡) 출신, 의병으로 봉화, 강릉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大韓帝國)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한국 식민지화에 광분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당시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에 대적하거나 일진회원(一進會員)을 비롯한 친일 주구배(親日走狗輩)를 처단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고윤한은
같은 해 7월 이인숙(李寅肅) 등 의병 60여 명과 함께 의병 자금 확보를 위한 비상 수단으로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서 엽전(葉錢) 200냥을, 다시 9월에는 이인숙(李寅肅)과 함께 강원 강릉군 중계면(中溪面)에서 엽전 100냥을 군자금으로 징수하였다. 그리고 1908년 6-7월에는 봉화군에서 의병 자금을 징수하는 등 지속적으로 의병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피체(被逮)되어 1908년 10월 16일 대구지방재판소(大邱地方裁判所)에서 징역 15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建國勳章愛國章)을 추서(追敍)하였다.(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報勳處編 別1卷 342-343쪽, 獨立有功者功勳錄 第1卷 國家報勳處 317쪽, 同 第12卷 88쪽, 醴泉鄕土新聞 1998.3.30)
---
호란 때 순국한
고의겸(高義謙) : 1624-1704, 조선 인조 때,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개성, 절도사 약회(節度使若淮)의 후손, 교위 몽석(校尉夢錫)의 증손, 수직(壽職)으로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올랐고,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때 교사(敎師)로 순국(殉國)하였다.(竺山勝覽 1934, 醴泉郡誌 2005)
---
광복군 모집활동으로 옥고를 치러 애국장에 추서된
고형림(高亨林) : 1907(융희 1)-1975, 개포면 출신,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나가노(長野), 오사까(大阪), 명고옥(名古屋) 등지에서 생활하다가 사진 기술을 익히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잠시 예천농회(醴泉農會) 지도원으로 있다가 독립운동의 큰 뜻을 품고 1938년 8월 만주로 건너갔다. 그는 안동성 임가대(安東省林家臺)에서 사진업을 경영하다가 1940년 8월에 하남성 수무현 초작(河南省修武縣焦作)으로 이전(移轉)하였다. 이곳에서 사진관(寫眞館)을
경영하던 중 1941년 8월 광복군(光復軍) 제5지대에서 파견된 조씨(趙氏, 日本名 松田政茂)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제5지대장(支隊長)과 그 대원들의 연락 장소로 자택을 제공하고 비밀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였고, 서주(徐州)에서 2명, 북경(北京)에서 2명, 택주(澤州)에서 2명 등 광복군(光復軍) 입대 희망자들이 이 곳에 도착하게 되자, 이들을 극진히 접대하였다. 1943년 광복군의 국내 기반 조성을 위하여 고향인 예천에 돌아온 그는 표면상으로 농업에
종사하면서 광복군(光復軍) 대원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일경(日警)에 탐지(探知)되어 동년 3월 1일 피체(被逮)되고 말았다. 그는 1943년 7월 9일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에서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으로 1945년 8월 17일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포장(建國褒章, 1986), 애국장(愛國章, 1990)을 추서(追敍)하였다.(判決文 1943.7.9 大邱地方法院,
大邱刑務所 拘置監 名簿, 執行指揮書 1943.7.12 大邱地方法院 檢事局, 獨立有功者功勳錄 8卷 311쪽, 獨立運動史 1991 283쪽, 醴泉新聞)
---
독립운동가인
고형림(高亨林) : 1907∼1975, 독립운동가, 경상북도 예천 출신,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대판(大阪)·나고야(名古屋) 등지에서 노동에 종사하다가 사진 기술을 배워 귀국한 뒤 한 때 예천군농회(農會) 지도원으로 있었다. 생활난으로 1939년 8월 만주 안동성(安東省)으로 이주, 임가대(林家臺)에서 사진업을 시작하여 산시성(山西省)·허난성(河南省) 등지에서 사진관을 경영하였다. 1941년 8월 허난성 슈우현 자오쭤(修武縣焦作)에서 사진관을 경영하고 있을 때, 조수로 고용한 광복군 제5지대 대원으로부터 광복군에 가맹할 것을 권유받고 바로 제5지대에 입대하였다. 당시 산시성 시안(陜西省西安)에 본부를 두고 있던 광복군은 자오쭤를 중심으로 제5지대를 창설하여 활발한 공작 및 초모(招募) 활동을 벌이는 한편,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일제와의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제5지대에 가맹한 뒤 주로 지대장과 대원들의 연락 장소로 자택을 제공하는 한편, 제5지대에 입대하기 위하여 각지에서 오는 한국인 청년들을 부대와 연결시키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1943년 7월 광복군 제2지대의 국내 기반 조성을 위하여 고향인 예천으로 돌아와 농사에 종사하며 활동하다가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1945년 8월 17일 출감하였다. 198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大邱地方法院判決文, 大邱刑務所拘置監名簿, 독립운동사 5·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1975), 李潤相(韓國學中央硏究院))
---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권경휘(權景暉) : 1566(명종 21)-?, 감천면 현내리 출신, 자는 명보(明甫),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
죽어서 충성스런 마음 빛나는 해와 같은 권계용(權季容) : 旣載
---
임란 원종공신인
권극관(權克寬) : 1560-1634, 보문면 사람, 본관은 안동, 참봉 흔(昕)의 3자, 임진왜란 원종공신(原從功臣)이고, 1594년(선조 27)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에 이르렀다.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 정(訓練院正)에 증직외었다(襄陽誌 1661, 醴泉郡誌 2005)
---
인조 때 원종공신인 권극수(權克守) : 旣載
---
임란 때 군량미 보급 공으로 주부에 제수된
권덕령(權德齡) : 조선 선조 때, 자는 일수(日秀), 본관은 안동, 수해(壽海)의 고손(高孫), 임진왜란(1592) 때 군향 공(軍餉功)으로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를 특별히 제수(除授)받고, 판관(判官)에 올랐다. 늦게 예천에서 살았다. 묘는 예천마사봉(馬寺峰)에 있다.(族譜)
---
1896년에 창의한 권동선(權東善) : 旣載
이인좌의 난에 의병 부장으로서 공을 세운 권만추(權萬樞) : 旣載
---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권문계(權文啓) : 1549(명종 4)-1636(인조 14), 용문면 하금곡리 출신, 자는 중질(仲質), 본관은 예천, 직장 우(直長祐)의 아들, 철(澈, 1575生, 字汝涵, 進士)의 아버지이다. 음사(蔭仕)로 선공감 역(繕工監役)을 지냈는데, 청렴결백(淸廉潔白)하였다. 임진왜란(1592) 때 귀향하여 집에서 머물다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하였다. 기직(耆職)으로
호군(護軍)에 올랐다. 묘는 예천읍 갈구리 구미산 건좌(龜尾山乾坐)에 있다.(倡義錄, 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895, 族譜, 司馬榜目)
---
정여립 모반사건을 예언하고 창의한 권문해(權文海) : 旣載
---
단종 때 절개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용궁현에 이거한
권변(權변) : 단종 때, 본관은 안동, 이조참의 미(眉)의 아들, 긍(肯, 龍宮縣監)ㆍ응(膺, 部將)ㆍ등(騰, 縣令)ㆍ전(전, 縣令)ㆍ승(勝, 兵馬節度使)의 아버지이다. 강릉 부사, 호조 참판을 지냈다. 단종 때에 화를 입고 절개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한양에서 용궁현으로 옮겨 살았다. 묘는 용궁면 무이리 표석령(表石嶺) 자좌(子坐)에 있는데, 묘비명(墓碑銘)은 1977년 2월에 16세손 우집(羽集)이 지었고, 17세손 영창(榮昶)이 썼다.(醴泉의 金石文
2003)
---
병자호란 때 창의한 권별(權鼈) : 旣載
---
이강년 의진에 종사하여 순국한
권복술(權福述) : 용궁군(龍宮郡) 출신,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에 종사(從事)하여 충주 전투에서 총탄을 맞고 순국하였다.(醴泉文化 2집)
---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권사민(權師閔) : 1563(명종 18)-?, 감천면 관현리 홍고개(紅古介) 출신, 자는 효사(孝思), 호는 운계(雲溪),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하였다.(倡義錄)
---
호란 때 전공으로 조산대부에 오른
권산기(權山起) : 1561(명종 16)-1646(인조 24), 자는 경점(景漸), 본관은 예천,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이 일어나자 전쟁터에 출정하여 군공(軍功)을 수립하고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오르고, 수직(壽職)으로 동추(同樞)에 올랐다.(族譜, 奉化郡誌 1978)
---
사육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내 살아서 종묘사직을 구하지 못할 바에야 살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하며 통곡하고 조복을 갖추고 지붕 위에 올라가 북향하여 절한 뒤, 떨어져 자진한 권산해(權山海) : 旣載
---
1896년 의병 모집 대표자인
권상옥(權尙玉) : 1851(철종 2)-1914, 호명면 내신리 못뒤 출신, 자는 여중(汝仲), 호는 현남(峴南), 본관은 안동, 죽림 산해(竹林山海)의 후손,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 후인 1896년 정월 16일에 향사당(鄕射堂)에서 향회(鄕會)를 열고 집강소(執綱所)를 차리고 의병을 모을 때의 대표자이다. <병신창의일기(丙申倡義日記)>가 그의 후손인 못뒤의 권영하 가(權寧河家)에 소장되어 있다.(醴泉文化 6輯 1993)
---
병자호란 때 왕을 호가하고, 유효립옥사건 때 공로가 인정되어 영사1등공신에 책록된 권상정(權尙正) : 旣載
3.1운동 때 예천에서 독립만세 선창한 권석인(權錫寅) : 旣載
---
3.1운동 때 독립만세 부르다가 징역살이하여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은
권석호(權錫虎) : 1879(고종 10)-1961, 용문면 죽림리 대수 출신, 자는 사수(士綏), 호는 죽전(竹田), 본관은 예천, 문해(文海)의 후손, 1919년 4월 3일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권석인(權錫寅)과 함께 사전에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각 동리에 배부하는 등 예천읍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준비하다가 일경(日警)에 심한 감시 때문에 일시 중단되었다. 용문 장날인 4월 3일 드디어
이들은 수 백 명의 시위 군중을 규합하여 면사무소 앞길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피체(被逮)되었다. 이 해 4월 9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5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1992, 제83368호)을 추서하였다. <죽전유집(竹田遺集)>이 있고, 제자들의 죽전학계(竹田學契)가 성하다.(判決文 1919.5.5 大邱覆審法院,
3.1運動實錄 李龍洛 803쪽, 獨立運動 國家保勳處 第3卷 418-419쪽, 獨立有功人物錄 第10卷 1992 41쪽, 醴泉新聞)
---
3.1운동 때 독립만세 부르다가 징역살이하여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은
권석효(權錫孝) : 1900(광무 4)-1954, 용문면 죽림리 대수 출신, 본관은 예천, 3.1 운동(1919)의 공로로 대통령 표창(1992)을 받았다. 활동 내용은 권석호(權錫虎)와 동일하다.(獨立有功人物錄 1992)
---
3.1운동 때 독립만세 부르다가 징역살이하여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은
권세원(權世遠) : 1889(고종 26)-1945, 용문면 출신, 그는 1919년 4월 2일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수 백 명의 군중을 주동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곳의 만세운동은 권석인(權錫寅)이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을 참례차 상경했다가 서울의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오면서 구체화되었다. 이에 평소 항일 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권석인, 권석호(權錫虎), 권석효(權錫孝), 변용구(邊用九) 등과 함께 예천읍 장날인 3월 12일에
거사하기로 약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일경의 삼엄한 경계망으로 인하여 거사를 다음 장날인 3월 17일로 미루었으나, 이 때도 역시 일경의 철통같은 감시로 인하여 사전 탐지되어 중지하고 말았다. 이렇듯 거사가 지연됨에 따라, 그들은 어떠한 일경의 탄압과 경계에도 불구하고 거사를 단행하기로 뜻을 굳히고 4월 2일 오후 10시에 만세시위를 단행하였다. 그는 수 백여 명의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횃불을 앞세우고 면사무소와 동리
각처에서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9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5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이 3.1운동(1919)의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1992)을 추서하였다.(大韓民國 獨立有功者功勳錄 第10卷 國家報勳處 1993年 43쪽, 判決文 1919.5.5 大邱覆審法院, 3.1運動實錄 李龍洛 803쪽, 獨立運動史
國家報勳處 第3卷 418-419쪽, 獨立有功人物錄 1992)
권세원(權世遠) : 용문면 죽림리 출신, 본관은 예천, 초간(草澗) 문해(文海)의 후손, 1919년 3.1운동 때 항일운동을 하여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醴泉鄕校誌 2004)
---
임란 때 창의하여 모속관으로 활동한 권시(權時) : 旣載
언행이 충성으로 꽉찬 권심언(權審言) : 旣載
임란 때 의병소모장이 되어 많은 공을 남긴 권연(權연) : 旣載
국권피탈되자 머리를 기둥에 부딛쳐 피를 토하면서 순국한 권용하(權龍河) : 旣載
정유재란 때 선무공신에 녹훈된 권욱(權旭) : 旣載
---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애족장에 추서된
권원하(權元河) : 1894(고종 31)-1936, 용문면 하금곡리 471번지 출신, 자는 도장(道壯), 호는 중산(重山), 본관은 예천, 졸재 오기(拙齋五紀)의 14세손, 해진(海鎭)의 3자, 태어날 때부터 남달리 영민하고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여 뭇 사람들의 총애를 한 몸에 누리더니, 장성하면서부터 늘 국가가 왜적에게 강탈 당한 것을 한탄하면서 국가 민족의 광복을 위해 투쟁하였다. 어려서는 향리에서 한학을 닦고,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신학문을 수학할
큰 뜻을 품고 1909년에 애국지사 김동삼 등이 설립하여 애국 교육을 바탕으로 하는 안동협동학교(安東協同學校)를 졸업하고, 1913년부터 1919년 2월 사이에 왜관공립보통학교(倭館公立普通學校)를 제1회로, 부산제2상업학교를 졸업하여 신구 학문을 고루 겸비하였다. 졸업하던 해, 서울 사간동에 거처를 정하고 일제의 동정을 살피며 경향 각지에 걸쳐 동지를 규합하여 배승환(裵昇煥), 이재영(李縡榮), 류우국, 조태형, 권재수 등 동지와 국권 회복을 위해 활동하던
중 노도와 같이 절규한 3.1운동의 선봉이 되어 사력(死力)을 다해 항쟁하였으나 정의의 우리 민족들은 일제의 총검과 만행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어 그는 무력으로 왜적을 침공해야겠다는 열의 아래, 동년 8월 김종엽 등 몇몇 동지를 규합하여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조국을 등지고, 만주로 밀항하여 당시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奉天省柳河縣三源堡)에 있는 우리 군정부(軍政府) 소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제4기생으로 입학, 1920년 1월 하순에 졸업한 후
독립운동 자금 및 독립군 모병의 임무를 띠고 1920년 2월에 귀국하여 암약하다가, 동년 7월에 최재화(崔載華), 조강제(趙强濟), 배승환, 김영철(金永哲) 등 동지들과 함께 소위 무관학교생도모집사건(武官學校生徒募集事件)에 관련되어 칠곡군 왜관(漆谷郡倭館)에서 투숙하다가 왜경(倭警)에게 발각 체포되어 1920년 9월 14일에 경상북도 경찰국에 송치되어 수많은 고문과 악형으로 10년형에서 5년으로 항고 끝에 감형으로 1921년 2월에 2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그 해 안동분감(安東分監)으로 이감(移監)되었다. 동년 8월 하순에 가출옥(假出獄)되었다. 출감 후에는 왜적의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주목을 받으면서도 그의 애국심은 더욱 불타 올라 엄시일(嚴時一), 권세형(權世衡), 권봉(權鋒) 등의 가명(假名)으로 행사하면서 서울 등지로 피신해 가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면서 안재홍(安在鴻), 여운형(呂運亨) 등과 친교를 맺어 상호 밀회를 거듭하며 국권을 찾으려고 애썼다. 안재홍은 용문면 성현리에 있는 병암정(屛岩亭)에서
숙식을 함깨 할 때 권봉이란 가명을 당시 안재홍이 작명하였다. 왜경의 눈을 피하여 용문사(龍門寺), 명봉사(鳴鳳寺) 등 사찰을 밀회 장소로 이용하여 청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후일 일경(日警)에 탐지되어 투옥되었고, 배일 단체인 신간회(新幹會), 교직원사건(敎職員事件), 소작인사건(小作人事件), 민중소용사건(民衆騷擾事件), 대동국권회복단 사방사건(大同國權回復團砂防事件)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의 선봉에 서고 이 나라 독립운동을 위해 투쟁하였다.
이 밖에도 수많은 활약상을 낱낱이 밝히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일제 하에서 옥살이보다 잔혹한 예비 검속과 투옥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예천읍내에서 조선일보 지국장(朝鮮日報支局長)을 가장하여 언론을 통하여 동지들과 규합, 독립운동을 꾀하였다. 1926년 1월 9일 상주청년회관에서 열린 경북(尙州)건설자동맹 발회식(發會式)에서 권원하가 임석 경관의 엄중한 경계 하에 개회사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온 축전 축사(祝電祝辭)를 낭독하게 되자 돌연히
임석 경관으로부터 낭독을 금지 당하였다. 이어서 열린 임시총회에서 그는 사찰위원(査察委員) 겸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어서 열린 집행위원회에서는 상무위원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6월에는 김상기(金相起), 남병태(南炳台), 박창호(朴昌鎬), 장대발(張大發) 등과 함께 예천군내 청년대회를 개최하고 신간회(新幹會)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의하는 등 구국 운동을 하였고, 예천청년동맹회의 집행위원으로서 전예청소년운동(全醴靑少年運動)의 통일을 기하여
계몽운동에 주력하다가 왜경(倭警)에게 발각되어 다시 투옥되는 등 많은 고문의 여독(餘毒)으로, 병보석(病保釋)으로 일시 석방되었으나 1936년 4월 9일, 광복의 영광도 누리지 못한 채 객지에서 일생을 마치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강탈당한 국권을 회복키 위해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청춘을 항일 투쟁에 몸바치고 갖은 고문과 옥고 끝에 광복의 영광도 보지 못한 채 형추(刑推)의 여독(餘毒)으로 타계하였다. 어찌 통탄하지 않으리오. 그가 독립운동에만
전념하는 동안 많은 가산(家産)은 모두 탕진되고 가족들은 왜경(倭警)의 시달림에 견디다 못해 강원도 영월, 평창(平昌) 등 오지(奧地)로 도피를 하면서 온갖 고생을 당하였고, 우리가 광복된 다음해 1946년 2월, 그를 애도하는 뜻을 모아 경향 각지에서 수 천명이 운집한 가운데 사회장(社會葬)으로 용문면 덕신리 대곡(大谷) 앞산으로 이장(移葬)하였다. 그리고 그의 부인 김재수(金在洙)는 예천읍 백전1리에서 살고 있었다. 늦은 감은 있으나 정부 당국으로부터도
그의 독립 유공이 높이 평가되어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1977)을 추서(追敍)하였고, 기념비 건립비를 지원함에 있어 향리(鄕里)에서도 권원하의 추도비 건립을 위하여 씨족과 문벌 또는 지연과 혈연을 초월하여 범향토적(汎鄕土的)으로 추진함이 마땅하다 하여 1979년 3월 1일 <중산 권원하 선생 독립운동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重山權元河先生獨立運動記念碑建立推進委員會)>를 결성하고, 동년 3월 15일, 위원장에 권중해(權重海)를 뽑고, 기념비신(記念碑身) 및 축대
공사를 대구석물공장(大邱石物工場)에 의뢰하여 1979년 8월 15일에 기념비 제막식을 용문면 하금곡리 입구에서 가졌다. 또한 애족장(愛族章, 1990)을 추서(追敍)받았다.(重山權元河 先生獨立運動記念碑 除幕式 典帖, 日帝 警察極秘本 影印板, 大韓獨立運動略史 1980 122-123쪽,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 8卷 493쪽, 高等警察要事 200-201쪽, 東亞日報 1922.8.25, 1926.1.17, 獨立有功者功勳錄 4卷 511쪽, 奬學通信 19號 1985,
Yahoo 2001)
권원하 기념비(權元河記念碑) [碑] : 용문면 하금곡리 용두 도로(龍頭道路) 변에 있는 비로,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던 중산 권원하(重山權元河)를 위하여 1979년에 기념사업회에서 세웠다.
---
▲유천면 사곡리, 살기좋은 생태우수마을로 겹경사...축하합니다.
사곡리(柳川面 沙谷마을 참 살기좋은마을가꾸기 奬勵에 이어 生態優秀 마을 選定 겹慶事) [記事] :
백두대간이 뻗어있고 국사봉(727m)이 자리한 예천군 유천면 사곡리(이장 최종봉)가 2008년도 국가지정 생태우수마을 선정과 2008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전국 콘테스트 장려상에 입상하는 겹경사를 맞았다.
이번에 신규로 생태우수마을에 지정된 사곡마을은 전국의 다른 29개 마을과 함께 2009년 1월부터 2011년 12월까지 3년간 생태보존활동비 지원, 자연환경보전 이용시설과 환경 기초시설 설치를 위한 국고보조사업 추진시 우선 지원, 환경관련 포상 우선선정, 생태마을 지정사항에 대한 환경부 홈페이지 게재 등 각종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다.
유천면 사곡마을은 45가구가 살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으로 2004년도부터 무농약 우렁이쌀과 찰수수, 고추 등 친환경농법으로 먹을거리를 생산하여 대도시 출하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마을 뒤 계곡에는 1급수에만 살고 있는 가재가 서식하고 봄이면 어김없이 제비가 날아와 제비집을 짓고 있으며 마을주변에는 노송이 우거진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며 장승이 서 있고 물레방아가 돌아가며 흙돌담이 그대로 남아있어 예스러움과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서는 매월 1회 이상 전 주민이 참여하는 대청결 활동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깨끗한 들판 만들기로 2008년에는 클린농촌 경상북도 우수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편, 사곡마을은 행정안전부가 주관한 "2008년 참 살기 좋은 마을가꾸기 전국콘테스트"에서 장려에 입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번 콘테스트에서 사곡마을은 친환경 농산물 재배와 마을 쉼터조성, 물래 방아 복원, 우물 복원사업, 등산로 정비, 솔숲 조성 등의 사업을 지역 주민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발적으로 참여토록 유도함으로써 아름다운 마을공동체를 복원시켰다는 점이 높이 평가됐다.
특히, 예천군은 주민들의 자립 능력을 배양하고 지역 공동체 가치를 복원하기 위해 2008년 3월부터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콘테스트에 응모 신청을 받아 동년 11월 경상북도가 주관한 ‘2008년 보물찾기를 통한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콘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이번 전국콘테스트에서 장려상을 차지하여 행정안전부장관으로부터 우수마을 인증서와 시상금 50만 원을 받았다.
(김상국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1-05 오전 8:54:54)
---
▲경북도립대 라오닐, 2년 연속 선정...축하합니다.
경북도립대(慶北道立大學 學校企業『라오닐』, : 敎育科學技術部 學校企業支援事業者로 2年 連續 選定) [記事] :
경북도립대학(학장 박용환) 학교기업 『라오닐』이 2008년 연말 교육과학기술부가 실시한 2008년 학교기업지원사업 평가’에서 2008년도에 이어 2009년도에도 학교기업지원사업자로 2년 연속 선정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번 학교기업지원사업자 선정으로 인건비, 현장실습비 등으로 최대 1억 5천만 원의 국비가 지원될 것으로 보여 재학생들의 교육여건 개선 및 장학금 확대 지급 등 다양한 혜택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학교기업지원사업 평가는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전국의 66개 학교기업을 대상으로 2008년도 학교기업의 현장실습 참여학생 실적, 매출액 및 순이익, 기술이전 실적과 2009년도 사업계획을 심사하였으며, 『라오닐』은 평가항목 중 2008년도 현장실습 참여학생 실적(목표대비 370% 달성)과 신규 인력채용 실적(목표대비 160% 달성) 및 2009년도 사업계획 등이 우수한 평가를 받아 계속 지원 사업자로 선정되었다.
학교기업지원사업자로 선정된 『라오닐』은 경북도립대학 자동차소방계열 자동차전공을 모태로 2005년도에 설립되었으며 학생들의 현장실습을 통해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기업으로 자동차 커스텀 페인팅 및 특수도장, 가전.IT제품.페인트 컬러개발, 자동차 보수, 도장 등을 주요 제품으로 생산하고 있으며, 재학생들의 현장실습 능력 강화, 우수 도장인력양성 등으로 졸업생들의 취업률 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한, ’08 서울 오토살롱 등 각종 전시회 참여 및 전국 순회 투어를 실시하여 자동차 애호가 및 일반인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았으며 2008년 경북도내 대학 중 유일하게 교육과학기술부의 학교기업지원사업자로 선정되어 국비 4억 원을 지원받았다.
한편 경북도립대학은 지난 2003년부터 2008년까지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자동차 도장분야 특성화 대학으로 선정, 한강이남 최고의 도장기술을 자랑하는 도장기술 보유 대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학교기업 라오닐의 관계자는“작년 학교기업지원사업자로 선정된 이래 자동차 도장기술에 관한한 전국 최고의 명문대학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도장기술을 국내에 정착시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2년 연속 사업자로 선정될 수 있었다”고 하며, “올해에는 글로벌 기업인 (주)듀폰과 제휴하여 칼라칩 생산을 통한 칼라DB 구축으로 매출이 크게 증가될 것으로 기대 한다”며 포부를 밝혔다.
(醴泉인터넷放送 2009-01-05 오후 12:40:46)
---
▲예천방문 336
석송령과 황목근 [記事] : 한국영상문학협회 카페/ 예천의 세금내는 나무/ 글쓴이: 동백꽃/서정부/ 2009.01.05 19:55/
석송령 :
수령(樹齡)은 600여 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1m, 가슴높이 줄기 둘레가 3.67m이고, 가지의 길이는 동·서쪽이 19.4m, 남·북쪽이 26.2m이다.
이 소나무는 약 600년 전에 큰비가 와서 풍기지방에서 시작된 홍수를 따라 흘러 내려오는 것을 어떤 과객이 건져내어서 이곳에 심은 것이라 한다.
그 뒤 이 나무는 좋은 성장을 계속하였는데 이 마을의 주민이었던 이수목(李秀睦)이란 사람이 이 나무에서 영감을 느끼게 되어 석송령이란 이름을 지어 주고 그의 소유토지 6,600㎡를 이 나무에 상속시켜 문서등기를 마쳤다.
토지와 같은 부동산을 나무가 소유한다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동리회관 건물도 석송령의 소유토지 위에 건축된 것이다.
이 소나무는 해마다 농지를 경작하는 사람으로부터 돈을 받고 그것을 은행에 저축하고 있다.
땅을 소유하고 있으니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지사.
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 나무에 500만 원을 하사한 후, 이것을 장학기금으로 하여 매년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정월보름날 새벽에 동민들은 이 나무 아래에서 동제를 올려 평안을 비는데 사람들은 이 나무가 동리를 수호해 주고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동제가 끝나면 아주머니들이 막걸리가 든 술병을 들고 이 나무의 주변을 돌면서 술을 땅에 뿌린다. 소나무는 술의 효과를 얻어 더욱 씩씩하게 자란다는 것도 사람들은 믿고 있다.
동리 노인들은 이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송계(松契)를 만들고 있다.
황목근 :
1) 천연기념물 400호/ 명칭 : 예천금남리의 황목근/ 위치 :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 696/
감천면에 세금 내는 소나무 석송령이 있다면 금남리 금원마을에는 약 500년으로 추정되는 팽나무가 있습니다. 줄기둘레 3.2m, 키 15m에 이르는 큰 나무로 “황목근”이라 합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5월에 나무 전체가 누런 꽃을 피운다 하여 “황”씨 성을, 근본 있는 나무라는 뜻을 따 “목근”이라 하였답니다. 1939년 마을 사람들이 쌀을 모아 마련한 마을의 공동 재산인 토지를 황목근 앞으로 등기 이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12,232㎡의 땅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세금 내는 나무가 되었어요. 실제로 1996년의 경우 8,240원의 세금을, 1998년에는 10,440원의 세금을 납부했습니다./
2) 경상북도 예천 금원마을이라는 곳에 이름난 땅부자 나무가 있다. 팽나무란 이름보다 황목근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이 나무의 나이는 약 5백년, 높이는 18미터, 줄기의 둘레는 네 아름에 둥그스름하게 잘 발달된 수관을 갖고 있다.
이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마을 사람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풍년제를 지내기 위하여 쌀을 모아 공동의 재산을 마련하였다. 근대화가 되어 토지의 소유권에 대한 법적인 조치가 필요하자 공동재산을 등기부에 올려야만 하였다.
뒷날 혹시라도 재산다툼으로 아옹다옹 할 수 있는 공동명의를 피하는 방법을 찾았다. 기발하게도 마을 앞 당산나무 앞으로 등기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오랫동안 논란 끝에 드디어 1939년 이 팽나무 앞으로 등기이전을 결정하게 된다. 팽나무라는 보통명사로는 등기가 되지 않으니 고유의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정해진 이름이 황목근(黃木根)이다. 팽나무가 5월에 황색 꽃을 피운다는 뜻에서 황이란 성을 따오고, 나무의 근본이란 뜻으로 목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황목근은 현재 약 2,800평의 자기 땅을 가지고 있는 알짜 땅 부자다. 토지관리 대장에 엄연한 고유번호도 가지고 있고 매년 세금도 꼬박 꼬박 낸다.
나무의 모든 몸 관리를 국가에서 해주는 탓이다. 자고 나면 재산이 불어나는 행복한 나무다. 같은 예천군에 있는 석송령(石松靈)과 함께 자기 앞으로 등기된 땅을 가진 희한한 나무라서 사람들이 흥미로워한다.
황목근은 금원마을을 지켜주는 수호목이자 당산나무로 매년 정월 대보름 자정에 제사를 올리고, 다음날 온 마을 주민이 함께 모여 잔치를 벌여 왔다.
또 7월 백중날에도 마을 잔치를 열어 농사일로 지친 심신의 피로를 풀고 나무를 보살피는 행사가 이어진다. 황목근은 나무나라의 평범한 백성으로 태어났을 터이지만 이제는 재력가로서 인간 세계에까지 이름을 떨치니, 나무고 사람이고 모두가 부러워 할만하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성림회.경북 예천 회룡포 마을 - 정보화마을(daum 2009)
---
서악사(西岳寺) [寺刹] : 예천읍 대심리 560번지(宗)에 있는 절로, 대심리 ''''하무실; 북쪽 봉덕산 중허리에 있다. 1701년에 창건되었고, 1737년에 옮겨 세웠다. 1761년 3월 25일의 상량문(上樑文)이 있고, 1783년 2월, 1871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사찰 규모가 협소하여 현재는 규모가 큰 불당(佛堂)을 지었다. 원통전은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와가 맞배지붕이며, 요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와가 팔작지붕으로, 앞면은 둥근 기둥을 세웠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