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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1813) : 예천 충효 12(附 예천방문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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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권응성(權應星) : 1530(중종 25)-1631, 지보면 대죽리 출신, 자는 경추(景樞), 본관은 안동, 산해(山海)의 증손, 윤(綸)의 2자, 훈도 경(經)의 양자, 부모 사후(永感下)에 유학(幼學)으로서 1558년(명종 13) 동생 응기(應箕), 응삼(應參), 응정(應定)과 더불어 모두 함께 식년 진사시(式年進士試)에 3등 71위로 합격하였고, 4형제 5부자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1592)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대죽(大竹)에서 안동
신양(新陽)으로 이거하여 대대로 살고 있다. 나중에는 금산(金山, 現 金泉)에서도 살았다. 묘는 풍산 만운동 조파산 오향(豊山晩雲洞助坡山午向)에 있다.(族譜, 朝鮮환輿勝覽 1929, 竹林先生實記 1989, 司馬榜目, 醴泉郡誌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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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창의하여 순절한
권응정(權應定) : ?-1592(선조 25), 지보면 대죽리 출신, 자는 문숙(文肅), 호는 호암(湖岩), 본관은 안동, 수(綏)의 장자, 1558년(명종 1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1592) 때 창의(倡義)하여 순절(殉節)하였다. 묘는 용궁현 신하면 법방산 곤향(龍宮縣申下面法方山坤向)에 있다.(族譜, 醴泉郡誌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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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를 옹호한
권정침(權正침) : 1710(숙종 36)-1767(영조 43), 예천 출신, 자는 자성(子誠), 호는 평암(平庵), 본관은 안동, 신(藎)의 아들, 정흠(正欽)ㆍ정룡(正龍)의 형이다. 편모 슬하(慈侍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754년(영조 30) 증광 진사시에 3등 39위로 합격, 1757년(영조 33)에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즉 1757년(영조 33) 8월 29일 임금이 친림한 시험(殿試)에서 1위를 하였다. 합격자 명단을
본 왕이 하교하기를, "옛날에 들으니, 정시(庭試)는 한강을 건너가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홍패(紅牌)가 장차 조령(鳥嶺)을 넘어가게 되었으니, 경사를 함께 하려는 의도를 거의 저버리지 않겠구나."라고 하였다. 1757년(영조 33) 10월 19일 임금이 친히 공묵각(恭默閣)에 가서 한림(翰林)에 권점(圈點)을 받을 사람들에게 치루는 소시(召試)에서 권정침이 일부 과목 답지에 백지를 내었음에도 설서(說書)로 조용(調用)하라고 하였다. 즉 권정침은 시험장에
들어와서 사륙문(四六文)을 익히지 않으므로서 백지를 바쳤는데, 임금이 그 사유를 묻고 가상히 여겨 하교하기를, "현재의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질(質)을 숭상하는 것보다 나온 것이 없다. 대저 응시를 함에 있어서 자기가 잘하는 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따라서 시험지를 메우는 자가 많은데, 권정침은 자신이 능하지 못한 바를 억지로 하지 않고 그냥 백지를 바쳤으니, 그 질실(質實)함을 볼 수 있다. 더구나 그는 충정공(忠定公) 권벌의 자손이니, 춘방(春坊)의
참하(參下)를 감당치 못하겠는가? 만일 그를 무턱대고 하향(下鄕)하게 버려둔다면, 어찌 그 학문을 좋아하는 곳(鄒魯之鄕)을 위로하겠는가? 설서로 자리가 빌 때를 기다려 조용하게 하라."하였다. 영조(英祖)에게 인정되어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지냈다. 1762년(영조 38)에 형조 판서 윤급(刑曹判書尹伋)의 겸종 나경언(겸從羅景彦)이 장헌세자의 비행을 열서(列書)하여 영조에게 올리니, 왕이 크게 놀라 세자를 책(責)하였다. 이 때 세자궁(世子宮)의
관원(官員)이 모두 물러났지만, 다만 권정침과 사서 임성(司書任珹), 그리고 한림 임덕제(翰林林德제) 등 3명이 세자를 모시고 왕 앞에 나가 세자의 무죄함을 역설하여 일단 무사히 수습(修習)되었다. 그러나 왕이 다음 달 드디어 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죽게 하니, 권정침 등 3명은 울며 간(諫)하며 대신 몸을 바칠 것을 청원하여 통곡하다가 형장까지 끌려갔으며, 특지(特旨)로 석방된 수 일 후 친구들에게 끌려갔다. 귀향하여 문을
닫고 음식을 전폐하다가 타계하였다. 시호(諡號)는 충헌(忠獻)이다. 저서로는 <중용총론(中庸總論)>, <근사록강의(近思錄講義)>, <평암집(平庵集)>, <서연강의(書筵講義)> 등이 있다.(英祖實錄, 韓國故事大典, 司馬榜目, 英祖實錄)
권정침(權正침) : 1710(숙종 36, 경인) ~ 1767(영조 43, 정해),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 안동(安東). 자는 자성(子誠). 호는 평암(平庵). 시호는 충헌(忠憲). 우찬성(右贊成) 벌(?)의 후손. 신(藎)의 자. 1754년(영조 30) 진사시를 거쳐 175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어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신임을 받았다. 1762년 나경언(羅景彦)이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열거하자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 임성(任珹),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임덕제(林德)와 함께 세자의 무고함을 밝혀 무사히 수습시켰다. 그러나 다음 달 영조가 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하고, 뒤주 속에 가둘 때, 극력 세자를 옹호하다가 형장에까지 끌려갔으나 특지(特旨)로 석방된 후 고향에 돌아가 두문불출하였다. 문집에 『평암문집(平庵文集)』, 저서에 『중용총론(中庸總論)』, 『근사록강의(近思錄講義)』, 『사단칠정변(四端七情辨)』 등이 있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宋志香)?酉谷(權廷羽)(www.koreastudy.or.kr 2007)
권정침 [記事] : 안동시사 5/ 간행년 : 1999/ 저자 : 안동시/ 발행처 : 안동시청/ 【安東 權氏】/ 권정침(權正?):1710(숙종 36, 경인)~1767(영조 43, 정해). 본관 安東. 자는 子誠. 호는 平庵. 斗翼의 손자. 藎의 子. 외조는 全州 柳以觀. 1757년(영조 33) 文科庭試 급제. 1762년(영조 38) 羅景彦이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자, 林德?·任珹 등과 함께 나경언을 엄중히 취조할 것과 세자의 무죄를 力說, 결국 그를 옹호한 죄로 형장에 끌려갔으나 特旨로 석방됨. 世子侍講院說書 역임함. 시호:忠憲. 저서:『平庵集』. ▣참고:「墓碣銘」(柳致明 撰) □집필:권진호(www.koreastudy.or.kr 2007)
권정침 [記事] : 봉화군사/ 간행년 : 2002/ 저자 : 봉화군/ 발행처 : 봉화군/ 第3章 人物/ 第1節 文科/ 권정침(權正枕) : 1710~ 1767, 字는 子誠, 호는 平庵, 시호는 忠憲, 본관은 안동으로서 충재의 후예이다. 영조 30년(1754)에 진사가 되고 3년 뒤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의 설서(說書)가 되어 사도세자의 신임을 받았다. 1762년 나경언(羅景彦)이 세자를 모함하여 세자가 죽을 지경에 이르자 고은 임성(任誠) 박덕제와 함께 세자의 목숨을 구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에는 뒤주 속에 가두어 죽게 했다. 공은 낙향하여 두문불출 애통 속에 세상을 떠났다. 직제학(直提學)에 추증되고 충헌(忠憲)이라 시호가 내렸다. 그의 저서로는「중용총론」 「근사록의의」 「사단칠정변」 「평암집」 등이 있다.(www.koreastudy.or.kr 2007)
권정침 [記事] : 안동시사 5/ 간행년 : 1999/ 저자 : 안동시/ 발행처 : 안동시청/【安東 權氏】/ 권정침(權正?):1710(숙종 36, 경인)~1767(영조 43, 정해). 본관 安東. 자는 子誠. 호는 平庵. 斗翼의 손자. 藎의 子. 외조는 全州 柳以觀. 1757년(영조 33) 文科庭試 급제. 1762년(영조 38) 羅景彦이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자, 林德?·任珹 등과 함께 나경언을 엄중히 취조할 것과 세자의 무죄를 力說, 결국 그를 옹호한 죄로 형장에 끌려갔으나 特旨로 석방됨. 世子侍講院說書 역임함. 시호:忠憲. 저서:『平庵集』. ▣참고:「墓碣銘」(柳致明 撰) □집필:권진호(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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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왜적과 싸우다가 순국한
권종(權悰) : ?-1592(선조 25), 1590년(선조 23)에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하여 1591년(선조 24)에 이임, 자는 희안(希顔), 시호(諡號)는 충민(忠愍), 본관은 안동, 도원수 율 장군(都元帥慄將軍)의 종형(從兄)이다. 효행과 청렴으로 천거되어 개령 현감(開寧縣監)을 거쳐 1590년에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고, 임진왜란(1592) 후에 금산 군수(錦山郡守)일 때,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는 종제(從弟)인 도원수 권율(都元帥權慄)과
연락, 군사를 이끌고 관찰사(觀察使)를 따라 전주에 도착, 관찰사가 그의 노령을 이유로 군사를 빼앗고 군량 관리의 임무를 맡기자, 금산군(錦山郡)에 돌아가 병졸 수 백 명을 모집,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조헌(趙憲)에게 지원을 요청한 뒤, 대거 내습해 온 적과 격전 끝에 순국하였다. 금산(錦山)에 순의비(殉義碑)가 세워지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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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조달하여 항일운동을 한
권준(權俊) : 일제 때, 예천 출신, 중국 길림성(吉林省)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가,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길림성 파호문(把虎門) 밖 중국인 반모(潘某)의 집에서 김원봉(金元鳳), 이종암(李鍾岩), 한봉근(韓鳳根), 김옥(金玉), 윤세주(尹世胄), 서상락(徐相洛), 신철휴(申喆休), 곽재기(郭在驥), 강세우(姜世宇), 이성우(李成宇), 배동선(裵東宣) 등 대부분 경상남북도 출신 12명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무력
항쟁을 통하여 일제 조선총독부의 통치 기능을 마비시키고 군자금(軍資金) 모집을 하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그 후 근거지를 북경으로 옮기고 북경과 상해 방면의 우국 지사(憂國志士)들을 포섭함으로써 1925년 경에는 약 70명의 결사적인 단원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었고, 한편 군내에 들어와 군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였다.(高等警察要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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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추성영사공신에 등록된 권중달(權仲達) : 旣載
명 나라가 조선에서 세공(歲貢)을 적게 바친다고 트집을 잡자 사은사로 가서 현재대로가 마땅하다는 확약을 받아온 권중화(權仲和)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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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 왜구를 막고 선초에 대죽리에 은거한
권진(權軫) : 1357(공민왕 6)-1435(세종 17), 지보면 대죽리 사람, 호는 독수와(獨樹窩), 본관은 안동, 감찰 희정(希正)의 아들, 1377년(우왕 3)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의창 현령(義昌縣令)으로 왜구(倭寇)를 막았다. 조선이 건국(1392)되자 북백(北伯)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으나 대죽리 염송산(大竹里念松山)에 은거(隱居)하였다. 그 후 1398년(태조 7)에 경력(經歷, 종4품)을 거쳐 태종 초에 강원도와 경상도의
도관찰사(都觀察使)를 지내고, 1407년(태종 7)에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라, 흠문 기거사(欽問起居使)로 명(明) 나라에 다녀와 평안도 도관찰사(都觀察使)가 되었다. 그 후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다시 명(明) 나라에 다녀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거쳐 1430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전임(轉任), 1430년(世宗 13)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高麗史)
총명 민첩하고 기억력이 강하였다. 1377년(우왕 3)에 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였는데, 그 때의 권신 염흥방(廉興邦)이 질녀를 아내로 주려하였다. 엄흥방이 모함하려고 마음먹고 있기에 그는 관직을 사양하고 나오지 않은 것이 두어서너 해였다. 의창현(義昌縣)이 왜적의 침략을 받아 주민들이 생업을 잃었었는데, 그는 현령(縣令)이 되어 오래된 폐단을 없애고 궁핍한 사람올 진휼하니, 선정의 명성이 가장 높았다. 태조가 그 때에 시중(侍中)으로 있었는데, 말하기를, "우리 고향 전주(全州)가 백성이 많고 일이 번다하여 재주있는 사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하고, 그를 발탁하여 판관(判官)으로 삼았더니, 부세(賦稅)가 공평하고 정치가 엄숙하였다. 1408년(태종 8)에 경상도 도지사를 지냈다. 1428년(세종 10) 가을에 성석린(成石璘)이 나가서 서도(西都)를 진무하였는데 특별히 그를 천거하여 경력(經歷)으로 삼았다. 사명을 받들고 제주(濟州)에 갔는데, 제주의 풍속이 매양 조신(朝臣)을 만나면 으레 토산물을 선사하므로, 그가 주는 대로 받았다가 일이 끝난 뒤에 받았던 물건을 모두 관사에 달아두고 돌아가니, 고을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나가서 수령과 감사가 되어 모두 그 직책에 알맞았고, 들어와 대사헌이 되어 드디어 형조ㆍ호조ㆍ이조의 판서와 찬성(贊成)을 지냈고, 1431년(세종 13)에 우의정에 제수되고 1433년(세종 15)에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죽으니, 나이 79세이다. 유명(遺命)으로 불사(佛事)를 행하지 말고 염(斂)에는 옷 한 벌만 썼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임금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조회를 사흘 동안 중지하고, 조의(弔儀)와 부의(賻儀)를 보냈는데, 쌀, 콩이 합하여 70석이고, 종이가 100권이다. 관가에서 장사를 지내주고, 시호를 문경(文景)이라 하였다. 권진의 몸가짐이 맑고 검소하였으며 일을 다스리는 것이 간결하고 평이하였고, 먹는 데는 여러 가지 반찬을 겹치지 않았고, 옷은 문채있고 수놓은 것으로 입지 않았으며, 거문고, 비파, 바둑, 장기 같은 것을 절대로 좋아하지 않았고, 병이 있으면 귀신이나 부처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하여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명이 있으니, 제가 어떻게 나를 수요(壽夭)하게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아들 셋이 있으니 권맹경(權孟慶), 권맹도(權孟度), 권맹정(權孟貞)이었다.(世宗實錄 1435.4.12)
[정종실록] : 1399년(정종 1) 6월 27일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사헌부의 규찰을 받았고, 동년 9월 10일 직문하(直門下)로서 지합주사(知陜州事)에 임명되었고, 1400년(정종 2) 8월 1일 지합주사로서 평양백(平壤伯) 조준을 무고한 죄로 축산도(丑山島)에 귀양을 갔다. [태종실록] : 1401년(태종 1) 10월 10일 지형조사(知刑曹事)로서 가정 사정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고, 다시 지형조사(1401.10.18)를 거쳐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 1403.윤3.11)로서 노비 변정(奴婢辨整)을 오결(誤決)하여 파직되었으나, 왕명으로 제주(濟州)에 가서 궁사(宮司), 창고, 노비의 적(籍)을 만들었고, 이조 참의로서 왕명으로 의정부 우정승 조영무(趙英茂)의 집으로 가서 사직서를 되돌려 주었고(1405.11.24),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 1406.1.25)를 거쳤는데, 형조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전 도관찰사 권진은 행실이 청렴하고 절개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1407.6.1). 사헌부 대사헌(1407.7.4)으로서 민무구의 죄를 청하였고(1407.7.25), 민무구 등의 직첩을 회수하고 국문하기를 왕에게 청하였다(1407.7.29). 마침 안성(安省, 前 醴泉郡守)이 아버지의 병으로 사직하여 자리가 비어있던 경상도 도관찰사(1408.1.27)를 거친 후 달단을 협공하기 위해 명 나라에서 군사를 요청한다는 소식이 전해져 풍해도(豊海道)에 순찰사로 내려갔다(1409.10.12), 판충주목사(判忠州牧使)를 거처 가정 제조(加定提調, 1414.4.22)에 오르고, 변정도감 제조로서 부정이 있다 하여 탄핵을 받았다(1414.8.22). 전라도 도관찰사로서 덕산현(德山縣)에 이른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 1필을 바쳤고(1416.2.7), 검교 한성윤(檢校漢城尹) 조유(趙瑜)가 불경하게 굴므로 왕에게 아뢰어 그 직첩을 거두도록 하였고(1416.9.14), 왕명으로 회안대군(懷安大君)의 딸이 혼일할 때 필요한 혼수를 주었다(1416.9.19). 형조 판서(1417.4.25)로서 불충 불효 이외의 이죄(二罪) 이하의 죄인은 모두 석방하도록 왕에게 아뢰어 윤허를 받았고(1417.4.25), 기거(起居)를 흠문(欽問)하기 위하여 북경으로 가서(1417.윤5.12), 북경에서 받은 중국 황제의 성지(聖旨)를 갖고 돌아왔고(1417.7.30), 옛날 전라도 도관찰사 때 옥사 때문에 의금부에 갖혔다가(1417.8.16) 풀려났고, 노비의 공문에 대해서 왕과 의논하였다(1417.11.21). 1417년(태종 17) 12월 3일에 평안도 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세종실록] : 1418년(세종 즉위) 12월 7일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에 임명되었고, 호조 판서(1418.12.26)를 거쳐, 안성(安省)이 병들었으므로 교체되어 유후사 유후(留後司留後, 1419.8.6)에 임명되었고, 충청도 관찰사로서 임금께 사람을 보내어 말 2필을 바쳤고(1421.10.15),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 1422.2.16)로서 하정사(賀正使)로 의관(衣冠), 약물 등을 갖고 북경으로 갔는데(1422.11.3), 그 도중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1423.1.25)에 임명되었고, 북경에서 돌아왔다(1423.2.11). 판한성부사로서 북교(北郊)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고(1423.4.21), 중국 사신의 원접사(遠接使)로 갔고(1423.7.30), 겸 관반사(兼館伴使)에 임명되었고(1423.8.7), 원접사로서 왕이 가평역(嘉平驛)의 일수(日守) 정현(鄭玄)에게 옷을 포상하도록 하였고(1423.8.9), 중국 사신에게 생초(生초) 2필을 받았다(1423.8.20). 형조 판서(1423.9.29)로서 왜통사(倭通事) 윤인보(尹仁甫) 등을 의금부에 가두었고, 태종의 배향 공신이 되었고(1424.2.6), 살꽂이에 있는 밭을 하사받았고(1424.3.13), 벽제(碧蹄)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였고(1424.6.24), 유후사 선위사(留後司宣慰使)로서 출발하였고(1424.7.20), 원접사로서 떠났다(1424.9.23). 형조 판서(1424.11.3)로서 명 나라 사신을 마중하였다(1425.윤7.3). 찬성(贊成)으로서 평양선위사(平壤宣慰使)가 되어 길을 떠났고(1426.2.19), 의정부 찬성 겸 판한성부사(1426.12.7), 찬성(1427.9.8), 찬성사(1428.7.5), 이조 판서(1430.1.8), 예조 판서로서 경기 정역 찰방(程驛察訪)을 1명 더 증원 요청하여 윤허받았고(1431.1.10), 우의정으로서 최진(崔眞)의 누이동생에게 미곡을 줄 것을 청하였다(1432.11.18). 1435년(세종 17) 4월 12일 우의정 그대로 치사(致仕)하게 하였는데, 1435년(세종 17) 4월 12일에 죽었다. 동년 5월 25일에 임금으로부터 제사가 내려졌다.(嶠南誌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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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큰공을 세운 도원수인
권진(權軫) : 조선 중기, 감천면 미석리 석남(石南) 안동 권씨 석남파(石南派)의 입향조(入鄕祖), 전은서별제(別提) 자(刺)의 아들, 충의위(忠義衛)에 올랐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안동 태화동 금곡으로 이거(移居)하였고, 진(軫)이 석남으로 이거(移居)하였는데, 현재 감천면(甘泉面)에서 살고 있는 안동 권씨(權氏)는 대부분 진(軫)의 후손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 후 그는 아버지의 유지(遺志)인 "한 가문(家門)의 성만(盛滿)을 귀신도 시기하는 법이다.
우리가 조상 대대로 부귀를 누렸으니 이제 남에게 양보할 때도 되었다.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를 이어 청운(靑雲)의 꿈을 포기하고 인적이 드문 석남리(石南里)를 찾아왔다. 당시 종형 철 (從兄轍)은 영의정(領議政)이요 종질 율(從侄慄)은 임진왜란(1592)에 큰공을 세운 도원수(都元帥)다. 여러 번 벼슬에 나올 것을 종용받았으나 유지(遺志)을 내세워 거절하고 그 곳에 안주(安住)하였다. 석남(石南)의 유래는 석남과 구곡(龜谷) 사이 개울을 바라보는
곳에 잘 다듬어진 듯한 선바위 하나가 서 있다. 또 옛날 황새가 그 바위 위에 둥우리를 틀고 알을 낳아 새끼를 깐 곳이라 해서 황새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황새는 영물(靈物)이고 영물이 번식하는 곳에는 길상(吉相)이 찾아온다고 해서 그곳을 세거지(世居地)로 삼았다. 후손 광(壙)은 문장이 널리 알려져서 먼 곳에서부터 배움을 청하였고, 그 후 영(穎)과 호(灝, 松泉)는 시문(詩文)에 능하고, 섭(燮)은 학문이 높아 오죽재 조의양(梧竹齋趙宜陽) 등이 존경하였다.
위(褘)와 보(補)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회(檜)는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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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하다가 옥고를 치러 대통령표창에 추서된
권창수(權昌銖) : 1892(고종 29)-1970, 하리면 금곡리 지경터 출신, 본관은 예천, 1919년 영주군 하리면(現 醴泉郡 下里面)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지렀다. 권창수는 1919년 4월 4일 동지들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하리면 은산동 황병석(黃炳奭)의 집에서 거사를 논의하였다. 이들은 이 날 오후 6시 경 마침 장이 열리고 있던 은산동 장터로 나아가 독립 만세를 고창한 후, "일본군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로 가서
이를 격파하자''''''''''''''''고 외쳤다. 그러나 이를 듣고 급히 달려온 일본군 헌병들에 의하여 권창수를 비롯한 동지들은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독립 만세를 불렀다. 권창수는 이로 인하여 1919년 5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 第14卷 國家報勳處 2000年
72-73쪽, 判決文 1919.5.16 大邱地方法院, 身分帳指紋原紙 警察廳, www.independence.or.kr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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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망하자 지보면에 은둔한 권초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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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의 좌종사로서 항일운동을 하여 건국포장에 추서된
권태선(權泰宣) : 1868(고종 5)-1941, 용궁군 출신, 자는 극여(極汝), 본관은 안동,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그는 국권 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1907년부터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에 나섰다. 1896년에 이미 거의(擧義)한 바 있는 이강년 의병장은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1907년 3월 충북 제천에서 재봉기하여 경상, 강원, 충청도 일대를 넘나들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 해산병이 주축이 된 민긍호(閔肯鎬)
의진과 합세하여 충주성을 공략하였고, 추치전투, 죽령전투, 고리평전투, 백자동전투 등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이강년 의병장은 특히 지방민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리에 밝은 이점을 이용해 신출귀몰한 유격전술을 구사하여 의병사에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1908년 2-4월 간에 전개된 요소동전투, 갈기동전투, 백담사전투, 안동 서벽전투, 봉화 재성전투, 안동 재산전투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강년 의병장은 같은 해 6월 청풍 작성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피체되어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이와같이 후기 의병사에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한 이강년 의진에서 그는 좌종사(坐從事)에 선임되어 항일 활동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의병 활동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大韓民國 獨立有功者功勳錄 第1卷 國家報勳處 319쪽, 同 第14卷 國家報勳處 2000年 74쪽,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報勳處 第1輯 304쪽, 韓國獨立史 金承學 下卷 81쪽, 雲崗集, 인터넷 獨立記念館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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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대를 탈출하여 광복군 비호부대에 편입된 권혁무(權赫武)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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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때 원종공신인
권효손(權孝孫) : 조선 태종 때, 지보면 대죽리 출신, 본관은 안동, 처용(處庸)의 장자, 만호(萬戶)를 지냈다. 문종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이었고,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증직(贈職)되었다. 묘는 용궁현(龍宮縣) 동쪽 대동 위봉산 갑향(大洞委鳳山甲向)에 있다.(族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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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때 원종공신이 된 금이영(琴以詠)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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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에 의병에 참가한
금현달(琴玄達) : 구한 말(舊韓末), 예천 출신, 1909년에 의병(義兵)에 참가하였다.(明治百年史叢書 金正明 1권 83쪽, 獨立有功者功勳錄 第1卷 國家報勳處 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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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남들은 피난가는데 5성위판을 남한산성으로 옮긴 김곤(金곤)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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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란 때 순국하여 참판에 증직된
김광희(金光熺) : 1610-1640, 호는 선희(仙希), 본관은 안동, 병자호란(1636) 후 인조가 명 나라에 보내는 기밀문서를 지니고, 볼모가 된 종숙인 김상헌(金尙憲)을 적진으로 만나러 가다가 청의 용골대(龍骨大)에게 사로잡혀 그 문서를 씹어 삼키고 죽임을 당하여 병조참판이 증직되었으며, 그 부인인 안동 권씨가 어린 아들 수준(壽埈)을 업고 친정인 용궁 동면(東面)으로 왔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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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개국 때 좌명공신으로 좌찬성에 오른 김균(金균)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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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때 원종공신인
김기(金琦) : 자는 기옥(奇玉), 본관은 강릉, 익위사세마 자형(自亨)의 아들, 효생(孝生)의 손자, 경력 보손(寶孫)의 증손자이다. 1447년(세종 29) 식년 생원시에 2등 13위로 합격, 1447년(세종 29) 친시 문과(親試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여 집의를 지냈다. 1455년(세조 1) 12월 27일 직장(直長)으로서 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1456년(세조 2) 10월 1일에는 도사(都事)로서 한 자급(資級)을 더하였다. 그 후 사헌부 지평으로서
의금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윤허되지 않았고(1457.4.24), 사헌부의 의논으로 홍일동(洪逸童)을 탄핵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고(1457.7.7), 왕의 순수(巡狩)가 부당하다고 아뢰었다(1457.7.12). 의금부 지사(知事)로서 왕명으로 자기 종 부귀(富貴)의 귀를 베고 힘줄을 끊은 홍계조(洪繼祖)를 국문하였고(1462.11.4), 의금부 진무(鎭撫)로서 왕명으로 이시애의 난에 연루된 함길도관찰사 신면(申면)을 잡아왔고(1467.5.19), 함흥 유향소(咸興留鄕所)의
품관(品官)이 서명한 사목(事目)을 가지고와 이시애의 동정을 아뢰었고(1467.5.29), 이시애에게 보낸 서한에 거짓이 있다 하여 의금부에 갖혔으나(1467.5.29), 무죄로 석방되었다(1467.6.1). 1467년(세조 13) 11월 8일에는 겸 사헌부 집의로 임명되었다.(司馬榜目, 世祖實錄, 醴泉郡誌 1770 1841, 韓國故事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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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항일지사인
김기석(金己石) : 일제 때, 예천읍 백전리 187번지 출신, 항일지사(抗日志士)였다. 부인은 권분이(權粉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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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과 독립단체들에서 항일운동하다가 옥고를 치러 건국포장에 추서된
김낙문(金洛文) : 1872(고종 9)-1942, 감천면 출신, 자는 춘달(春達), 호는 모죽(慕竹), 고종 황제 강제 퇴위(1907)에 항의하여 단식 순국한 순흠(舜欽, 建國勳章 愛國章)의 4자, 1907년 3월 이강년(李康秊)이 제천에서 창의하자, 그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단양, 충주 전투에서 패전하였고, 그 뒤 청주전투에서 패하고 체포되어 3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1908년 9월 그의 아버지가 단식(斷食) 자살한 뒤 1911년 이동하(李東下)에게
자금을 제공하였고, 이동하의 부하인 노병직(盧炳稷), 김동연(金東淵), 강병수(姜秉秀) 등과 기맥을 통하며 활동하였다. 1913년 임병찬(林炳璨)이 조직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에 가맹하기도 하였다. 1915년 무단통치 하에서 이동하, 이은영(李殷榮), 이식재(李湜宰) 등과 의병 활동을 하다가 희생된 후손들이 모여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한 민단조합(民團組合)에 가입하여 1916년 8월 예천, 안동 그리고 경남 밀양 등지에서 군자금 200원을 모집하다가
충남에서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權大雄 1910年代 慶尙道地方의 獨立運動團體 硏究 嶺南大 學士學位論文 1993, 大韓民國 獨立有功者功勳錄 第10卷 國家報勳處 1993年 49쪽, 高等警察要史 慶北警察部 259-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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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으로서 이경년 의진에 협력한
김달원(金達源) : 구한 말, 예천군 출신, 일명 성계(聖계), 본관은 김해, 의병(義兵)으로서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에 협력하였다.(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報勳處 1卷 306쪽, 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國家報勳處 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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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때 왜구들을 평정한 공으로 수문전 학사 겸 문하시중을 제수받은 김두(金두)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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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에 협력한
김두상(金斗相) : 용궁현(龍宮縣) 출신, 자는 응칠(應七), 본관은 영양,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에 협력하였다.(雲崗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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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란 때 적을 많이 죽이고 순국한
김득남(金得男) : ?-1636(인조 14),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수안(遂安),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철곶 첨사(鐵串僉使)로서 전사(戰死)하였다. 1637년(인조 15) 9월 7일 비국(備局)이 왕에게 아뢰기를, "철곶 첨사(鐵串僉使) 김득남은 정병(精兵)을 모아 거느리고 자원하여 싸움에 나가 부평(富平)에서 적기(敵騎)를 만나 죽인 것이 자못 많고, 드디어 적의
칼날에 죽었습니다. 그 강개하게 국난을 구제하러 나아가 마침내 국가를 위하여 죽은 뜻은 참으로 매우 숭상할만하니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하니, 윤허하였다.(仁祖實錄, 竺山勝覽 1934, 龍宮縣邑誌 1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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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란 때 원종공신에 훈록된
김득유(金得酉) :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용궁,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 주부(主簿),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지내고,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때 공훈으로 호성공신 선무원종공신 훈록(扈聖功臣宣武原從功臣勳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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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의 좌종사부, 의용단 재무총장으로서 독립운동을 하여 애국장에 추서된
김병동(金秉東) : 1857(철종 8)-1928, 유천면 수심리 출신, 일명 병동(炳東), 농업에 종사하다가, 1907년 7월 5일 충북 제천에서 이강년 의병장(李康秊義兵將)이 재차 의거하자 참진(參陣), 좌종사부(坐從事部)에 소속되어 1908년 6월 4일 이강년 의병장이 피체(被逮)될 때까지 1년여 간 충청, 강원, 경상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21년 2월에서 1922년 4월에 이르기까지 당시 경상남북도를 중심으로 비밀결사
의용단(秘密結社義勇團)을 조직하였고, 이응수(李應洙), 김찬규(金燦奎)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경북지역 담당 재무총장(財務總長)을 맡아 독립 자금 2만원 모집 계획을 수립하는 동시에 동지들의 규합에도 힘썼다. 1922년 12월 18일에 경북경찰부에 송치되었다. 석방 후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建國勳章愛國章)을 추서하였다. 현재 그의 손자 김규원이 영주시 장수면 두전리에 살고 있다.(豫審終結決定書
1923.9.30 大邱地方法院, 高等警察要史 208-209쪽, 日帝侵略下 韓國36年史, 雲岡先生倡義日錄, 獨立運動史資料集 10卷 747 750쪽, 東亞日報 1922.12.20 1922.12.23 1922.12.30, 獨立有功者功勳錄 7卷(78쪽) 11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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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339
서악사(心襟 울리는 가을 山寺音樂會 열려, 西岳寺 大雄殿 앞마당에서-노래와 演奏 열기 가득) [記事] : ‘천년의 향기와 바람이 소리를 만나는~’대한불교조계종 천년고찰 서악사 제1회 가을산사음악회가 2004년 10월 9일 예천읍 대심리 서악사(주지 도일 스님) 대웅전 앞마당에서 열렸다. 이 날 행사에는 예천사암연합회 청안 스님 및 대덕 스님들을 비롯한 김수남 군수, 조경섭 군의장, 이철우·남시우 군의원, 설용진 농협군지부장 및 각급 기관단체장, 신도회원, 지역민 등 1천여 명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루었다. 대구 MBC ‘골든디스크’ 진행자인 이대희 씨의 사회로 진행된 산사음악회는 룸비니어린이들의 재롱춤을 시작으로 서악사합창단과 함께하는 통기타로 노래하는 승려 가수인 도일 주지스님의 노래와 연주가 행사장을 뜨거운 열기로 가득채웠다. 이어 우정 출연한 예천 연방사 일봉 스님의 노래가 이어졌으며,‘낯설은 아쉬움’의 가수 진시몬, 가수 겸 작곡가 이상래, 민요가수 소천, 성악가 김경녀 씨의 주옥같은 노래가 천년고찰 서악사의 가을밤을 수놓았다. 한편 서악사에서는 대한불교 조계종 예천불교대학 제1기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다. 강의는 매주 월요일 서악사 천불전에서 저녁 7시에서 9시까지 2시간 동안 열리며, 강사로는 직지사 전 주지 정혜창 큰스님, 직지사 현 주지 자광 큰스님, 장안사 지정 스님, 동국대학교 교수 등 다수가 참여하며, 단전 호흡 및 참선의 시간도 가질 예정이다. 대상자는 불교에 관심이 있고 올바르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입학이 가능하다.(醴泉新聞 2004-10-15 15:3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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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