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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1815:예천충효14(祝금당실/예천방문341)
작성자장병창 @ 2009.01.13 07:09:35

  예천의 자랑(1815) : 예천 충효 14(附 예천 금당실정보화마을, 전국평가 노력상 수상...축하합니다/예천방문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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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 때 원종공신이었고, 호란 때 순국하여 참판에 추증된
  김황(金璜) : 용궁현(龍宮縣) 출신, 본관은 용궁,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 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녹선(祿選)되고 고창 현감(高敞縣監)을 지내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때 순절(殉節)하여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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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용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러 애족장을 추서받은
  김회문(金會文) : 1876(고종 13)-1927, 유천면 중평리 출신, 일명 현동(賢東), 농업에 종사하다가 1907년 백우 김상태 의병장 휘하(白愚金尙台義兵將麾下)에서 김의성(金義城)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2월 만주 군정서(軍政署)의 밀명(密命)으로 김찬규(金燦奎), 이응수(李應洙), 김동진(金東鎭) 등이 경상도 지역에 비밀결사 의용단(秘密結社義勇團)을 조직하여 군자금(軍資金)을 모집할 때 이응수의 권유에 따라 의용단에 가입하였다. 그는 예천군 간사(幹事)로 임명되어 경북 일대의 부호에게 출금통지서(出金通知書)를 발송하는 등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2년 12월 18일 소위 제령 7호 위반(制令7號違反)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1923년 9월에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대통령 표창(1983)과 애족장(愛族章, 1990)을 추서(追敍)하였다.(豫審終結決定書 1923.9.30 大邱地方法院, 高等警察要史 208 209 210 211쪽, 東亞日報 1922.11.13, 1922.11.16,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保勳處 10卷 748쪽, 金尙台 義兵將 逮捕顚末記 日警記錄, 獨立有功者功勳錄 2卷(617쪽) 7卷(119쪽), 抗日獨立運動史 285쪽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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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권피탈 후 벼슬을 버리고 두문불출한
  김훈(金薰) : 1870(고종 7)-1934, 초명은 두극(斗極), 자는 성가(聖歌), 호는 모운(慕雲), 본관은 김해, 1903년 평양 감리서 주사(平壤監理署主事)를 거쳐 금산(金山, 現 金泉)과 선산 군수(善山郡守)를 지내고, 국권피탈(1910) 후 두문(杜門)했다.(醴泉郡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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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남득례(南得禮) : 1564(명종19)-?, 감천면 천향리 천전(泉田) 출신, 자는 문보(文甫),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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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남득인(南得仁) : 1553(명종 8)-?, 감천면 천향리 천전(泉田) 출신, 자는 원보(元甫),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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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을 한
  남병인(南炳寅) : 예천 출신, 독립 운동(獨立運動)을 하였다.(36史 8卷 285쪽, 獨資 14卷 228 쪽, 獨立有功者功勳錄 7卷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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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 때 공신인
  남연(南堧) : 1598-?, 용궁현(龍宮縣) 출신, 호는 무민당(无憫堂) 또는 무망재(無妄齋), 본관은 영양, 호군 융달(護軍隆達)의 후손, 1624년(인조 2)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안 현감(禮安縣監), 첨정(僉正)을 지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의 독운공신(督運功臣)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龍宮縣邑誌 1780 1832, 竺山勝覽 1934, 知保面誌 1987). [承政院日記] : 1637년(인조 15) 10월 9일에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제수되었으나 친노(親老) 때문에 상경치 않고 사임하였다.(承政院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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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남윤선(南胤先) : 1565년(명종 20)-?, 감천면 천향리 천전(泉田) 출신, 자는 효숙(孝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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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남윤조(南胤祖) : 1538(중종 33)-?, 감천면 천향리 천전(泉田) 출신, 자는 찬숙(纘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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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묘호란 때 창의한
  남융달(南隆達) : 1565-1652, 용궁현 출신, 자는 현언(顯彦), 호는 나재(懶齋), 본관은 영양, 응원(應元)의 아들, 유일재(惟一齋) 김 선생의 제자, 효자이고 덕행이 높았으며 수직으로 호군(護軍)이 되고, 손자 천택(天澤)이 귀(貴)로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정묘호란(1627)에 창의앴으며, 안동 봉암서원(鳳岩書院)에 주벽(主壁)으로 제향되었다. 1622년에 영양 남씨의 <임술보(壬戌譜)>가 편찬되었는데,  그 서문에서 그가 이르기를, "서울에 사는 전에 현령을 지낸 적이 있는 대현(大俔)은 의령의 후손인데, 여러 해 동안 족보 간행의 일을 하여 처음으로 족보를 이룩하여 담양 문중에서 간행하려 하다가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의령은 본래 영양과 한 파인데, 이제 영양파가 빠지면, 이는 족보가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 하고, 이에 영양보를 구하여서 그 근원을 밝히고자 하여 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나에게 와서 부탁하니, 내 비록 불민하나 어찌 감히 힘을 다하지 않으리오. 이에 거황(居煌), 군태(君太)와 함께 널리 세보(世譜)를 구하고 고적(古跡)을 고증하고, 모든 비문과 지문(誌文)을 문중 어른에게 물어 세대와 파를 바른 연후에 몇 권을 간행한다."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1622년을 전후해서 의령파에서 최초로 체계적인 족보를 만들려고 시도했음을 볼 수 있고, 안동파에는 아직 일반적인 족보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kalcon.postech.ac.kr 2002, 醴泉郡誌 2005)


  남융달 [記事] : 봉암서원/ 남응원(南應元, 1539~1611)의 자는 인중(仁仲), 호는 허영정(許穎亭), 본관은 영양이다. 허영정은 자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 6년 동안 무덤 곁에 여막을 얽어 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런 뒤에도 어버이 묘소가 바라보이는 자리에 정사를 지어 거처하면서 종신토록 추모의 정성을 한결같이 하였다. 평소에 항상 가묘를 깨끗이 쓸고 아침저녁으로 참배했고,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상식을 폐한 적이 없었다. 제사에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몸소 받들었다. 임진왜란에 왜적이 침입해 오자 온 마을이 크게 놀라 경황이 없는 중에도 조용히 사당과 묘소를 살폈다고 한다. 선조 때 지방의 사림들이 그의 효성과 행실을 조정에 알려, 임금이 관직과 포상을 내렸으나 실행이 소문에 미치지 못한다 하여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 뒤 학봉 김성일이 또 그의 효행을 조정에 올렸다. 1675년(숙종 1)에 정려가 내려지고, 통훈대부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옛 선비들은 당호나 정자에 자신의 정신 세계를 담아 이름을 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허영정’이란 정자의 편액은 자기 자신에 대한 다짐이요. 그 후손들에게 내리는 경계의 의미이다. ‘허영’은 요임금이 그 신하인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내주려 하자 허유는 거절하고, 자신의 귀가 더러워졌다고 하여 영수(潁水)에서 귀를 씻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허영정의 지극한 효성과 그 정신 세계는 이후 후손들에게 가학의 전통으로 전해지고 있다.  남융달(南隆達, 1565~1652)은 자가 현언(顯彦), 호는 난재(懶齋)로 허영정의 둘째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모습이 범상치 않아 여느 아이들과 달랐으며, 성장해서는 스스로 알아서 책을 읽고 글을 지었다.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실패하여 한창 나이에 과거 공부를 버리고 자질(子姪)을 가르치는데 전심하였다. ...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을 때, 난재는 용궁(龍宮)에 우거하고 있었다. 그 변란...(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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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을 한
  남진영(南震英) : 예천 출신, 독립 운동(獨立運動)을 하였다.(獨資 9卷 671쪽, 獨立有功者功勳錄 7卷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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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운동을 하다가 옥고 치러 건국포장에 추서된
  남태영(南太榮) : 1902(광무 6)-1991, 하리면 출신, 1926년 예천군 소작쟁의(小作爭議)를 주도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평소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농촌 문제로서 접근하였다. 그는 농민운동을 활발하게 펴던 중 일경(日警)에 피체되어 1926년 10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에 유학한 그는 1928년 8월 경 귀국길에 일본 왕을 암살한다는 내용의 투서를 일본 경도경찰서(京都警察署) 앞으로 보냈다가 국내에서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1928년 8월 26일에 송치되어 고초를 치렀다가 1929년 3월 24일 예심면소(豫審免訴)를 받기까지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국내 항일운동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 第7卷 124쪽, 同 第12卷 國家報勳處 1996年 541쪽, 獨立運動史資料集 國家報勳處 第14輯 228쪽, 高等警察要史 慶北警察部 150쪽,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 國史編纂委員會 第8卷 285쪽, 東亞日報 1926.10.21 192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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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표창을 받은
  도상빈(都相斌) : 1899-1970, 자는 공필(孔弼), 호는 청암(淸菴), 본관은 성주, 1948년 건국표창(建國表彰)을 받았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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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 때 순국한
  명춘(命春) : 이조 선조 때, 매오 정영후(梅塢鄭榮後)의 사비(私碑), 임진왜란(1592) 때 여주인 한씨(韓氏)와 처녀 정씨(鄭氏)가 함께 낙동강에 투신 자결하자, 그 시체를 찾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씨(韓氏)의 시체만 찾아내고 혀를 끊어 왜놈에게 절개를 보여 살해되면서도 상전(上典)의 집안을 보호했다. 지금도 동래 정씨 문중에서 제사를 지내주고 있으니, 충의의 산 표본이다.(醴泉郡誌 1939, 竺山勝覽 1934, 朝鮮환輿勝覽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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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포왜란 때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성균관 사성에 오른 문경동(文敬同)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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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말 왜구를 퇴치 평정한
  문구(文龜) : 고려 말, 감천 문씨(甘泉文氏)의 중시조(中始祖), 자는 호지(浩之), 호는 절재(節齋), 시호(諡號)는 양정(襄靖), 영주 두서리(榮州斗西里) 입향조(入鄕祖)이며 감천 문씨의 시조인 원길(原吉)의 손자, 재도(載道)의 아들, 도첨의찬성사 안축(都僉議贊成事安軸)의 장인, 133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주서(注書), 군부 정랑(軍簿正郞), 양광도 안찰사(楊廣道按察使), 상의우승지판부사(尙衣右丞知判部事), 어사중승(御史中丞), 전법사 판사(典法司判事), 해주 충주 목사(海州忠州牧使), 군자감(軍資監), 정당문학(政堂文學), 군기감 검교(軍器監檢校), 문하시중 중대광대부(門下侍中重大匡大夫)를 역임하였고, 감천군(甘泉君)에 봉해져서, 그 후손을 감천 문씨(甘泉文氏)라고 한다. 감천 문씨는 남평 문씨(南平文氏)에서 분적(分籍), 1255년(고종 42)에 중랑장 문원길(中郞將文原吉)이 신호위 보승장군(神虎衛保勝將軍)으로서 영주 두서리(榮州斗西里)에 세거하였다 하나 정확한 고증과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임진왜란(1592) 때 전전 유이(流移)하여 감천면 현내리(縣內里)에서 살았을 것이나, 현재는 문씨가 그곳에는 한 집도 없다.(東文選 120卷 碑銘條, 大東韻玉, 陽村集 38卷)


  [神道碑銘] : 감천현(甘泉縣) 태생, 시호는 경양(敬襄), 본관은 남평, 감천파(甘泉派)의 원조(元祖), 집현전태학사 득걸(得傑)의 고손자, 양간공(襄簡公) 극명(克明)의 증손자, 중랑장(中郞將) 원길(原吉)의 손자, 평해 군사(平海郡事) 재도(載道)의 아들이다. 왜구가 영천(榮川, 榮州)에 침입하여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자, 관원들은 중과부적으로 피신하였으나, 그는 아버지를 모시고 관아를 사수하며 적을 토벌, 퇴치하여 평정하니, 연안(沿岸)까지 평화가 회복되었다. 혼자의 힘으로 침입한 왜구들을 물리침으로써 고려 공민왕 23년에 정려가 내리니 지금 영주 시내 소재 효자리 비각이 그 때에 세워진 것이다. 조선 초 좌정승, 감천군(甘泉君)에 봉해졌다. 묘는 감천면 대덕산(大德山) 임좌원(壬坐原)에 있다. 1967년에 대구광역시장 방예 희갑(熹甲)이 쓴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문순공(文順公) 안축(安軸)의 아들인 문간공(文簡公) 안종원(安宗源)의 묘비명이 <동문선> 120권에 실렸는데, 그 비명에, "감천군부인(甘泉君夫人)에게 장가들었으니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구(龜)의 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안종원은 삼우당 문익점(文益漸)보다 5년 먼저 출생하였다.(神道碑銘)


  [醴泉의 金石文] : 양양부사 걸(傑)의 아들, 근(瑾, 參判)의 동생, 홍필(弘弼, 敬陵參奉), 홍보(弘輔, 忠毅校尉)의 아버지이다. 1498년(연산군 4)에 진사시에 합격, 1507년(중종 2)에 문과에 급제, 승정원 권지 부정자, 예문관 검열, 시교, 봉교, 성균관 전적, 병ㆍ호조 좌랑, 안음 현감, 병조 정랑, 사헌부 지평, 형ㆍ예조 좌랑, 사간원 헌납, 장악원 첨정, 주청사 시장관, 종부시 첨정,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묘는 유천면 지만산(知滿山) 오좌(午坐)에 있는데, 묘갈명(墓喝銘)은 대사간 김응조(金應祖)가 지었다.(醴泉의 金石文 2003)


  문구(文龜) : 고려 말, 감천현(甘泉縣)에서 출생, 시호는 경양(敬襄), 시적(始籍)은 남평, 조선 초 좌정승(左政丞)을 역임하고 감천군(甘泉君)에 봉군되어 이적(移籍) 감천(甘泉)이라고 하였으니, 감천파의 원조이다. 평해군사 재도(載道)의 아들, 한영(漢英, 文科, 宗簿寺 內部令)의 아버지이다. 왜구가 영천(榮川, 現 榮州)에 침입하여 약탈과 살인을 자행할 때 관아 관원들은 중과부적으로 피신하였으나 그는 아버지를 모시고 관아를 사수 적을 토벌 퇴치하여 평정하니 연안(沿岸)까지 평화가 회복되었다. 혼자의 힘으로 침입한 왜구들을 토벌 퇴치함으로써 1374년(공민왕 23)에 정려가 내리니, 지금 영주시내 소재 효자리 비각이 그때에 세워진 것이다. 묘는 감천면 대덕산(大德山) 임좌(壬坐)에 있는데, 신도비(神道碑)는 1997년에 대구광역시장 방예(傍裔) 희갑(熹甲)이 찬하였고, 경북도의회 부회장 방예 대식(大植)이 썼다.(醴泉의 金石文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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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 때 공신
  문여량(文汝良) : 이조 세종 때, 감천면 출신, 본관은 감천, 1429년(세종 11)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450년(문종 1) 지평으로 있으면서 영양위(寧陽尉, 敬惠公主의 男便)의 집을 새로 지으려할 때 성안의 민가가 헐릴 것이 많다 하여 옛집을 그대로 수리하여 거주함이 옳다고 주청하였다. 1455년(세조 1) 군사(郡事)를 역임하였으며, 1463년(세조 9) 집의가 되고, 1465년(세조 11) 제주 목사를 거쳐 직제학(直提學), 한성 부윤(漢城府尹)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훈(李壎)과 노비 쟁송으로 거짓으로 꾸민 무고 상소를 당해 처형되었다(文宗實錄, 世祖實錄, 國朝榜目).


  [王朝實錄] : 1435년(세종 17) 7월 7일 진하사 서장관(進賀使書狀官)으로서 북경에서 돌아와 <자치통감>을 왕에게 바치고 옷 한 벌을 하사받았다. 사헌부 지평(1447.1.29, 1450.11.30)으로서 경혜공주의 집을 짓기 위해 인가를 많이 헐 수 없다고 왕에게 아뢰었고(1451.4.3), 감찰 이승윤(李承胤)의 사령장을 빨리 서경(署經)하라는 왕명을 받았고(1451.8.1), 강원도 횡성현(橫城縣) 백성들 중 유망한 사람들의 공부(貢賦)를 감해 줄 것을 청하였고(1451.8.7), 황주(黃州) 목사 반효손(潘孝孫)을 탄핵하였고(1451.8.10), 역질이 만연하므로 수륙재 행사를 반대하였고(1451.9.19), 수양대군이 길에서 칼에 씌운 스님을 불러오게 하자, 그 사유를 임금께 아뢰었고(1451.9.26), 출사(出仕)하라는 왕명을 받았고(1451.10.14), 이순백(李淳伯)의 죄를 다시 조사하였고, 홍담(洪澹)을 아울러 탄핵하라는 왕명을 받았고(1451.10.17), 빈곤한 사람이 결혼할 때 자장(資裝)을 주는 법을 거듭 밝혀 거행하라는 왕명을 받았고(1451.10.21), 권맹손(權孟孫, 醴泉人), 김계권의 사면이 부당하다고 왕에게 아뢰었다(1451.11.25). 황해도 도사(都事)로서 1452년(문종 2) 2월 19일 왕을 인견하고 하직하였고, 1452년(단종 즉위년) 6월 19일 빈전에 진향하였다.


  [세조실록] : 군사(郡事)로서 1455년(세조 1) 12월 27일 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사헌부 감찰로서 1459년(세조 5) 12월 17일 사간원에서 그 등용에 이견을 제시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그 후 사헌부 집의(1461.5.20), 제주 목사(1464.12.5)에 제수되었다.(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문여량(文汝良) : 세종(世宗) 11년(기유, 1429년) 식년시(式年試) 동진사13(同進士13) 급제, ▲인적사항 : 본관(本貫) 감천(甘泉), ▲이력 및 기타사항 : 전력(前歷) 생원(生員), 관직(官職) 직학(直學)(文科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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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괄의 난 이후 원종1등훈에 등록된 문우량(文宇量) : 旣載
  창의한 공으로 부사직을 지낸 박경운(朴擎雲)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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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을 하여 대통령 표창에 추서된
  박규수(醴泉 出身 獨立運動家 6名 光復節 맞아 褒賞) [記事] : 국가보훈처는 광복 61년 광복절을 맞아 항일운동을 전개한 예천 출신 6명을 포함 모두 313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했다. 이번에 포상한 독립유공자의 훈격은 건국훈장 145명(독립장 3, 애국장 43, 애족장 99), 건국포장 47명, 대통령 표창 121명 등이며, 이 중에서 예천군 출신이 6명 포함됐다. 정휘세(1916-1931, 일본방면활동) 선생이 애국장, 황창섭(1896-1949, 국내항일) 선생이 애족장, 박규수(1891-1947, 3.1운동)·이용헌(1880-1934, 3.1운동)·이종협(1895-1929, 3.1운동)·이준형(1883-1940, 3.1운동) 선생이 대통령 표창 포상을 받았다.(醴泉新聞 2006년 08월 17일 11: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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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년에 창의한 박규익(朴逵翼)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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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때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룬
  박기양 : 용궁면 사람, 17세에 전도인으로 목회에 발을 들여놓은 뒤 만주, 러시아 선교에 큰공을 세운 침례교단 초대 목사이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 반대로 3년 간 옥고를 치루었고, 예천군 박씨 집성촌에서 쫓겨나 용궁면으로 옮겨 살았다. 그의 영향으로 손자 중 정근 등 4명이 목사가 되었다. 79년 침례교 소천교회 목사였다.(國民日報 1999.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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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 때 창의한
  박기종(朴起宗) : 1546(명종 1)-1627(인조 5), 호명면 형호리 밀양(密城) 박씨의 입향조(入鄕祖), 상리면 도촌(道村)에서 이곳으로 우거(寓居)하여 후손이 40가구 298명이 살고 있다. 자는 대운(代雲), 호는 백암(白庵), 천시(天視)의 아들, 의재 김제갑(毅齋金悌甲)의 제자, 호군(護軍)과 부산 첨사(釜山僉使)를 지냈고, 임진왜란(1592) 때 호재 곽수지(浩齋郭守智)와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협찬하였다. 묘는 호명면 오천리 방구산(芳邱山) 부경원(負庚原)에 있다.(郭守智의 師友錄, 族譜 1982). [醴泉의 金石文] : 하리면 도촌리 출신, 정략장군(定略將軍) 천시(天視)이 아들, 진보(震輔)ㆍ진필(震弼, 文科, 縣監), 진홍(震弘, 禁軍別將), 진윤(震倫, 監察), 진근(震近, 工曹參議), 진영(震永)의 아버지, 의재(毅齋) 김제갑(金悌甲)의 제자이다. 호군(護軍), 부산절제사(釜山節制使)를 지냈다. 임진왜란(1592) 때는 호재(浩齋) 곽수지(郭守智)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서로 협조하였다. 묘는 호명면 오천리 방구산(芳邱山) 경좌(庚坐)에 있는데, 묘갈명(墓喝銘)은 예안 이회문(李會文)이 지었다.(醴泉의 金石文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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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괄의 난 때 공신인
  박덕남(朴德男) : 1593-1624, 자는 덕여(德餘), 호는 학서재(鶴西齋), 본관은 함양, 성량(成樑)의 아들,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訓練院奉事)로 이괄(李适)의 난에 순절(殉節)하여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다.(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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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좌의 난 때 창의한
  박동석(朴東碩) : 이조 영조 때, 용문면 상금곡리 출신, 본관은 함양, 운(蕓)의 고손자,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창의하였고, 장서기(掌書記)를 지냈다.(族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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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좌의 난 때 창의한
  박동수(朴東秀): 1668(현종 9)-1741(영조 17), 용문면 상금곡리 출신, 자는 정오(挺吾), 본관은 함양,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만헌(晩軒)과 더불어 창의하였다. 묘는 용문면 사부리 우망(憂忘)마을 서쪽 술좌(戌坐)에 있다.(族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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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년의 의병인
  박륙익(朴陸翼) : 자는 사홍(士鴻), 호는 백초(白樵), 본관은 무안(務安), 장호(章浩)의 아들, 가훈(家訓)을 준수하고, 문예에 능했고, 1896년에 의병에 참가하여 <병신창의록(丙申倡義錄)>에 실렸고, 유고가 있다.(조선환여승람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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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년 의진의 조사부에서 항일운동을 한
  박봉종(朴鍾鳳): 1879(고종 16)-1969, 유천면 매산리 퇴치(退致) 출신, 자는 명가(鳴可), 호는 추당, 본관은 무안, 규익의 장자, 7세부터 한학(漢學)을 공부하여 유학(儒學)에 통달하였다. 후진 교육에 진력하던 중 고종이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1907)되자, 운강 이강년 의진(雲岡李康秊義陣)의 종사부(從事部)에 들어가 항일 의병 활동을 하였다. 주로 의병 모집, 양식 조달, 의병 자금 모금 등을 하면서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의병이 해산되고 한일합방(1910)이 체결된 후로는 지하로 숨어서 독립 운동를 하였는데, 더욱이 일제 시책인 단발령(斷髮令)에 응하지 않고 항거하자, 당시 예천경찰서장 등이 가위를 숨겨가지고 다니며 강압적으로 상투를 짜르려 하였다. 이에 박종봉은 목을 내밀면서, "나의 목은 자를 수가 있어도 단발령에는 응할 수 없다."라며 죽음을 걸고 대항했다. 일제 말기의 어느 날, 예천경찰서장으로 부임하면서 부임 인사란 명목 하에 가위를 숨겨가지고 집을 찾아와서 강제로 상투를 자르려고 유도하자, 박종봉은 이에 응하지 않기 위한 술책으로 이르기를, "상투 자르는 데는 하나의 조건이 있다. 나의 손녀가 하나 있는데, 그를 출가시킨 후에는 단발을 하겠다. 이는 조선 선비의 명예를 걸고 약속한다. 그 때까지만 참아 달라."라고 하였다. 이에 서장은 과년한 손녀가 있는 줄 알고 그 조건을 수락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손녀의 나이가 3살 밖에 되지 않았음을 알고 속았다고 노발대발하였을 뿐, 조선 선비와 일본 서장과의 명예를 걸고 한 약속을 어길 수 없어 해방(1945) 때까지 더 이상 단발을 강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1957년 경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영주 부석사(榮州浮石寺)를 방문할 때 경북 유생 대표로 영접하였고, 영주(榮州)의 소수서원, 호명면의 노봉서원(魯峰書院) 등 경북 북부 지방 11개 서원장(書院長)을 지냈다.(獨立運動史資料集 1卷 國家保勳處 305쪽, 獨立有功者功勳錄 1卷 國家保勳處 353쪽, 醴泉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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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때 독립운동하다가 사형 당한 박봉필(朴鳳弼)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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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박비호(朴匪虎) : 1546(명종 1)-?, 용문면 제곡리 출신, 자는 위로(渭老), 호는 북계(北溪), 본관은 함양,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醴泉郡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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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좌의 난 때 창의한
  박서린(朴瑞麟) : 1677(숙종 3)-1746(영조 22), 개포면 금리 출신, 자는 성징(聖徵), 본관은 함양, 이인좌(李麟佐)의 난(1728) 때 창의(倡義)하였다. 묘는 보문면 승본리 동막 해좌(東幕亥坐)에 있다.(族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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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박성열(朴成烈) : 1550(명종 5)-?, 용궁면 무이리 출신, 자는 비원(비元), 호는 청원정(淸遠亭),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하였다.(倡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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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좌의 난 때 의병장으로서 많은 공을 세운 박성옥(朴成玉) : 旣載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박수검(朴守儉)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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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박수겸(朴守謙) : 1562(명종 17)-?,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金塘谷) 출신, 자는 백익(伯益), 호는 소담(蘇潭),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21일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 의진(郭再祐義陣)에 입성(入城)하였다.(倡義錄)


  박수겸 [記事] : 한국문집총간(091_152c) 학사집(鶴沙集, 1776)에 실린 학사 김응조(金應祖)의 기사로, 그 내용은, "鶴沙先生文集卷之七/ 墓碣銘/ 通訓大夫行司贍寺直長蘇川朴公墓碣銘 幷序/ 公諱守謙。字景靜。咸陽朴氏。系出新羅赫居世。世襲冠冕。禮部尙書仁挺,判三司事凝川公臣?,咸陽府院君文齊公忠佐,密直副使文梓,工曹典書規。尤顯。贈吏曹參議諱紹宗,昌樂道察訪贈兵曹參判諱訥,吏曹正郞諱從麟,贈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諱蕓。於公爲高曾祖考。凝川公五子。俱登文科。兵曹參判公五子。又俱登文科。世未有也。?平康祭氏。贈貞夫人。考諱承先。生員壯元。大司憲諱?。祖也。公生于萬曆丙子。沒以天啓壬戌。是年十二月。合?繼室金氏墓。卽醴泉郡北流里洞午向原。公少力學。業成。薄遊京師。尹相承勳薦其賢。?授英陵,孝敬殿,泰陵參奉。陞司饔院奉事內贍寺直長。癸丑。中司馬。是年因事罷。自是無意進取。泊如也。嗚呼。公嘗受業月川趙先生。親炙而有得。杜門看書。拈出喫緊語。書于壁以自警。性凝重寡言。每肅容端坐。家人子弟。非命召不敢近。?輩敬憚。不敢以字呼。治家有法度。祭必沐浴。祭需必親看檢。晨起省大夫人。夜與伯仲諸公。更唱迭和。且令子弟習歌之。日以爲常。憐寡妹無依。割基田家之。又爲之經紀。嚴於訓子。課學業習禮容不懈。其監燔造役于海州。前官例用役價。公散與知舊。州人吐舌。及爲禁府假郞。拿逆差後期。爲崔有源所啓罷後有攻崔者將投疏意。公挾前憾同事。公正色責之。事遂寢。崔聞而慙服。鄕人推公爲鼎山洞主。深留意於興學。以育才爲先。噫。使公而壽得。德益邵才益展。其所樹立如何。而遽爾不淑。天也。先配義城金氏。察訪諱守一女。旋夭葬臨河景出先塋。後配順天金氏。贈判決事諱德男女。淑愼有閨行。先公四年卒。壽四十六。男四。瑩,,?,?。女三。生員權尙達,忠義權佶,幼學李世美。瑩一男宗華。二女。金學逵,金行一。一男幼。三女。權鈗,金宗河。一幼。?二男。全華,思華。三女。洪宇,權以赫,權恂。?二男幼。三女。李萬葉。二幼。側室女禹昌奎。內外子孫男女七十餘人。明敏有操行。今宰龍宮。來省墓。將碣而銘之。豈不?錫類者非歟。公最愛鵲城蘇水之勝。築臺其上。仍自號蘇川。銘曰。/ 天旣生才。何遽奪壽歟。抑別有主宰。而播弄造化於宇宙者歟。嗚呼。其在後者無窮。石可轉而名不可朽。"이다.(www.minchu.or.kr 2006)


  박수겸 [記事] : 학사집 (鶴沙集) 11권 6책 중 卷7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墓碣銘 / 通訓大夫行司贍寺直長蘇川朴公墓碣銘(幷序) 42/ 朴守謙(1576~1622)의 묘갈명이다. 자는 景靜이고 咸安朴氏다. 尹承勳의 추천으로 참봉·봉사·직장을 역임했고,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했다.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 출신이다.](www.koreastudy.or.kr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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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 때 임금을 의주로 모셔서 훈신에 책록된 박수근(朴守謹) : 旣載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에 입성한 박수약(朴守約) : 旣載
  국권피탈 후 치욕을 느껴 울분 속에서 여생을 마친 박수양(朴洙陽) : 旣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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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 금당실정보화마을, 전국평가 노력상 수상...축하합니다.


  금당실정보화마을(醴泉 金塘室情報化마을 努力賞) [記事] :


  ...행정안전부에서 주최한 2008년도 정보화마을평가에서는 · 정보화마을부문 전국 대상(포항 호미곶정보화마을)과 우수(청송 주왕산사이버타운), 장려(김천 양각자두정보화마을, 영덕 대게정보화마을), 노력상(문경 새재팔영정보화마을, 예천 금당실정보화마을)이 선정되었으며, 광역자치단체부문에서는 경북도가 우수상, 기초자치단체부문에서는 김천시가 우수상을 받아·마을과 자치단체에 상사업비 290백만 원을 지원받았으며, 시상식은 행정안전부 계획에 따라 2월중에 개최될 예정이다...


  (최도철 取材部長 金泉新聞 2009-01-13 오전 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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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341


  서악사(西岳寺 山寺音樂會 大盛況) [記事] : BBS 대구불교방송(사장 법조)이 주관한 "가족과 함께하는 제2회 서악사 산사음악회" 가 2005년 8월 24일 오후 7시부터 비가 오는 가운데 서악사 대웅전 앞 마당에서 김수남 군수, 오창근 경찰서장, 이현준 도의원을 비롯한 2천여 명의 사부대중들이 참여한 가운데 최석준, 정수라, 조항조 등 인기가수의 공연과 일봉(연방사 주지), 도일 스님의 열창이 봉덕산을 떠들썩하게 했다. 시작 전부터 굵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박수경 아나운서(대구불교방송)의 사회로 시작된 이 날 음악회는 인기가수 조항조가 "남자라는 이유로" 를 시작으로 일봉(연방사 주지), 도일 스님(서악사 주지)의 음성 공양이 참석자들을 매료시켰다. 이어 해바라기, 정수라, 김범룡 등이 자신의 히트곡을 열창하며 참석자들과 한데 어우리져 고요 속에 목탁소리만 들리던 서악사는 이 날 저녁 사찰이라기보다 열린음악회장으로 변했다. 1부 행사가 끝난 직후 예정에 없던 향토 출신 "꽃을 든 남자" 의 인기가수 최석준 씨는 오창근 경찰서장의 소개로 무대에 등장, 자신은 서악사 산사음악회가 열리는 줄 몰랐으나 오창근 서장이 전화를 통해 고향 사람들을 위한 산사음악회에 꼭 참석해 줄 것을 간청, 참석하게 됐다 고 소개하자 2천여 명의 참석자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로 그를 환영했다. 최씨는 ''''꽃을 든 남자''''를 열창한데 이어 무대를 내려와 고향 선,후배들과 한데 어우러져 "꽃잎사랑" 등 자신의 히트곡과 흘러간 노래 10여 곡을 선사했다. 한편 이 날 행사를 위해 "예천불교신도연합회" "서악사 합창단"과 일반 신도 등 1백여 명이 터미널~서악사에 이르는 도로에 연등을 설치하는 등 지난 몇 일 간 폭염 속에서 참석자들을 위한 준비에 고생을 했으며, 공연 시작 전부터 예천경찰서는 교통 및 공연장 질서에 만전을 기해 성공적인 행사가 되도록 해 주민들의 칭송을 들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5-08-24 오후 10: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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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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