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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1814) : 예천 충효 13(附 원류 출신 홍현기 교수 작품 ''''''''''''''''신화~내재율'''''''''''''''', 국립현대미술관에 컬랙션...축하합니다/예천방문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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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으로 이강년 의진에 협력한
김복철(金福哲) : 구한 말, 예천군 출신, 본관은 김해, 1895년 의병으로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에 협력하였다.(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報勳處 1卷 105쪽, 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國家報勳處 3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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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의병장으로서 큰 전과를 올려 애국장을 추서받은
김성운(金成雲) : 예천 출신, 의병장으로서 1908년(융희 2)부터 영양 일월산(日月山), 안동, 예천, 영주, 울진 등지에서 신돌석, 유시연 의진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에 따라 일본군 수비대는 김성운 의진을 일망타진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이른바 ''''''''''''''''토벌작전''''''''''''''''을 벌였지만 끝내 그를 체포하지 못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의병 활동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 第12卷 國家報勳處 1996 289-290쪽, 高等警察要史 慶北警察部 8쪽, 明治百年史叢書 金正明 第1卷 129ㆍ179쪽,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報勳處 第3輯, 668ㆍ736쪽, 獨立運動史資料集 別1卷 453쪽 3卷 668-738쪽, 明治百年史叢書 金正明 1권 129 179쪽, 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國家保勳處 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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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순절하여 호성공신에 등록된 김세일(金世鎰) : 旣載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을 모시고 예천에 온 김손(金遜), 김저(金佇)의 옥사(獄事)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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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과 김상태 의진에서 활동하다가 순국하여 애국장에 추서된
김수준(金守濬) : 1879(고종 10)-1913, 예천 출신, 일명 수종(壽宗), 수경(秀慶), 본관은 김해, 1907년 3월 제천(堤川)에서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에 참전하여 종사관(從事官)에 선임되어 경상, 강원, 충청도 일대에서 여러 차례 일군(日軍)과 교전하였다. 1908년 이강년 의병장이 까치성에서 중상을 당하여 피체(被逮)된 후 순국하자, 다시 이강년 의병진의 중군장(中軍將)으로 활동하던 김상태(金尙泰)를 의병장으로 추대, 계속 국권 회복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1913년에 일경(日警)에 피체(被逮)되어 모진 고문에도 굽히지 않다가 재판도 없이 그 해 9월 20일에 피살 순국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建國勳章愛國章, 1992)을 추서(追敍)하였다.(雲崗先生倡義日錄 12쪽,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保勳處) 第1輯 301 729쪽, 獨立有功人物錄 第10卷 73쪽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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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때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원종공신 어모장군을 제수받은 김순지(金順志)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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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강토의 조세가 모두 일본인의 창고에 들어갈 바에야 내 어찌 왜놈의 납세지민이 되랴. 슬프다. 나라 잃은 민족이여, 조국 광복에 분투하라. 총궐기하라. 나는 죽음의 뜻을 결정하였다" 하며 자결한 김순흠(金舜欽)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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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를 격퇴하였고 좌명공신이 된
김승주(金承주) : 1354(공민왕 3)-1424(세종 6), 하리면 우곡리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된 사람, 호는 월담(月潭), 본관은 순천, 시호는 양경(襄景), 풍주(豊州) 수령으로 있을 때 왜구를 격퇴하여 전중경(殿中卿)에 오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경상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역임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어 녹산군(鹿山君)에 봉해졌다. 1406년(태종 6)에는 사은사로 명 나라에 다녀와 서북면 도순문찰리사 겸 병마절제사와 평양 부윤
등을 거쳐 병조 판서가 되고,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으며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에 오르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후손은 하리면 우곡리 등에 살고 있다.(太宗實錄, 世宗實錄, 韓國人名大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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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의병장인 김업(金업) : 旣載
병자호란 때 의병으로 수성장을 지낸 김영(金영) : 旣載
국상 중에 술과 고기를 먹지 않은 김영락(金榮洛)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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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의 좌종사로서 애족장에 추서된
김영상(金泳相) : 1864(고종 1)-1907(융희 1), 지보면 출신, 자는 경함(景涵), 호는 산포(山圃), 본관은 영양, 현감 유중(縣監有中)의 후손, 음사(蔭仕)로 정릉 참봉(貞陵參奉), 판임관(判任官, 1904)으로서 1907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으로 재직 중 을사조약(乙巳條約, 1905)이 체결되자, 귀향하여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에 합류하여 좌종사(坐從事)로 충청, 경상, 강원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建國勳章愛族章)을 추서하였다.(竺山勝覽 1934, 雲崗先生倡義日錄, 英陽金氏源石錄 1966, 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 第11卷 國家報勳處 1994年 65-66쪽,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報勳處 第1輯 306쪽, 雲岡先生倡義日錄, 英陽金氏源石錄 1966 31後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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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경하면 반드시 얻는 의병장으로서 원종공신이 된
김영수(金永壽) : 조선 선조 때, 하리면 우곡리 출신, 자는 천로(天老), 호는 신재(愼齋), 본관은 경주, 계림군(鷄林君) 균의 후손, 군사책에 밝아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어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한 후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이 되어 경주에 모여 진을 치고 통곡하였다. 피난민 900여 명을 의병에 합류시켜 세력이 커졌다. 왜적을 참살하고 포로를 사로잡을 수가 있었다. 의병장 박의장(義兵將朴毅長)이 이르기를, "김영수는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얻는다. 김영수와 같은 의병장은 고금을 찾아도 그에 겨룰 자가 없다."라고 하였다. 그는 경주, 문경 새재(鳥嶺)로까지 누비면서 왜적 토벌에 동분서주(東奔西走)하였다. 당시 여러 의병장들이 이르기를, "몸을 바쳐 의리를 떨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은 문경새재 이남에서 김영수와 영천 의병장 김응수(金應銖) 뿐이다."라고 하였다. 경상북도 지역 뿐 아니라 경상남도 청도, 밀양을 거쳐 남해안에 이르러 허수아비를 만들어
밤을 틈타 불을 지르고 왜놈의 배에 불을 지르고, 많은 적을 섬멸하였다. 다시 대구 팔공산까지 진격하였다가 적의 화살에 맞았으나 다행히 심한 상처는 아니었다. 한때는 왜적과 투석전(投石戰)까지 벌이면서 크게 승리하기도 하였다. 조선인 반역자 오돌지(吳乭只)를 토벌할 때는 큰 바위와 돌을 굴리어 죽이기도 하였다. 명(明) 나라의 장군 이여송(李如松)도 그의 소문을 듣고 크게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의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고,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실기(實記)와 유집(遺集)이 있다.(醴泉郡誌 1939, 醴泉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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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포의 난을 평정한 좌명공신 김영열(金英烈)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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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한
김영희(金永熙) : 예천 출신, 독립 운동을 하였다.(36史 8卷 285쪽, 獨資 14卷 228쪽, 東亞日報 1926.10.21 1926.10.31, 獨立有功者功勳錄 7卷 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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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에 협력하다가 잡혀 기밀누설할까봐 혀를 깨물어 벙어리가 된
김용태(金容泰) : 예천군 출신, 구한 말에 이강년 의진(李康秊義陣)에 협력하였다. 왜적에게 잡혀 고문(拷問)에 못이겨 기밀을 누설할까봐 혀를 깨물어 벙어리가 되었다.(雲崗集, 獨立運動史資料集 1卷 國家保勳處 304쪽, 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國家保勳處 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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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운이 기울자 조국 독립을 위하여 활약한
김우성(金禹聲) : 1876(고종 13)-1947, 예천군 현내면 하광덕리(현 의성군 다인면 덕지리 하광덕) 출신, 자는 응소(應韶), 본관은 김녕, 문기(文起)의 후손, 재질이 특출하여 13세에 대구 감시(監試)에 나아가 입선하였다. 시율(詩律)에는 천부의 재질이 있었으며 예문에도 식견이 많았다. 그 후 응시하여 중앙 우정국 주사를 지냈다. 국운이 기울어짐에 조국 독립을 위하여 애국 지사들과 여러 방면으로 활약하다가 신교육 보급을 절실히 느끼고 낙향하여
봉양서숙을 설립하였다. 학감에 취임하여 후진을 양성하던 중 일제의 박해로 중단하였다. 문적은 많았으나 한국전쟁(1950) 때 불타 없어졌다.(多仁面志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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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만주(滿洲)로 건너가 북간도(北間島)로 이주해 온 동포들에게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을 전개한
김인배(金仁培) : 용궁면 출신, 호는 우금(又琴), 애족장 정준(愛族章定浚)의 2자, 한양리 의사(韓良履義士)의 제자, 부산공립상업학교 졸업, 1919년 3월 22일 예안읍(禮安邑)의 장날 2차 의거(義擧)에 분연히 참가하여 태극기(太極旗)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 때 일경(日警) 및 수비대(守備隊)의 잔악한 진압으로 허리에 부상을 입고 다른 사람의 등에 업히어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피신하였고, 후유증(後遺症)으로 수개월 간 고난을
겪었다. 후일 신현돈(申鉉敦) 경북도지사에게 보내는 서신 중에 당시를 회고하여 대한만세운동은 악독한 왜놈들에게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뿐 아니라, 3.1정신을 높이 받은 민족적 거사임을 진술하고 있다. 안동군 예안금융조합(禮安金融組合, 1919.4.1)에 부임, 예천으로 전임(1920) 이후 항일독립운동의 민족적 역량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의 장래를 책임져야 할 청년들의 수양과 훈련은 물론 이를 통한 민중의 계몽과 지도의 필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동지 김종성(金鍾성), 이상하(李相夏), 이순성(李순成)과 함께 용궁청년회(龍宮靑年會)를 조직하고 야간 강습소를 설립하여 고향인 용궁(龍宮)에서 출퇴근하면서 보통학교에 입학치 못한 청년들을 대상으로 조선어, 한문, 산수 등을 교육하는 동시에 항일 사상과 민족 의식을 고취하여 조국 광복을 위한 후진 양성에 헌신하였다. 또한 체육 활동으로 축구부를 만들어 열성을 다해 지도한 결과 예천 및 안동대회에 출전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양하였고, 체력 단련은 물론,
강인한 정신과 단결력 함양에 공헌하였다. 선수가 출전하는 행로에는 부녀자가 서성거리는 일이 전무(前無)할 정도로 거면적(擧面的)인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1930년 7월부터 예천청년회에서 조직한 예천군소비조합(協同組合) 전무이사를 맡아 생산자와 도매상에서 직접 생계에 필요한 일용품(日用品)을 구입하여 조합원에게 공급하는 새로운 형태의 생활 합리화를 꾀하는 동시 이민족(異民族)의 지배를 받은 상태에서 민중 스스로가 경제적 자립책을 궁구(窮究)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견지 속에 일인(日人)의 경제 수탈을 막고 지역 주민의 이권을 옹호해야겠다는 자립 운동은 급기야 불매운동(不買運動)으로 번져 왜상(倭商)의 발붙일 곳을 상실케 하였고, 제2 개성(開城)이라는 별명까지 낳게 하였다. 일본의 침략 행위가 극심하게 되자 우국(憂國)의 의분(義憤)을 품고 1933년 만주(滿洲)로 건너가 간도성 노동안내소장(間島省勞動案內所長)으로 있으면서 악독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생활 터전을 잃고 남부녀대(男負女戴)하여 북간도(北間島)로
이주해 온 동포들에게 농지를 주선하여 경농(耕農)토록 하고, 또는 각 사업체 및 사립학교 등 직장에 알선하여 생활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이러한 한인 사회(韓人社會)를 기반으로 민중과 함께 호흡하면서 민족혼(民族魂)을 일깨우는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을 전개하여 민족 실력 양성에 주력하였다. 때로는 용정사도구(龍井四道溝), 주청(注淸), 멀리는 돈화(敦化) 부근 촌락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독립 애국자와 비밀 유대를 강화하였고, 또는 국내에서 민족 지도자인
고하 송진우(古下宋鎭禹) 선생을 만나 자문을 청탁하기도 하였고, 1942년에는 "남산지수 송백지무(南山之壽松柏之茂)"라는 축수 휘필(祝壽揮筆)도 받은 바 있다. 해방(1945)이 되자 지난 날 배일(排日)의 온상지(溫床地)인 집안현(輯安縣)에서 조선민회장(朝鮮民會長)으로 피선되어 민족자치운동(民族自治運動)을 주도하여 한인의 교육 및 식산에 노력하다가 1947년 5월에 귀국하여 조선특수연(朝鮮特殊燃, 株)을 거쳐 외자관리청(外資管理廳)에 근무하면서 국가 경제
부흥에 진력하였다.(醴泉文化 6輯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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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을 하다가 15년형을 살아 애국장에 추서된
김재명(金載明) : 1885(고종 22)-1977, 감천면 출신, 1910년 5월 10일 경 최성천(崔聖天), 한명만(韓明萬), 김상태(金相泰) 등과 같이 안동군 북후면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면서 적 수 명을 사살하고 출동하는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히는 등 영주, 예천 등지를 주무대로 활동하며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이어 같은 해 7월 18일에는 안동의 사립학교인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습격하여 의병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한 교사 안상덕(安商德) 등
수 명을 사살하고 출동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영주군 평은면(平恩面)에서 일본군에게 피체(被逮)되어 같은 달 23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 살인죄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 1990)을 추서하였다. 현재 그의 아들 김기수가 영주시 장수면 소룡리에 살고 있다.(受刑人名簿 釜山地方檢察廳, 判決文 1910.12.23 大邱地方裁判所, 獨立運動史 國家保勳處 第1卷
681 696 697 757쪽, 獨立有功者功勳錄 第9卷 1990 建國勳章敍勳者 104쪽 1991, 抗日獨立運動史 65쪽 1991, 醴泉新聞)
김재명(褒賞者功績調書) [記事] : 유공자명(한글) 김재명 유공자명(한자) 金載明 / 생년월일 (양)1885년 07월 13일 / 사망년월일 (양)1977년 11월 28일 / 본적 慶北 醴泉 甘泉 美石 158 / 독립운동당시 주소 慶北 醴泉 繩刀 眉湖 / 관리번호 3770 / 운동계열 의병 / 독립운동기간 6월 활동지역 安東 醴泉 榮州 / 수형년수 징역 15년 0월/ 복역년수 0년 0개월 0일 / 추천훈격 애국장 사정훈격 애국장 / 소속 공훈심사과 간사 심사담당자 / 공적개요 1910년 崔聖天 韓明萬陣의 義兵으로 安東戰鬪에서 敵數名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義擧非協助者등을 살해하며 활동하다 1910년 12월 日憲에게 피체되어 징역 15년을 받은 공적이 인정되므로 建國勳章愛國章에 해당되는 분으로 사료됨.(www.history.go.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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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내 한이 끝날까 저승에 가서도 달라지지 아니할 것을...라는 시를 남기고 굶어 죽은 김전(金鈿)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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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비호대원인
김정숙(金正淑) : 1922- , 용문면 사부리 출신, 소학교(小學校) 4학년 중퇴, 피혁회사(皮革會社) 직원, 일본군, 광복군 비호대원(光復軍飛虎隊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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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때 항일운동하다가 옥고를 치러 애국장에 추서된
김정연(金正演) : 1891(고종 28)-1958, 용문면 상금곡리 453번지 출신, 3.1운동(1919) 때 안동군 임하면 오대동(安東郡臨河面梧垈洞)에서 손영학(孫永學), 김정익(金正翼), 장두희(張斗熙) 3명과 함께 의거를 모의했다. 바로 이웃 길안면 천지동(吉安面泉旨洞)에서 3월 21일 장날을 타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정하고 준비를 했다. ''''''''''''''''대한독립만세''''''''''''''''라고 적은 큰 깃발과 대형 태극기를 만들었다.
동시에 마을 사람들을 포섭하여 약 30명을 장날 시위의 중심 대원으로 삼았다.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천지동에 있는 일본 경찰주재소(警察駐在所)의 삼엄한 주시를 받아왔다. 3월 21일 길안면 소재지인 천지동에 장이 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4명은 태극기와 시위 도구를 감추어 장에 들어갔다. 오후 5시쯤, 그들은 만들어 온 큰 기를 시장 가운데 세우고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장꾼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군중 약 400명은 주동자들의 지휘 아래 우선 길안면사무소로 갔다. 면장과 면서기들을 보고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했다. 주재소의 경찰이 달려와 막자, 데모 대원들은 흥분하게 되었다. 돌을 던지어 면소의 유리창들이 깨어지고 출입문이 박살이 났다. 그리고 이들은 오후 7시경에 주재소로 향했다. 이들 데모대는 경찰 주재소를 포위하고 만세를 외치고 중심 인물 몇 사람은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일본 경찰의 저지가 무도해지자 데모대에서
돌이 날았다. 주재소의 문기둥에 있던 문 등과 유리창이 깨어졌다. 일본 경찰이 총을 쏘자,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후퇴한 후 밤 12시 쯤 되어 해산하였다. 이 사태가 있은 후 경찰은 많은 사람을 잡아갔다. 주동자 중 김정연, 손영학, 김정익은 피하여 의성 박재하(朴在夏)의 집에 숨어 중국상해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다가 결국 잡히어 1920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와 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 6개월, 그 외 4명은 1년형에 벌금 50원의 언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건국포장(建國褒章, 1977), 애국장(愛國章, 1990)을 추서(追敍)하였다.(判決文 1920.5. 21 大邱地方法院, 獨立運動史 3卷 401 402쪽, 獨立運動史資料集 5卷 1364-1365쪽, 抗日獨立運動史 143쪽 1991, 醴泉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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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의 좌종사부로서 항일운동을 하여 애족장에 추서된
김정준(金定浚) : 1882(고종 19)-1964, 용궁면 읍부리 출신, 일명 김재경, 자는 응구(應九), 호는 금호(琴湖), 본관은 김해, 구계 영락(龜溪榮洛)의 손자, 을사조약(1905)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강년(李康秊)의 의진(義陣)에 들어가 좌종사부(坐從事部) 소속으로서 1907년 8월 문경 갈평전투(葛坪戰鬪)에 참전하여 왜적 800여명을 잔멸(殘滅)시키는 대승(大勝)의 전공을 세우는 등 충청, 경상,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면서
1908년 6월 의진이 해진(解陣)할 때까지 1년여 간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밀명을 띠고 문경, 상주와 안동, 영주 등지의 경로 요충인 용궁(龍宮)에서 여관을 경영하면서 극비리에 군량미 수송과 유격대원의 숙식 및 피난처 마련 등 특수 임무를 수행하여 이강년의 부하인 김도곡이 예천, 안동에서 유격 활동을 벌이는 데 도움을 주고 이강년 의진이 계속 예천, 영주, 재산(才山), 안동 서벽(西壁), 순흥(順興) 등지 전투에서 적을 대파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07년 음력 12월에 한태섭 의사(韓台燮義士)가 친상(親喪)을 당하여 잠시 고향인 용궁면 용암(龍岩)에 머무는 동안 이강년이 매우 급박하고 은밀한 용건으로 다녀갔는데, 이 때 한태섭 의사와 비밀 만남을 치밀히 주선하고 남이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감쪽같이 이강년을 모시게 하여 실로 위기일발(危機一髮)의 어려운 고비를 모면케 하였다. 1909년 이승재(李承宰)와 한양리(韓良履) 의사가 결사대를 조직하여 매국노의 처단을 꽤했을 당시 동지들 간의
비밀 연락 및 자금 조달과 피신처를 마련하는 등 일제의 무서운 감시에도 신변의 위험을 무릎쓰고 오로지 조국 광복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독립 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활약하던 중 한양리 의사는 신태식(申泰植), 김찬규(金燦奎), 이응수(李應洙), 서상업(徐相業), 장진우(張進瑀) 동지들과 함께 1922년 12월에 피체(被逮)되어 2년의 형을 선고받게 되자, 의사는 솔선하여 일금 100원을 출연하였고, 뒤이어 한씨 문중(韓氏門中)에서
50원을 내어 한양리 의사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 후 여러 자제들을 한양리 의사 밑에서 한학(漢學)을 수업케 함으로서 민족 자존과 애국 지사의 얼을 함양하는 동시 구랑계(龜浪契)를 만들어 독립 지사의 양가 자손들로 하여금 후일까지 친화 단결을 도모함과 아울러 나라 사랑하는 자주 독립의 올바른 사상을 영구히 계승토록 하였다. 1930년 4월부터 1945년 9월까지 일경(日警)의 감시를 피해 벽지인 충북 괴산군 연풍면 갈금리(槐山郡延豊面葛琴里)에 은거 농사를
경영하면서 유교 서적 침독과 때로는 비밀리에 옛 동지를 만나 유대를 공고히 하는 등 항시 광복의 큰 뜻을 버리지 않고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일제의 패망을 기도하는 일념으로 지냈다. <운강 선생 창의 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의 출판에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애족장(建國勳章愛族章, 1993)을 추서(追敍)했다. 1994년 10월 3일에는 개포면 황산리 산정산(山井山)에서 묘비 제막식(墓碑除幕式)이
있었다.(雲崗先生倡義日錄, 獨立運動史資料集 1卷 國家保勳處 307쪽, 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國家保勳處 336쪽, 同 11卷, 醴泉文化 5輯 1992, 醴泉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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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의 좌종사부로 항일운동을 하여 애족장에 추서된
김종화(金鍾和) : 1881(고종 18)-1956, 용궁군(龍宮郡) 출신, 자는 희숙(熙叔), 본관은 김해, 1907년 3월 충북 제천에서 이강년 의병장(李康秊義兵將)이 다시 의거하자 입진(入陣)하여 좌종사부(坐從事部)에 소속되어 충청, 경상,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면서 1908년 6월 의진(義陣)이 해진(解陣)할 때까지 1년여 간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建國勳章愛族章)을 추서(追敍)하였다.(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
第11卷 國家報勳處 1994年 83쪽,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報勳處 第1輯 305쪽, 雲岡先生倡義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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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끈 김주(金주) : 旣載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자취를 감춘 김준(金遵)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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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김중웅(金仲熊) : 1560(명종 15)-?, 용문면 금당곡(金塘谷) 출신, 자는 공망(公望),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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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김지 : 1564(명종 19)-?, 용문면 금당곡(金塘谷) 출신, 자는 준원(浚源), 호는 죽림(竹林),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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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의 난 때 창의한
김천환(金天煥) : 호는 덕헌, 본관은 광산,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예천에서 창의하였다.(www.kwangsankim.or.kr 200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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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후 이강년 의병진의 참모관으로서 왜적과 싸운 김철상(金喆相)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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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용단 예천군간사로 항일운동하다가 옥고를 치러 애족장에 추서된
김현동(金賢東) : 1876(고종 13)-1927, 예천 출신, 이명(異名)은 회문(會文)이다. 1907년 백우(白愚) 김상태(金尙台) 의병장 휘하에서 김의성(金義城)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1921년 2월 만주 군정서의 밀명으로 김찬규(金燦奎), 이응수(李應洙) 등이 경상도 지역에서 비밀결사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할 때 이응수의 권유에 따라 의용단에 가입하였다. 그는 예천군 간사로 임명되어 경북 일대의 부호들에게 출금통지서를
발송하는 등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2년 12월 18일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1923년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국내 항일운동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 第4卷 國家報勳處 1987年 617-618쪽,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報勳處 第10輯 748쪽, 豫審終決決定書 1923.9.30 大邱地方法院, 高等警察要史 208ㆍ209ㆍ210ㆍ211쪽,
東亞日報 1922.11.13 1922.11.16, 金尙台義兵將逮捕顚末記 日警記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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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때 화전을 만들어 적을 무찔렀던
김협(金協) : 1546(명종 1)-1638(인조 16), 호는 충효당(忠孝堂), 본관은 순천, 서애 유성룡(西厓柳成龍)의 제자, 혜민서 주부(惠民署主簿)를 지냈다. 임진왜란(1592) 때 불을 달아 쏘는 화살인 화전(火箭)을 만들어 적을 무찔러서 나라에 충성하였고, 가정에서는 항상 효성이 지극하였다. 지보면 암천리에 후손들이 그를 위해 세운 충효당(忠孝堂)이 있다.(族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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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진의 조사부로서 한일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러 애국장에 추서된
김형도(金炯燾, 金炯哲) : 1880(고종 17)-1948, 감천면 천향리 출신, 1899년부터 보문면 오신리로 옮겨 살았다. 자는 문일(文一), 호는 천은(泉隱), 이명(異名)은 형철(炯哲), 본관은 삼척, 어릴 때 한학(漢學)을 공부하고, 20세에 주사(主事)를 지냈다. 을사조약(乙巳條約, 1905)이 체결되어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선비 정신으로 항일투쟁을 결심하고, 정미의병(丁未義兵, 1907)에 가담하여 운강
이강년 진영(雲崗李康秊陣營)의 종사부(從事部)에 참가하여 동지 규합과 국권 회복을 위하여 항일투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한일합방(1910)이 체결되고 일제의 무단정치로 국내외의 독립운동가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영덕 출신 김진갑(金珍甲)과 모의하여 김주상(金周相), 김동상(金東相), 김무경(金武京), 고심(高尋), 강진수(姜鎭守) 등과 더불어 경북 문경, 충북 단양 등지에서 일본 경찰과 친일 분자의 집을 색출하여 금품 탈취, 암살 모의 등 항일 투쟁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1915년 5월 의병 군자금 조달 의무를 띄고, 영덕 사람 김진갑과 모의하여 김주상, 김동상, 김무경, 강진수 등과 문경, 단양 등지에서 일본 경찰관의 집과 친일 분자의 집을 색출하여 금품 탈취, 암살 모의등 항일 투쟁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 1915년 6월 30일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서 대구형무소에서 7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1923년 출옥하여 오신리에서
초가 단간으로 가난한 생활로 청소년들의 교육과 애국정신 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묘는 보문면 오신리 산 49번지에 있다가 1998년에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제753)으로 배위 박유산(朴柳山)과 합장 이장하였다. 유족으로는 딸 김남숙(金南淑, ?-1987) 뿐이었는데, 외손자 김종우(金鍾祐)와 김종문(金鍾文), 종질 김경수(從姪金慶壽, 영주봉현오현 거주) 외 1명이 있다. 1996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국장(建國勳章愛國章, 제2550호)을
추서받았다.(獨立運動史資料集 1卷 國家報勳處 301쪽, 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國家報勳處 341쪽, 同 14卷 244쪽, 判決文 1915.6.30 大邱地方法院, 醴泉新聞 199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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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찰 및 친일파의 집에 군자금 탈취, 암살 모의로 옥고를 치러 애국장에 추서된
김형도(金炯燾) : 보문면 오신리 출신, 본관은 삼척, 병영(炳榮)의 아들, 국권피탈(1910) 후 일본 경찰 및 친일파의 집에 금품 탈취, 암살 모의로 일본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았다.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醴泉鄕校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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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으로 옥고를 치러 대통령표창에 추서된
김형식(金亨植) : 1885(고종 22)-1972, 용문면 출신, 1919년 4월 2일 용문면 상금곡동에서 수 백 명의 군중을 주도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곳의 만세 운동은 권석인(權錫寅)이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례 차 상경했다가 서울의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가지고 오면서 구체화하였다. 이에 평소 항일 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권석인(權錫寅), 권석호(權錫虎), 권석효(權錫孝), 변용구(邊用九) 등과 함께 예천읍
장날인 3월 12일에 거사(擧事)하기로 약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일경(日警)의 삼엄한 경계망으로 인하여 거사를 다음 장날인 3월 17일로 미루었으나, 이 때도 역시 철통같은 감시로 인하여 일경에 사전 탐지되어 중지하고 말았다. 이렇듯 거사가 지연됨에 따라, 김형식(金亨植) 등은 어떠한 일경(日警)의 탄압과 경계에도 불구하고 거사를 단행하기로 뜻을 굳히고, 4월 2일 오후 10시에 만세 시위를 단행하였다. 그는 수 백여
명의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횃불을 앞세우고 면사무소(面事務所)와 동리 각처에서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경(日警)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5일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으로부터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刑事事件簿, 文化遺蹟總覽, 慶尙北道史, 獨立運動史 國家報勳處 第3卷 418-419쪽, 大韓民國 獨立有功者功勳錄 第12卷 國家報勳處
1996年 190-191쪽, 醴泉郡誌 醴泉郡 1988 148-149ㆍ169쪽, 大韓獨立抗日鬪爭總史 大韓獨立抗日鬪爭總史編纂委員會 下卷 5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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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호(金頀)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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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류 출신 홍현기 교수 작품 ''''''''''''''''신화~내재율'''''''''''''''', 국립현대미술관에 컬랙션...축하합니다.
홍현기 [記事] : 자랑스러운 예천인을 소개합니다/ 이름 권호근/ 날짜 2009-01-11 (14:45)/ 조회 24회 /
용문면 원류리 출신 홍현기 교수(62. 인천가톨릭대)의 그림이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 컬랙션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홍익대 미술대학을 졸업한 작가는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꾸준히 전시회를 갖은 서양화 전공의 작가로, 이번에 앞의 미술관에 그림이 컬랙션된 것이다.
동 미술관에 컬랙션 되려면, 동 미술관의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인,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처 통과하면, 또 동 미술관의 구입 가격 심사위원회에서, 구입 가격을 산정 후 선정되게 되는 것으로, 그 과정이 굉장히 까다롭고,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므로, 이번 작품도 천만 원대로 고가에 구입되었다고 한다.
작품명은 "신화_내재율(神話~內在律_ Myths)", 규격은 193x96cm로, 재료는 한지(韓紙)에 Chinese ink carbon black(직역하면 : 인쇄잉크 원료 먹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과천에있는데, 들르시는 길이 있으면 찾아서 감상하는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예천에 거주하며,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컬랙션된 작가는, 이분이 처음인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고장의 자랑이라 했습니다.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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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현기(洪鉉旗) : 1947- , 용문면 원류리 출신, 용원초등(龍元初等), 대창중, 대창고(10회), 홍익대 서양화과, 동 대학원 졸업, 대창중고등학교ㆍ왜관 순심여고(純心女高) 미술 교사, 인천 가톨릭대 교수이다. 83년 제1회 개인전(個人展)을 서울 관훈미술관(寬勳美術館)에서 열었다. 85년 미국 LA Gallery Scope 개인전, 93 95년 일본 오사카 Amano갤러리 개인전, 87 94년 대구 인공갤러리 개인전을 열었다(醴泉新聞 1995.5.25).
[김복영 敎授의 評論] : 83년 제1회 ''''''''''''''''신화전(神話展)'''''''''''''''' 84년 제2회 신화전, 85년 제3회 신화전, 87년 제4회 신화전, 90년 제5회 신화전을 열었다. 그 간의 변모 과정, 또는 탐색의 특징을 개괄한다면, 그의 정확한 작품 명제인 ''''''''''''''''신화-태동기''''''''''''''''가 말해주 듯이, ''''''''''''''''신화''''''''''''''''라고 말해지는 작가의 내밀한 특수한 체험의 근원적 의미를 묻고자 한다는 점, 이 물음을 작품으로 진치시키는 방법으로서 화면의 단위 전체 속에 검정과 갈색의 얼룩들을 방만하게 배열하되 이 것들이 중첩되면서 발전적으로 화면 전체의 톤을 이룩하며 마침내 예기치 않은 표면 효과를 창출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애초에는 커다란 얼룩들의 배열이 두드러졌으나 해를 거듭할수록 조밀하고 담면 효과에로 진입하는 경향으로 발전되어 갔다는 일반적인 추이를 또한 첨언해 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일단 ''''''''''''''''신화''''''''''''''''라는 것은 작가의 주관적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체험과 체질, 의식 내용과 정서 등 일체가 용해되어진, 그러므로 해서 한 인간의 정신적 시초를 이루는 그 자신의 숨겨진 진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는 <작업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형상보다 질(質)이 중요한데 신화의 본질은 어떤 것인가? 역사보다 신화가 더 깊은 데가 있다. 신화 속에서 역사가 탄생하며 역사는 다시 신화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신화를 첫째 형상보다 질적인 세계, 둘째 역사의 원천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이러한 본성이 어떻게 자신의 체험, 또는 의식과 관련될 수 있는지, 다시 말해서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신화의 본성들이 어떻게 증식되는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금번 제5회전은 바로 이러한 관심의 직접적인 표명으로 받아들여진다. <신화-내재율(內在律)>로 명명되고 있는 명제가 이미 시사하고 있듯이 신화라는 것은 그의 정신 깊숙한 곳에서 시작되는 내적 법칙으로서 이해되어진다. 그는 ''''''''''''''''내재율''''''''''''''''로서의 신화가 자신의 깊이로부터 증식되어 의식의 밖으로 유출되어지는 것으로 믿는다. 바로 이러한 증식과 유출을 우리의 신체와 종이의 상호 작용의 방식을 빌려 치환시키거나 옮겨낼 수 있다는 데서 <신화-내재율>이 구상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작업일기>에서 이르기를, "한지에 수성 젯소를 묽게 만들어 바르고 건조시키면서 몇 번씩 반복한 후에 얻어진 따블로에 색동저고리의 화려한 색들 또는 퇴락한 흙색들을 밀도있게 바른 위에 블랙을 반복해서 덮는 작업을 한다. 붓과 손가락(신체)으로 먹과 기름(오일)의 안료를 바를 때 손가락이나 붓이 화면에서 움직이는 방향은 꼭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간다. 나의 진솔한 바이로리듬인 것 같다. 기(氣)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무심필(無心筆)이라고나 할까"라고 하였다.
위의 <작업 일기>의 일절은 근작들이 제작되는 방법, 기법, 의의를 기술하는 가운데 신화, 즉 내재율의 증식과 유출이 1) 한지를 사용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옮겨질 수 있고, 2) 이 효과를 젯소와 몇몇 유채색을 원용함으로써 높일 수 있으며, 3) 붓과 신체의 일부인 손의 바이로리듬, ''''''''''''''''기(氣)'''''''''''''''' 또는 ''''''''''''''''무심필(無心筆)''''''''''''''''의 상태로 치환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 준다. 그는 이러한 의미와 절차에 부가해서 ''''''''''''''''표현의 분방함보다는 표현의 금욕''''''''''''''''을 통한 ''''''''''''''''농축된 표현''''''''''''''''(작업 일기)의 양식이 자신의 내재율을 획득하는 건강한 방법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의도와 방법 그리고 이것들이 가질 수 있는 의의에 관련해서 고려할 때 <신화-태동기>와 <신화-내재율> 사이에는 질량의 차이가 있어 보인다. 분명히 전자에는 그가 태어나 자라온 농촌의 삶, 특히 흙의 애환, 어머니의 한, 커서 알게 된 자신의 정신적, 심리적 정황들의 흔적이 짙게 배태되어 있지만, 후자는 그러한 흔적들이 일체의 검정색의 침묵 속에 잠입되고 은닉되어져 하나의 ''''''''''''''''단일 평면''''''''''''''''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를 더 자세히 언급하자면 종래의 두텁고 영롱하던 얼룩의 색면이 단일한 검정의 평면으로 환원되는 과정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신화''''''''''''''''를 자신의 의식의 출발점, 또는 세계의 체험 가능성의 시초 내지는 원천으로 파악하면서 이것이 작가 개인에게서 증식되고 유출되어 형성화된 것에서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 말하자면 사회와 역사 가운데로 확장됨으로써 그것의 객관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기 가운데서 홍현기는 분명히 후자보다는 전자에 관심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신화가 사회와 역사 속에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이전에 시초적으로 증식되는 말하자면 작가의 의식 속에 주관적이고 무형한 상태를 포착하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신화-내재율>은 그러하다면 무엇을 겨냥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작가 자신의 존재 확인이자 존재 증명의 일환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듀상에서 네오지오까지 흘러왔다. 그러나 이 따위와는 관계없이 내가 설 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디를 향해 어떻게 가고 있는가? 바로 이것이 반복된 의혹의 핵심이기도 하다.(작업일기)" 즉 자신을 묻는다는 것이야말로 홍현기에 있어서 ''''''''''''''''내재율''''''''''''''''로서의, <신화>의 창조의 동기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분방한 표현보다 금욕적인 표현이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 결과 유채색을 배면에 은닉시킨 표면의 농축된 검정과 단일한평면이 강조됨에 이르렀다. 이 점에서 홍현기의 <신화-내재율>을 ''''''''''''''''미니멀한'''''''''''''''' 양식 개념으로 치부할 필요가 없으리라는 것을 이 말미에서 강조해 두고자 한다. 그의 근작들은 바로 그 자신의 존재 전체와 맞먹는, 하나의 분신(分身)으로서의 무게를 갖는다는 것에 주목할 때 그의 검은 그림들은 그 자신의 존재에로 해체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것들은 어떠한 의미에서건 객관적인 물체(오브제)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사 홍현기는 <신화-내재율>에서 자신의 인간됨의 존재론적 시발을 붙잡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신화> 시리즈의 탐색의 결과이긴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탄생의 시작이라는 점을 또한 강조하면서 그 앞으로의 추이를 지켜보고자 한다. 1990.11 김복영(美術評論家 弘益大 敎授 哲學 博士)
홍현기 : 홍익대 미술학부, 동 대학원 졸업, 개인전 15회(대구5, 서울2, 일본7, 미국1), 대구현대미술가협회 회장 역임, 인천가톨릭대 미술학부 교수, 현주소 용문면 원류리 120(韓國,韓國이미지 展 2006)
홍현기(藝術속 지팡이는 : 工藝家 홍현기氏 展示會 17~25日 두산아트센터) [記事] : 10년째 오직 나무 지팡이를 만드는 데 온 힘을 쏟아온 향토 출신 공예가 홍현기 씨가 지금껏 모인 작품들로 전시회를 연다. 작품전은 ‘홍현기의 지팡이들’이란 타이틀로 2006년 11월 17~25일 두산아트센터 전시장 1, 2관에서 선보인다. 그의 지팡이 작품은 줄잡아 1,500여 개에 이른다. 10년을 한결같이 2~3일마다 한 작품 이상씩은 만들어 온 셈이다. 모든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손작업으로 제작됐다. 단단한 잡목의 뒤틀린 부분을 펴고 손잡이를 만드는 공정 하나하나가 홍씨의 꼼꼼한 잔손질을 거쳤다. 나무 본연의 모습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기 위함이다. 김이순 미술평론가는 “홍현기 작가의 지팡이는 예술성과 일상성, 순수 미술과 응용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폭넓은 표현력을 갖고 있다”며 “잡목을 투쟁적으로 다룬 그의 손동작에선 끈질긴 생명 연장의 의지를 지닌 인간상이 떠오른다”고 평했다. 한편 경북 예천 출신인 홍씨는 홍익대를 졸업하고 국내는 물론 미국과 일본 등 해외에서 15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대구현대미술가협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 교수로 있다.(박민혜 記者 大邱日報 2006-11-15 20:03:26)
→예천의 자랑(1215) : 예천선몽대 일원, 어제 명승 제19호 지정(附 홍현기 교수, 지팡이전시회/지훈, 한국가요계 샛별 탄생/최경민, 세무사 합격)(作成 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2006-11-16 照會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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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340
서악사(千年古刹 山寺音樂會로의 招待 : 西岳寺 24日 午後 7時 - 정수라, 해바라기, 김범룡 珠玉같은 노래 선사) [記事] : 산새들의 지저귐과 바람소리, 천년의 향기를 담은 풍경소리가 어우러진 가족과 함께하는 산사음악회가 2005년 8월 24일 오후 7시 예천읍 봉덕산 서악사(주지 도일)에서 펼쳐진다. 이 번에 2회를 맞는 서악사 산사음악회는 대구BBS특집 공개방송으로 진행되며, 연주를 맡은 코리아 팝스 오케스트라는 아름다운 선율로 산사의 밤을 책임진다. 또한 80년대의 대표가수인‘아! 대한민국’의 정수라,‘내마음의 보석상자’의 해바라기,‘바람 바람 바람’의 김범룡 등 대형 가수들이 출연해 주옥같은 노래로 옛추억의 향수를 선물할 예정이다. 그리고 찬불을 수행과 포교의 방편으로 삼고있는 통기타로 노래하는 도일 스님과 일봉 스님의 음성 공양이 있으며, 서악사 합창단과 도일 스님이 함께 부르는 찬불가도 준비되어 있다. 산사음악회가 열리는 서악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 말사로 매년 1월 1일 군민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봉덕산 해맞이 행사장으로 군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서악사 범종은 군민의 날을 상징하는 16번의 타종으로 새해의 아침을 깨운다. 2004년 6월 통기타로 노래하는 도일 스님을 새주지로 모시고 제1회 산사음악회를 성황리에 마쳤으며, 서로의 믿음을 떠나 노래와 천년고찰의 만남을 통해 마음의 평안과 화합을 선도하고 있다. 이 번 산사음악회를 위해 예천불교연합신도회와 서악사합창단원, 신도들은 폭염의 더위 속에서도 행사장에 오르는 길을 따라 연등을 달고 주변 정리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으며, 산사음악회의 성공적인 개최와 행사장을 찾는 군민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 지난 98년 창립된 서악사합창단은 행사가 다가올수록 걱정이 태산이다. 단원들은 행사장 준비에 노래연습에 동분서주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지만 마음 한켠에는 부족한 실력으로 행사를 망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단다. 서악사합창단은‘노래하며 봉사한다’는 철학으로 한 달에 두 번. 대창중 음악교사인 이원섭 씨의 지도 아래 찬불가를 부르며, 연말이면 불우이웃을 위한 김치담그기와 독거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를 여는 등 노래 속에서 작지만 큰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단원은 21명. 대부분이 7년 이상을 같이 활동해 이제는 눈빛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며, 기쁨도 슬픔도 나누다 보니 마치 친자매처럼 스스럼이 없다.“이 번 산사음악회는 불교방송에서 공개방송으로 열려 잘못하면 전국적인 망신이 될텐데 걱정이다. 무대에 서야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단원들. 하지만 제1회 산사음악회에서 보여준 멋진 하모니와 관내 각종 불교행사에서 선보인 실력은 어느 합창단에 못지않다는 것이 주변 신도들의 평가다.“산사음악회를 통해 힘들고 지친 일상을 탈피하고 부처님의 가피 아래 모든 지역민들이 행복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는 마지막 말속에 걱정은 기우이며, 21명의 단원들과 통기타를 치는 도일 스님이 엮어내는 멋진 하모니가 벌써부터 가슴을 설레게 한다.(醴泉新聞 2005-08-19 09: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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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